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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방시조 2호
-낮달의 미소
<발간사>
가장 황홀한 빛깔로 달려와 가슴을 채색하는 단풍은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나무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벗어야 할 껍질일까요.
문우들과 함께한 기해년(己亥年)의 아름다운 동행.
우린 매주마다 토방에 모여 시조를 공부하고 자작 시조에 대한 상호합평과 시조시인 명사초정강연을 통해 실력을 연마하였으며, 대청호에서는 풍류를 낚았고 황악산 백수 문학관에서는 정완영 선생님의 시 세계를 거닐며 시조의 매력에 흠뻑 젖었습니다.
시조는 3장6구 12소절(음보)의 독특한 형식미와 외형률을 가진 정형시로 고려 중엽에서 지금까지 한국인의 정서와 사상을 노래해 온 한국문학의 긍지이자 자랑으로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유럽의 소네트 등의 정형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문학의 보편성과 독자성을 지닌 한국인의 정형시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랑스럽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켜 인류무형문화제로 유네스코에 등재하여 인류보편적 문화유산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한국시조협회에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진력(盡力)하고 있으니 우리 시조시인들도 모두 힘을 합해 쾌거(快擧)를 이룩하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우리 토방시조 문우님들의 경사가 차고 넘친 기쁜 한 해였습니다.
봄에 윤옥희님과 박숙자님, 가을에는 이선희님이 대전문학 <신인작품상>, 겨울에는 김관형님과 박강정님이 시조사랑 <신인상>을 수상하여 시조시인으로 등단하였고 주영자님이 <대전문학> 신인작품상(시)으로 시인으로 등단하였습니다.
또한 채동선님이 직접 촬영한 사진과 함께 담은 아름다운 시조집 「대전블루스」를 출간하였고, 조국성님이 (사)한국시조협회 대은시조문학상 <작품집상> 신미경님이 대은시조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가을에는 한밭전국시조백일장에서 박강정님이 차상, 지옥임님이 차하상을 수상하였으며 박강정님은 가람문학상도 수상하였습니다.
더욱 기쁜 것은 지금껏 우리를 이끌어 주신 박헌오선생님께서 (사)한국시조협회 제5대 이사장으로 당선되어 내년 봄(2020. 02)에 취임하십니다.
문우님들의 경사는 우리 토방시조의 경사이며, 앞으로도 토방시조의 힘찬 행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문우님들의 작품들을 담아 낮달의 미소 「토방시조 2호」를 발간합니다. 이를 위해 수고하신 문우님들과 헌신적으로 지도해 주신 박헌오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2019. 12 문 경 훈
<축사>
토방의 아름다운 시조모임에
얼마 전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 하신 고명한 스님의 법어가 많은 사람에게 회자된 일이 있었다. 이를 흉내 내서 ‘내가 곧 시조이다.’라는 말 한마디를 걸어본다.
30여 년 전에 시조시인이란 말이 부럽기도 해서 시조를 배우고 또 쓰기를 거듭해서 일단 ‘등단’이란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 슬며시 우쭐대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에 오는 낙심도 적지 않았다. 자꾸만 제대로 내세울 만한 시조 한 수 못 쓰면서 ‘개구리가 웃을 일이지 시인은 무슨 시인이냐’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 짐스러운 이름을 버려야 할지 그래도 계속 지고 가야 할지 갈등을 가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운명이라면 스스로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했다.
살아 있음이 태어남에서 비롯되고, 한국인임은 어버이가 점지해 주신 것이며, 한글을 쓰도록 세종대왕께서 마련해 주셨음을 비껴갈 수 없으니 사람으로서 ‘사람답기 위해 노력해야 함’ 같이 한글을 쓰는 문화인으로서 조상 대대로 이어온 민족전통의 시조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조시인’이 아니라 ‘시조인’인 것이다.
한국인은 모두가 ‘시조인’이 되어야 한다. 문맹으로 살든지 외국어만 쓰면서 한국인이기를 부정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조인’이 되기를 권한다. 기왕 먼저 시조를 쓰고 ‘시조시인’이 된 사람들이 앞장서서 온 국민이 ‘시조인’이 되도록 이끌어 줘야 한다.
시조 속에 한국인의 전통적 정신과 한국인답게 사는 윤리관과 문화적 멋과 아름다움은 물론 조화로운 사회성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한국문학의 기반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 바탕이다. 시조의 특성인 정형성을 지켜가면서 그 안에서 자유로이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본질이다.
시조를 배우기 위해 나선 분들은 먼저 깨어있는 사람들이다. 시민대학의 시조창작 학습과정에 참여하신 분들 가운데 많은 분이 시조시인으로 활동하고 있고 벌써 8년여를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출석하신 분도 계시다.
고향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감 있는 장소가 토방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함께 공부하신 분들의 소박한 학습동아리를 ‘토방시조’라 하였다.
벗 가운데 가장 고절하고 정겨운 벗이 문우일 수 있다. 문우로 함께하시는 분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모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주시는 분들에게 찬사를 드린다. ‘토방시조’의 견실한 앞날을 소망하며 제 2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박 헌 오 합장.
<축시>
박헌오
< 약 력 >
- 1987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및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
- 초대 대전문학관장 역임.
- 사단법인 한국시조협회 제5대 이사장 당선.
- 한국문인협회 이사.
- 대전문인협회 수석부회장.
- 대전시민대학 강사<시조창작반>
- 대전 중구문화원 부원장
- 저서 : 『하늘이 들고나온 노란 시집』 등 7권.
부엉이 수행도(修行圖)
환히 듣는 귀를 가진
바위 속 깊은 고요
맑게 보는 눈을 가진
삼경의 짙은 어둠
관음봉 깎아지른 암벽에
나무꾼 부엉이 산다
별들이 팔랑팔랑
나비 되어 찾아오고
명과․ 개금 익어갈 때
짝짓기 황홀하더니-
부엉이 은밀한 둥지
줄탁동기(啐啄同機) 한창이다.
산과 산이 무동(舞童) 타고
그림자끼리 무동 타고
아궁이 찌개 끓는
산막까지 둥둥 떴다
명부전 천불동자들
하늘구경 다 나온다.
구중 연못 백련 피고
천년 송백 목탁 들고
법고소리 범종소리
둥지마다 적셔줄 때
부엉이 영산회상화
죽비 들고 깨워놓다.
황악산에 가면
황악산(黃岳山) 찾아가면 노 시인이 기다린다
시조 행랑 들쳐 메고 비가와도 기다리다
인경에 종아리 걷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골물도 산바람도 시 한수씩 메고 온다
바위도 소나무도 끙끙대며 땀 맺히고
노 시인 올빼미 안경 밤새도록 뒤척인다.
관음전 풍경소리 금이 가는 산의 묵정(默靜)
조용조용 달빛 밟고 해우소로 가는 스님
천불전 동자 하나가 일어서서 내다본다.
죽비를 손에 들고 육십장(六十棒)* 청하는 뜻은
금(金)울 숨겨 김이라커니 천(泉)을 숨겨 백수(白水)라커니
연꽃에 가부좌 틀고 직지(直指)하는 청개구리 탓.
판각에 비석에 문신처럼 부적(符籍)처럼
목마른 시구(詩句)들을 피워내는 기침소리
갇혔던 무량수의 꽃이여 가슴 여니 날아가라.
