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가신(可臣)이고 자는 흥도(興道)이며, 성은 홍씨(洪氏)이고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일찍이 만전(晩全)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세대가 오래되었으니, 그 시조 선행(先幸)은 고려 때 금오위 별장동정(金吾衛別將同正)을 지냈다. 이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위인(偉人)이 났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한(瀚)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다. 사화(史禍)에 연좌되어 연산조(燕山朝) 때 유배되어 죽었는데, 이분이 공에게 증조가 된다. 중묘(中廟)께서 반정(反正)하신 뒤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의 휘는 윤창(胤昌)으로 내섬시 판관(內贍寺判官)을 지냈으며, 졸(卒)한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의 휘는 온(昷)으로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을 지냈으며, 졸한 뒤에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양대(兩代)가 증직된 것은 모두 공 때문이었다.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신씨(申氏)로 군수(郡守) 윤필(允弼)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 모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신 부인이 아이의 젖을 떼고 난 뒤부터 질병이 위독해지자 모두들 황급하여 여러 날 동안 아이를 미처 돌보지 못하였다. 모두들 죽은 지 오래되었다고 여겼는데, 부인의 병이 조금 나아진 뒤에 덮었던 이불을 걷어 보니 얼굴에 정채(精彩)가 동하였으므로 모두들 경이롭게 여겼다. 태어난 지 겨우 8개월 만에 말을 하고 걸을 수 있었다. 나이 8세 때에 의정공(議政公)을 따라 산불을 구경하였는데, 의정공이 시를 지으라 하자 즉시 응대하여 읊기를, “조나라의 성벽에 홀연히 한신의 깃발이 꽂혔네.〔趙壁忽竪韓信幟〕” 하니, 의정공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아직 성동(成童)이 되기 전에 이미 성인(成人)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소학(小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여러 경전을 외우고 자집(子集)까지도 널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필법(筆法)과 문장은 청건(淸健)하여 기력이 있었는데 그 집안의 장로(長老)들이 모두 칭탄(稱歎)하면서, “우리 참의공(參議公)의 풍절(風節)이 이 아이에게 전해졌도다.” 하였다. 관례를 치르고 난 뒤에는 어울려 교유하는 사람들이 모두 당세(當世)의 명인(名人), 석사(碩士)들이었다. 일찍이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는데, 답안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을 때 시험 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한 친구가 우리나라 사람의 명작(名作)을 취하여 모방해서 완성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답안이 완성되었을 때는 시간이 이미 지난 후였는데, 거둔 시권(試券) 가운데에 넣어 주려고 도모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정색을 하고 이르기를, “지금 출신(出身)하여 임금을 섬기려고 하면서 먼저 불선(不善)한 짓을 저질러 임금을 기만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 명종22)에 상사생(上舍生)에 보임되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유학(遊學)하였는데, 언어와 동작이 매사에 법도에 맞았다. 사람들이 간혹 눈으로 비웃는 자가 있었으나 공은 변함이 없었다. 신미년(1571, 선조4)에 추천해 주는 자가 있어서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갑술년(1574)에는 재행(才行)이 탁이하다고 하여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에 초수(超授)되었다가 곧 형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이해 가을에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나갔는데, 고을을 다스림에 청간(淸簡)과 애민(愛民)을 우선하였다. 여가에는 독서를 하면서 읍중(邑中)의 자제들을 장려하였는데, 이웃 고을의 선비들이라도 와서 배우고자 하는 경우가 있으면 받아들여 거처하게 하면서 친히 강독(講讀)을 해 주니, 성취한 자가 많았다. 