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따는 오빠
박성희
숨이 멎는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냥 그 자리에 딱 붙어버리고 만다. 오빠만 보면. 5월이면 오빠가 왔다. 아니,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이면 오빠가 왔다. 드디어, 대롱대롱 매달린 하얀 아카시아 꽃봉오리가 팝콘처럼 톡톡 터졌다. 오늘도 나는 아카시아에서 슬슬 기어 다니는 뱀을 피해 꽃향기를 맡고 있다. 뱀이 뱉어 놓은 하얀 거품 침과 가시덤불을 경계하며 걸음을 옮긴다. 내 몸을 가려줄, 늙은 아카시아 뒤에서 오빠를 훔쳐보려는 것이다. 오빠가 개울 건너 우리 밭에서 벌을 치고 있다.
운동화 틈으로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소담히 피어난 하얀 찔레꽃 사이로 새촘이 내민 연한 찔레를 꺾어 물기도 한다. 도깨비 풀과 엉겅퀴 꽃은 내 종아리를 노리고 있는 눈치다. 유유상종인지 가시 달린 것끼리 어울려 무언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같다. 오빠는 아무것도 모른 채, 벌통을 옮기고 꿀 딸 준비에 여념이 없다. 주변의 벌들은 윙윙거리며 빙빙 돈다.
아카시아 꽃은 하루가 다르게 하얗게 피어났다. 온 산과 개울가가 아카시아 꽃으로 뒤덮여 있어, 마치 백설이 내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니다. 설탕을 뿌려놓은 게 틀림없다. 온 동네가 달콤한 향내로 흘러넘치는 걸 보면. 꿀 냄새로 진동하는 걸 보면.
벌들이 바삐 날아다닌다. 아카시아꽃 속에서 단 꿀을 훔쳐 와 벌집에다 저장하려는 것이다. 저녁때, 엄마는 얼큰하게 무친 열무김치를 한 대접 담더니 오빠 갖다 주란다. 난 내심 기쁘지만, 나설 용기가 없다. 수줍어 머뭇머뭇하는 내게 저쪽에서 오빠가 다가왔다.
"뭐니."
-드시래요.
오빠는 시장했는지 침부터 꿀꺽 삼킨다.
"와, 맛있겠다."
오빠가 기거하는 텐트 안에는 책들이 쌓여있고, 이젤과 스케치북도 눈에 띈다. 까무잡잡한 얼굴은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정이 간다. 낡은 군복 차림에, 다소 긴 머리와 수염이 터프 하다.
며칠 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빠와 마주쳤다.
"이거 한 번 찍어볼래?"
오빠가 떠 준 꿀 대접에다 새끼손가락을 찍어 혀끝에 댔다. 처음 맛보는 꿀. 설탕물보다, 조청보다, 엿보다 달다.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그 끈끈한 액체가 마구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꼴딱꼴딱 그 자리서 다 비운 그릇 밑바닥까지 혓바닥으로 싹싹 핥는다. 꿀의 진이 온몸을 끈끈하게 칭칭 감는다.
오빠는 드럼통에서 아카시아 꿀을 대 병 가득 담더니, 집에 가져가라고 한다.
우리 가족은 달콤함에 매료되어 행복했다. 그 오빠한테 밭뙈기 빌려주기를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오빠에게 빵떡도 나르고, 부침개도 나르고, 찬거리도 해 날랐다. 아카시아 꽃들은 연신 입을 쫙 벌려 향긋한 입 냄새를 풍겨 주었고, 벌들은 열심히 꿀을 따다 주인님께 바쳤다.
"내일 또 놀러 올래? 줄 게 있어."
밤새도록 '뭘까' 하는 생각에 잠을 설치다, 다음날 학교를 파하고 들렀다.
"이거 너 가져. 내일이면 나 떠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건네준다.
서운했다. 오빠랑 막 정이 들려고 하는데, 아카시아 꽃이 다 지어서 그만 떠나야 한단다. 다음날 마루 위에는, 맑고 향긋한 아카시아 꿀이 들어있는데 병 3개가 놓여 있었다.
"대학생인데 휴학을 한다지 아마. 아버지랑 단둘이 살다가 혼자 남게 되었으니 얼마나 안 됐나."
아버지도 섭섭한지 그 청년, 그 청년 한다.
한 달 후쯤인가, 분홍색 꽃 편지가 날아왔다. 그 오빠였다. 해마다 꿀 따고 싶은 동네라며 우리 집 안부를 궁금해한다.
나는 오빠가 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중1 소녀가 읽기엔 아직 어려운 내용이다. 하지만 '성숙하게 해 준 것 같다'라고 오빠에게 답장을 썼다. 오빠는 '곧 알게 될 나이가 된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오빠랑 편지를 몇 번 주고받는 동안 봄은 또 찾아왔고, 여전히 아카시아밭엔 꽃향기를 맡기 위해 찾아온 누런 뱀들이 나뭇가지에 길게 늘어져 있거나, 찔레꽃 덤불에서 꿈틀대고 있다.