*육십장(六十棒) : 백수선생 시조전집 서문 중“나라는 사람은 익은 밥 먹고 선소리만 60년을 해왔으니 방(棒) 60을 맞아도 허물이 남을 사람이다.”
김관형
시조시인. 2019년 <시조사랑> 신인상 수상
서울대학교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도시계획기술사 및 철도기술사.
(전) 고속철도건설기획단 및 고속철도건설공단 근무
(현) (재단법인)한국건설품질연구원 부원장
지팡이
어릴 적 등하교 길엔 언제나 가뿐했다
생업의 시달림에 무거워지는 발걸음
한 노인 멋스런 지팡이 왠지 자꾸 눈길 간다.
활력을 되찾으려 실행하는 걷기운동
오늘도 유등둔치 옆지기와 함께 한다
서로가 지팡이 되어 한평생을 걸으련다.
봉수산 봉곡사
뭉클한 천년 숲길 소나무의 푸른 기상
다가온 만공선탑(滿空禪塔) 고고한 자리매김
표주박 약수 한 잔에 떠오르는 선문답
산신각 모란 향기 산사를 감싸 돌고
대숲의 맑은 바람 안개를 쓸어내면
부처님 인자한 미소 동자승을 쓰다듬네.
주지승 염불송이 무설전(無說殿) 울려가고
총무보살 죽비 앞에 묵정에 든 사부대중
평안을 깨달아가니 마음속에 불심 서다.
호수의 숨은 풍경
호수에 가부좌 틀고
거꾸로 앉는 산들
물에 잠긴 길도 집도
거꾸로 고요하다
모두가 거꾸로 앉아
숨소리를 고른다.
가족모임
하하 깔깔 도란도란 할 얘기도 많고 많다
엇그제 종종걸음 귀엽고 곱던 놈들
어느새 짝지어 앉아 술잔 이마 부딪는다.
다도해
하늘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 올망졸망
마냥 어린 그 모양새
큰 해일을 견디려나?
공연히 이는 기우(杞憂)를
물안개가 덮어준다.
문경훈
시조시인. (사)한국시조협회 대전문인협회 대전시조시인협회 회원.
대전문학 신인작품상(시조) 수상
새해맞이
벼랑 위 독수리
눈보라에 깃을 펼쳐
켜켜이 쌓인 더께
정갈이 씻어내며
나태로
뭉거진 부리
돌에 쪼아 뽑아낸다.
김복동 할머니를 추모하며
열넷에 강제 동원 일본군의 성(性)노예
하늘 땅도 외면하여 갈가리 찢긴 심신
원통해 죽을 수 없어 산 증인으로 나섰다.
유엔에 위안부 피해 맨 처음 증언하고
회유 협박 거부한 채 사죄를 받아내려
세계에 성노예 참상 평생토록 알리셨다.
아린 세월 감당 못해 생존자 이십삼명 뿐
끝까지 눈 못감고 유언으로 남긴 말씀
만행을 사죄받기까지 ”끝까지 싸워달라”
오늘은 수요집회* 영정으로 오셔서
동백꽃 목을 꺾는 카랑카랑 목소리
“일제는 용서하더라도 결코 잊지는 말아라.”
나라도 하지 못한 소녀상 세우시고
쇠잔해진 민족혼 일깨우신 당찬 투사
명복을 무릎꿇고 비오니 거기선 행복하세요.
*수요집회-일본 정부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1992년 1월부터 시작되어 27년 째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계속되고 있다
산수유
설한풍 이불 덮고
속울음만 삼키더니
겨우내 얼녹으며
빚어낸 그리움을
봄맞이
소녀 가슴에
노란 폭죽 팡팡팡.
첫돌 맞는 손자에게
우수라 강물 풀려 매화 꽃잠 깨우더니
봄바람 타고 내려온 소혹성 어린 왕자
첫돌을 축하합니다 돌상을 받으세요
친가 외가 모두 모여 웃음꽃 활짝폈다
건강하게 쑥쑥 자라 꽃길 걷고 부자되라
모두 다 꼭 이루어질 차고 넘친 축복말씀
돌잡이 때 엄마는 여권을 원했는데
태명이 토르라서 의사봉을 잡는구나
올바로 사용하세요 지혜로운 판단으로
맛을 내는 소금으로 어둠 밝힐 빛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 되고
이웃을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하며 사세요.
양파를 받고서
형님이 보내주신
고향 뒷산 보름달
땡볕에 허리 굽혀
빚어낸 홍보석을
넘치게 담으셨구나
감당 못 할 그 사랑
부끄런 감사전화에
껄껄걸 웃으시며
당신 고생 잊으시고
“무더위에 건강해라”
호랑이 장가가는지
볼 적시는 빗방울.
넝쿨장미
라일락 향기 실은 연두바람 살랑대자
께끼발로 넘보다 불꽃된 그리움
꿈에 본 님 마중하려
그 담장을 넘는구나.
봉긋한 가슴 열어 발걸음을 붙들면
꽃잎에 일렁이는 첫사랑 아린 추억
묻어 둔 보조개 소녀
담장 위에 웃고 있다.
대나무
장맛비 가슴 적셔
술렁이는 발돋움
하늘 끝 붙잡으려
음이온 내뿜으며
속 비워 매듭을 짓고
우뚝 서는 대장부
눈보라 폭염에도
굴곡 없이 곧게 자라
선비들의 오랜 벗
사시사철 곧은 기개
푸르러 세상을 씻고
바람 불러 시를 쓴다.
사랑꾼 매미
뜨건 가슴 주체 못해
가쟁이 빙빙 돌며
목청껏 뽐내보는 휘어 꺾는 트로트
내 사랑 어서 오세요 하트 뿅뿅 날린다.
한여름 다 가도록
애태우는 아가씨께
땅속 칠년 빚어낸 연미복 팔랑대며
빈가지 붙든 탭 댄스 날좀 보라 치근댄다.
낮달의 미소
속울음 감추면서 앞만 보고 내달리다
마음 지쳐 하늘 보니 아슴한 엄니 얼굴
흐른 땀 씻어주시며 처진 어깨 다독인다
저승 삶도 고달픈지 가냘프고 하얀 미소
바람에 씻기고 햇살에 사위어도
하늘길 좌정하시어 나를 지켜 보신다
맛난 음식 드려도 잡순 모습 못 뵈고
고운 옷 지으려도 잴 수 없는 사랑 폭
그 은혜 값을 길 없네 울렁대는 빈 가슴.
국화축제
갈바람에 피어난
백만 송이 가을동화
호랑나비 손짓하고
아기공룡 놀자하니
풍선 든 아가 발걸음
천방지축 신났다
야윈 가슴 적시는
향기로운 수채화
저마다 멋진 포즈
추억 쌓기 바쁘고
번지는 행복바이러스
눈 시린 하늘이다.
박강정
시인. 시조시인. 2016년 <대전문학> 신인작품상(시) 수상.
2019년 한밭전국시조백일장 차상 수상. 2019년 <시조사랑> 신인상 수상
(주) 예주건설 이사
붉은발의 유혹
암컷은 가슴 열고
매혹의 향기 날려
붉은 발 자랑 떠는
유혹의 가위 발에
지긋이 배꼽을 열고
찐한 사랑 갈망한다.
