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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단편소설>
율도국(栗島國)으로 날아간 따오기
김호운/한국문협 부이사장
전철 4호선 종점인 오이도역에서 내려 수인선으로 갈아탔다. 마치 은하철도를 타고 낯선 행성에 온 듯 내겐 이곳 풍경이 몹시 낯설다. 수원에서 장난감처럼 생긴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갈대숲과 염전 사이를 지나가던 아름다운 옛 추억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18년이란 세월이 이곳을 이처럼 다른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서울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도 새로운 노선의 전철이 놓인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여길 와 보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소래 포구나 오이도에 몇 번 다녀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일부러 핑곗거리를 만들어 가족 나들이에서 빠지곤 했다. 아문 상처가 덧날 것 같은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이도(烏耳島)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육지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던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2년 일본이 군사용 염전을 개발하면서 육지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운명은 이미 이때부터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 뒤 1994년에 오이도와 대부도(大阜島) 사이를 시화방조제(始華防潮堤)로 연결하면서 이곳의 원래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게 바뀌었다. 제방 건설로 생긴 시화호(始華湖)를 담수(淡水)로 만들어 광활한 간척지를 농경지로 바꾼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시작한 공사였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입수와 배수가 원활하지 못하면서 시화호 물은 썩어들어갔고, 지금은 물고기조차 제대로 살지 못하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 사업을 업고 주변에 도시화 개발이 병행되면서 누대로 이곳에 뿌리박고 살아가던 원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고, 그 자리에 공장과 고층아파트들이 앞다투어 들어서면서 지금은 낯선 이들이 들어와 새로운 삶터를 만들어 가고 있다. 갯가 주변에는 모텔과 각종,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인근 도시 사람들이 몰려들어 삶에 지친 피로를 풀고 돌아가는 땅이 되었다. 새로 들어와 사는 이나 잠시 놀러 왔다 돌아가는 이들은 이곳이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관심이 없다. 이곳에 드나드는 교통이 더 편리해져서 부동산값이 오르고, 먹거리들이 더 풍성하고 값싸며,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18년 전 ‘따오기 할배’도 흑백사진 한 장을 남겨 놓은 채 고향인 이곳을 떠났다. 우리 곁에서 사라진 따오기처럼 따오기 할배도 그렇게 사라졌다.
어제 TV 뉴스를 보다가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충격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하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나란히 서서 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장면이었다. 8개 협약을 체결하며 하나하나 발표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따오기 보호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처음에 뭘 잘못 들었나 하고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자연보호에 관심을 기울이는 두 정상의 훌륭한 모습에 감격한 게 아니다. 국가 정상끼리, 그것도 우리 국익에 큰 영향을 끼치는 중국 최고위 지도자와 만나는 중요한 자리에서 ‘새’에 관한 협약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다. 자연보호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께서 이런 말을 들으면 크게 비난하겠지만, 솔직히 나는 ‘왜 이 중요한 자리에서 하필 새인가?’하는 떨떠름한 생각을 했다. 그렇잖아도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고, 일본과도 껄끄럽지 못한 상황에서 한가롭게 새를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잠시였다. 물론 ‘잠시’라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건 그동안 속물근성으로 살아온 부끄러운 내 속내를 보여준 것이며, 나는 평생 이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나의 그런 속물근성을 칼로 베듯이 잘라 버리며 내게 전율을 느끼게 한 것은 ‘따오기 할배’였다. 그동안 따오기 할배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따오기, 따오기……. 정말 나는 따오기 할배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18년의 세월은 내게도 이렇게 도시 속의 아파트에 적응하며 잘 살아가도록 길들여놓고 있었다. 따오기 할배와 헤어져 돌아오던 그날, 나는 인터넷과 사전을 뒤적이며 따오기에 대해 살펴보았다.
따오기는 천연기념물 제198호, 그리고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2급으로 지정된 황새목 저어샛과의 겨울 철새다. 1977년 판문점 근처 비무장 지대에서 2마리가 발견된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자연 상태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2008년 중국으로부터 한 쌍을 기증받아 창녕에 있는 따오기 복원센터에서 개체 번식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공 번식으로 겨우 개체를 보존하고 있다.