부여현은 백제(百濟)의 옛 도읍지였으므로 백제의 충신(忠臣)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의 사당을 세워 주었는데, 고려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을 배척하다가 또한 이곳에 유배된 적이 있으므로 그곳에 함께 제향(祭享)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賜額)되었다. 낙화암(落花巖) 가에 조그만 집을 짓고 이은(吏隱)이라고 제(題)하였다. 때로 한두 학생들과 소요(逍遙)하면서 자적(自適)하였는데, 임기가 만료되어 지평(持平)으로 부름을 받았다. 고을 백성들이 모두들 유임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비(碑)를 세우고 노래를 새겨 그 정사(政事)를 찬미하였다. 만력(萬曆) 기묘년(1579, 선조12)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는데, 거상하는 의절(儀節)을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랐다. 상기를 마치고 나서는 아우 경신(慶臣)과 차마 서로 떨어져 살 수 없어, 마침내 집을 지어 함께 거처하게 하면서 한 담장 안에 거실만 달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계미년(1583) 여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곧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나갔다. 치적(治績)이 훌륭하다고 하여 승진되어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기축년(1589) 겨울에 백유함(白惟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집안에서 기거한 지 수년 뒤인 임진년(1592) 여름에 일본의 군대가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파천(播遷)하였다. 공은 집안이 가난하여 말〔馬〕이 없었으므로 임금을 배종(陪從)하지 못하고 도보로 고양(高陽)에 이르렀는데, 늘 서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다. 가을에 길을 바꾸어 남양(南陽)으로 들어가 향인(鄕人) 자제(子弟)들을 이끌고 창의(倡義)하였는데, 기략(機略)을 써서 참획(斬獲)한 수급(首級)이 매우 많았다. 계사년(1593)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파주는 서남로(西南路)의 요충지인지라 병화(兵禍)를 가장 혹독하게 입었다. 당시에 명나라 장수가 파주의 경내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군량을 공급하지 못한 것이 이미 이틀이나 되었으므로 크게 화를 내며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이 이르러 명함(名銜)을 보내 뵙기를 청하였는데, 명나라 장수가 공의 의도(儀度)가 범인(凡人)과 다른 것을 보고는 즉시 읍(揖)을 하면서 이르기를, “본 고을의 군량이 부족하게 된 것은 모두 고을의 기강(紀綱)과 서리(胥吏)들의 탓입니다.” 하였다. 공이 공수(拱手)하고 나서 사과하기를, “잘못은 실로 목사에게 있으니, 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사양하리까.” 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두 번 손을 들고 이르기를, “무릇 사람의 마음은 모두 탓을 남에게 미루려고 하는데, 지금 대인(大人)은 홀로 그렇지 아니하니,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할 만하오.” 하였다. 공이 이에 체부(體府)에 아뢰어 쌀 수백 곡(斛)을 얻어다 급한 수요를 충당하였다. 얼마 안 되어 조정에서 공이 서생(書生)으로서 군대를 다스려 적을 막아 내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무신(武臣)을 써서 그 직임을 대신하자는 의론이 돌았다. 떠나갈 때에
고을의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나룻가까지 뒤따라 와서 모두 울부짖다가 돌아갔다. 관직에서 물러나 호우(湖右)에서 우거(寓居)하였는데,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굶주림으로 누렇게 변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대가가 환도(還都)하게 되자 공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학문하는 규모와 치란(治亂)의 원인, 복구하는 대책 등을 아뢰었는데, 조금도 거리낌 없이 모두 말하였다. 다음 해 봄에 특지(特旨)로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김상 응남(金相應南)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처음 홍모(洪某)의 소(疏)를 보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했었다. 