알갱이 실어 담고
내 볼일 보고 나니
가위 발 무섭다고
옆걸음 삼십육계
해갈아 다시 보자고
홀로 굴에 숨어든다.
회상
삼월의 눈발마저 날리다 되도는데
내 마음의 봄바람도 불다가 멈추었고
머리에 흰 눈이 내려
안타까움만 쌓인다
이른 봄 촉 틔우고 돌아보는 회한의 길
살갑던 순이 손길 지금도 생생한데
살아선 잊지 못할 꿈
홀로 피는 상사화다.
청려장
어느덧 칠십 나이
바람에 날리고서
오십을 접어 넣고
내 청춘 돌아본다.
어제의 절름거림도
멋들어진 모습이다.
지난 일 버리고서
청려장 내려놓고
회상의 시간 속을
달래어 불러 본다
불시에 떠날 이 몸이
나이마저 잊을까?
중천에 걸린 달
달빛이
중천이라며
부지런을 떠시더니
밤새워
뒤척이시던
일손을 내려놓고
평생을
잡아주시던 손
어찌 훌훌 벗으셨소.
짝짝이
짝짝이 신발 녀석 늦잠을 주무셨나
토방을 지키거라 그렇게 일렀건만
어젯밤 서생원 녀석 걸쳐 신고 마실 갔나
떨어져 기웠어도 정 깊은 내 짝인 걸
오십 년 품고 살다 흰머리 닮아가도
해묵은 시집살이는 무쇠솥을 녹였다
보석
태양에
끓는 바다
한편의 시가 타고
알알이
맺힌 보석
새하얗게 빛난다
어머니
고운 손맛으로
또 한 편의 시가 되리.
유혹
그 가슴 봉그러니 벌어진 틈 사이로
양 볼에 피어오른 홍조 띤 앙칼이여
잎으로 꽃을 지고서 눈웃음을 짓는다
탐스레 익어가는 과육의 풍성함도
향내가 익어가는 외마디 비명이여
농익은 빛을 이고서 달빛마저 유혹한다.
꽃 풀
동자승 하얀 가슴
불붙는 꽃 사랑
아무도 대답 없는
한나절 문을 열고
메마른 꽃씨의 정령
잠을 깨워 촉 틔운다.
아이 놀던 골목길에
차려놓은 소꿉살림
추억을 얼기설기
한소끔 담아놓고
섬돌에 꽃 상을 차려
내 유년을 독축(讀祝)한다.
박숙자
시인. 시조시인.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문학 15회 신인작품상(시),
대전문학 17회 신인작품상(시조) 수상
노래하는 가을
달빛 물든 창가에 마실 나온 귀뚜라미
추억 모아 향기 모아 모닥불을 지피며
밤새껏 얼굴 맞대고 읊어보는 시 한 수
수놓은 갈잎을 바람결에 띄우고
은쟁반에 담긴 구슬 멀리 쏘아 보내며
둘이서 간직한 연서 오선지에 옮긴다.
빛 고운 단풍잎을 문살에 덧바르고
구비치는 들녘에선 피어나는 코스모스
정겨운 가을 풍경을 화선지에 담는다.
낙엽
긴 여행 마치고서
사뿐히 내려온다
두려움도 화려함도 내 것이 아니라며
비우고 가벼워진 몸 떠날 준비 서두른다
고운 옷 갈아입은
낙엽 한 잎 발등에 뚝
갈 길 찾아 떠나는데 눈시울은 왜 붉히나
괜시리 보내는 마음 속울음 짓고 있다.
매미의 기다림
땅속의 깊은 세월 묵묵히 견뎌내고
이토록 밝은 세상에 울음부터 쏟는데
수줍은 암매미들은 소리 없이 내숭 떤다.
나뭇잎 사이사이 맑은 빛 내리쬐고
사방으로 눈 굴리며 살펴보는 싱싱한 숲
맺힌 한 칠십년만큼 내 노래 다 불러주나.
사랑을 듬뿍 주니
가녀린 싹눈이 뾰쪽하게 내밀었다
그 손을 반갑다고 잡아주고 웃어준다
마음껏 팔다리 펴며 재롱떠는 고구마 싹
거침없이 줄을 타고 앙증맞은 손 흔들며
조금씩 땅 뺏더니 거실을 다 삼켰다
겨우내 물만 먹고도 솟는 힘이 뜨겁다.
장미꽃을 보내며
불타던 열정의 빛 어느새 잦아들고
바람에 흩날리는 쓸쓸한 꽃잎들
앙상히 비운 가지에 그림자만 서성인다.
그리 곱고 당당한 색 어디에 숨겼는지
짱짱히 감긴 시계 슬그머니 풀려가고
조여 맨 기억의 창고 하현달이 열어본다.
멋쟁이 들꽃 향기
머리를 곱게 묶어 한껏 멋을 자랑하고
보조개 웃음 지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손등은 까칠하지만 고운 속내 뉘 다 알까
늘씬한 키 나풀대는 자주색 스카프
풋풋한 몸놀림은 뭇사람 호려댄다
향기로 마음 전하는 엉겅퀴의 매력이다.
불볕더위
호박꽃에 날아온 벌 낮잠을 청하는데
시원한 그늘 찾는 개미떼는 바쁘다
후드득 소낙비 한 줄기 반갑다가 그만이다
이글대는 뙤약볕에 시들해진 나뭇잎
타오르는 목마름은 하늘만 바라보는데
먹구름 달려오더니 멈춰 서서 속 태운다.
여름감기
부르지 않았어도 제집처럼 눌러앉아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긁어댄다
힘주어 큰소리쳤더니 잠시 떠나 엿본다.
짐승도 안 앓는다는 여름감기 진을 치고
물렁한 주인이라 깔보고 안 나간다
끝내는 의사의 손에 든 주사보고 꽁지 뺐다.
연안부두에서
푸른 물결 수를 놓듯 반짝이는 가을바다
날개를 휘저으며 둥지 찾는 갈매기 떼
구슬픈 뱃고동 소리 시린 가슴 저민다
야속히 가는 시간 붙잡지 못함 알지만
눈물은 앞을 가려 흔드는 손 얼룩지나
뱃머리 멀어지는데 그리움은 가까워라.
꼴머슴
꼴 한 짐 베어놓고 졸린 눈 비비면서
흥건히 젖어 내린 땀방울 씻어가며
푸른 꿈 장대에 띄워 소원을 올려본다
키 작은 제비꽃 핀 개울가 언덕에서
애꿎은 조약돌로 물수제비 날리는데
꿈 따라 떠나보라고 봄바람이 등 떠민다
속삭대는 아지랑이 못내 보낸 두려움
햇살 맑은 언덕에서 새 꽃을 피워야지
마음을 굳게 다지니 발걸음 깃털 같다.
양순례
수필가. 2018 <수필과 비평> 수필 등단. 문학동인대전문학회, 대전에세이 회원
시민대학 시조창작 수료.
천국 자리
떠도는 구름 보며 바람과 소곤소곤
조각달 훔쳐보려 천국 문 활짝 여네
엄니랑 옥수수 하모니카 바로 누워 불던 옥상.
못 잊어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보네
어디메 계시다요 그리븐 얼굴이여
멀리서 개밥바라기 젖은 눈을 부빈다.