따오기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의 놀라움은 더욱 커져갔다. ‘따오기가 자연에서 사라진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 훼손과 남획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라는 조사보고서의 한 문장을 읽고 나는 한동안 멍하게 허공만 바라보았다. 논이나 물가 또는 갯가에서 물고기와 곤충 등을 잡아먹고 사는 따오기는 성질이 예민하고 경계심이 강하여 소리와 주변 환경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새다. 그런 따오기가 자연을 훼손하는 난개발에 쫓겨 점점 더 깊은 숲 속으로 숨어들다가 결국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따오기가 살 수 없는 땅엔 우리 인간도 살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그렇게 사라진 새다.
나는 TV 뉴스를 보다 말고 부리나케 작업실로 뛰어갔다. 작업실이라고 거창하게 부르고 있지만, 실은 아파트의 작은 방에 천으로 된 간이 암실(暗室) 하나를 만들어 놓은 게 고작이다. 그나마 이젠 거의 사용하지도 않아 그 방은 온갖 잡동사니들을 넣어두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카메라도 디지털로 몽땅 바꾸었기 때문에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 현상하는 일은 거의 없다. 혼자 고고한 척하며 필름으로 찍어 직접 현상해야 제대로 된 사진이라고 고집을 피웠지만, 나도 변하는 대세를 외면할 수 없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는 입에 풀칠하기는커녕 현상비도 나오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이 아니라 ‘누군가가 요구하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젠 흑백 필름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고, 더구나 직접 현상을 하기에도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이 방에 있는 작은 암실만은 여태 없애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한 가닥 남은 자존심 같아서 도저히 철거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꼬박꼬박 이 방을 ‘작업실’이라고 부른다. 가끔 일에 지치거나 흑백사진의 향수에 빠지면 한 번씩 들어와 멍하니 암실을 바라보다가 나간다.
나는 암실 한쪽에 세워둔 사진 더미에서 액자 하나를 찾아냈다. 택배로 보내온 건데, 사과박스를 뜯어 만든 허술한 포장지 속에 넣어진 채 지금까지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따오기 할배가 검은색 매직으로 박스에 비뚤비뚤하게 ‘따오기 할배’라고 쓴 글씨를 한번 들여다보고 나서 포장을 열고 나무 액자를 꺼냈다.
흑백사진 속에는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허름한 집 한 채가 있고, 집 옆에 바짝 붙여 세워 놓은 낡은 고깃배가 한 척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 배 위에 올라앉아 갈대피리를 불고 있다. 집 뒤로는 갈대숲이 바람에 출렁이고, 그 갈대밭 너머로 염전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촬영한 지 18년이 좀 넘은 흑백사진이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그 시절로 달려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백수로 지내다가 막 대기업 홍보실에 사진기자로 취직을 했을 때다. 언론사에 취직한 친구들과 달리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정확해서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무척 행복해하던 시절이었다. 주말이 되면 나는 늘 수원까지 가서 장난감 같은 작고 앙증맞은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달월, 월곶, 소래, 그리고 물왕리 저수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서울 인근에서 이곳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살아 있는 자연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갈대숲이며 넓게 펼쳐져 있는 염전들이 나를 매료시켰다.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무척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이 좋은 곳에 사진 찍는 친구들과 함께 가면 좋을 걸 나는 언제나 혼자 다녔다. 이 아름다운 풍경이 연기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다. 소중한 것을 나 혼자 숨겨놓고 몰래몰래 훔쳐보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이런 희망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날 오이도와 대부도를 잇는 장대한 시화방조제 공사를 시작하더니 주변의 염전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포구의 마을들도 조금씩 변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고층아파트 단지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했다. 월곶 포구 근처도 위락시설과 횟집들이 빈틈없이 들어찼고, 외지 사람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벌떼처럼 몰려오는 관광지로 변해 버렸다. 급기야 수원과 인천 사이를 오가던 그 앙증맞은 협궤열차도 운행을 중단해 버렸고, 대신 오이도와 송도를 잇는 전철이 새로 생긴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전철이 생기면 이 일대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다며 돈 많은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다녔고, 여기저기 부동산 간판이 우후죽순처럼 매달렸다.
