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병 제4기로 출전, 도솔산 전투에 참전
1951년 3월 해병 제1대대 제2중대는 원한의 38선을 넘었다. 신록으로 푸르게 덮여오는 강원도 산하에서 적을 쫓아 이동을 개시하다가 6월 3일 아침 강원도 양구군 남면 원동지곡에 이르렀다. 그 당시 해병 제4기인 문두남 1등 수병은 제2중대 박격포반의 60밀리 박격포 사수였다. 그리니 박격포의 포열과 칼빈소총을 소지하고 소총소대에 배속되어 보병과 함께 행동해야 했다. 이렇게 문두남 해병이 속한 박격포부대는 제3소대에 배속되어 도솔산 앞에 이르렀는데, 6월 4일 오전 중대를 도열시키더니 이응덕 중대장이 훈시를 시작하였다. “해병대는 미해병대가 공격하던 도솔산을 공격한다. 이 산은 능선이 가파르고 매일 비가 내리며 산에 안개가 끼는데, 북한군 제12사단이 산에 견고한 진지를 이미 구축하고 방어를 하고 있어, 산을 점령하는 게 참으로 힘든 전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발하여 공격하면 승리는 반드시 우리 편에 있으니 각개 병사가 충성심을 발휘하여 필사즉생의 각오로 임해주기 바란다. 이상!”하고 짤막한 훈시가 끝났다. 즉시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제1대대는 제1목표를 공격하기 위하여 우선 692고지를 점령해야했다. 이에 따라 제1중대는 고지좌측을, 제2중대는 고지우측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제12중대는 도솔산 692고지를 향해 전술종대로 행군을 개시하였다.
올라가다보니, 지친 모습으로 부상병들을 들것에 들고 내려오는 미해병대 제5연대 제1대대 병사들과 마주쳤다. 심한 격전을 치른 듯 옷은 피와 땀에 젖었고, 몸은 심하게 지쳐있어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니 세계 최강의 해병 제5연대가 아닌가? 1950년 9월 2일 낙동강 방어선인 양산작전에 참가한 이래 9월 15일 인천상륙과 수도탈환 그리고 11월 18일 장진호에 이르기까지 영웅적인 철수작전을 단행한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자못 굳센 적군이 이 산악진지에 버티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무튼 친근감 넘치는 미해병에게 한국해병들은 “USMC 넘버원!”하고 엄지손가락을 높이 쳐들어 격려하였다. 그러자 미행병도 웃는 얼굴로 “KMC 넘버원!”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국해병들은 무한한 감사와 우정의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하여 산으로 접근한 제1대대는 제1목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처음 692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제1중대는 좌측으로 제2중대는 우측으로 공격하였다. 바로 그 순간 번쩍하고 섬광이 일더니 미해병 포대에서 155밀리 야포탄이 날아와 692고지를 강타하였다.그 포사격이 끝나자 아군은 가파른 능선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적의 반격은 너무나 완강했다. 적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막심고리키 수냉식 중기관총탄과 경기관총탄이 무수히 떨어졌고, 가끔씩 61밀리 박격포탄도 날아와 지근탄으로 박혔다. 아군도 이에 질세라 캘리버50 중기관포와 경기관총을 쏘며 보병을 엄호했다. 아군은 올라가다 이곳저곳에서 적탄을 맞고 아우성쳤고, 아까운 나이에 여러 명이 쓰러졌다. 해병은 이러한 전우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6월 4일 오후5시 40분에 제1목표 점령을 완료하여 첫 번째 개가를 올렸다.
□ 제4(死)목표 무명고지 점령
그런 후 제1중대는 제2목표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을 개시하고, 제2중대는 제4목표를 향해 이동을 개시하였다. 제4목표를 가려면 그 중간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우선 점령해야 했다. 이미 보병은 많은 손실을 입은 데다 지형이 박격포를 쏠 입장이 안돼서 60밀리 박격포분대는 보병처럼 제4목표를 향해 진격대열에 끼였다. 가는 도중에 날씨는 잔뜩 찌푸렸다가 가랑비가 내리고 사방에 안개가 덮여왔다. 이제는 날이 저물어 도저히 더 나갈 수가 없어 박격포 분대원 6명(분대장 1, 사수 문두남, 부사수, 탄약수 3명)은 배수가 잘될 지형을 골라 판초우의를 위에 치고 땅은 질퍽거려 철모를 깔고 앉았다. 문수병은 소지한 박격포 포열의 뚜껑을 덮고 칼빈소총은 물에 젖지 않도록 내려놓은 후 다른 전우와 밀착해서 앉았다. 때가 여름철이라지만 비가 내리는 산중의 밤은 오들오들 떨려왔다. 그리고 어제 아침을 먹은 후 지금까지 다섯 끼가 보급이 안돼서 굶고 지낸 터라 참을 수 없는 배고픔으로 배속이 꼬르륵거리며 밥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고향에서 보리밥이나마 배불리 먹고 지내던 게 너무나 그립기만 했다. 차라리 이런 때는 전대 속에 미숫가루를 담고 전투하는 북한군의 보급형태가 오히려 나은 것 같았다. 그들은 심산유곡에서 보급이 안 돼도 그 전대에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먹으면 일주일은 견딘다고 했다.