독한 녀석
오락실 드나든다 손들어 벌세우면
‘노는 걸로 보이냐’고 엄마 눈을 꼬아보던
미쁘나 독한 녀석과 기 싸움도 많았었지
어미가 결국에는 백기를 들었더니
게임 프로 개발자로 당당히 등극했다
끝까지 반대했다면 엇나갈 수 있었지
자식 말 깊은 뜻을 부모라고 다 알까
틀에 박힌 부모보다 오히려 한 수 위라
신세대 선견지명에 대견함을 보았네.
섬
내 안에 섬 있네
오도카니 머리 세운
오도 가도 못하도록
쉴 새 없이 파도치네
동자승
꿈을 꾸는데
초승달은 도망치네.
장대비
그녀를
잊기 위해
후려쳤다 골목등(燈)
코뼈가
부러지고
안경도 풍지박산
늦잠에
울다 깨보니
장대비는 내리팬다.
때 묻은 보물
가갸거겨 말로 혀봐 나냐너녀 글씨 써봐
흘려준 할아버지 주워들은 할머니
아궁지 불댕김서도 부지깽이로 그셨네
소중한 우리보물 만백성의 훈민정음
유행어와 외래어로 주물러 때 묻혔네
뻔뻔한 건방 덩어리 국어사랑 변치마세
순수한 말모이로 외래종 안 섞은 밥
무쇠솥 닥닥 긁어 숭늉까지 마셔보세
한글로 지은 영양 밥 영혼까지 살찌우네.
윤 옥 희
시인. 시조시인. 수필가.
(창작수필) 수필 등단 (문예춘추) 시 등단, (대전문학) 시조 등단
한국 문인협회 회원 KBS 박물관 문학, 대전 수필문학회 동인.
오정문학회 동인. (시조집) ‘꽃은 다시 핀다’ 발간
오늘 하루
시민대학 시조 교실 다시 피는 초심(初心)밭
맨얼굴 반쯤 가린 옛 생각의 푸른 솔
때늦은 열매 맺고파
혹독하게 몸 흔든다.
선생님 열강하고 학우들은 귀를 쫑긋
쓴 지적 약이 되고 어려움은 깨쳐야지
어쩌랴, 덜 여문 열매
속마음을 달군다.
청운의 꿈
누구나 반겨주는
봄볕같이 행복한 방
언제나 가슴 열면
희망이 자라난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아
꿈에서도 시를 쓴다.
반딧불이
어둠 속 반짝반짝 소똥에 떨어진 별
여름밤 보물찾기 숲속에 앉은 손님
동트면 해님이 웃는다.
날개 덮는 쇠똥구리
햇살은 창틈으로 한일(一)자를 길게 쓰고
소리 없는 고운 빛 형설지공 설파하며
빠르다 초침 따라 돌다
시 한 수에 멈춘다.
휴전선
분단선 울타리엔 아픔과 슬픔 걸려
한겨레 한 자손들 철모에 피가 젖다
휴전선 초연한 숨결
온 세계가 지켜본다
아침 해 솟는 하늘 어울려 받들면서
옛 생각 생생하여 땀 흘리는 산하여
영원한 백두대간을
가로막은 휴전선.
내미는 손 뿌리치고 저희끼리 마주보며
빗장을 풀어놓고 참았던 말 쏟는 날은
서로를 보듬어 안고
열쇠 없이 열릴 마음.
겨울나무
고운 옷 동여매던 가을과 작별하니
목에 건 멍에 벗고 홑몸 되어 서있다
나무는
추워질수록
숨은 키를 치킨다.
초록빛 달빛마저 흠칫 놀라 물러선 밤
우듬지 달라붙은 가람 눈 털어내며
동짓달
야위어진 몸
팽팽하게 울었다.
국화 향
얼룩진 독거의 방 벽속에 숨긴 무늬
살 개미 침묵의 독 검버섯 곪은 살빛
남겨진 꽃의 흔적은
먼 행복을 앓고 있다
외로움 화서(花序)같이 아프게 매만져서
누룽지 된 벽의 때 손끝으로 긁어내니
신방을 차리던 벽에
달빛 젖은 국화 핀다.
산책
무더위에 지친 날도
웃으며 함께 가요
높은 산 깊은 물도
바람 타고 가는 구름
남정네 목석같아도
손잡으면 따뜻한 걸.
민들레
엉덩이 꽃진 자리 새 가족 바람나네
태양의 길을 보며 하얀 등을 바쳐 들고
흩어질 후손을 위해
무릎 끓고 기도하네.
위태로운 하얀 촛대 은하수 쏟아 진날
일산대 높이 들고 면사포를 가려주며
민들레 앉은뱅이 꽃
흩뿌리며 기도하네.
그림자
아침 해가 솟는다 밝은 빛 뒤 내 모습
태양의 움직임에 반대편에 서는 모습
하얀 몸 검게 감싸고
숨어 사는 순결한 몸.
구석진 뜨락에도 언젠가 꽃이 피듯
숨 고르고 오르는 무대 위의 극중 인물
누구나 그림자를 가진
연출자가 되었다.
은희란
시인. 시낭송가. 시낭송지도사. 시마을 문학회 회원. 글마중 문학회 총무국장
2016년 제3문학 신인상 등단. 2017년 제3문학 시화집 및 동인지 다수
공저 「시간밖에서 새들을 보다」
민들레꽃 씨
햇빛에 활짝 핀 몸
다 날리면 어쩔텐가
소리 없이 미는 세월
조신한 종종걸음
한 떨기 바람을 잡고
우아하게 날아야지
물 건너 산 넘어
샛노란 꿈 찾아보자
진한 젖 물 올리며
억세게 터 잡아서
자식들 꽃가마 태워
갈무리할 그때까지.
백일홍
살포시 내려앉은
별빛들 사이사이
꿈꾸는 무지갯빛
새색시 저고린가
온종일 수를 놓고선
곱게 눕는 여름 멀미
세한도를 보며
송백의 푸른 절개
달빛에 걸어놓고
그 향기 다듬어서
마음 가득 세워두면
꿈꾸듯 아득한 거리
방패연이 걸렸다
구름 한 점 없는 장막
불 켜는 초가 한 채
벗인 듯 길손인 듯
푸름을 벗어놓고
고요한 여백의 기운
내면의 외침이여.
촛대 바위
망망대해 한가운데
심지 하나 우뚝 서다
뱃사공 기다리는
애절한 단심인가
사내의 심장소리가
파도되어 달려온다.
갈매기 벗을 삼는
무인도의 오랜 꿈
지쳐버린 이마 위에
단단함 홀로 세워
저녁놀 다 태우고서
어둠 속을 지키리라.
갈망
엎드린 풀뿌리들
새싹을 돋우려나
반백년 심지 속
발 묶인 금단의 벽
가슴에 두 손 모아서
한 발짝 내딛는다
서두르지 말아라
멈추지도 말아라
손 모아 갈구하며
오매불망 꾸어온 꿈
한민족 바램을 안고
피어난다 저 불꽃-
상처
홍도화 긴 그림자
저녁놀에 잠기면
명치끝 매달린
그리움의 멍울들이
한사코 파고들어서
아문 상처 덧난다
이선희
시조시인. 대전문인협회, 대전시조시인협회 회원
2019년 대전문학 신인작품상(시조)수상.