바로 이 무렵에 나는 ‘따오기 할배’를 만났다. 월곶 포구 근처에 마치 이런 변화에 시위라도 하는 듯 이상한 집 한 채가 덩그마니 서 있었다. 주위에는 고층아파트들이 그 낡은 집을 위협하듯 빙 에두르며 서 있고, 한쪽에는 새로 닦는 큰길의 고가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내가 이 집에 유독 관심이 끌린 건 이런 주변 환경 때문이 아니었다. 집 바로 옆에 낡은 폐선 하나가 장식품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물에 떠 있어야 할 고깃배가 뭍으로 올라와 집과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게 내겐 무척 신기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카페나 횟집에서 장식품으로 가져다 놓은 게 아닐까 싶어 살펴봤는데, 평범한 살림집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다가가는 길을 찾는 일이 만만찮았다. 집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진입로가 없었다. 한쪽은 고가도로 공사를 하느라 통제하고 있고, 그 반대편은 문을 닫은 염전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 한쪽은 고층아파트 단지 울타리가 빙 둘러쳐져 있다. 편하게 가려면 해안 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쪽은 개펄이 넓게 들어와 있어서 쉬 출입할 수가 없었다. 들어가는 길을 찾느라 한참 헤매던 끝에 겨우 길 하나를 발견했다. 고가도로 공사하는 쪽에 덤프트럭이 드나드는 진입로가 있는데, 위험하긴 하지만 그곳으로 들어가서 아파트 울타리 옹벽 아래쪽 빈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힘겹게 들어간 나는 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공사장의 소음 때문에 몰랐는데, 집 앞에 이르니 피리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살펴보다가 나는 고깃배 위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그 노인이 피리를 불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낯익은 노래가 아닌가.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이드뇨?
내, 어머님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가뜩이나 슬픈 노래인데, 피리 소리에 실려 오니 더 가슴 저미듯 애잔하고 구슬프게 들렸다. 어릴 때 부르던 노래여서 어렴풋이 귀에 익은 가락이었을 뿐, 이 노래 제목이 「따오기」고, 한정동이라는 아동문학가의 동시에 윤극영 선생이 곡을 붙인 거. 라는 사실은 나중에 따오기에 대해 자료를 살펴보다가 알았다. 원래 발표할 때의 제목은 ‘동옥이’였는데, 뒤에 ‘따오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마 한정동 선생의 고향인 북쪽에서는 따오기를 ‘동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따오기가 진짜로 존재하는 새라는 것도, 지금은 자연에서 사라지고 없다는 것도 나는 이때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평소 관심을 가질 기회도 없었지만,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노래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피리 소리가 끊어지기 전에 얼른 카메라를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구도가 나오지 않았다. 아파트 울타리 옹벽과 공사판의 구조물, 그리고 자재 더미들 때문에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집과 고깃배, 그리고 피리를 부는 할아버지를 자연스럽게 앵글 속에 담기 위해 애를 썼지만, 주변 환경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공사장 자재 더미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하이앵글로 구도를 잡아 셔터를 눌렀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위가 너무 산만했다. 고층아파트와 어지러운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살릴지 날려 버릴지 잠시 고민했다. ‘이 집이 왜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가?’라는 의미를 새기기 위해서는 난삽한 배경을 살리는 게 좋겠고, 순수하게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배경을 날리는 게 좋다. 나는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피리 소리가 끊어질 듯하여 나는 쫓기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리를 옮겼다. 개펄 쪽에 갈대숲이 있어서 폐염전과 함께 이를 배경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이 집이 안고 있는 사연을 담기보다 내 욕심을 살렸다. 갈대숲과 염전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서 있는 집과 배를 한 폭의 평화로운 정물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몇 컷을 더 찍는 동안 어느새 피리 소리는 멎어 있었다. 배 위에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도 사라졌다. 나는 자재 더미에서 내려와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집 안쪽을 기웃거렸다.
“뭘 찾으시오?”
언제 다가왔는지 할아버지는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찾으려고 집 앞쪽으로 들어가고, 할아버지는 자재 더미 위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나를 보기 위해 집 뒤쪽으로 돌아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여기… 할아버지 댁이세요?”
“그렇소만?”
