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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재상이었던 황희정승은 청렴하고 깨끗한 성품과 함께 너그럽고
인자하기로도 널리 알려졌다.
한번은 황희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밖이 소란하여 내다보니 옆집 아이들이
복숭아를 몰래 따고 있었다. 황희는 점잖게 타일렀다.
“얘들아, 다 따가지는 말아라, 나도 맛 좀 보자꾸나.”
잠시 후 밖이 조용해져서 나가보니 복숭아나무에는 열매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황희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만 가득 띠었다.
어느 날은 배가 무르익었는데 뒤뜰이 요란했다. 나가보니 역시 옆집 아이가
돌을 던져 열매를 모두 떨어뜨려 놓은 것이었다.
황희는 하인을 불러 광주리에 배를 담게 한 후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아이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였다. 아이는 배를 받자 뛰어나와 엉엉 울었다.
까닭을 물으니 잘못을 뉘우쳐서 우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황희의 소탈한 성품이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이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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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아들 황수신(黃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세종은 조선의 가장 훌륭한 왕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새로 건국된 조선 왕조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세종 혼자서 한 것은 아니다. 세종 시대에는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다. 그중 황희(黃喜)는 맹사성(孟思誠)과 더불어 조선 초기 최고의 재상으로 꼽힌다. 그는 세종 치하에서 무려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으로 재직했다.
황희의 본관은 장수(長水), 호는 방촌(尨村)이다. 그는 1363년(공민왕 12) 판강릉부사
(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실록에는 그가 출생했을 때
“신기(神氣)가 보통 아이와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희는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한 후에는
벼슬길을 버리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둔했다. 그러나 은둔 기간은 길지 않았다. 태조가 여러 번 황희를 조정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함께 은둔했던 고려의 충신들도
“황희가 나가지 않으면 백성이 어떻게 되겠느냐?”며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했다.
이후 황희는 태조, 정종, 태종에 이어 세종, 문종까지 다섯 왕을 보필하며 정사를 폈다.
황희는 1401년(태종 1)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
경력이 되었고, 1405년(태종 5) 박석명을 대신해 지신사가 되었다. 지신사는 승정원
소속의 관리로 왕명을 출납하는 직책이다. 황희에 대한 당시 태종의 신뢰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문종실록》 권12, 문종 2년 2월 8일, 황희의 졸기후하게 대우함이 비할 데가 없어서 기밀 사무(機密事務)를 오로지 다하고 있으니,
비록 하루 이틀 동안이라도 임금을 뵙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러서 뵙도록 했다.
태종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나와 경(卿)만이 홀로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卿)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했다.
황희는 태종 조에 대사헌, 병조 판서, 예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황희가 태종의 눈 밖에 나게 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 때문이었다. 1416년(태종 16) 태종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위하고자 했다. 이미 몇 차례의 선위 파동을 통해 외척 민씨
일가를 척결한 뒤였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폐위 의사를 밝히자 황희는
세자의 자리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에 반대했다.
“세자의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이니 큰 과실은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해 태종의 눈 밖에 난 황희는 이듬해 평안도 도순문사 겸 평양 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1418년(태종 18), 결국 양녕대군이 폐위되면서 황희 역시
관직을 박탈당하고 파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태종의 배려로 곧 고향과 가까운
남원으로 이배되어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세자의 폐위에 반대한
황희를 내치기는 했으나 태종은 여전히 그를 아끼고 있었다. 황희 역시 그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유배지에서 근신하며 때를 기다렸다.
1422년(세종 4), 마침내 황희에게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태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그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말했다.
“황희의 전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뜻을 받아들였다. 황희는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환급받고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다시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황희는 세종의 오른팔이 되어 뛰어난 국정 운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양녕대군의 폐위 후 세자에 오른 세종은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집권 초기에는 아버지인 태종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성군(聖君)의 자질은
이때부터 발휘되고 있었다. 세종이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황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든 것은 단순히 태종의 천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종의 머릿속에는
이미 추진해야 할 수많은 정치 개혁 과제들이 있었다. 때로 과격하게 느껴질
정도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해 나가다 보면 자칫 정국이 불안해질 수 있다.