그런데 성상(聖上)께서 벌을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큰 고을을 맡기기까지 하셨으니, 가히 그 임금에 그 신하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당시에 광해군(光海君)이 감무(監撫)로서 전주(全州)를 거쳐 홍주(洪州)에 머물고 있었는데, 시종하던 문무관(文武官)들이 각자 처자(妻子)를 데리고 이르러 온갖 것을 다 요구하였다. 공은 일체 법으로 다스리고 관례에 따라 나누어 주는 것 외에는 한푼의 돈도 사사로이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궁인(宮人)들과 내시(內侍)들이 공을 미워하여 유언비어를 지어내어 비방하였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당시에 왜구의 난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연변(沿邊)의 수령들이 다투어 선척(船隻)을 마련하여 처자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는데, 공만은 막연히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답하기를, “어쩌다 불행한 일이 있게 되면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요, 처자는 나를 위해 죽을 것이니, 어찌 미리 자신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을 세우겠는가.” 하니, 듣는 이들이 열복(悅服)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명나라 사신 이종성(李宗城)ㆍ양방형(楊邦亨)이 왜군의 우두머리 평수길(平秀吉)을 봉하는 일로 조서(詔書)를 받들고 동쪽으로 내려왔는데, 공은 접대 차관(接待差官)의 자격으로 전의현(全義縣)으로 달려갔다. 관찰사 이하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이르러 노차(露次)에 열(列)을 지어 앉아 있었는데, 명나라 장수가 불쾌한 바가 있어 군교(軍校)와 무뢰배들을 시켜 발길질을 하게 하였다. 여러 수령들이 모두 놀라서 도망쳐 숨었는데, 공만은 꼿꼿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한 관인(官人)이 오래도록 주시하고 있다가 군교에게 호통을 쳐서 물러가게 하고는 붓을 찾아 글을 쓰기를, “내가 천하의 선비를 많이 보았으나 공과 같은 자를 본 적이 드물다.” 하였다. 그러고는 다가와 그 무릎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매번 꼿꼿이 앉아 있으려면 괴롭지 아니한가?” 하였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왕래하면서 그 은근한 정을 다하였는데, 이별할 적에는 예물(禮物)을 보내 주기도 하였다. 그 사람은 아마도 천사의 서기(書記)를 맡았던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관상을 잘 보았던 장방달(張邦達)인 듯하다. 이해 가을에 호서의 도적 이몽학(李夢鶴)이라는 자가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틈타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무리를 모으니, 1만여 인이나 되었다. 여섯 고을을 쳐서 함락시키고 두 고을의 수령을 포박하였는데, 장차 경성(京城)으로 향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니 호서 지방이 크게 동요하였다. 당시에 홍주(洪州)의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하였고 성(城)은 작고 낮았다.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공에게 성을 버리고 근왕(勤王)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탄식하기를, “변방에서 나라를 지키는 신하는 성곽 안에서 죽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 내가 명을 받아 이 땅에 부임하였는데, 이제 위급하다고 하여 버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또 처자(妻子)를 내보내어 피신시킬 것을 권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은 모두 듣지 않고 성 밖에 있는 자제와 친척들을 모두 불러 성안에 모아놓고 온 집안이 함께 죽을 뜻을 보였다. 이로 인해 중인(衆人)들의 의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이에 사졸(士卒)들을 나누어 성을 지킬 계획을 세웠다. 수사(水使) 최호(崔湖)가 진(鎭)에 있으면서 공에게 영하(營下)로 와서 만나자고 격문을 보냈는데, 공은 응하지 않고 답하기를, “홍주는 호서의 요충지이니, 제가 한 발짝이라도 이곳을 떠난다면 적들이 반드시 승세(勝勢)를 타게 될 것입니다.” 