나는 멍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슨 큰 의미를 가지고 사진을 찍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어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몰래 사진을 찍은 것도 따지고 보면 잘못한 일이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말했다.
“기자요?”
“네?”
“아님, 회사에서 나왔소?”
그제야 할아버지가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 집이 개발과 관련된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주변이 온통 개발 중인데 이 집만 이렇게 덩그마니 있다는 게 그걸 말해 준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마도 언론사 기자거나 이해관계에 있는 회사에서 온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 아닙니다, 할아버지. 배가 집 옆에 있기에 신기해서 그냥 사진 한 장 찍으려고 왔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더니 “사진작가요?” 했다. 나는 아직 사진작가라고 명함을 내밀 정도로 이름난 공모전에 입상한 경력도 화려한 개인전을 연 적도 없으니 그렇다고 말하기가 참 난처했다. 나는 회사 명함을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그냥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이렇게 다닙니다.”
“이왕 누추한 곳까지 왔으니 들어오시오.”
내 명함을 받아 든 할아버지는 앞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허락 없이 사진을 찍었다고 혼을 내는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가 의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할아버지가 먼저 대청마루로 올라간 뒤에야 쭈뼛쭈뼛 따라 들어갔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는 단층 맞배지붕의 조그마한 기와집이었는데, 허름한 겉모습처럼 집 내부도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본의 아니게 초대되어 들어간 터라 남의 집을 구석구석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대청마루에 앉아서 문이 열려 있는 안방을 슬쩍 들여다본 느낌이 그랬다. 오래도록 비워둔 집처럼 휑하게 찬 바람이 부는 그런 분위기였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사용한 지 오래된 어구(漁具)들이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마루에 앉아서 보니 집 옆에 앉아 있는 고깃배가 집 크기와 비슷할 정도로 엄청, 커 보였다. 마당에서 배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사다리로 배에 오르내리는 모양이다. 가만히 집주변을 살펴보니 대문이 있었다. 이 집의 운명을 말해 주는 듯 담장은 여기저기 다 허물어졌는데, 도로 공사장 반대편에 녹슨 대문이 허물어지다 만 자투리 담장에 겨우 붙어 있다.
“커피 한 잔, 하겠소?”
그렇게 질문을 했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어디에서 왔소?”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이라… 좋은 데 사는구먼.”
“할아버지 혼자 사세요?”
그릇이며 작은 항아리 등 부엌에 있어야 할 세간들이 모두 대청마루에 있었다. 오래 그래 왔던 것처럼, 주섬주섬 컵을 챙겨 커피를 타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 물어보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할멈과 아들딸 다 있소. 왜, 혼자 사는 불쌍한 노인네처럼 보이우?”
“아, 아닙니다.”
“보기에는 이래도 이 집이 당장 현금 3억 몇천만과 맞바꿀 수 있는 황금 덩어리라오.”
나는 할아버지가 건네주는 커피잔을 받아 들다 말고 멈칫했다. 할아버지는 무심히 던진 말인 듯 무표정하게 커피를 마셨다. 나는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조금 전 “할멈과 아들 딸 다 있소. 왜, 혼자 사는 불쌍한 노인네처럼 보이우?” 라고 하던 할아버지의 말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다. 솔직히 나는 할아버지를 처음 보았을 때 오갈 데 없는 불쌍한 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과 주변 환경으로 보아 도저히 정상적으로 사람이 기거하는 집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청마루에 초대받고 나서 생각들이 혼란스럽게 뒤엉켰다. 부엌에 있어야 할 세간이 마루에 와 있어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매우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도 하루살이처럼 아무렇게나 사용하던 게 아니라 오랫동안 손때가 묻은 안정된 살림살이들이었다.
“이 집에 살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
“예?”
