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민국 보통 여성의 이야기/ 변재영
1976년 만삭의 몸으로 추석 차례를 다 치르고 엄마는 나를 낳았다. 나는 우리 집 다섯째 딸이다. 넷째까지 딸을 낳은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아들을 못 낳았단 이유로 소박을 맞을 뻔 했다. 그때 아버지는 엄마의 바람막이가 돼 주지 못했다. 그 뒤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한을 풀었다 생각했는데 안타깝게 아들은 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상심이 컷던 할머니는 죽은 아들보다 살아 있는 딸이 낫다며 더이상 타박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기어이 아들을 낳겠단 일념으로 마지막 일곱 번째로 성공했다.
나와 남동생의 나이 차는 네 살이다. 유년 시절에 남동생은 엄마를 등에 업고 대들기 일쑤였고, 그 꼴을 그냥 넘기지 못한 나는 동생과 안 하운 날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남동생을 따끔하게 야단치지 않는 엄마가 미웠다. '둘 중의 하나가 없던지 해야지 내가 너희들 때문에 못 살겠다.' 엄마는 우리가 싸울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선에 끝엔 항상 내가 있었지만 엄마는 지금도 당신이 차별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오랜 세월 당연하게 박힌 남녀 차별에서 엄마인들 자유로울 순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대 놓고 차별하진 않았다. 오히려 조심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의식이 무의식을 이겨낼 수는 없었던 거 같다.
국민학교 시절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을 괴롭히고, 귀찮게 하며, 무시하는 말들도 해댔다. 그러면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피해 다니고 무서워 하며, 남자 아이들의 비위를 맞춰 주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피해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불평등한 상황이 항상 거슬렸던 거 같다.
언젠가 미투 기사 댓글란에 누군가 여자로 살면서 성추행에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거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도 그 분의 의견에 동감한다. 나 또한 겪은 일이니까 말이다. 그는 6학년 때 담임 이었다. 하교 후 몇몇 여자 아이들에게 도와 줄 것이 있다고 남기고 이쁘다며 껴안고 키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처음엔 한 명이 있을 때만 그러더니 점점 대담해져 교실 한쪽 문을 잠그고 서너 명의 아이들을 차례로 추행 하기도 했다.
그때는 성추행이 뭔지도 몰랐고, 지금처럼 성에 대한 교육도 없던 시절이라 다들 암묵적으로 함구했고, 자신이 걸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때도 지금도 그런 남자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진화한 듯 보인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성인이 됐다는 해방감을 온 몸으로 표출하고 다녔었다. 머리 모양을 바꿔보고 난해한 색의 립스틱도 발라보고, 색색의 메니큐어로 손톱을 치장하곤 했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보고 싶었다. 그런던 어느 날 한 예비역 선배가 내 손톱을 보고 한소리를 했다. '손톱 색이 요란 한 거 아니냐? 좀 얌전하게 다니면 좋을 거 같은데.' 그 소리에 발끈한 내가 쏘아 붙였다. '제 손톱 색이 이래서 선배한테 피해 주는거 있던가요? 그런 간섭은 사양합니다.' 그때 선배의 어쩔 줄 몰라하며 빨개지던 얼굴이 생각난다. 선배는 종종 여학생들의 옷차림이나 행동에 참견을 했었지만, 완곡한 말투를 썼기에 대부분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겉으로는 말이다. 왜 남자의 입맛에 여자의 행동을 맟춰야 하는가?
시간이 흘러 3년 사귄 남자와 결혼을 결심 했을 때였다. 남편될 이는 여러 모로 나보다 조건이 안 좋은 사람이었다. 부모님과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 그의 집에선 당연히 환영 받을거라 생각했는데, 아들 가진 부모의 갑질을 겪을 줄은 몰랐다. 부모님 두 분만 빼고 나를 본 일가 친척들은 다 환영하는데 정작 중요한 두 분의 마음에 들기는 정말 힘들었다. 결혼 생활을 하고
십수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시부모님은 '갑' 나는 '을'로 남아 있다. 시댁에서 며느리 혼 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친정에서는 사위가 어떤 잘못을 해도 딸이 함께 사는 한 참고 또 참으며 대접을 한다. 물론 다른 집도 있겠지만 내 주위는 대부분 그랬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내가 희생을 해야 할 부분은 늘어 나기만 했다. 대부분의 가사일은 내 몫 이었다. 물론 나도 직장 생활을 했음에도 말이다. 아이들이 생기고 아이들이 크는 동안 내 일은 늘어만 갈 뿐 줄어든 적은 없었다. 직장도 아이들의 스케줄에 맞춰서 퇴근이 자유로운 영업직을 선택하는 수 밖에 없었다. 첫 아이가 생기기 전 좋은 조건의 직업은 유산의 위험이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만 두었고, 인기가 많았던 그 일은 더이상 내 차지가 되지 않았다. 두 아이를 기르려면 기동성은 필수라며 경차를 마련한 뒤부터는 완전한 독박 육아의 시작이었다. 아침에 애들 등원 준비에 내 출근 준비를 마치면, 애들은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출근한다. 오전 회의를 끝내고, 그 날 만날 고객들과 통화 후 외근, 사무실 귀소 후 보고, 퇴근 후엔 애들 하원 시켜서 귀가, 귀가 후엔 2부 일과가 시작된다. 청소와 빨래, 음식 만들어 아이들 저녁 먹이고 씻기고, 잠자리 책들을 읽어주고 잠을 재우면 10시가 훌쩍 넘어 있다. 녹초가 되어 남편을 기다리면 남편은 함흥차사다.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다. 싸워서라도 남편을 바꿔야지, 물론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싸움만 될 뿐 남편이 바뀌지도 않을 뿐더러 나만 악처 만드는 환경에 기운만 빠질 뿐이었다.
할 말은 더 많다. 대한 민국에서 여성 아닌 여자로 살면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도 하고 분노도 해봤지만, 세상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다음 생에 뭐로 태어나고 싶는냐고 자주 묻는다. 울 엄마는 새로 태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고 했다. 평생을 밖으로 도는 아버지 대신 7남매를 건사하며 사신 삶이 얼마나 답답하셨겠는가? 다른 여인은 꽃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남자로 태어나고 싶었다. 내 눈에 남자들은 가진 자들이었고, 난 가진 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물어본 여성들은 다시 태어나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사람이 10%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들은 거의 태반이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남자로서 받아 온 혜택을 계속 누리고 싶어 했다.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 날 생각은 없느냐는 내 질문에 하나 같이 도리질을 남자들만 있었다. 해답은 남성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득권을 내려 놓으면 좀더 좋은 세상에서 우리 아들 딸들이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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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방금 고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