하면서, 도리어 최호에게 함께 홍주성을 지킬 것을 청하였다. 최호가 이를 받아들여 남포(藍浦), 보령(保寧) 두 고을의 수령을 인솔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당도하니, 기세가 조금 올랐다. 이에 최호와 더불어 성을 나누어 지켰는데, 최호에게는 견고한 곳을 주고 자신은 허술한 곳을 맡았다. 친히 스스로 야경(夜警)을 돌며 군사들을 위로하고 음식을 가져다 먹이면서 사수(死守)할 것을 다짐하니,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며칠 뒤에 적들이 보루(堡壘)에 바싹 다가와 진을 치고 세 곳으로 나누어 주둔하였는데, 혹은 내달리면서 위무(威武)를 보이기도 하고 혹은 나누어 포진하여 성을 포위하는 형상을 짓기도 하면서 백방으로 공갈하였다. 공은 성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못 들은 듯이 조용히 하게 하면서, 망루(望樓)의 보초를 엄격히 하고 대오를 정비하여 범할 수 없는 기세를 보였다. 이에 적들은 계책이 궁해지고 사기가 위축되어 차츰 물러가려고 하였다. 마침 날이 저문 데다 비까지 내렸으므로 적들은 이문(里門) 밑으로 흩어져 들어가느라 몹시 소란스러웠다. 공이 이르기를, “적도(賊徒)는 오합지졸이라 정비하지도 못한 채 소란스러우니, 깨뜨릴 수 있겠다.” 하면서, 관청의 울타리를 뜯고 무기고에 비축해 둔 균로(筠簬)를 꺼내어 큰 횃불을 만들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주었다. 또 노수(弩手) 수백 인을 선발하여 밤에 성을 타고 나가 곡식들 속에 매복하게 하고는 경계하여 이르기를, “성안에서 횃불을 들기를 기다렸다가 발사하라.” 하였다. 한밤중이 되자 성첩을 지키는 자들을 시켜 사람마다 세 개의 횃불을 붙여서 들게 하고, 또 성 위에서 불화살을 쏘아
적의 막사(幕舍)를 태워 버리니, 화염이 맹렬하고 바람이 드세어 천지가 온통 붉게 되었다. 성안에서 북을 울려 기세를 돋우자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니, 적의 무리들이 놀라고 동요하였다. 이때 공이 보냈던 노수 수백 인이 일시에 모두 일어나 발사하니, 적을 죽인 것이 이루 셀 수 없었다. 적들이 마침내 크게 도망쳤는데, 날랜 장수 박명현(朴名賢) 등이 추격하여 모두 몰살시켰다. 몽학(夢鶴) 등이 몸을 빼어 도망하였으나, 그 수하(手下)인 임억명(林億明)에게 살해되어 바쳐짐으로써, 호서가 평정되었다. 공은 서생이니, 언제 무위(武威)를 떨치고 전투를 하는 일을 익힌 적이 있었겠는가. 오직 충의(忠義)로 분발하여 늘 목숨을 바쳐 적을 응징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을 따름이다. 또한 일을 도모하는 데 능하고 기회를 잘 살렸으며 사람을 볼 줄 알아 적절하게 부렸으니, 이것이 성공한 이유이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임기가 차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행장(行裝)은 비어 쓸쓸하고 집안에는 조석거리가 부족하였다. 홍주의 백성들이 공을 위하여 수십 곡(斛)의 보리를 바쳤으나 공은 받지 않았다. 억지로 굳이 청한 뒤에야 1곡을 남겨 두도록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제수하는 명이 여러 번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경자년(1600)에 비로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하는 명에 응하였는데, 곧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조(吏曹)의 한 전랑(銓郞)이 권세 있는 재상의 뜻으로 권하기를, “왕자(王子)와 공주(公主) 12궁이 모두 한고을에 모여 있으니, 목사 노릇 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차라리 굳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니, 공이 답하기를,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일 따름이다.” 하고는, 마침내 부임하였다. 아전이 근래에는 고을의 목사가 처음 부임하면 먼저 여러 궁(宮)들을 찾아뵙고 난 뒤에 관청으로 가는 것이 관례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공은 듣지 않고 먼저 관청에 나아간 뒤에 여러 궁을 찾아뵈었다. 또 어떤 이는 이전에는 반드시 여러 궁에 따로 물건을 바치고 또 왕자와 의빈(儀賓)들을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궁궐(宮闕)과 교통(交通)하는 것이 이미 사대부의 염치를 손상시켰다. 