때문에 세종에게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소신껏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있는
황희 같은 인물이 필요했다.
실제로 황희는 왕과 중신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중용(中庸)의 미덕을 정치 현장에서 그처럼 잘 실천한 사람도 드물다. 황희는 세종이 키운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이 뜻을 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지나치게 앞서 나가려 할 때는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고 진언하여 완급을 조절했다.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잡아 정국을 안정시킨 것이다.
중도를 걸은 황희의 철학은 실생활에서도 나타난다.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하루는
황희의 집에서 부리는 여종 두 사람이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찾아왔다. 황희는
먼저 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더니 “네 말이 맞다.”고 했다. 이번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흠, 그래 네 말도 맞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황희의
부인이 “어찌 둘 다 맞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핀잔했다. 황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인의 말도 맞소.” 했다. 이처럼 황희는 어떤 의견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혹자는 그의 이런 태도를 ‘양시론(兩是論)’이라 비판한다.
하지만 자기 주장만 내세우기 바빠 남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황희의 이러한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
세종은 1436년(세종 18)에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었다. 육조직계제
는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했던 제도이다. 육조직계제를 포기하고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한다는 것은 재상들에게 권력의 중심이 넘어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미 왕권은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항상 격무에 시달렸던 세종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때문에 육조에서 올라오는 업무를 일일이 보고받고 직접 처리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세종은 황희를 비롯한 재상들이 자신을 대신해 이런 일들을 잘 처리해 주리라 믿었다.
황희는 세종의 믿음에 부응했다. 그가 조정에서 재상으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동안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 발명, 4군 6진의 개척 등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황희는 고려의 예법을 조선에 맞게 고치고, 농사를 개량해 농업 발달에도 이바지했다.
또한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를 지휘하고 감독했다. 그의 이러한 치적은 세종과
더불어 태평성대를 여는 데 공헌했다.
세종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인물에게 중책을 맡기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곤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영실(蔣英實)이다. 1433년(세종 15), 세종은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든 장영실에게 정4품에 해당되는 호군(護軍)의 관직을 내리려 했다. 그런데 장영실이 기생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여러 중신이 반대했다. 세종이 이를 의논하자 황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인(金忍)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9월 16일
황희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세종과 뜻을 같이했다. 이지숭(李之崇)의 첩의 아들을
충의위(忠義衛)에 입속시킬 것인지의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서도 황희의 넓은 도량을 짐작할 수 있다. 충의위는 1418년(세종 1)에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 3공신의 자손들을 입속시키기 위해 설치된 양반숙위군이다.
《세종실록》 권63, 세종 16년 1월 20일고금을 통해 천자(天子)는 본래 양천(良賤)의 분별이 없사오며, 더욱이 지금
중국에서는 적·첩(嫡妾)의 구분조차도 없사온데, 어찌 유독 본국에서만 굳이
이 법을 시행한단 말입니까. 지숭의 아들은 충의위의 입속을 허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황희는 천첩 소생의 천역을 면제해 백성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노비도 역시 하늘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오.”라면서 집에서 부리는 종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뜻을 글로 적어 자식들에게도 전했다. 이런 너그러움에 때론 종들이 무례하게 굴었다. 그래도 그는 좀처럼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았다.
그런데 황희가 유독 엄하게 대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종서(金宗瑞)이다.
