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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와 우리신화
그 중국의 삼황이 이 땅에 신화로 남아 있다. 제주도 신화인 천지왕 본풀이에 의하면, 최초에 무극無極라 할 수 있는 암흑과 혼돈이 있었다. 신화에서는 천황닭이 목을 길게 빼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크게 울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데 무극은 곧 태극이라 했다. 태극은 우주의 생성과 운행을 상형한다. 태극은 우리 주변에서 태극선ㆍ삼태극 등과 함께 무엇보다도 태극기의 원형정신으로 발전한다. 그 이전에 태극은 우주의 본체를 말하며 역易의 철학에 바탕한다. 그리고 주역周易는 우주의 생성이 역의 완성과 같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우주의 근원인 태극이자 무극無極가 동動하면 양陽를 낳는다. 동이 극에 달하면 정靜하여 음陰를 낳는다. 이렇게 순환하는 가운데 양이 변하고 음이 화합하여 수화목금토를 낳아 오기五氣가 베풀어지고 사시四時가 운행된다. 태극에서 나온 팔괘 중에서 건乾는 남성男性, 곤坤는 여성을 이루어 이理와 기氣가 교감함으로써 만물이 화생하니 그 변화가 무궁한 것을 일컬어 태극이라 한다.
도상학적으로 볼 때 태극의 원형은 암각화나 청동거울 등에서 원 일점원 삼원동심원으로 보인다. 원은 천원天圓를 뜻하며 일점원은 원 안에 점을 찍어 해와 달ㆍ우주를 주재하는 존재 등으로 표상되었다. 삼원동심원 혹은 삼태극은 일점원에 세 개의 동심원을 그려 삼재三才, 즉 천지인天地人를 표현한다. 삼태극은 태극팔괘도 및 경주 미추왕릉 지역에서 출토된 신라 보검의 칼자루 장식에서부터 반짓그릇 부채 갓통 등의 전통 공예품에 쓰여왔다.
삼황과 함께 등장하는 하도는 하나라 우임금이 치수할 때 낙수의 거북의 등에 그려졌다는 그림을 말한다. 「사물기원」에서는 黃河에서 圖가 나오고, 洛水에서 書가 나왔다고 했다. 事物紀原「圖畵」易曰.河出圖.洛出書...
홍수신화의 결산, 그것을 낙구부도洛龜負圖라 부른다. 낙구부도는 강륜문자도의 예禮자에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
그림 옥녀직금도
다시 제주도 신화인 천지왕 본풀이에 의하면 암흑과 혼돈을 깨고 천지가 창조된 후에 세상 만물 중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별이라 했다. 동쪽에는 견우성, 서쪽에 직녀성, 남쪽에 노인성, 북쪽에 북극성 및 하늘 가운데는 삼태성이 자리잡았다.
구전 설화를 기록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견우직녀변증설」에 의하면 상제의 손녀인 직녀와 하고河鼓라는 이름의 목동 견우는 천제의 벌을 받아 칠월 칠석에 한번 만나는데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아주느라 칠석 이후에는 대머리가 된다고 했다. 까마귀와 까치는 한국에서 큰 설날, 작은 설날을 상징한다. 또 까마귀는 태양, 까치는 희보喜報 즉 기쁜 소식의 상징이기도 하다.
노인성 혹은 수성은 인간의 수명을, 북극성은 사후세계를 관장한다. 삼태성, 혹은 삼성은 인간의 세 가지 욕망을 표상한다. 사슴을 탄 사람은 수壽를, 홍포를 입은 사람은 녹祿을, 남포를 입은 사람은 복福를 상징한다.
성수星宿 혹은 진수辰宿는 별자리가 된다. 해와 달이 모이는 곳을 진이라 하고 일년에 해와 달이 열두 번 모이기 때문에 십이진이 된다. 별자리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성수도이다. 태양이 운행하는 길인 황도皇道 주위의 4방에 있는 28수宿, 즉 28개의 별자리로 파악한 그림을 말한다. 고대에서부터 별은 위인의 탄생이나 사망 등 인간의 운명과 왕조의 흥망성쇠 및 그 조짐까지를 맡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혜성이나 운성이 출현하면 성신에게 초제醮祭를 지냈다.