더구나 한 고을에서 여러 궁을 봉양하고 군수(軍需)를 제공하느라 민력(民力)이 고갈되었으니, 몸을 사려 자리나 보전하려고 하는 짓은 내 차마 못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청난원훈(淸難元勳)에 책공(冊功)되고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명을 받아 경사(京師)에 이르렀을 때 소를 올렸는데, 대략의 내용에, “몽학은 근본이 없는 오합지졸로, 잠시 연명(延命)하는 목숨이었고 솥 안의 고기였을 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또한 신이 성(城)을 지킨 것은 신하 된 자의 직분이니, 무슨 기릴 만한 공이 있겠습니까. 황공하여 감히 사양하옵니다.” 하였다. 두 번이나 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어 주역교정청 당상(周易校正廳堂上)으로 참여하였으며, 형조 참판으로 옮겨졌다가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도감(都監)이 녹훈(錄勳)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대로 두기를 계청(啓請)하였다. 얼마 있다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옮겨져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겸하였다. 갑진년(1604)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자급(資級)이 올랐는데 굳게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곧이어 형조 판서에 임명되고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入侍)하였다. 당시에 상께서 편찮으신 지 오래되었으므로 제신(諸臣)들이 다투어 약방(藥方)을 바쳤는데, 공은 홀로 진언(進言)하기를, “고인(古人)의 말에, ‘병을 다스리기를 나라를 다스리듯 해야 할 것이니, 임금이 바르면 나라가 바르게 된다.’ 하였습니다. 마음은 오장(五臟), 육부(六腑), 백맥(百脈)의 주인입니다. 반드시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버리시어 그 본원(本原)을 기른다면 온갖 병들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니, 헛되이 약물(藥物)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듣는 자들이 모두 훌륭한 비유였다고 하였다. 을사년(1605) 가을에 경외(京外)에 홍수가 나서 물에 휩쓸려 죽은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았다. 공이 입대(入對)하여 재해(災害)를 초래한 원인을 아뢰었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였다. 당시에 오공 억령(吳公億齡)이 함께 경연(經筵)에 입시하였는데,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홍모(洪某)가 진언(進言)한 것은 곡진(曲盡)하여 맛이 있으니, 참으로 독서인(讀書人)이다.” 하였다. 이때에 공은 이미 물러나 쉴 뜻이 있었다. 일찍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나이가 지극(至極)하여도 사직하는 자가 없으니, 너무도 염치를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 있어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는데, 개성에서는 조사(詔使)가 이를 때마다 소용되는 은(銀)과 삼(蔘)을 시기에 앞서 시장에서 구해서 관고(官庫)에 쌓아 놓고 쓰임에 대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공은 재물이란 기름때와 같은 것이라 가까이하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면서, 마침내 상인(商人)을 시켜 예단(禮單)의 수량을 헤아렸다가 그때에 화매(和買)하여 쓰게 하였다. 아전들이 그 일에 관여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궁노(宮奴)들이 세력을 믿고 강탈하여 가는 곳마다 충돌하는지라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가지 못하였는데, 공이 한번 법으로 다스린 뒤로부터는 궁노들이 두려워하여 피하면서 감히 개성의 경내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앞서 공이 형조의 장관으로 있을 때 불법을 저지른 궁노 몇 명을 잡아다 장살(杖殺)한 적이 있었으니, 이 무리들이 공의 위세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언젠가는 화공(畫工)에게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벽 위에 걸어 두고는 조석(朝夕)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가을바람이 부는 것을 인하여 소를 올려 해직을 청하니, 윤허가 내렸다. 그날로 예성강(禮成江)에 배를 띄워 바다를 통해 아산(牙山)에 이르렀는데, 바로 공의 고향이다. 