나는 막 한 모금 문 커피를 급히 삼키느라 사래가 들어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할아버지가 물을 한 컵 부어 건네준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이지만, 할아버지는 마치 오랜 지기인 것처럼 허물없이 자상하게 대했다. 문득문득 던지는 할아버지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나는 종잡을 수 없었다. 듣기에 따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세월의 모진 바람 앞에서는 인간이 한 줄기 갈대보다 못하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아까 배 위에서 불던 피리를 들어 보였다. “우리 부친이 어릴 때 불던 건데, 내가 다섯 살 때 물려받아 지금껏 불고 있소. 이게 무엇으로 만든 건 줄 아시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피리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았다. 얼룩처럼 거무스름한 색깔이 불규칙하게 배어 있었는데, 마치 코팅을 한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한눈에도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을 탄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대나무처럼 단단하긴 했지만, 좀 가늘고 마디도 밋밋하여 대나무 같지는 않았다. 이런 물건을 본 적이 없어 건성으로 돌려가며 보다가 할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갈대로 만든 피리요. 우리 조부께서 아버지가 어릴 때 만들어 준 것인데, 내가 다섯 살 때 물려받아 70년째 가지고 노니까, 아마 90년이 아님, 100년은 족히 된 물건이오. 그런데도 한결같은 소리를 내고 있소.”
할아버지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다시 「따오기」의 애잔한 가락이 한 줄기 바람처럼 대청마루를 휘감아 돌았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피리 소리를 감상했다. 피리 소리는 마치 마술을 부리는 듯 너울너울 춤추며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나는 동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피리를 부는 할아버지도 어느새 5살짜리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피리 소리가 뚝 끊어졌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혼자 너무 깊게 감상에 빠졌다가 대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원래 4소절로 된 짧은 노래다. 4절까지 가사가 바뀌면서 같은 곡이 반복되는데, 연주로만 들으면 금세 끝난다. 어색한 기분을 지우기 위해 남은 커피를 훌쩍 다 마셨다.
“이 노래를 좋아하시나 봐요?”
“따오기?”
“아까도 이 노래를 부시는 것 같았는데…?”
“어릴 때는 이 일대가 온통 갈대밭이었어요. 이 피리도 그놈들 가운데 하나를 잘라 만든 것이지. 우리 아버지가 이 피리를 내개 주면서 맨 처음 가르쳐 준 노래가 따오기요.”
“아, 그래서 이 노래를 좋아하시는군요.”
“나는 철없을 때라 이 노래를 신이 나서 불렀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땐 이 노래를 부르면 일본 순사들이 잡아갔다고 해.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었어. 아마도 태평양 전쟁 말기여서 왜놈들이 전처럼 힘을 펴지 못했기 때문일 거야.”
“네에….”
이 노래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것도 나는 처음 알았다.
“뱃일이 참 고달프거든. 바다 위에서 이 노래를 불면 거짓말처럼 힘든 게 바람처럼 싹 가시고는 했어. 이젠 배를 탈 일이 없으니까 이렇게 소일로 불어보는 거요.”
“자녀분들이 계시다면서… 할아버지께서는 자녀들에게 피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나요?”
“그러게. 내가 무심한 건지, 욕심이 많아 움켜쥐고 있었던 건지…. 우리 아이들은 인천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이런 거에 관심이 없었어. 몇 번 쥐어 줘 보았는데, 재미를 못 붙이더군. 내 욕심 때문이었겠지. 억지로라도 가르쳐 봤으면 정이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두어 번 시켜보다가 이내 관둬 버렸어. 솔직히 내가 갖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게야.”
할아버지는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한번 웃었다.
이것이 내가 ‘따오기 할배’와 만난 인연이다. 첫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운명처럼 많은 사연을 만들었다. 그 뒤에도 서너 차례 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한 번은 첫 만남 때 찍은 사진을 현상해서 액자에 넣어 가져다주느라 만났고, 그 이후 두어 차례는 할아버지와 함께 물왕리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며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말은 낚시를 하는 거였지만, 우리는 고기를 잡는 일은 뒷전이었고, 지난 세월을 낚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왕리 저수지가 생긴 내력에서부터 이 일대에 염전이 생기고 협궤열차가 다니기 시작하던 그때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나는 마치 동화 같은 할아버지의 옛이야기에 푹 빠졌다. 그리고 더 기묘한 인연은 여기에서도 만났다. 낚시를 마치고 돌아올 때 할아버지는 나를 끌고 저수지 끄트머리로 난 길을 한 30여 분 돌아 올라가 한 묘소를 소개해 주었다. 바로 동시 「따오기」를 쓴 아동문학가 한정동 선생의 묘소였다.
