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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면서 부모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수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좋은 친구, 좋은 배우자, 그리고 좋은 자녀의 만남, 이렇듯 사람은 그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좋은 만남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중한 만남 중에 특별한 만남이 있습니다. 서울둘레길 100인 원정대의 만남이 그 것입니다.
100인 원정대의 서울둘레길 157km를 통해 "길 위에서 행복을 찾은 원정대원"들이 100인 원정대의 여정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100인 원정대의 인연으로 또 다른 길을 걷고 있답니다.
제일 먼저 걷고 싶은 길이 서울둘레길에서 만난 북한산둘레길이지요. 그리고 수도권에 많은 걷기좋은 길이 있지만 강화나들길과 평화누리길을 찾는답니다.
그중에서도 서울 둘레길 길동무(리더: 수명산)팀은 제3기 100인 원정대원과 함께 동행한 제1기 길동무 강화나들길 팀에 이어 제2기 길동무 강화나들길 팀은 16명의 대원들이 완주의 기쁨을 나누웠답니다.
2017년 겨울 제3기 강화나들길 팀이 강화나들길을 시작했습니다. 12월 2일 강화터미널에서 제5기 100인 원정대 7조팀과 함께 아름다운 고비고개길을 걸었습니다. 초겨울 낙엽송길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다음은 길동무들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보았습니다.
다음 일정은 12월 9일(토)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부터 시작합니다.
강화나들길 5코스 고비고개길은 강화 동쪽에서 서쪽을 가로 지르는 길이다. 강화 장터로 장 보러 가는 길이고 또 반대로 장보고 돌아오는 길이며 나무꾼이 등짐을 지고 오르내리던 정다운 길이다. 철새들이 나들이꾼을 반기는 국화 저수지를 지나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숲 속으로 들어서면 오감의 기쁨이 현란히 교차하는 오솔길이 이어지다가 크고 작은 고인돌 여러 개가 모여 있는 오상리 고인돌군을 만난다. 강화나들길은 이렇게 수천 년 전 강화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터를 만날 수 있는 경이로운 길이다
강화도행렬도가 마중나온다. 1849년 6월 조선 25대 철종임금을 서울로 모시고 가기 위해서 강화도로 오는 관리의 행렬을 그린 역사기록화로 원본은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강화산성 남문이다. 남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의 하나로 안파루라 불리며, 조선 숙종 37년(1711) 유수 민진원이 건립하였다. 강화의 내성은 고려 고종(1213∼1259, 재위) 때 축조한 토축성이었으며 그 규모가 커서 지금의 강화읍과 선원면에까지 걸쳤었다. 그후 조선 초기에 쌓은 성은 그 규모가 매우 작아 그 둘레가 4,200m에 불과하였다. 이 문은 1955년 5월 호우로 붕괴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와 성곽 일부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1976년에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여장 및 순환도로를 개설하여 현재와 같이 정화하였다.
한옥관광안내소다. 5코스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서문이다. 서문은 강화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의 하나로 첨화루라 불리는데, 숙종 37년(1711)에 당시 유수 민진원에 의해 건립된 것이며 현판도 그의 글씨이다. 문루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서 건평 14평이며 누상에 오르면 시내 일대를 바라볼 수 있다. 그뒤 퇴락되었던 것을 정조 20년(1796) 유수 김이익에 의해 중수된 바 있고 1977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국화저수지다. 강화읍 국화리에 위치한 국화저수지는 고려산과 혈구산 자락에서 흐르는 깨끗한 냇물을 저장하여 강화읍의 식수원 및 농업용수로 사용하고자 축조한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는 1978년 준공되었으며, 23.48ha로 강화읍 동쪽에 위치한 넓은 평야를 옥토로 바꾸어 주었다. 물이 깨끗하고 주변 풍경이 아름다운 국화저수지에는 2010년 강화군청과 농어촌공사의 노력으로 저수지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생태문화로를 조성하였다. 약 3km의 산책로에는 쉼터와 수생 식물원, 이벤트 광장, 자연학습장이 마련되어 있어 청소년들의 생태 체험학습장으로 환영 받고 있으며, 특히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는 삶의 고단함을 털어버리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제공되고 있다.
고려 고종 홍릉입구다. 왕복 1km, 홍릉은 고려 제23대 왕이다. 고려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고비고개 정상이다. 예전에 나무와 등짐을 지고 강화 장터로 장 보러 가는 길이고 또 반대로 장보고 돌아오는 길 그리고 나무꾼이 등짐을 지고 오르내리며 장시 쉬어가던 고갯마루다.
오상리 고인돌군이다. 오상리 고인돌은 1999년 4월 26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 고려산(436m)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발고도 75m의 나지막한 산에 고인돌 12기가 한곳에 모여 있다.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고인돌은 지석묘, 돌멘(dolmen)이라고도 하며 대체로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한다.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의 고인돌 가운데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내가 지석묘(內可支石墓)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대형 판석 한 장을 덮은 모양으로 고인돌의 돌방[石室] 축조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원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밖의 고인돌은 거의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다. 오상리 고인돌군은 내가 지석묘를 중심으로 고려산 서남쪽 능선에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이 고루 분포해 있다.