목 백일홍
봄바람 꽃바람에
가슴 문 활짝 열고
아스팔트 폭양에도
초연하게 웃고 있다
새색시 순결한 미소
성하의 가객이다
매혹도 화려함도
치마폭에 누벼놓고
삼복더위 비웃고
갈바람을 부르며
백일도 불사하는 저력
보란 듯이 피어있다.
바람의 사랑
백두대간 굽이 타고
한라까지 애무하다
울창하던 초록아씨
울긋불긋 미소 짓고
한적한 비탈길까지
사랑으로 물들인다.
계곡에 피어오른
물안개도 단풍들고
낮달이 빠져있는
호반도 걸어가며
그대는 애정 다 쏟고
알몸으로 기다린다.
물고기의 삶
자나 깨나 자식 걱정
용왕님의 생존 교육
눈떠도 코 베인다며
목 긴 놈들 조심해라
구릿한 냄새 풍기거든
줄행랑이 상책이다.
보기엔 평화로운
수중궁궐 귀한 자손
눈 한 번 잘못 팔면
도마 위에 오를 신세
언제나 입조심 해라
낚싯밥이 따로 없다.
뿌리공원
맑은 물 파란 바람
녹음방초 향연이다
오리선장 애기선객
오밀조밀 동화나라
뿌리를 가슴에 새긴
만성보(萬姓譜)의 비림(碑林)이다.
나날이 뻗어가는
씨족으로 얽힌 낙원
말라가는 종친들의
물줄기 끌어안고
도도(滔滔)한 새 물꼬 트여
자손만대 지켜간다.
상사화
헛헛한 가슴 안고 하얗게 지샌 밤들
산사의 불경소리 가슴을 다독이고
화려한 웃음 속에도 숨어 우는 외로움
내 마음 훔쳤는지 가을비 추적추적
어이해 그대와 나 손 못 잡는 사랑인가
가랑비 엇갈린 소식 체념하고 지는 꽃.
이팝꽃 축제
유등천 물안개로
고슬고슬 지은 쌀밥
초록마을 소복소복
쌀밥 잔치 벌어졌네
옛부터 춘궁기 없는
이팝 마을 꽃 풍년.
민들레
난쟁이 꽃이라고
짓밟지 말아주오
정조만은 그 누구도
날 따를 자 없지 않소?
태곳적 공녀로 끌려가다
임께 바친 넋이라오
행여나 그대 발길
채일까 숨죽이며
시골집 사립문 앞
서성이는 하얀 그미
노년은 홀씨 아닌 솜 나무
그대 곁에 이불되리.
하지
왼종일 품어주는
북극 섬 백야의 품
불 꺼진 남극 하루
수평선도 잠든 날
지구촌 신비로운 변신
내 생애의 기점이다.
햇살을 달달 볶아
항아리에 담는 날
멀어졌던 두 마음
다시 손을 맞잡고
삼복도 마다않는 열애
너무나도 짧은 밤.
조국성(본명: 조성국)
시인. 시조시인. 2010년 <시선> 시 등단. 2015년 <시조사랑> 신인상
시집 「착각의 스넵」 외 5권
시조집 「말뼈는 시다」외 2권
골통
정수리 황폐하니 골통이 따로 없다
바닥난 소갈머리 남은 건 주변머리
나날이 푸른 시절이 그리워질 나이다.
궁지기의 생
충성을 맹세하고 선발된 궁지기다
근무에 충실하니 대우도 극진하고
일마다 신바람 나니 세상살이 즐겁다.
출입을 허락하니 맘대로 드나들고
업무에 통달하니 살맛이 넘치지만
어쩌다 한눈을 팔다 구설수에 오른다.
엄격한 직장이라 태만은 금물이고
체력이 달리면서 구박이 자심하니
나이가 많아질수록 견뎌내기 힘들다.
세월이 흐르면서 궁문이 삐걱대자
추억을 반추하며 어쩌다 기웃대니
이제는 별 볼일 없다 궁문마저 잠근다.
노인의 의미
No와 사람人의 합성어인 ‘No人’을
한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노인’이다
의미상 사람이 아닌 쓸모없는 존재다.
아픔을 동반하고 추억을 반추하며
젊은이 피땀으로 살아가는 걸림돌
사실상 불필요하니 치우면서 살아라.
가을 담쟁이
초록색 담쟁이가
담장에 오르더니
드디어 감추었던
본색을 드러낸다
빨강이 자주색이라
오리발을 내민다.
등용문상
―시조사랑 작품집상 수상 소감
십년을 노력하면 소원을 푼다더니
늦깎이 시인에게 등용문이 열리나
드디어 분에 넘치는 문학상을 받는다.
상이란 채찍이니 더욱더 분발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시조를 사랑하고
마음껏 꿈을 펼치며 민족혼을 살리리.
떼거리 문화
허기진 갈매기가 떼거리로 몰려들어
공짜로 던져주는 새우깡을 낚아챈다
파도도 따라오면서 떼거지를 부린다.
신의 생사
서로가 믿는 신은 맹신의 바로 당신
혼자서 믿는 신은 불신의 자기 자신
믿음은 신으로 살다 귀신으로 떠난다.
망구*의 황혼길
어려운 산수**공부 막 끝낸 할아비와
동행할 망구는 시선을 바꾸시오
머나먼 인생 여정의 종착역이 가깝소.
신변의 희로애락 벗처럼 끌어안고
이제는 아전인수 행복만 가꾸시오
앞으로 골드인생과 황혼 길을 걸어가소.
육신의 자식들이 영원히 대를 잇고
영혼의 제자들이 사회의 별로 뜨니
죽어도 영생 아닌가 지족가락 하시오.
* 望九: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 81세
**傘壽: 나이 80세
통일
통통한 젊은이가
일부러 달려와서
통로에 서성이다
일일이 손잡는다
통일은
일이 아니다
통문 열라
일러라.
어버이날
오늘이 있기까지 키워줘 고맙다는
자식의 인사말에 가슴이 뻐근하다
양육은 부모의 임무
당연한 일 아닌가.
까맣게 잊고 살던 미욱한 아비에게
각성을 촉구하듯 양심을 콕 찌른다
효도는 자식의 도리
눈물샘이 넘친다.
부모님 생존 시에 생략한 감사인사
산소를 찾아가서 엎드려 속죄한다
열매는 뿌리를 잊고
굴러가기 바쁘다.
저승의 부모님이 가까이 오셨는지
효조(孝鳥)인 까마귀가 반갑다 인사한다
올해는 어버이날이
어리아리 저문다.
주영자
시인. 시조시인. (사)한국시조협회, 대전문인협회 회원.
<시조사랑>신인상 수상 <대전문학> 신인작품상(시조)수상. <대전문학> 신인작품상(시)수상. 국가기록원 전국기록백일장(자유시) 금상 수상. 우암 전국백일장(자유시) 금상 수상
다시 사월*
사월(四月)의 꽃상여(喪輿) 울음이 출렁이는
구해 달라 부르짖다 절망으로 숨져갔다
허사(虛事)다
노란 리본의 빙점(氷點)
기다려도 아니 왔다
애끓음 쌓여가는 기억을 소환(召喚)하며
헤진 옷 품에 안고 야위어 간 천팔백일
어머니
낮달로 떠 계신다
가라앉지 못한 슬픔.