다행이 그날 밤은 자정 때면 찾아오는 북한군의 기습이 없어 퍽 다행이었지만 정말 괴로운 밤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는지 동쪽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했고 비도 그쳤다. 그러나 허기져서 도저히 일어날 기력이 없었는데, 식사가 도착했다는 기별이 왔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여 중대본부로 갔더니 노무자들이 밥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다. 군번 없는 그들은 현역군인 못지않게 고생을 많이 했다. 때로는 총포탄의 위협을 받았고, 지뢰를 피하면서 보급품을 지고 올라와서, 내려갈 때는 전우의 시신을 지고 내려가야 하니 그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모두가 달려가서 철모에 밥을 배식 받고 된장도 한 숟갈씩 받자마자 입속에 연신 숟갈로 떠 넣어 씹지도 않고 삼켰다. 그제야 겨우 기력을 회복했다.
그러고 보니 노무자 이외에 또 고마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철모였다. 철모는 머리에 써서 방탄용도 되고, 식기도 되고, 세면도구도 되고, 이렇게 비오는 날은 땅바닥에 내려놓고 앉을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다목적으로 쓰였다. 병사들은 식사를 하자마자 다시 제4목표를 향해 전중대가 산개하여 이동을 개시했다. 가다보니 적이 진을 쳤던 진지부근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아군 포탄과 항공기폭격에 맞았는지 아니면 미해병대와 백병전을 치렀는지 몰라도 적군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그 때 정평이 나 있는 북한군 군관들이 휴대했던 소련제 떼떼권총을 찾아보려고 눈을 크게 떠서 살펴도 군관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북한군 전사들이 스페어로 가지고 다니는 농구화는 그 질이 매우 좋았다. 그것은 생고무를 바닥에 붙여 노란색의 농구화를 만들었는데 이게 탐이 나서 집어 드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한 눈을 파는 순간에도 문두남 수병은 박격포의 오열을 오른쪽 어깨에 메고 칼빈총을 겨냥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가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고 비에 젖은 바위에 미끄러지고 하면서도 다른 보병소대와 마찬가지로 박격포분대도 제4목표 앞에 놓인 무명고지에 접근하였다.
제2중대는 6월 7일 9시를 기해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아군은 30~40도의 경사를 이루는 돌산을 기어올라야 하는데, 적은 정상에서 아군을 내려다보며 기관총과 소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한발 한발 적진으로 올라갈수록 머리통만한 소련제 수류탄이나 방망이 수류탄이 계속 떨어져 내렸다. 그래서 해병도 10여명이 일제히 쓰러져, 아군은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쳐했다. 이 때 문수병이 박격포를 내려놓고 단단한 땅을 골라 거치한 후 발사명령이 떨어지자 적진으로 60밀리 박격포탄을 10여발을 쏘았다. 그때마다 포탄은 활공을 하며 적진과 배후에 낙하하여 폭발음을 내었다. 그리고 제3소대장 이근식 소위가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빗발치는 탄막을 뚫으며 적진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불꽃이 솟아오르고 적의 토치카가 박살이 났다. 전중대원이 그 순간 함성을 지르며 무명고지 정상으로 올라갔고, 문두남 해병도 칼빈소총을 쏘며 공격대열에 끼였다. 그렇게 무명고지를 점령하고 즉시 제4목표 공격에 들어갔으나 적의 반격은 예상외로 완강하여 제2중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BAR를 쏘던 자동소총수도 쓰러지고 M1소총을 쏘며 돌격하던 소총수도 피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이러한 전우의 죽음에 적개심이 용솟음쳐왔다. 작년 9월 1일 제주항에서 함께 출전한 용사들인데......,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다니, 문수병은 서글픈 생각과 함께 나도 앞으로 언제 이렇게 죽어갈지 모른다고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제2중대는 더 이상 정공법으로 정면 돌파는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공격을 잠시 중단하였다. 중대장과 장교들이 숙의를 거듭하여 적의 허를 찌를 야간공격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대에서 특공대를 조직하고 밤중에 살금살금 적진에 침투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적은 항상 야간공격위주로 활동하였고, 밤에는 해병대가 공격치 않을 것이라고 방심하였다가 전광석화와 같은 아군의 공격에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6월 11일 새벽 5시10분에 해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제4목표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문수병은 박격포사수로 어떤 때는 소총수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바로 옆에서 수많은 전우가 애석하게도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부상 하나 없이 건재하게 된 것을 조상님의 큰 음덕으로 여기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비록 57년이 지난 까마득한 옛일이지만 해마다 6월이 오면, 그 처참한 전장에서 먼저 간 전우들을 회상하며 눈물을 짓곤 한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