정미년(1607, 선조40) 봄에 공신(功臣)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유지(有旨)를 내려 공을 불렀는데, 공은 병으로 조정에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차자(箚子)를 올려 사례(謝禮)하고 인하여 열여섯 글자를 새긴 금감(金鑑)을 만들어 바쳤는데, 그 내용은 덕을 닦아 스스로 힘쓸 것〔修德自強〕, 마음을 맑게 하여 기운을 배양할 것〔淸心養氣〕, 현인을 가까이하고 아첨꾼을 멀리할 것〔親賢遠侫〕,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보호할 것〔畏天保民〕이었다. 여름에 당(唐)ㆍ송(宋)의 구례(舊例)에 따라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가을에 중풍으로 마비 증세가 심해지니, 상이 의원을 보내어 간병하게 하고 약물을 보내 주었다. 공이 감읍(感泣)하여 진사(陳謝)하였다. 무신년(1608)에 선조께서 승하(昇遐)하시자 공은 울부짖으며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병을 무릅쓰고 경사(京師)에 들어가 상(喪)에 참석하고서 돌아왔다. 광해군 초기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정 문숙공(鄭文肅公)이 구언(求言)을 인하여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궁척(宮戚)과 권귀(權貴)들을 논척(論斥)하는 등 말이 매우 박절하였으므로, 광해군이 매우 노하여 큰 벌을 내리고자 하였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 호오(好惡)를 공정하게 하여 직언(直言)을 아뢰었다고 여겨 소를 올려 구원하였는데, 광해군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는 당(黨)을 보호하기 위하여 낸 말이다.” 하였다. 경술년(1610)에 나이가 찼다고 하여 치사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심상 희수(沈相喜壽)가 글을 보내 치하하기를, “근세의 사대부 중에 명절(名節)을 보전하여 시종 흠이 없었던 이로는 당연히 선생이 으뜸일 것이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홍양(洪陽)에서 어가(御駕)가 머물렀을 때 공로가 있다고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불러서 회맹연(會盟宴)에 참석하게 하였으나,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을묘년(1615, 광해군7) 봄에 병이 깊어져서 오래도록 낫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부인이 먼저 졸(卒)하자 곡읍(哭泣)하고 애통해하느라 병환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하여 6월 14일에 돌아가시니, 춘추 75세였다. 병환이 깊어진 뒤에도 빗질하고 세수한 뒤 관건(冠巾)을 정돈하였으며, 어쩌다 부축받아 일어나게 되면 옷깃을 여미고 꼿꼿하게 앉아 정신이나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돌아가시는 날에는 갑자기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다가 숨이 멎으면서 함께 멈추었다. 다음 해 6월 모일에 아산 대동(大洞)의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장사는 공신(功臣)의 예(禮)로 치렀고 장사에 쓰인 물품은 관청에서 지급하였다. 아술(牙戌), 온창(溫昌) 두 고을의 선비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홍주 사람들은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리면서 청난비(淸難碑)라고 불렀다. 용주(龍洲) 조공 경(趙公絅)이 그 글을 지었다. 공은 청엄(淸嚴)하고 온화(溫和)하여 한편으로 두려운 듯하면서도 친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가정에 대해서도 독실하였는데, 나이 17, 8세 때 계모 성씨(成氏)가 병이 깊어지자 의원을 찾아가 약을 문의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고 측은하였다. 의원이 그 성효(誠孝)에 감동하여 남들에게 말하기를, “어버이의 병 때문에 와서 묻는 자는 한없이 많았지만, 그 지성이 남을 감동시키기로는 홍 수재(洪秀才)만 한 이가 없었다.” 하였다. 어릴 때 초당(草堂) 선생 허엽(許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일찍이 무리들과 함께 나란히 나아갔는데, 마침 퇴도(退陶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이 자리에 있다가 가리키면서 묻기를, “학생 중에 검은 옷을 입은 몇 번째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는, 오래도록 눈길을 주었다. 처음에는 문장(文章)과 사예(詞藝)를 즐겼는데, 그 시문(詩文)은 반고(班固)와 두보(杜甫)를 따르고자 하여 지은 것이었다. 