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가야산은(1,430m)일명 우두산이라고 불리는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서쪽은 비계산,동쪽은 백운산성 줄기로 백련암을 감싸고 있다. 해인사를 품에 안고 있어 더욱 유명하고 바람소리, 물소리, 목탁소리 아름다운 소리로 찾는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가 하면, 함께 어우러진 노송과 그 사이 비단결 같은 시심이 흐르고 붉게 물든 홍류동 계곡으로 떨어지는 황금빛 물줄기 사이로 푸근한 고향의 향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여 해동제일의 명산으로 유감이 없으며 또한 절뒤의 소나무와 기암괴석은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은 꿈을 꾸게 한다. 법보종찰 해인사의 주산으로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과 일몰은 경이로움을 자아내어 조선8경의 하나로 이름나있다.
합천8경중 제1경이기도 하다. 가야는 우리말로 가람, 개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수행을 하신, 인도의 붓다가야에 있는 가야산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우두'니 '상왕'이니 '영산'이니 하는 이름들도 인도의 가야산에서 온 것들이다. '지환'과 '중향'은 옛적부터 가야산을 일러 '삼남의 금강산' 이라 한 데에서 연유하여 금강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산의 남녘에 신선의 세계인 만수동이 있다고 전해 오는 말이 있을 만큼 가야산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곧, 높이가 해발 1430M나 되고 넓이는 4328 정보에 이르는 큰 산이기도 하려니와, 그 경치가 썩 빼어나서 예로부터 해동의 십승지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적송, 잣나무 같은 늘푸른 나무며 철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여러 활엽수가 온 산에 울창한가 하면, 기암괴석이 또한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로는 말 그대로 맑고 푸른 벽계청수가 쉬임없이 흘러내린다.
특히 해인사 앞자락을 굽이쳐 도는 홍류동 계곡은 우리나라 팔승 가운데 으뜸이라는 그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는 멋들어진 계곡 풍경을 철따라 운치있게 펼쳐내고 있다. 그렇듯이 빼어난 명산 가야산에 해인사가 터를 잡은 모습을 일러 행주형국이라하니, 이는 곧 큰 바다에 배가 가고 있는 모양이란 뜻이다.가야산의 이런 지형은 일찍이 신라의 이름난 선비 고운 최치원이 찬탄하여 이른대로, 가야산이 명산 가운데 명당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어 준다
해인사 소개
송광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三寶) 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는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법보 사찰이다.
삼보사찰이란
삼보사찰(三寶寺刹)이란 불(佛)·법(法)·승(僧)의 세 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 삼보는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물이라는 뜻으로,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를 가리킨다. 불보는 중생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석가모니를 말하고, 법보는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중생을 위해 설명한 교법, 승보는 부처의 교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제자 집단, 즉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중생에게는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벗이다. 삼귀의(三歸依)가 모든 사부대중에게 삶의 지침이 되는 것처럼, 이 세 가지는 불교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믿음의 대상이다. 한국에서는 통도사(通度寺)·해인사(海印寺)·송광사(松廣寺)가 삼보사찰에 속하며, 이들 세 사찰을 일컬어 3보사찰이라고 부른다.
양산 통도사는 5대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 부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이라고 한다. 7세기 중엽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590∼658)이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 불사리와 부처의 가사 한 벌을 가져와, 사리는 3분하여 황룡사와 울산 태화사(泰和寺)에 두고 나머지는 통도사를 창건하여 금강계단(金剛戒壇:국보 290)에 가사와 함께 안치하였다. 이로써 통도사는 불보 종찰(宗刹)이 되었다. 본당인 대웅전에는 따로 불상이 없고 불단만 있는데, 법당 안에서 정면을 향하면 바로 사리를 모신 보궁이 보이게 되어 있다.
순천 송광사는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정혜결사(定慧結社)의 근본도량이다. 그 뒤 지눌의 제자 혜심(慧諶)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했다고 해서 '승보사찰'이라고 불렸다.
불단에는 과거의 연등불,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과 함께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보살 네 분을 모시고 있다고 전해졌다.
해인사를 일러 법보종찰이라 하는 것은 고려대장경 곧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불리는 무상법보를 모시고 있는 까닭이다.
고려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까닭은 대장경의 장경판수가 팔만 여장에 이르는 데에서 비롯되었기도 했을 터이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에서 아주 많은 것을 가리킬 때 팔만사천이라는 숫자를 쓰는 용례대로 가없이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음직하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창건기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
해인사에 관한 종합적인 문헌으로 「가야산 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이 있는데, 이는 해인사의 연기(緣起), 실화(失火)와 중창의 역사, 대장경의 인경(印經)에 관한 여러 사적과 문헌들을 모아 고종 11년(1874)년에 판각한 것이다. 이「가야산해인사고적」에 수록된 문헌가운데 똑같은 이름의 「가야산해인사고적」(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진 것)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의 두 기록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창사정신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이라는 낱말에 응집되어 있다.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 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중생의 본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인 것이다. 청정도량 해인사, 이곳은 우리들 마음의 고향이다. 그래서 황량한 대지를 방황하는 현대의 이방인들을 다정한 고향의 손짓으로 부르고 있다. 팔만대장경, 높은 탑, 자연의 그윽함이 있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해인삼매의 한 생각, 맑은 마음 그 거룩한 도량이 바로 해인사이기 때문이다.
중창기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경중봉사(敬重奉事)하여 전지(田地) 500결(結)을 시사(施事)하고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 태조 때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때가 바로 930년 경이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인사는 균여(均如)대사, 대각(大覺)국사 등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사우(寺宇)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실록을 보관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이는 조선 왕실이 해인사에 힘을 기울인 결과라 생각된다. 특히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태조실록 7년(1398)에는 강화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고 정종실록 원년(1399)에는 해인사에 대장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태조 때 장경판이 해인사로 이운(移運)되고 이때부터 법보종찰로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1458)에 임금이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대장경 50벌을 인경(印經)하고 신미(信眉), 학조(學祖) 두 스님에게 장경판전을 시찰하게 하고 그 결과 보고에 따라 판고가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판전 40칸을 다시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조가 1468년 승하하자 정희(貞熹)왕후는 해인사를 중건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83년 세상을 떠난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성종 12년(1481)에서 21년(1490) 사이라고 본다. 성종 19년(1488) 덕종의 비 인수(仁粹)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仁惠)왕비가 선왕의 뜻을 받들어 도목수 박중석(朴仲石) 등을 보내어 학조(學祖)대사로 하여금 판전 30칸을 짓게 하고 보안당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종 22년(1491) 조위(曺偉)가 쓴 『해인사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그 후 해인사는 임진왜란 때도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ㅇ 숙종 21년(1695) :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ㅇ 숙종 22년(1696) :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ㅇ 영조 19년(1743) :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ㅇ 영조 39년(1763) : 화재
ㅇ 정조 4년(1780) : 무설전 화재.
ㅇ 순조 17년(1817) : 수백칸 당우 화재.
ㅇ 고종 8년(1871) : 법성요 화재.
이와 같이 1695년 이후 1871년까지 해인사에는 일곱 번의 큰 화재가 있었으나 판전 건물은 피해가 없었다. 해인사에서 비교적 오랜 건물은 대적광전, 응진전, 퇴설당, 구광루, 해탈문 등이며 대장경판전 외에는 모두 순조 17년(1817) 직후의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은 훨씬 후의 건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