꿀 따러온 오빠는 왔다 갔다 벌통을 옮기느라 분주하고, 벌들도 꿀 뜰 채비를 하는 듯 공중을 몇 바퀴씩 돌고 있다.
나는 오빠가 오면 주려고 개울에서 주운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며 그곳에 갔다.
"어서 와."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웃음 저편에서 어두운 표정과 쓸쓸한 음성이 직감된다.
"꿀 줄까. 이건 잡꿀이야."
꿀 대접을 냉큼 받아 손가락으로 빨아 보니, 여러 가지 꽃향기가 나면서 쌉싸름하니 달다.
오빠가 꿀을 따는 동안 텐트 안에 있는 스케치북을 펼쳐보았다. 웬 여자의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머리가 길고 눈이 슬픈 모습이다. 오빠의 애인인가 보다. 나는 괜히 서글퍼져, 조약돌을 힘껏 내던졌다. 그리고는 얼굴이 불그락발그락 해졌다.
오빠의 모습은 자꾸만 수척해 갔고, 연민마저 느끼게 했다. 벌들도 주인을 닮아 기운을 잃었는지, 그 해는 별 재미를 못 보고 오빠는 다시 돌아갔다.
어느새 세월은 흘렀고, 봄이 2번이나 더 왔다가 갔으나 오빠는 아무 소식도 없다. 오빠가 준 꿀 병도 모두 동이 나, 빈 병만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다.
나는 벌써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2학년이나 되었는데... .
아슴푸레 오빠가 보고 싶다. 베르테르가 롯데를 사모하는 것처럼, 오빠가 그립다. 그 슬픈 분위기가 자꾸 내 마음을 흔든다.
"여보, 그 청년이 왔어. 아침상 좀 내 와요."
아버지의 밝은 목소리가 잠을 깨운다. 얼른 옷 입고 학교 가기 바빠 죽겠는데, 떨려서 도저히 밖에 나올 용기가 없다. 세수도 안 한 모습으로 어떻게 보고 싶은 오빠와 마주칠 것인가.
그 날, 난 꼼짝 않고 이불만 뒤집어쓴 채 온종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문틈으로 살랑거리며 들어오는 아카시아꽃 냄새만 맡고 있었다. 어느새 아카시아가 하얗게 폈고, 꿀 따는 시기가 온 것이다.
"좋아하던 여자를 잃어버렸다지. 몹쓸 결핵인지 뭔지... ."
아버지가 담배를 태우며 이야기하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그랬구나. 오빠의 롯데를 하늘나라로 배웅해주고 오느냐고 못 온 거구나.
하얀 아카시아는 생기를 찾았고, 동네는 다시 꿀벌 소리로 요란해졌고, 꿀 냄새로 흘러넘쳤다.
보고 싶은 오빠가 왔는데 마주칠 자신이 없다. 성숙한 눈길로 다가갈 용기가 없다. 아카시아밭에서 우물쭈물한다. 오빠가 온 지 일주일도 넘지만 숨어서 볼뿐이다. 얼굴이 달아오른 채, 가슴이 쿵쿵 곤두박질친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야, 꿀 먹어라. 너 아카시아꿀 잘 먹는다고 주더라."
엄마가 꿀 병을 안겨준다.
마음이 아팠다. 며칠을 앓았다.
아카시아 꽃이 향기를 잃고 다 지자, 오빠는 다시 돌아갔다.
벌통과 텐트가 있던 자리가 허전하다. 그곳에 산책하러 나갔다. 아직 오빠의 흔적이 남아있다. 땀 냄새와 꿀 냄새로 범벅이고, 주인을 못 따라 간 벌들이 윙윙거린다. 오빠가 앉아서 고독을 씹던 돌멩이 밑으로 꼬깃꼬깃 접은 쪽지가 발견된다.
'오빠 안 보고 싶었나 보다. 그림 그려주고 싶었는데. 아무튼, 건강하고 어여쁜 숙녀가 되어라... .'
그 후로 오빠는 다시 오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서로가 어색했는지, 편지조차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
아카시아 꽃이 필 때마다, 환영처럼 동네 어귀에는 아직도 꿀 뜨는 내로 진동을 한다. 그때 그 꿀벌들이 찾아와 꿀을 빠는지.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오빠의 슬픈 얼굴과 달콤한 꿀과 소란한 벌들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온 산하가 하얀 아카시아로 흐뭇이 뒤덮인 지금, 오빠도 어느 하늘아래선가 아카시아 꿀을 따느라 정신이 없겠다.
오늘 따라 그 아카시아 꿀이 미치게 먹고 싶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