고려저수지(내가저수지)다. 고려저수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에 있는 저수지이다. 1950년에 착공하여 1957년에 준공되었다. 고려저수지는 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이다. 한때 호수의 오염이 심각하였으나, 강화군에서 특별관리하여 현재는 깨끗한 저수지로 옛 명성을 되찾았다. 특시 저수지의 밤낚시 등불의 강화팔경의 하나로 불릴 정도로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내가면사무소다. 인천 강화군의 중서부에 위치하는 면이다. 동쪽으로 고려산(436m)을 경계로 강화읍에 접하고 서남쪽으로 바다 건너 삼산면과 접한다. 면의 중앙에 고려 저수지가 있다. 면사무소는 고천리에 소재한다. 내가면의 동쪽은 고려산과 혈구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형 지역이며 서쪽은 해안과 연접한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면의 서남쪽에 위치한 외포리는 나둘꾼들이 석모도 그리고 주문, 볼음도로 나갈 때 찾던 외포리선착장이 눈에 선한 곳이다.
덕산산림욕장이다. 내가면 고천리 서쪽 덕산 기슭에 위치하는 덕산산림욕장은 총 50ha의 부지에 주차장, 삼림욕로 등 기반시설과 전망대, 정자, 의자, 자전거보관대, 물놀이장 등 편의 시설, 음수대, 배드민턴 코트, 지압보도, 세족장, 운동기구 등 위생시설 및 운동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면 고천리에서 외포리, 황청리, 구라하로 이어지는 해발 191m의 덕산을 중심으로 소나무, 참나무, 낙엽소 등 산림이 울창한 숲속에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삼림욕을 겸한 최적의 산림휴양활동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덕산산림욕장의 낙엽송이 줄지어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초봄에 연두색 신록이 아름답고 가을에 단풍 또한 어느 수종 못지않아서 해가 서산을 넘으려는 저녁나절 넓은 낙엽송 숲의 스카이라인은 그 색채와 함께 우리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나무다. 특히 이 길은 눈 내릴 때 걸으보니 너무나 아름다웠다.
덕산으로 오를 수 있는 길목이다. 높이 240m의 덕산은조망이 아름다운 곳이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던 곳이다. 조선 초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별립산 봉수로 전달했고, 조선 후기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교동 화개산 봉수로 전했다. 망산봉수는 사방 8.3m 내외의 정방형 기단에 원형 연대를 갖추고 있었다. 지난해 길동무와 함께 올랐던 곳이다.
외포리 곶창굿당이다.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고창굿’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 지역은 한강 이남으로 세습무권이었으나 현재는 서울식 굿을 하는 신들린 무당에 의해 굿이 전승되고 있다. 주로 어업을 하는 정포(井浦)마을과 농사짓는 대정(大井)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득제장군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함과 생업의 번창을 위하여 하는 굿이다. 득제장군은 득대장군(得大將軍)이라고도 하는데 문헌상에 나와 있는 장군이 아니어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굿이 벌어지는 상산당(上山堂)에는 득제장군과 장군마누라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성주·제석·별상·산신·군웅·도당할머니·대감·창부의 화분을 그려 모시고 있다. 곶창굿은 대개 3년마다 음력 2월 초에 한다.
먕양돈대다. 석모도와 마주한 낙조 명소 망양돈대는 강화의 48돈대와 마찬가지로 망양돈대 역시 1679년(숙종 5년)에 병조판서 김석주가 축조하였다. 망양돈대는 건평돈대, 삼암돈대, 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에 속했다. 동족으로는 외포리항이 있고, 바로 아래에는 삼별초항쟁유허비가 있다. 남쪽은 급경사로 거의 절벽에 가깝다. 이 망양돈대에서의 일몰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망양돈대에서 추억거리 하나 남겨본다.
삼별초항쟁비다. 삼별초는 고려 원종이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자 봉기한 군사 조직이다. 고려 무인정권 집정자 최우에 의해 처음엔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6월 강화도로부터 진도로 이동하여, 구 후백제 지역과 남부 해안지역의 연안 해양세력권 구축을 통해서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결하였다. 또한 일본과의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몽골에 대응하려 하였다.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 삼별초 항쟁비이다. 앞면에는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취지가 새겨져 있다.
외포리 젓갈시장이다. 감칠맛이 나는 젓갈은 밥도둑으로 불리며 사랑받는 우리나라 전통음식이다. 저장성이 좋은 젓갈류와 건어물로 유명한 이곳은 전국의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다. 재래시장 분위기의 전통 시장인 이곳에서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강화새우젓이 가장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젓갈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맛볼 수도 있다. 젓갈을 구매하면 꾹꾹 눌러 담아주는인정과 덤의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예전에 외포리선착장은 이제 옛모습이 아니다. 삼산연육교가 개통이 되고 지난번까지 이곳에서 석모도 석포나루까지는 1.5km,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 깜짝할 사이, 10분 정도면 도착하는 카페리호를 타고 거지갈매기의 향연을 보며 석모도로 오가던 추억의 장소다.
석모도로 오가던 카페리가 떠난 후 갈매기의 그림자 초차 찾아 볼 수 없는 외포리선착장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친다.
영상앨범은 수명산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댓글 그렇군요!
우리가 길동무로 만난 것은 서울둘레길 100인 원정대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