그림 七星神將圖
고구려벽화에는 북두칠성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혹은 북두칠정北斗七情라고 쓰이기도 한다. 존칭하여 칠성님ㆍ칠원성군ㆍ치성광여래 등으로 불렀다. 북두칠성은 알타이문명의 신표라 할 수 있다. 북두칠성신앙은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살던 우리의 먼 조상이 남하하면서, 알타이문명의 남진南進와 함께 고향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줄기차게 전승되었다. 칠성당에는 일곱 남자 모습의 칠성신을 모셨으며 민간에서는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칠성신을 모셨다. 음력 7월 7일 북두칠성이 곡식을 점지한다는 신앙이 있다.
산소에 매장을 할 때는 지관이 패철, 즉 지남철을 대고 남북의 방위를 잡는다. 죽은 사람의 머리가 정북으로 향하게 묻으면서 관 바닥에 천지판, 혹은 칠성판을 깔아준다. 한국인 이름에 칠성이가 유독 많았던 이유도 이에 다르지 않다.
북두칠성이 팔괘 태극과 함께 그려지는 태극팔괘도가 있다. 마치 태양에서 방사되는 햇빛처럼 그려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북두칠성과 성수도가 있으니 바로 하늘나라가 예 아닌가.
천지신명이시어 Heaven, Earth and Heavenly bodies
우리네 어머니는 두손바닥이 닳도록 비비면서 비손을 했다. 그 때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천지신명이시어, 일월성신이시어” 였다. 후렴도 있다. “굽어 살피시옵소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에 있는 천지 신명과 해달별님들이 모두 굽어 선처해주시옵소서 하는 말이다.
천지신명天地神明는 천지와 신명이다. 천지는 하늘과 땅이니 바로 이 세계를 말한다. 후한서「예의지」에 동방은 신명의 집이요, 서방은 신명의 묘라 했으니 태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八家後漢書輯注「謝承後漢書」卷一, 周天游輯注, 靈帝紀
漢郊祀志『東方神明之舍, 西方神明之墓』也, 故凡事鬼必以西爲導也.
고대에는 신神=단旦로 통용되었으며 단旦=일출日出로 쓰이기도 했다. 단은 해日가 지평선-위에 떠있는 모양을 본 땄으니 일출과 같고 고대인에게 해가 뜨는 것은 태양신의 승천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기하적으로 단순화한 태양도상은 십十자요, 우주의 생성과 운행을 상형하는 것이 태극이었다. 십자는 태양을 중심으로 사방에 햇살을 비춘다는 생각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앗시리아의 천신인 아누는 그 상징이 십자였다.
만卍자는 十자에서 변형되어 태양의 회전을 나타내는 도상으로 사용된다. 지금부터 6-7천년 전, 내몽고 옹우특기翁牛特旗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동심원 안에 만자를 그려 넣은 무늬가 발견되었고 상주商周의 갑골문과 청동기, 진한의 동경銅鏡나 궁전의 와당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상주시대는 동이족의 전성기라 할 만한 시기이다.
만자는 글자끼리 연결하여 연속무늬를 만들고 장식하기도 한다. 이 연속무늬는 덩굴식물을 뜻하는 만蔓처럼 생각되어 자손의 번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만자卍字를 감마디온Gammadion라 부른다. 나치의 휘장인 철십자가는 만자와는 회전방향이 다르며 스바스티카Swastika 혹은 Svastika라 부른다. 한자의 만卍자는 스바스티카를 수평뒤집기한 형태이며 좌선만자 혹은 사우바스티카Sauvastika라 부른다.