문신 출신인 김종서는 황희의 추천으로 함길도 관찰사로 가게 되었다. 덕분에
김종서는 6진 개척의 공을 세웠고, 이후 한양으로 돌아와 육조의 판서 자리를
고루 지냈다. 이때 정승이던 황희는 김종서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다소 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꾸지람을 하거나 김종서의 종을
대신 매질하기도 했다. 평소 자기 집 어린 종에게 수염을 잡히고도 사람 좋게
웃어넘기던 황희였다. 그런 인품으로 어찌 김종서에게만 고약하게 구는지 김종서
본인도 괴롭고, 주위 사람들도 의아해했다. 한 번은 보다 못한 맹사성이 그 이유를
물었다. 황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연려실기술》 권3, 세종 조 고사본말이것은 곧 내가 종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거요. 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니 훗날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으니,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해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 있게 해 혹시 일을 당해서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에게 곤란을 주려 함이 아니오.
훗날 황희는 김종서를 자신의 자리에 천거하고 떠났다. 이 밖에도 황희는 ‘호랑이
장군’이라고 불리던 최윤덕(崔閏德)을 영변 부사에 천거해 4군 개척의 공을 세우게 했다. 세종의 옆에서 왕명을 출납한 지선사 안숭선(安崇善)도 황희가 천거한 인물이다.
황희는 출신이 변변치 않은 인물도 거침없이 추천했다. 또한 사소한 잘못이나
오해로 중신들의 배척을 받은 인물일지라도 넓은 도량으로 껴안았다. 그렇게
황희에게 발탁된 인재들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 수 있었다. 황희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물을 뽑아 쓸 줄 알았던 유형의 리더였다.
황희는 검소하고 청렴했던 청백리의 표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전해지는 일화 중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계란유골(鷄卵有骨)’이라는 사자성어의 유래이다. 황희의 궁색한 살림살이에
마음이 쓰인 세종이 한 번은 하루 동안 숭례문으로 들어오는 상인의 물건을 모두
사서 황희에게 가져다주라고 명했다. 그런데 마침 그날 비바람이 몰아쳐서 숭례문을
출입하는 자가 없었다. 다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한 노인이 계란 한 꾸러미를 들고
지나갔다. 명을 받은 관리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사서 황희에게 가져다주었는데 그
계란마저도 모두 곯아 있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검소한 황희는 단벌 관복을 빨아서 입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희의 부인이 솜이 들어 있던 관복을 뜯어 빨았는데, 급히 입궐하라는 세종의 명이
떨어졌다. 황희는 할 수 없이 솜이 너덜너덜한 젖은 관복을 입고 입궐했다. 그 모습을
본 세종이 비단을 하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희는 한사코 받기를 거절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일화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실록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1427년(세종 9), 당시 좌의정이던 황희는 우의정 맹사성과 함께 파면됐다. 이른바 ‘
서달 사건’에 연루된 까닭이었다. 서달(徐達)은 황희의 사위이다. 어느 날 서달이
모친을 모시고 신창현(新昌縣)이라는 곳을 지나가는데 그 고을 아전이 예로 대하지
않고 달아난 일이 있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서달은 집에 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 아전을 잡아오라 명했다.
이에 서달의 종들이 아전을 잡으러 나섰다. 그러나 행방을 알 길이 없어 지나가던
아무 아전이나 붙잡아 묶고 때리며 그의 행방을 대라고 했다. 그때 옆을 지나가던
표운평(表芸平)이라는 아전이 한마디 했다.
“누구의 종들이기에 관원도 없는 데서 이렇게 아전을 묶어 놓고 때리느냐!”
그러자 종들이 이번에는 표운평을 붙잡아 두드려 패 서달의 앞에 끌고 갔다. 서달은
맞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표운평을 보고는 “일부러 술이 취한 체한다.”고 했다.
그 바람에 다시 또 두드려 맞은 표운평은 다음 날 죽고 말았다. 이 일을 운평의 아내가
감사에게 고했다. 무고한 자를 때려 숨지게 했으니 살인 사건이 분명했다. 하지만
서달이 권력자 황희의 사위이다 보니 형을 집행해야 할 관리들은 서로 눈치만 보다가
결국 서달을 풀어 주었다.
