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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 30편>
序 時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 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주었다
그때엔 흙에서 흙 냄새나겠지
나희덕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그런 저녁이 있다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 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기억의 자리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길 위에서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너무 많이
나희덕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나희덕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땅끝
나희덕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넸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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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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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이 열리고
나희덕
한 개의 門이 열려
며칠째 눈발이 천지를 메우더니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발들은 모두 묶이고 말았네
마른 풀대도
시린 발목을 눈에 묻고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네
소리들도 갇혔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가장자리는 얼어가지만
흐르는 물만이 門을 닫지 않아
나는 물소리 앞에 쪼그려 앉았네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당신에게로 흐르는 水門만이 남았네
눈송이를 낚으려 하나
물에 닿는 순간 사라져버리네
젖은 눈 속에 젖은 눈,
그 열린 門으로 나도 따라 들어가네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별
나희덕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어두운 무한천공을 한없이 떠돌다가
가슴에 한 점 내리박히는 일
그리하여 생명의 입김을 가지게 되는 일
가슴에 곰팡이로나 피어나는 일
그 눈부심을 어찌 볼까
눈물 없이 그 앞을 질러 어떻게 달아날까
밤하늘 아래 얼마나 숨죽여 지나왔는데
얻어온 별빛 하나 어디에 둘까
어느 집 나무 아래 묻어놓을까
비 오는 날에
나희덕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빈 의자
나희덕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위에 번져 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 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산 속에서
나희덕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 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산딸기 익을 무렵
나희덕
아기를 들쳐 업은 한 여자의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네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를
숨어서 도란거리는 지붕들을
입맞출 수도 없이 낮은 곳에 피어나
잎새 뒤에 숲 뒤에 숨은
작은 마을을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그 울음에 산딸기 좀더 익으면
땅거미가 내려와 붉은 열매를 감추는 저녁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들었네
산딸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무사하라 무사하라 부르는 그 노래를
녹슬어가는 함석 지붕 아래서
나는 들었네
살아 있어야 할 이유
나희덕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나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새떼
나희덕
철새들이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
길을 잃지 않으려 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한몸이어서입니다
티끌 속에 섞여 한계절 펄럭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는
저 두 사람
그 말없음의 거리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온기에 젖어
나는 두리번거리다 돌아갑니다
몸마다 새겨진 어떤 거리와 속도
새들은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혹시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절이 그들의 가슴 위로 날아갔다 해도
聖 느티나무
나희덕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고묵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찬가지 끝으로 잎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그루 용수처럼
제 아궁이에서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럻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 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살을 달여 내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가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체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심장 속의 두 방
나희덕
나를 좀 지워주렴.
거리를 향해 창을 열고
안개를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증발해버렸다
나를 좀 지워주렴.
짙은 안개를 들이키고도
사물들은 여전히 건조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으로
안개가 밀물처럼 스며들었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몸 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의자가 젖고 거울이 젖고
사물들은 어느새 안개의 일부가 되었다
심장 속에 나란히 붙은 두 방은
서로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두 방을 오가는 것은
소리 없이 출렁거리는 안개뿐
이따금 봄이 찾아와
나희덕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 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정신적인 귀
나희덕
어디에 두고 왔을까
두 귀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소리를 끌어모아 어루만지던 귀
소리의 혈맥을 더듬어
그 통점과 경락을 찾아내던 귀
허공의 거미줄을 따라
미세한 움직임에도 흔들리던 귀
어느 순간 먹먹해졌다
귓바퀴는 멈추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에 갇힌 건반처럼
정신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난청과 실어증의 나날,
바람이 헛되이 녹슨 현들 울리고 간다
젖기 않는 마음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한 포기의 집
나희덕
장마가 들이닥치기 전
배추를 거두려고 서두르는 손
잎을 들출 때마다
한 포기씩 뽑힐 때마다
수룩수룩 딸려나오는 목숨들,
잎부터 뿌리까지 한 틈바구니도 남기지 않고
푸른 지붕 아래 오글오글 정들어 살던
온갖 날것과 기어가는 것들이여.
한 목숨에 붙은 목숨들
이리도 많다니!
한 포기의 배추가
실은 한 채의 집이었다는 걸 안다 해도
장마 오기 전 서두르는 손들,
더 멀리 날아가는 날개들,
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작은 발들.
흐린 날에는
나희덕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흔들리는 것들
나희덕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나희덕(羅喜德, 1966 ~ ) 충남 논산 출생
시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 “뿌리에게”(1991), “어두워진다는 것”(2001), “야생 사과”(2009) 등과 수필집 “반 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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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희덕 시인의 시를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이 접할 수 있으니 참 기쁩니다.
제 블로그의 비공개 코너로 정중히 모셔감을 허락해주십시오.
여유를 갖고 공부하고 싶어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