금문金文와 상서尙書즉 서경書經, 시경詩經 등에 자주 보이는 비현丕顯는 크게 나타남, 명덕明德는 밝은 덕, 명명덕明明德는 광명의 덕으로 해석하여 모두 태양을 상징한다.
詩經第2章 帝遷明德, 第7章 帝謂文王, 予懷明德...
史記卷三十九, 「晉世家第九」父義和, 丕顯文·武, 能愼明德, 昭登於上, 布聞在下, 維時上帝集厥命于文·武.,
尙書第四篇「周書」 康誥第十一, 惟乃丕顯考文王, 克明德愼罰, 不敢侮鰥寡, 庸庸祗祗威威顯民.
또 황皇는 빛날 황煌와 같고 하늘 호昊는 머리 위에 태양을 지고 있는 대인大人로 글자풀이가 된다. 또한 고대부터 대大=천天와 같은 글자였으므로 대인이란 천인이 된다. 그리고 중국화한 토속신앙에서 옥황상제玉皇上帝는 옥玉=왕王가 되어 높고 밝은 존재가 된다.
서경의 첫 5편은 요순시대, 6-9편은 하나라, 다음 17편은 은나라의 건국과 멸망, 마지막 32편은 기원전 771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서주西周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경 역시 서주시대까지의 시가를 모았다. 그런데 이 시대는 많은 중국의 학자들이 동이의 활동시기로 지목하고 있다.
왕명손은 이족夷族는 하족夏族와 나란히 동과 서를 대표하는 부족, 혹은 국가로서 특히 이족은 중국상고시대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주장한다. 王明蓀,「論上古的夷夏觀」邊政硏究所年報第14期, 民國72=1983年 10月 1-13項
왕신은 동이문화와 회이문화에서 하나라와 상나라지구에서 주요한 고고학문화는 이인夷人의 문화이고, 하상시대 동방지구의 기본은 이족이었으며, 주대에는 많은 이인이 살고 있었다고 했다. 또한 왕헌당의 말을 빌어 산동은 하상주 삼대를 이족夷族가 다스리고 있었다고 밝힌다. 王迅, 東夷文化與淮夷文化北京大學出版社,1994 pp.85-90.
중국역사박물관의 유위초는 오늘날의 산동반도에 발달했던 악석문화를 위시하여 이리두, 용산, 대문구문화는 하나라 동이집단의 것이며, 이 때의 동이는 구이九夷와 같다고 보고 있다.
兪偉超,「早期中國的四大聯盟集團」中國文化硏究學報第19卷, 1988年, pp.11-14.
그 동이의 천명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일월성신을 앞세운 순임금의 십이장十二章이다.
십이장은 이러하다. 일日는 태양속의 삼족오, 월은 불사약을 찧는 달토끼, 성신은 삼태성을 그린다.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지식을 가르쳐준다. 곤륜산은 지켜야할 절개, 용은 사람들을 덕으로써 감화시키는 수단, 종이宗彛는 제기, 불火는 덕에 대한 열의와 사랑의 상징, 보불黼黻는 악덕을 징계하는 검정과 파랑의 도끼와 아亞자무늬이다. 조藻는 마름 혹은 바닷말, 분미粉米는 풍요의 상징인 쌀, 화충華蟲는 아름다움과 다양한 빛깔로 다양한 덕을 실천하여 수범이 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순임금은 맹자가 동이라 했기 때문이다.
孟子離婁章句下 一章凡三十三章 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註:諸馮負夏鳴條, 皆地名, 在東方夷服之地
또한 순임금에게서 오방사상이 비롯된다.
尙書에는 순임금이 우禹에게 말씀하시기를, ‘오채를 수놓아 오색으로 십이장을 들어나게 옷을 만들고자 하거든 그대로 분명히 만들고, 육율과 오성, 팔음을 듣고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음을 살피어 오덕에 맞는 말을 백성들에게 전하여 주고자 하거든, 그대가 듣고 잘 살피시라’고 당부하고 있다.