그런데 이 일이 세종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세종은 서달은 물론이고 그를 풀어 준 일에 연루된 관리들을 모조리 벌주었다. 또한 권력을 남용해 사위를 방면시킨 황희와 그의
청을 들어준 맹사성까지 파면했다. 그러나 황희와 맹사성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복권됐다. 결국 죄를 지은 황희의 사위를 살리려고 엄한 하급 관리들만 목이 달아나고
만 셈이다. 권력자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서달 사건으로 파면됐다가 복직되고 1년 후 황희는 다시 한 번 탄핵을 받게 된다. 당시
추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박포(朴苞)의 아내가 자신의 간통 사실을 안 우두머리 종을
연못에 빠뜨려 죽이고는 황희의 집에 숨어들었다. 이때 황희가 박포의 아내와 간통했다는 것이 첫 번째 추문이다. 두 번째는 황희가 박용(朴龍)이라는 사람에게서 말을
뇌물로 받고 뒤를 봐줬다는 내용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섹스 스캔들과 뇌물 스캔들인
것이다.
황희 자신은 뜬소문이라고 하면서도 왕에게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실록은 이러한 추문이 모두 사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힐난했다.
《세종실록》 권40, 세종 10년 6월 25일황희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를 물려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刑獄)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
그가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의논하거나 혹은 고문(顧問)에 대답하는 등과 같을 때에는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의논하는 것이 다 사리에 맞아서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됨이
없으므로, 임금이 무겁게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술(心術)은 바르지 아니하니,
혹시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황희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다.
태평성대를 연 조선 최고의 재상이라고는 하나, 오랜 권력의 마지막에는 이처럼 잡음이
따랐다. 이러한 허물에도 세종은 황희를 감싸 안았다. 재상으로서의 능력을 더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말한 것이 옳다. 그러나 대신을 진용퇴출(進用退出)하는 일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서달 사건으로 파면된 황희를 복직시키는 것에 대해서 옳지 않음을 지적한 대사헌의
상소에 대한 세종의 답이다. 왕의 의중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야사에는 유독 황희의 유한 성격을 표현한 일화들이 많다. 그러나 정사에 기록된
황희는 할 말은 하고 지킬 것은 지키는 강직한 재상의 모습이다. 어느 쪽이 진짜
황희의 모습인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안에 따라 때론 유연하고 때론
강직하게 대처했던 조화로움이 그의 리더십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황희의 이런
면모는 묘비에도 기록되어 있다.
평시에는 의논을 너그럽게 하였으나, 큰일을 당해서는 맞대고 그 자리에서 시비를
가려 의연히 굽히지 않았다.
황희가 지닌 조화의 리더십은 자신의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던 세종과 피 끓는 젊은
집현전 학자들 사이에서 더욱 빛났다. 재위 말년 세종은 궁궐 내에 불당을 차리고
불공을 드리곤 했다. 그런데 이것이 조정 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의 반발을 샀다.
황희 역시 불당을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세종은 예전에 “불씨의 교가
탄망(誕妄)하여 다스리는 체제에 해가 있으니 심히 불가하다. 내가 장차
그 폐해를 뽑아 버리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황희는 다른 대신들처럼 강경하게 반대하는 대신에 유연함을 발휘했다. 노구를
이끌고 등을 돌린 집현전 학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한 것이다. 극단적으로 치달을
뻔했던 갈등의 씨앗은 황희의 노력으로 진화됐다.
1432년(세종 14), 세종은 황희에게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늙은
대신에게 내리던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했다. 황희의 나이 70세였다. 수고했다는
의미의 궤장은 또한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정사에 소홀하지 말라는 격려의 뜻이기도
했다. 황희는 90세가 가까운 나이까지 정승의 자리에 머물며 세종의 뜻을 펼쳤다.
그가 강직하기만 했다면 쉽게 꺾여 그처럼 오래 정사를 돌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유연하기만 했다면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켜 공보다 실이 많은 불명예의 멍에를
짊어졌을지도 모른다. 강직함과 유연함의 절묘한 조화야말로 그를 정상의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게 한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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