* 그때
팽목항 세월호 참사 (4. 16)를 지금도 선하게
기억합니다 사는 동안 가끔은 아픔 잊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제비
지지배 지지배배
조그만 몸 눈이 깊어
얼굴 보며 웃다가
목이 쉬어 울다가
만리 길
그저 그리운 마음
명을 다해 찾아오다.
연꽃 필 때
외진 땅에 몸 뉘여
잉태한 임의 산고
베적삼 살폿 열어
볼 붉혀 젖 물리니
무한히 차오르는 모성 아침하늘 다 안긴다.
사모곡思母曲
홀로 와 등 기대여
나무 아래 울컥이면
배롱 꽃잎 어깨 앉아
제 눈물로 볼 부빈다
잊으라 불효한 후회 누구라도 그런 것을
“이리 자주 걸음마라
다시는 울지 마라“
어둠에서 뒤척이다
산을 넘는 풍경소리
어머니 고비 고비 사랑 끄덕이며 달빛 듣다.
그대와 성산포
1
어둠이 드리울라
숨찬 걸음 재촉하며
나비도 되어보고
조랑말도 되어보고
더운 맘
유채밭에 묻으며 오래토록 서 있다
2
배부른 말들은
서로를 애무(愛撫)하고
난바다 바람소리
심상찮게 거치른데
정인(情人)은
돌아가길 잊은 듯 무심(無心)속에 걷고 걷다.
설악(雪嶽)에서
능선을 넘어오는
시월의 가객이다
설악을 포위(包圍)하는
노시인의 깊은 시선
붓질은 산을 다 불지르고 화폭의 시 저리다
주단을 깔아놓은
흐드러진 진연(進宴)이다
큰설악 품에 안겨
철 들어간 애기 단풍
산 고을 눈이 부신데 만추(晩秋)에 탄식하다.
낙화
닿고져 하늘 바라
꽃성(成)을 쌓아 놓고
흩날리는 탄성으로
과분한 애무로
지는 잎
아름다움이사
임의 눈썹 이하이하(以下以下)
꽃길에서 봄 앓이 중
시공 너머 나부끼며
빛나던 편린(片鱗)마다
언약의 화인 찍고
꽃잎은
바람을 안고
저문 길을 떠나다.
지옥임
수필가. 2009년 수필시대 신인상 등단
대전시민대 시조창작 수료. 옥천 문인협회 이사
향토문학 수필집 「지매」 수필집 「바람의 옷)」 공저 「옥천의 마을시」
섬
바닷가 내 살던 곳 파도는 여전하고
해변에 갈매기 떼 어우러져 반겨주며
조각배 노을을 싣고 콧노래를 부르네.
유수한 세월 앞에 폐선은 시름없고
오염된 부둣가엔 어부들 늙어가네.
파도는 모래톱에다 누구 이름 써놓을까.
어머니 지팡이
지팡이 지체 삼아 뒤뚱뒤뚱 마당 뜰로
평생을 동고동락 문전옥답 일궜는데
자식들 오던 길에는 그림자만 어른댄다.
철없는 자식들은 온단 소식 감감한데
지팡이만 남겨놓고 먼 길 떠난 어머니
산소에 꿇어 엎드려 통한의 용서 빈다.
묵정밭
헛기침 대를 이어 서슬 퍼런 적장자들
야속한 세월 앞에 발길 끊긴 문전옥답
서얼자 개망초들만 활개 치며 행세한다.
병산서원
수려한 병산자락 고즈넉이 돌아앉아
유생들 글 읽는 소리 백사장에 쌓아놓고
도도한 낙동강 물엔 서애(西厓) 눈빛 서려있다.
만대루 넓은 마루 존덕사 숨결이
사백년 배롱나무 껍질 벗어 꽃피우고
서원의 여유자적은 징비록(懲毖錄)이 말해준다.
서천 갈대밭
바람이 지휘하고 갈대들은 연주한다.
강가의 철새 떼들 목청 높여 노래하니
대자연 오케스트라에 관객들 환호한다.
채동선
아호: 여물. 시인 수필가
한양공대 졸업, 한국원자력연구소 등에서 근무
한국문학세상에서 시, 문예감성 및 서정문학에서 수필 등단
수필집 : 『하모니카 아저씨』
시조집 : 『학의 춤』, 『대전 블루스』
황혼의 엘레지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고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가는
숙명의 인생 여정
노을빛
저리 고운데
이쯤에서 멈췄으면
자반고등어
습관처럼 윤회하는
아버지의 오일장五日場
허리춤에 꼬불친 돈
낮술에 다 말아먹고
남은 건
하루 치 품삯
자반고등어
한 손
수담手談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
자조의 한 줄 평에
미생으로 버티는
중원의 백병전
반집에
목숨을 거는
반상의 승부사들
아! 대한민국
-포항 지진에 부쳐
하느님이 보우한 땅
남북으로 쪼개놓고
좌우로 편을 갈라
죽자 살자 할퀴더니
용왕님
진노하셨나?
침몰하는
대
한
민
국
*.포항 지진 : 2017년 11월 15일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진도 5.4의 지진이다. 우리나라 역대 두 번째의 큰 규모로 사상 최대의 피해를 남겼다.
꽃무릇
그리움에 목을 빼도
기별조차 없는 님아
이 목숨 불살라서
그대를 뵙는다면
저승길
저물기 전에
넋이라도 안아주오
*.꽃무릇 :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돌 틈에서 나오는 마늘종을 닮았다하여 '석산화(石蒜花)'라고도 한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꽃이 진 후에야 잎이 돋아나는 꽃무릇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듯해서 상사화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잎이 지고 난 후에 꽃이 피는 상사화와는 엄연히 다르다. 꽃무릇은 짙은 선홍빛인데 비해 상사화는 연보랏빛이거나 노란빛을 띤다. 개화 시기에도 차이가 있어 상사화는 7월 말쯤, 꽃무릇은 9월 중순이 되어야 개화한다.
절필絶筆
마음 길 천리인데
몸은 여태 미동 없고
붓방아 찧는 손길
갈수록 무뎌지니
훨
훨
훨
자유를 찾아
이제는 날고 싶다.
해바라기
먼 곳에 있다하여
마음마저 멀어질까
발꿈치 치켜들고
님의 처소 바라본다
까맣게
타는 가슴엔
그리움이
⦁
⦁
⦁
최현주
소담(笑潭). 시조시인. 대전시조시인협회 회원. (사)한국시조협회 회원
대전문인협회(시조분과)이사. 전국한밭시조백일장 수상. 한밭시조문학상 신인상
대전문학 신인작품상(시조)
소래포구
수인선 협궤열차 사라진 기적소리
이 빠진 침목 위에 남겨진 추억만이
소금빛 파도소리를 끌어안는 소래포구
빈손 든 사랑게 하루를 움켜쥐고
마실 나간 바닷물이 남기고간 뻘 위에서
햇볕에 몸을 말리며 졸고 있는 낡은 어선
짠내가 서성이는 어물전 귀퉁이서
구멍 뚫린 그물을 한 땀 한 땀 깁고 있는
어부의 주름살 위로 내려앉는 한 줌의 볕.
아버지의 작업화
갈라진 발등을 거미줄이 덮고 있다
사남매 기르느라 뒤축은 내려앉고
작업화
주름투성이 얼굴
눈을 감고 쉬고 있다
두 마리 제비새끼 신발장에 둥지 틀고
부모를 기다리는 수정 같은 눈망울
아버지
땀 절은 품에
새 식구로 들이셨다.