尙書「益稷」第五, 汝爲, 予欲觀古人之
象. 日月星辰山龍華蟲作會宗彝藻火粉米黼黻絺繡以五采彰施于五色, 作服, 汝明. 予欲聞六律, 五聲, 八音, 在治忽, 以出納五言, 汝聽
상서의 「우서」 순전 제2에 의하면 오악에 처음 순행한 것이 순임금이라 했다. 오채五彩와 오색五色 및 오음五音 오성五聲는 음양오행의 뼈대가 되어 동양사상과 철학의 굳건한 바탕이 된다.
무속화에서 일월성신은 일신ㆍ월신으로 그려진다. 제주도의 무속에서는 날궁전 달궁전의 일월신이 있었다. 동국세시기에는 인격화한 일월성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즉 ‘우리나라 풍속에 일직성, 월직성을 만나는 해라는 점괘가 나오면 그 사람은 종이를 해와 달의 모양으로 둥글게 오려 집게처럼 벌린 나무에 끼워 지붕 위의 용마루에 꽂거나 달이 뜰 때 횃불을 들고 달을 맞기도 한다’고 했다. 여기서 직성이란 사람의 나이에 따라 운명을 맡은 별을 말한다.
일직성과 월직성 외에도 수직성水直星와 나후직성羅睺直星가 있지만 제일 꺼리는 것이 처용직성이다. 남자는 10살부터, 여자는 11살부터 9년마다 그 해의 운수를 맡아보는 나후직성, 혹은 제웅직성이 찾아오는데 제웅치기로 액막이를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제웅치기가 소개되고 있다.
“나이가 나후직성에 든 사람은 제웅芻齡를 만드는데 사투리로는 처용이라 한다. 제웅 속에는 액년을 당한 사람의 성명과 출생간지를 적어서 넣고 그 머리 속에는 동전을 넣어서 上元 즉 보름의 전날 밤 초저녁에 길에다 버려 액을 막는다. 동네 아이들은 이날 집집마다 몰려다니며 제웅주세요 하고 청한다. 집주인이 제웅을 선뜻 내주면 아이들은 머리부분을 파헤쳐 제웅 속에 들어 있는 돈만 꺼내고 제웅은 길에 버린다. 이것을 제웅치기打芻戱라 한다.” 제웅치기는 나후직성에 든 사람앞에서 제웅을 때리며 돈을 달라고 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웅은 제용 혹은 처용이라 부른다. 처용은 삼국유사의 「기이편」 중에서 「처용랑 망해사」 조에 나오는 용왕의 아들이다. 헌강왕이 출유할 때 안개가 짙어 일관의 말대로 절을 지으라 명하자 안개가 개었다. 동해룡이 감사의 뜻으로 일곱 아들 중 하나를 서울에 보내 정사를 보좌했다. 왕이 보답으로 급간벼슬과 미녀 아내를 주었다. 역신이 아내와 동침하자 아내를 뺏기고도 노하지 않음에 감격한 역신이 처용의 화상을 그려놓은 곳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여 벽사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용재총화에서는 바다 가운데서 나와 처음으로 개운포에 나온 신인으로서 위인이 대범하고 뛰어나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慵齋叢話處容之戱, 肇自新羅憲康王時, 有神人出自海中, 始現於開雲浦, 來入王都, 其爲人奇偉倜儻, 好歌舞.
처용이 추었다는 춤은 나중에 장악원 향악부 처용무의 원형이 된다.
다시 그 원형으로 생각되는 것이 치우이다. 치우는 황제와 탁록의 싸움에서 패전한 동이의 장군이다. 사기에 의하면 헌원치세에 염제 신농씨가 쇠하여 제후가 서로 싸우느라 백성에게 포학한지라, 헌원이 제후들을 복속케 했으나 신농의 장수인 포악한 치우는 정벌할 수 없었다. 이에 판천의 들에서 헌원과 염제의 싸움이 벌어진다. 세 번을 싸웠으나 치우를 이길 수 없었다. 마침내 탁록의 들에서 치우를 죽이자 제후가 신농대신 헌원을 천자로 내세우니 이가 황제라는 설명이다.