습정(習靜) 민공 순(閔公純)의 문하에 종유하면서 비로소 문장이 소기(小技)라는 것을 알고 성현(聖賢)의 학문에 종사하고자 하였다. 퇴도 선생을 경저(京邸)로 찾아뵙고 직접 의형(儀刑)과 음지(音旨)를 받들었는데, 보고 느끼는 유익함이 많았다. 이때부터 더욱 스스로 각고면려하여 부화(浮華)한 것을 버리고 본질(本質)로 나아가게 되었다. 날마다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서(朱書)》를 읽어서 힘써 마음을 보존하고 행실을 닦는 바탕으로 삼았다. 그 일상적인 행실은 반드시 명백하고 통쾌하여 공도(公道)를 부지(扶持)하고 편사(偏私)를 끊는 것을 힘쓰고, 세상의 화려한 성색(聲色)과 화리(貨利)는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마치 자신을 더럽힐 듯이 하였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는, 한 친구가 이조에 있으면서 관리 선발을 부당하게 하였는데, 공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탄핵하였다. 금오 당상(金吾堂上)으로 있을 때는, 일찍이 적에게 잡혀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였다가 유배되는 벌을 받은 한 재신(宰臣)이 있었는데, 그 자식이 소를 올려 방귀전리(放歸田里)의 처분을 청하였다. 상이 의금부에 내려 당상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들 인정(人情)에 연연하여 그 청을 들어주려고 하였다. 이때 공이 죄가 윤기(倫紀)에 관계되므로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니,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일찍이 가뭄으로 억울한 옥사(獄事)를 심리(審理)하게 되었는데, 한 대관(臺官)이 뇌물을 받고 잘못 내보낸 적이 있었다. 일이 발각되자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중론(衆論)이 모두 구해 주려고 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법(法)에서는, 뇌물과 관계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용서가 안 된다.” 하였다. 그 대관의 형은 공과 인척으로 평소에 잘 지냈는데, 그 아우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공이 그 마음을 안타깝게 여겨 눈물을 흘렸으나, 그래도 사정(私情) 때문에 공의(公義)를 덮어 둘 수 없다고 하여 끝내 들어주지 않았으니, 법을 지키고 굽히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 등 제인(諸人)들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를 논박하면서 심지어 승려(僧侶)였었다는 것으로 논척(論斥)하니, 공이 그르게 여겨 이르기를, “이는 군자가 할 말이 아니다.” 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양현(兩賢)을 헐뜯자 경외(京外)의 선비들이 서로 상소하여 논척하면서 아울러 남명(南冥) 조공(曺公)까지 언급하니, 공이 이르기를, “이것이 상인(商人)이나 아녀자들의 다투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양현의 도덕(道德)과 행의(行誼)를 밝히기만 하면 사설(邪說)은 절로 사라질 것인데, 어찌 굳이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남명이 세상에서 은둔하여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을 또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그 논의가 공평하고 정대하기가 또한 이와 같았다. 정여립(鄭汝立)은 공과 동방 급제(同榜及第)한 벗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의 박학다문(博學多聞)한 것을 칭찬하였으나 공은 대꾸하지 않았다. 객이 떠나간 뒤에 아우 경신(慶臣)이 그 까닭을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나는 잡서(雜書)를 널리 본 것을 가지고 독서인(讀書人)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였다. 여립이 언젠가 수원(水原)으로 공을 방문하였을 때, 말이 선현(先賢)에 미쳤는데 “주자(朱子)는 수학(數學)에 밝지 못하다.” 하니, 공은 장사(莊士)가 아니라고 여겨 더불어 수작하지 않았다. 여립이 결국 역모(逆謀)로 주벌(誅伐)을 당하게 되었으니, 공은 또한 기미가 없었는데도 미리 알아챈 것이다. 이 옥사가 일어났을 때 이공 발(李公潑) 형제가 무함을 받아 유배되고 그 후에 장사(杖死)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화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선뜻 조문을 하려 하지 않으니, 공이 안타까워하며 한탄하였다. 그들이 유배될 때는 도포(道袍)를 벗어 주었고 죽음을 당했을 때는 옷을 벗어 시신을 덮어 주었다. 