폐선
세월의 더께로
관절염 앓고 있는
소금쩍 깊어져
삭아가는 판목선
뒤틀린
몸뚱아리로
건져내는 젊은 날.
우리 집 허수아비
새벽바람 가르며 첫 버스 올라타고
퇴근길 가로등에 권하는 막걸리 사발
확 풀린
하루의 피로
콧노래가 절로 난다
속곳 입고 뒹굴 던 오종종한 강아지들
어김없이 들려있는 과자봉지 받아들고
아삭한웃음소리에
어깨춤이 절로 뜬다
홑이불 다독이며 바라보는 천사들
멍이든 아들이마 거친 손 애만지면
따스한
약손의 효험
다보록이 돋는 행복.
우리 할매
늙은 벽 양달에 기대앉은 우리 할매
나그네새 물고 온 모이 같은 가을소식
광주리
한가득 받아들고
주름진 몸 데운다.
부부
이대 팔 가르마에 포마드 바르고
대문을 나서시는 아버지의 늦바람
베갯잇
누런 얼굴로
아랫목을 서성인다
내리치는 방망이질 다 받아낸 베갯잇
끓는 맘 한 땀 한 땀 시침질로 풀어내고
등잔불
희미한 애정
눈길 주는 어머니.
품다
골목길 모퉁이에 손발 묶인 낡은 장롱
가난살이 돌돌 말아 서랍 가득 끌어안고
기우뚱
짝다리 딛고
담벼락에 안겨있다
어둠이 기어드는 뒤틀린 문틈 새로
집 없는 새끼고양이 몸 떨며 들어서면
따스한
온기 나누며
하룻밤을 품어준다.
한진호
아호:주촌(周村). 시인, 소설가/ 대한약사문인협회와 대전문인협회 운영자문위원역임/ 한국해외문화교류회대표 권한대행(현) / 한중시낭송경연대회 심사위원과 충청남도 금산 칠백의총 예능심사위원장(현)/ 저서: 시집『몽돌의 노래』, 소설『회상』『유턴』
가을 편지
시인의 주소 찾아 이집 저집 물어물어
바람에 실려 온 곱게 물든 편지 한 장
새벽녘 창을 두드리며 가을소식 전한다
단풍 빛 녹아있는 상큼한 새벽공기
창 열면 닿을 듯한 보문산이 보낸 선물
해맑은 색동옷 입고 책갈피로 끼어든다.
가을이 오면
코스모스 향기 속에 기다려지는 혼삿날
햇살 박힌 사과 알 백일아기 웃음꽃
높아진 푸른 하늘에 꿈을 심는 할아범
땀 냄새 찌든 적삼 가을비로 씻어내고
알알이 영근 이삭 흐뭇한 농부 마음
손자를 허리춤에 달고 황금들판 걷는다.
가파도
파도치는 바다에
대형 가오리 떠있다
청보리 유채꽃
꽃섬이 된 가파도
저녁놀 곱게 물든 바다 함박 웃는 관광객
갈치 떼 파도타고
몰려오는 황혼녘
갯마을 굴뚝에
짭조름한 밥 냄새
석양도 입맛 다시며 발걸음 멈춘다.
* 가파도:제주남쪽에 있는 가구 150세대가 사는
관광지.모양이 가오리 같이 생겼다
찔레꽃
꽃뱀이 사는 덤불
청초한 봄의 천사
벌 나비 오지 않아
한 맺힌 생애였다
꽃잎에 아련한 슬픔
달빛이 감싸 준다
옹이진 한 생애
빨간 열매 맺어놓고
가시만 앙상히 남아
제 가슴 찔러댔다
피안에 별이 된 그녀
밤마다 고향 그린다.
멸치를 다듬으며
비릿한 물머리 밀려오는 청람색 바다
파도소리 들려오고 갯내음 코 시리고
청명한 눈동자에는 대양이 꿈틀댄다
그렁한 씨알 눈에 하늘이 박혀있다
그 푸른 바다는 엄마의 품이다
죽음도 잊게 하는 피안 눈 못 감고 오송그린다.
오서산(烏棲山)의 억새
하늬바람 불어오자
춤추는 은빛 물결
능선 따라 눈꽃 피어
줄기마다 달린 설화
빛 고운 천사 되려고 백발을 피워냈다
상고대에 꽂힌 햇살
가지마다 보석들
순백의 향연에
멈칫 놀란 까마귀
하얀 깃 백로를 꿈꾸며 설원을 날고 있다.
느림보 강물 길
만천하(滿天下)길 올라서니
하늘이 손에 닿을 듯
모였다 흩어지는
뜬 구름 같은 인생
우리네 짧은 한세상은 간두(竿頭)의 물방울이다
강물은 세월을 품고
급류로 흘러간다
앞만 보고 달려온
단애(斷崖)의 길이라니
세상에 느림보 강물 흘러가도 게 있구나.
* 만천하 스카이웨이 : 단양에 하늘 높이 올라간 조형물.
느림보 강물 길 : 단양에 남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사람들은 이강을 ‘느림보 강물 길’ 이라 부른다
무쇠솥
시골집 헛간에 홀로 녹슨 무쇠 솥
추억을 곱씹으며 한세월을 보낸다
한때는 가족 부양하던 정 들은 반려였다
흉년의 유년시절 해마다 보릿고개
수피(樹皮)로 식사 때우고 맹물로 배 채웠다
허기를 마저 채운 누룽지 최고의 만찬였다
심금을 울렸던 어머니의 녹슨 밥솥
주렸던 배 채우고 오리걸음 뒤뚱뒤뚱
통한의 세월 잊은 채 가부좌 틀고 있다.
뱃고동소리
갈대밭 창가에 달빛 비치는 실루엣
뿔고동 어망 짜는 뭉떵한 손놀림
동짓달 긴 밤의 기다림 파도소리 서럽다
새벽을 열며 입항(入港)하는 뱃고동소리
뿔고동 펼쳐 놓은 어촌의 아침마당
갯마을 허기진 굴뚝엔 짭조름한 바다냄새.
홍비표
시인. 시조시인. 공주사범대학 동대학원 졸업. <대전문학> 시 등단
<시조사랑> 시조등단. 대전신계중학교 교장 역임
길
돌아설 듯 내딛다가
사뿐사뿐 다가오고
휘감아 돌고 돌다
숨 죽여 멈춰 선다
무대 위
영혼의 몸짓
춤사위로 그려낸다
하늘 담긴 눈동자에
밝은 별 돛 세우고
긴소매 휘휘저어
구름을 다 밀쳐낸다
산 노을
북소리로 두드려
길을 열며 달려간다.
꿈
삼동에 날개 묶여 잊어버린 푸른 하늘
봄꿈 속에 노닐며 눈빛이 번득인다.
날개 펴 솟아오르니
꽃구름이 다가온다.
불현듯 임 그리워 구름 속을 물질하다
비바람에 흠뻑 젖어 어둠 깔린 노을 길
아뿔싸 꿈이었구나
파랑새는 없었다.
노루귀꽃
겨울 내 닦은 눈빛
잔설 위에 앉는다
꽃샘추위 습격할까
솜털 옷을 두르고
어디쯤 새봄이 오는가
조바심에 귀 세우다
얼음 삼킨 시냇물
소리 돋워 흐르고
버들가지 기지개에
연초록이 물오를 즘
앞장서 봄을 살고파
부랴부랴 꽃잎 열다.