“정말 소중한 인연이 아닌가? 이분이 이곳에 와 계시다. 는 걸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 이북이 고향이라는데 이곳에 어쩐 연고가 있어 오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겐 정말 희한한 인연 같단 말이지. 내가 어릴 때는 이곳 갈대밭에서 심심찮게 따오기를 보았거든? 그런데 언제부턴가 죄다 사라지고 없어졌어. 사라진 따오기가 노래가 되어 이곳에 다시 온 걸까? 마치 홍길동이가 율도국으로 찾아든 것처럼 말이지.”
율도국(栗島國)?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핍박받는 사람들을 이끌고 아무런 차별도 고통도 없는 이상향의 세상이라고 찾아간 그 율도국이다. 할아버지는 이곳을 자신의 율도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보상금도 마다한 채 자신의 낡은 고깃배와 함께 그렇게 끈질기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날 이후부터 나는 할아버지를 ‘따오기 할배’라 불렀다. 따오기 할배는 할아버지 대부터 이곳 달월 마을에 살면서 지금은 문을 닫은 포동 염전(浦洞鹽田)에서 일했다. 따오기 할배도 소년 때는 아버지와 함께 염전에서 일했으나 소금 밭일이 너무 힘들어 월곶 포구로 나와 고깃배를 탔다. 열심히 일한 덕에 작은 고깃배도 하나 마련했다. 두 남매도 잘 커서 대학을 졸업하고, 시집 장가를 가서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잔병치레가 잦고 뱃일도 힘에 겨워지자 아들이 서울로 모시겠다며 여러 차례 말했지만, 따오기 할배는 한사코 거절했다. 몸은 고달파도 고향인 이곳에 있으면 마음이 푸근했다. 어쩌다 자식들 집에 가면 답답하고 생병이 날 것 같아 하룻밤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돌아온다. 하루라도 염전과 갈대숲이 있는 이 월곶 포구와 달월 마을의 바람을 쐬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를 타지 않는 날은 낚싯대를 메고 물왕리 저수지로 갔다. 협궤열차를 타고 편하게 가도 되지만, 할아버지는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일부러 걸어 다녔다. 걸어가면서 염전도 보고 갈대숲도 보고 멀리 바다를 내다보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오기 할배의 이런 꿈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불어 닥친 개발 바람에 밀려 할아버지의 소망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따오기 할배는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했다고 한다. 70년 넘게 살아오면서 늘 그 모습 그대로였던 고향이 몇 년 사이에 전혀 다른 세상으로 뒤바뀌어 버리는 현상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따오기 할배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더 이상 고깃배를 띄울 수 없게 된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월곶 포구에 전에 없이 개펄이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아예 배를 띄울 수도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어촌계와 수협에서 여러 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뾰족한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이라고 했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모든 재앙이 바닷물을 막고 여기저기에 중구난방으로 길을 뚫으며 건물을 세워서 생긴 현상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저 그렇다는 하소연일 뿐,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고깃배가 나고 들던 포구에는 수많은 횟집들과 위락시설이 들어서고, 뱃사람들이 살던 마을에는 고층아파트들이 세워졌다. 결국 수협도 월곶 포구 공판장도 문을 닫았다.
따오기 할배의 집도 신축아파트 단지에 수용될 운명이었으나 이웃 몇 집과 함께 끝까지 버티었다. 하지만 함께 뜻을 모았던 그 이웃들은 얼마 못 가 모두 건설회사에 집을 팔고 이곳을 떠나 버렸다. 할아버지네 집만 남게 되자 할머니와 자식들이 그만 집을 넘기고 서울로 가자며 사정했지만, 할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간 건설회사의 수용에는 잘 버텼지만, 앞으로 공익사업에 수용이 되면 그나마 제대로 된 보상도 받을 수 없다. 무엇보다 진입로조차 차단되고, 생활환경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이 집에서 온전하게 살 수도 없었다.
따오기 할배는 오랫동안 갯벌에 방치 해두었던 배를 끌고 와 집 옆에 두었다. 배를 사겠다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팔지 않고 이렇게 집 옆에 옮겨 놓았다. 이것도 할머니는 못마땅했다. 참다못한 할머니는 얼마 전에 할아버지를 남겨 놓은 채 서울 아들네로 가 버렸다.