또한 친히 관(棺)을 잡고 운구(運柩)하여 염습(殮襲)하고 장사를 치러 주었다. 자제(子弟)들과 친척들이 모두 울면서 말리니, 공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실로 그들의 원통함을 아는데, 어찌 차마 화복(禍福) 때문에 내 마음을 바꾸겠느냐.” 하였다.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즐겨 읽었으며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였다. 자리를 정돈하고 무릎을 모아 꼿꼿이 앉은 채로 잠심(潛心)하여 완미(玩味)하기를 종일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후진들이 배우러 오는 경우에는 재능에 따라 가르쳐 주었으며, 억지로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서 가묘(家廟)에 참배하였는데, 비록 쇠하여 무기력해진 때에도 하루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제사 때는 반드시 친히 제수(祭需)를 마련하였으며 자제를 시켜 대행하게 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것을 어찌 남에게 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행의(行誼)의 현저함이 이러하니, 그 세세한 행적들은 생략해도 될 것이다. 부인 이씨(李氏)는 관찰사(觀察使) 맹현(孟賢)의 현손(玄孫)이며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 형(衡)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지성(至性)이 있었는데, 시집을 와서는 항상 공경하고 삼가 공의 배필로 손색이 없었다. 자손들을 가르치고 종들을 부리는 것은 은혜로우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공이 일찍이 병이 위독하였을 때는 부인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약에 타기도 하였다. 70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소찬(素餐)을 먹으며 삼년상을 마쳤다. 무당이나 점쟁이 따위는 일체 물리쳐 집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집안이 비록 가난하였으나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것에는 반드시 풍성하고 정결함을 다하니, 사람들이 공의 덕이 가정에서도 행해졌음을 알았다. 아들 5인과 딸 2인을 두었는데, 장남은 은(檃)으로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냈고, 그다음은 영(榮)으로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다. 그다음은 비(棐)이고, 그다음은 절(楶)로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그다음은 계(棨)이니, 모두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았다. 장녀는 현감(縣監) 심천정(沈天挺)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참의(參議) 신설(申渫)에게 시집갔다. 공은 집안에서는 효우(孝友)를 돈독히 하였고 임금을 섬김에 주저하여 회피함이 없었으며, 빈객과 붕우를 대함에 그 마음을 다하였다. 벼슬살이를 할 적에는 청렴하고 신중하게 직무를 수행하였고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는 신하의 절개를 지키며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공과 같은 이는 체용(體用)의 학(學)을 밝게 터득하여 신하의 의리에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이를 만하다. 아아, 공의 덕과 공렬(功烈)이 이미 이와 같이 성대하고 그 품계 또한 높으니, 마땅히 시호가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큰 흠사(欠事)라고 할 것이다. 금상(今上) 신미년(1691, 숙종17) 봄에 공의 증손 빙방(凭方)이 태복시 주부(太僕寺主簿)로 있었는데, 전례(前例)를 원용(援用)하여 조정에 시호를 청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들 유범(游範)에게 가첩(家牒)을 받들고 와서 현일(玄逸)에게 시장을 청하게 하였다. 현일은 이미 대대로 통가(通家)하는 사이인 데다 공의 덕과 행의(行誼)를 존모(尊慕)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관력(官歷)과 행적(行績)을 적은 시장을 갖추어 봉상시에 이첩(移牒)하여 시호를 의정(議定)하게 하는 바이다. 삼가 시장을 쓴다. 上之十七年 四月 十五日 재령(載寧) 이현일(李玄逸) 謹狀
ⓒ 한국고전번역원 | 권경열 (역) |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