늦장미
길게 뻗은 실가지 끝
높이 맺힌 꽃 한 송이
뙤약볕에 빛바래고
소낙비에 움츠려도
꽃향기
실바람 되어
잠든 창을 두드린다
꿈속에서 들었을까
등 밝히고 문을 연다
가시 세워 사랑 벼려
마냥 붉은 임의 가슴
저만치
떨어져 쪼여도
데일 듯한 뜨거움.
홍시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들의 젖무덤
쪽빛 하늘 배경삼아
주홍빛을 돋운다
날아든 배고픈 까치
앉자마자 쪼아댄다.
찬서리도 못 삭이는
떫은 속에 놀랐나
겨울의 눈 포대기에
푸근히 안기는 날
살가운 부드러움으로
흠뻑 취해 빨간 얼굴.
목백일홍
나비들 나래를 펴 봄 뜰을 휘저으면
풀꽃들 여린 마음 앞 다투어 피는데
까칠한
피부를 벗기며
몸단장만 열중했다.
태양이 불을 질러 한여름 타는 가슴
석 달 열흘 붉디붉게 맞불을 질러댄다
뒤늦게
세월 부둥키며
몸부림이 숨 가쁘다.
여전한 눈부심
양지 녘 바위틈에
모여 피는 여린 들풀
구름떼 돌아가고
숨죽여 넘는 바람
햇살이
병풍으로 서면
꽃 웃음에 나비 난다
잠 깨는 미진으로
흔들리는 바위 언덕
깜짝 놀란 풀꽃들
벽에 기대 하늘 본다
구름 위
무궁한 태양
눈부심이 여전하다.
문 속의 문
얽어맨 열쇄 뭉치
손에 들고 길을 간다
혼자서는 감당 못해
세상 밖에 내보이나
한시도 내려놓지 못해
몸에 밴 경계이다.
이중 삼중 잠금장치
끝일까 열어본다
안에서 마주치는
더 두껍게 녹슨 빗장
끝없이 눈앞에 나타나는
삶의 고비 문 속의 문.
문 밖의 사랑
임의 마음 비추려
심지 돋워 등 밝힌다
밤새도록 켜 놓으면
여린 가슴 다 탈까
수굿이
등불을 들고
문 밖을 내다본다.
기다림에 지친 마음
문 앞을 서성인다
다가서면 멀어질까
돌아서면 그리울까
망설임
수북이 쌓고
새벽별은 떠난다.
어물전 망신
재래시장 어물전 유영하는 오징어들
이놈 저놈 손가락질 놀던 기분 상했나
불시의
물총사격에
노발하는 한 손님
세탁비 건질세라 에누리 해달란다
길들이기 힘들다며 가게 주인 혼잣말
물고기
까칠한 성깔
건드린 게 잘못이지.
황인만
시조시인, 자유시인, 아동문학가
대전문학회원, 대전아동문학회원
시의 삶
오고가는 사람들 발걸음이 바쁘다
하늘의 해와 달도 바쁘기는 마찬가지
한 세상 바쁘지 않으면 맥 풀린다 잰걸음
산과 들 자동차에 기차여행 줄을 잇고
비좁다 해외로 하늘 길도 붐비는
빨라서 스쳐 지나듯 멍 때리는 공허함
주마간산 인생길 백년이 짧다 해도
마음을 채워주는 ‘시의 삶’ 한 가지면
어디서 어떻게 산들 바쁠 일이 무어랴.
빗접
까슬한 머리카락 길을 잃고 흩날릴 때
바가지 섞어지면 방바닥에 털이 자라
이마에 서리 내리면 손톱마저 더딘 것을
할머니 다니는 길 빗접이 펼쳐있어
풀어서 훑어내면 참빗살에 다 걸리고
손가락 감아올려서 비녀 틀어 쪽진 머리
신체발부 수지부모 한 올 한 톨 소중히
함부로 버려지면 기운이 나간다고
정갈히 갈무리 하시던 할머니의 유지 빗접.
찔레꽃
한 장의 흑백사진 유년의 추억이다
서운이 홍님이 예미와 꽃심이 누나
뒷동산 묏동에 모여 치마폭을 날린다
학교도 못 가던 그 옛날 그 시절에
하늘아래 첫 동네 깊은 산골 내 고향
어디서 누가 왔길래 귀한 사진 남겼을까
목화솜 부풀듯이 살랑대는 햇가슴
풀피리 불어대며 애린 정 봄이 들어
오뉴월 찔레향기에 바람 일던 소녀들.
N● 혀
머리가 못한 일 입술이 저지른 일
내 발등 짓눌리어 한 걸음 힘이 들 때
세치 혀 무릎 꿇고서 두 치 혀 짧은 소리
공짜다 껍데기를 냉큼냉큼 받아먹고
알맹이 야금야금 떼돈주고 해먹더니
등 돌려 명줄 잡으니 비틀대는 혀뿌리
가깝다 넘보면서 호시탐탐 혀 꼬부려
좋은 말로 덫을 놓고 나쁜 말로 비수 꽂아
한반도 하나 되는 길 쇠 박는 N●나라.
임존산성
망국의 통곡소리 복국의 진군소리
천 년 전 울림소리 구름만이 아는 소리
봉수산 삿갓봉우리 두통 앓는 신음소리
말발굽 골을 따라 쇠바퀴 자국 따라
왕자들 눈물 따라 맹장들 열기 따라
내포들 곡풍이 불면 흠향하는 몸서리
엎드린 제단 곁에 나무 등걸 말이 없고
조그만 샘물 속에 얼비치는 얼굴들
멀리서 구름 다가와 떡갈잎을 닦아 줍니다.
※임존산성 : 예산 봉수산, 백제복국운동 격전지
신은 죽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어라
피부과 병원입구 성형의 반쪽 얼굴
세상이 감쪽같다면 민망하다 창조주
감나무 가지 꺾어 고욤에 접붙인다
뿌리는 고욤인데 열매는 감이라니
조물주 전능하신 힘 실수인가 애교인가
참새
참기름 반지르르 연지곤지 새빨갛게
이마를 마주대고 조잘대는 떼거지
귓볼에 바람 스치면 후루룩 사라지고
바랑을 둘러메고 온 동네 누비면서
세월이 야속하다 수다로 배 채우고
노을 진 아파트 숲속 잠을 잊은 참새 떼
윤기 잃은 머리털 비어가는 머릿속
촉새도 글을 읽어 참새와 뒤섞이며
아무나 알 수 없는 시 조잘조잘 읊는다
그 사람
기뻐서 박수칠 때 슬퍼서 눈물질 때
샛별처럼 초롱히 달님처럼 선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웃어주는 그 사람
문턱을 넘어설 때 손잡아 끌어주고
거친 강 마주설 때 종아리 걷어주며
잘했다 두 손 모아서 박수치던 그 사람
소슬한 바람소리 갈잎의 도리질로
지나온 추억 속에 따라나선 그림자
가슴속 만 냥 금이 든 쌈지 같은 그 사람.
동학사
산바람 다듬어서 산새울음 빚어낸다
허공을 깨뜨리는 실안개 법고의 춤
백학이 둥지를 틀고 궁글리는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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