나는 한동안 따오기 할배를 만나지 못했다. 회사에서 창립 100주년 기념 사보를 제작하게 되어 1년 가까이 그 일에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어 할아버지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외 지사를 순회하는 경영진을 동행 취재하는 일로 한 달여 간 해외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니 회사로 택배가 하나 와 있었다. 발송인은 ‘따오기 할배’였다.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뭘까 하고 얼른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놀랍게도 그건 내가 선물로 전해 주었던 그 흑백사진이었다. 첫날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찍었던, 고깃배 위에서 피리를 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이게 왜 다시 내게로 온 거지?’
그때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사진을 현상하던 날, 나는 현상된 사진을 보고 나서야 다큐멘터리로 촬영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사진에는 정든 고향과 집을 잃어야 하는 할아버지의 아픈 마음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그 사진을 할아버지에게 선물했다. 혹시 할아버지도 이런 마음으로 사진을 돌려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일 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사진을 돌려보낼 리 없다. 아무래도 할아버지에게 뭔가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하지만 출장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나는 당장 할아버지에게 달려갈 수가 없었다.
보름쯤 지난 뒤에야 나는 월곶 포구를 찾아갔다. 염려하던 대로 할아버지의 집이 없어졌다. 집과 배가 있던 자리는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대신 그 자리에 컨테이너 여러 개가 줄지어 서 있었다. 컨테이너에 다가가 보았지만 모두 자물쇠로 문이 잠겨 있고,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은 온통 도로 공사 자재 더미만 쌓여 있어 어디 물어볼 만한 곳도 없었다.
나는 공사 중인 도로 난간 위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할아버지 집이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오기 할배가 다시 내게 연락하지 않는 한 나는 할아버지를 만날 길이 없다. 아마 아들네 집으로 갔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다면 사진이 큰 것도 아닌데, 왜 가져가지 않고 힘들여 내게 다시 보낸 것일까? 나는 도무지 따오기 할배의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픈 기억을 모두 없애 버리고 싶어서였을까?
“?”
그때 나는 할아버지의 피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환청인가? 그날 대청마루에서 들었던 것처럼 분명히 「따오기」 노랫가락이 그렇게 내 귀에 들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삭막한 공사 자재 더미와 고층아파트들만 시야에 들어왔다. 피리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사진을 돌려보낸 할아버지의 마음은 그렇게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내게 남아 있다. 나도 그 뒤부터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18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살아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 없다. 살아계신다면 따오기 할배는 아마 90세를 훌쩍 넘겼을 것이다.
오이도역을 출발한 송도행 수인선 전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월곶역에 도착했다. 오이도에서 새로 생긴 수인선 전철로 갈아탈 때 이미 나는 바뀐 세상을 실감했다. 이곳 역시 옛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오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할 수가 없다. 너무 달라져서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 어디쯤이었는지, 그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다.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역 앞에서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발길을 옮겼다.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흑백사진을 둘 곳을 찾고, 있는 중이다. 소래역사관, 생태박물관, 어느 곳이 좋을까? 불청객처럼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 사진을 내미는데 쉬 받아 주기는 할까? 부질없다 생각, 하면서도 이 사진이 따오기 할배의 피리 소리가 들리는 율도국을 찾는 부적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갈대피리로 부는 따오기 할배의「따오기」노래를 꼭, 다시 한번 듣고 싶다. -끝-
김호운 약력: 소설가
1978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단편소설 「유리벽 저편」이 당선되어 등단. 장편소설 『표해록(漂海錄)』 『바이칼, 단군의 태양을 품다』 등, 소설집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청소부』 『사라예보의 장미』 등, 콩트집 『궁합이 맞습니다』(전2권) 등, 에세이집 『연꽃,미소』, 인문학 저서 『소설학림』 등 작품집 30여 권 출간. 한국소설문학상, 한국문학백년상, 녹색문학상. PEN문학상, 둔촌이집문학상, 대한민국 예술문화대상, 리더스에세이문학 대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 역임. 현재 국립한국문학관 자문위원,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이사, 산림문학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