史記卷一「五帝本紀」第一, 軒轅之時, 神農氏世衰. 諸侯相侵伐, 暴虐百姓, 而神農氏弗能征. 於是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享, 諸侯咸來賓從. 而蚩尤最爲暴, 莫能伐. 炎帝欲侵陵諸侯, 諸侯咸歸軒轅. 軒轅乃修德振兵, 治五氣, 蓺五種, 撫萬民, 度四方, 敎熊羆貔貅貙虎,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三戰, 然後得其志.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
산해경에서 학의항郝懿行은 주서周書를 빌어 황제대신 적제赤帝 혹은 수제逐帝가 탁록의 전쟁을 벌이고, 다시 황제에게 말하여 치우를 중기中冀 혹은 청구靑丘에서 죽였으며 절비絶轡의 뜰이라 했다고 주를 달고 있다.
山海經第十四「大荒東經」 大荒東北隅中, 有山名曰凶犂土丘. 應龍處南極, 殺蚩尤與夸父, 不得復上. 故下數旱, 旱而爲應龍之狀, 乃得大雨. 郝懿行云: 周書嘗麥篇云 : 「蚩尤乃逐帝赤帝, 爭于涿鹿之河阿, 赤帝大懾, 乃說於黃帝, 執蚩尤殺之於中冀, 用名之曰逐帝之野.」 中冀蓋卽大荒北經所記冀州之野, 亦卽涿鹿之河阿也.
山海經第十四「大荒東經」 初學記卷九引歸藏啓筮云 : 「蚩尤出自羊水, 八肱、八趾、疏首, 登九淖以伐空桑, 黃帝殺之於靑丘.」 靑丘, 東方地名也. 或又傳在中冀.
치우는 갖가지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공격했다. 패전의 위기에 몰린 황제는 응룡에게 명하여 기주의 들에서 싸우게 했다.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청하여 폭풍우를 일으켰다. 풍백 우사의 이름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 운사 우사의 삼재三才 혹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연상케 한다. 그러자 황제가 천녀 발魃를 내려보내니 미친 듯한 폭풍우가 그쳤다. 마침내 치우를 죽였지만 발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거처하는 곳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
山海經第十七「大荒北經」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令應龍攻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魃不得復上, 所居不雨.
황제여발은 활쏘는 사람도 활 쏘기 무서워하는 북쪽 계곤산 공공대 위에 푸른 옷을 입고 있다고 했다.
山海經第十七「大荒北經」 有係昆之山者, 有共工之臺, 射者不敢北鄕. 有人衣靑衣, 名曰黃帝女魃.
황제가 처음으로 치우의 화상을 만들어 벽사의 목적으로 썼다는 이야기 외에도 상주商周시대에는 철문餮文로 불리었으며, 진대에는 치우부적이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산해경 「대황남경」의 가안珂案에는 치우의 상을 전이尊彛라는 그릇에 새겨 탐욕을 경계한다고 했고 오임신은 도철이라고 밝히고 있다.
山海經 第十五「大荒南經」 復說云 : 「後代聖人著其像于尊彝, 以爲貪戒.」 其說當有所本. 羅苹注云 : 「蚩尤天符之神, 狀類不常, 三代彝器, 多著蚩尤之像, 爲貪虐者之戒. 其狀率爲獸形, 傅以肉翅.」 吳任臣山海經廣注大荒北經引博古圖略同此說.揆其所說, 殆饕餮也.
치우의 얼굴을 그린 도상이 보고되고 있지만 고구려 벽화 등에서는 해석 여하에 따라 치우의 전신이라 생각되는 채색화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철이나 귀면와나 처용탈ㆍ제웅 등도 역시 치우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략...첨부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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