천불동 계곡은 설악의 마지막 은둔 계곡으로 1955년 시도되어 58년 1월에 처음으로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말, 서울고등학교 산악부는 감히^^ 하계 설악 원정을 떠났는데,
천불동 골골에 아무런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때라 그들은 '통'으로, '직관적'으로 천불동을 만났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그 시절 천불동의 비경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진을 볼 수 있고요.
제일 감동적이고 부럽고, 심지어 질투가 나는 사진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사진 소장자의 글씨체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도봉산 만월암 위의 바위에서라고 적혀 있습니다.
정통 산악부이다보니 이들은 인왕산 슬랩에서 클라이밍을 하는 등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분이 2학년 여름방학 때인 1950년대 말 설악산 원정을 갑니다.
1950년대 눈부신 설악의 장면들이 되살아 납니다.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만한 소롯길에 키슬링 배낭을 메고, 뜨거운 햇살을 등에 지고 산길을 올라갑니다.
어디일까요?
백담사 지나 내설악이기 쉽습니다.

천불동 계곡...
지금은 수많은 철제 다리와 계단이 놓여 있어서 상상도 어렵지만,
로프와 카라비너 등 전문 등반장비와 기술이 있어야 가능했던 그 시절을 증명합니다.

고교 산악부가 아니라 산악반'이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클럽Club의 번역어는 회(會)입니다.
그러나 대학교 등 학교 단체에서는 '부(部)'라는 게 일반적인 명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클럽을 '부'에서 '반'으로 격하시킨 건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 시절입니다.
자율적인 '부'가 아니라 전쟁에 동원시키기 위한 준군사조직 성격의 명칭으로 된거죠.
그 시절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이라 추측합니다.
(*보성고 등산'반' 출신인 소설가 조정래의 사진에서도...)

이 순간 그들은 어떤 심정일지 짐작가능합니다....
이런 것도 마이 부럽습니다...~

정상에서의 일행들.
모자 모습이 다 다른 게 이 학교의 자율과 품격을 보여주는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긴바지 밖에 반바지를 입은 까닭은 천불동 등반에 로프를 사용했다는 걸 말합니다.
1950년대 설악의 천불동은 지금과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른쪽에는 옷을 널어놓은 돌탑이 있습니다.
1955년 설악을 찾았던 유홍렬 서울대 교수는 1955년 동아일보 기사에
"설악 정상에는 자유와 조국을 위해 귀중한 생명을 바친 용사들의 유골을 안장한 누석총이 곳곳에 있다.'
라며 누석총이라고 적고 있네요.

설악 매니아라면 이곳이 어디인지 곧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얼음물같은 계류가 설악의 침봉만큼이나 강한 기억을 두고두고 남겼을 것 같습니다.

음....
의상대에서 소나무에 자일을 두르고 하강하기도 했군요.
의상대 바위 절벽에서 클라이밍을 하는 모습은 처음 만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해운정과 경포대를 들런 이들은 설악 등반의 대미를 장식하는 코스인 바닷가 야영을 합니다.
장기원정을 끝나고 온몸과 마음이 홀가분한 이날 밤 모닥불을 피우며 젊음과 우정을 만끽했을 겁니다.
텅빈 키슬링 배낭이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
그들에게서 가장 부러운 건......

바로 이 사진입니다.
천불동 계곡에서 텐트를 치고 아침(또는 저녁) 밥짓는 연기가 계곡에 자욱합니다.
밥짓는 연기, 멋있네요.
이 곳이 과연 우리가 아는 그 천불동일까요? 아니면 히말라야의 어느 협곡일까요?
그리고....

천불동 협곡입니다.
그들은 설악의 마지막 보루였던 천불동, 태초 그대로의 비경을 보았습니다.
사진에서 침묵이 배어나옵니다.
한참을 '물끄러미' 보게 됩니다.
그때까지 설악의 천불동을 만난 이들이 과연 몇명이나 되었을까요?
1950년대, 물설고 모든 게 낯설은 오지 설악으로 당당히 길나선 18세 무렵의 그들이 부럽습니다.
*추가) 그들은 내설악과 외설악을 이어서 등반한 걸로 보입니다.

서울고 산악반이 깃발을 들고 서있습니다.
이곳이 어디일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았더니 백담사입니다. 지금 백담사는 큰법당이 극락보전인데,
당시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이었습니다.
'''''''''''''''
피에스)
그리고 지금의 설악.
케이블카가 설치되건 말건, 저때의 설악에 비하면 오십배 백보가 아닐까라는,
뭐랄까 그런 근원적인 슬픔.
이상향이, 본향이 영원이 사라져버렸다는...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10800209204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1-08&officeId=00020&pageNo=4&printNo=10081&publishType=0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