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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진나루 외 2편
이 수 영
초등학교 교장 정년퇴임
수필춘추 2015여름호 추천작가
박목월 시인이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 했던, 강나루는 이별과 만남의 장소이다.
손을 흔들며 떠나보내는 사람과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애환이 강물에 젖어들고 무심한 사공은 그냥 배를 저어 간다.
내가 사문진나루를 찾은 날은 가뭄 끝에 모처럼 단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 건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령군 다산면의 APT들이 빗발속에 뿌옇게 흐려있고, 그 오른쪽 멀리 보일 듯 말듯 자리 잡은 강정고령보는 옛 성벽처럼 희미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문진나루는 일제 강점기에 찍은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를 비롯, SBS 수목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등의 촬영지가 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낙동강의 거센 물줄기가 절벽 밑을 휘돌아나가며 많은 모래를 퇴적 시켜서 사문진(沙門津)이 되었다 는 말도 있고, 고려 때 삼국유사를 쓴 일연선사가 화원읍 본리리의 인흥사에 주석하실 무렵 많은 사람들이 절을 찾았는데 그 절(寺)로 가는 문(門 )과 같은 곳이라 하여 사문진(寺門津 )이라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어쨌거나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낡은 철선 한 척이 사람이나 승용차를 싣고 강을 오가던 교통의 요지로 강나루의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1993년 6월 15일 큰 교량이 건설되면서 철선은 전설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그곳에 복원된 주막촌과 함께 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이 나루의 정취를 더하고 있다.
약 100년 전 소리나는 귀신통이라 불리던 피아노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이 나루를 통해 선교사들이 있는 동산병원까지 운반되기도 했고, 조선 초기까지 이곳에는 왜선(倭船)이 드나들고 왜물고(倭物庫)가 있었으며, 보부상들이 부산에서 대구로 오는 유일한 뱃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문진 나루는 그보다 훨씬 역사를 거슬러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수양하던 병약한 세자를 문병하러 가는 길에 사문진 나루의 오른쪽 언덕 그러니까 지금의 화원유원지의 전망 좋은 곳에 상화대(賞化臺)라는 행궁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왕은 주변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홉 번이나 찾았고,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구래동(九來洞) 또는 구라리(九邏里)라 했다.
요즘 사람들 중에는 ‘구라’라는 말의 어감이 좋지 않다하여 바꾸자는 말이 더러 있기도 하지만 화원읍에는 ‘구라리’라는 마을이 지금도 있다.
그리고 상화대 일대를 ‘성산리’라 하여 그때 쌓았던 성의 흔적과 고분 등이 남아 있다.
이 구라리에서 화원동산 쪽을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낙동강을 끼고 탁 터진 넓은 들판을 건너 멀리 몇 점의 올망졸망한 구릉이 자리잡았고, 그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화원동산의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가슴이 탁 터진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숨 쉴 틈도 없이 꽉 막힌 대도시의 그리 멀지 않는 한쪽 자락에 이렇듯 광활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도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는 것은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홍복이 아닐 수 없다.
3층 건물의 전망대 앞쪽에는 낙동강의 원류와 지류인 금호강이 만나고 그 두물머리에 150만평의 광활한 달성습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 습지에는 삵, 맹꽁이, 너구리, 고라니, 살모사 등이 서식하고, 철따라 흑두루미, 도요새 등의 철새들이 넘나드는 자연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곳에 서서 넓은 자연을 품던 나그네는 다시 나루 쪽으로 길은 나선다.
내려오는 길, 오른쪽의 아득한 절벽아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는 유람선 한 척이 한가롭다.
그 왼쪽 중턱쯤에 신라 때 쌓았다는 상화대의 석축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속에 어디선가 한 무리 아이들의 즐거운 재잘거림이 분위기를 바꾼다. 화원동산 수영장이 있는 곳이다.
강나루는 예나 지금이나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등짐을 지고 오르내리던 보부상도, 왜선에 물건을 싣고 오던 왜인도 없다. 눈만 감으면 애잔하게 다가오는 나룻배도, 뗏목도 과거의 그림이 되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 이곳을 오가던 철선과 그 철선을 타고 강을 넘나들던 사람들은 노인이 되거나 모두 떠났다. 그리고 이 나루에서 만나고 이별하고 사랑하던 사람들도 삶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아직도 여기 서서 그때의 강나루를 회상하고 있다.
사문진 주막촌은 옛 모습을 흉내 내기는 했지만 지금 것도 아니고, 옛것도 아닌 이상한 모양의 초가집들이 낯설다. 유람선은 찢어질 듯 시끄러운 유행가와 함께 통통거리며 오르내리고, 그 사이사이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추어 운행하는 쾌속선이 물찬 제비처럼 날렵하게 물살을 가른다.
주막촌 주변을 혼자 서성인다. 어디 앉아 쉴 만한 곳도 마땅치 않다. 너무 혼란스럽다. 장승을 비롯하여 무슨 구조물들은 그리 많은지, 거기에 어떤 이유로 소원성취 리본은 덕지덕지 매달아 놓았는지 머리가 어지럽다.
한가하고 고즈넉한 그런 주막촌이면 좀 좋을까!
이 모든 것들의 사이에 500년이나 이곳을 지켜온 팽나무 한그루가 무게를 잡고 묵묵히 서 있다. 이 나무만은 그때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팽나무를 바라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다.
이제 빗살이 더욱 거세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빗방울 둘레에 수많은 동그라미를 강물에 그리며 흩어지고 또 모여든다. 우산 끝 낙수에 바짓가랭이가 젖을 무렵 나는 막걸리 한잔을 먹으러 주막에 걸터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정말 소란하다. 그래도 오늘 나는 외롭다.
강나루를 떠나는 옛날의 나그네가 저기 저 나룻배에서 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역사
내 어릴 적 처음 들어간 학교는 ‘초등학교’가 아니고 ‘국민학교’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황국 신민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라는 의미였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도 오랜 세월 그 이름은 그대로 사용되어 왔다.
내 고향의 학교 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지은 목조 건물로 백두산에서 베어낸 소나무로 지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학교는 궁전처럼 어마어마하게 커보였고 건물의 내부는 모두 마루로 깔아 평소에도 걸어 다니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밤이나 사람이 없는 공휴일, 건물에서는 가끔 위이이잉 바람소리나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빈 건물 안에는 귀신들이 나와 저희들끼리 논다고 우리들에게 겁을 주곤 했다.
교실의 칠판 앞에는 교단과 교탁이 있고 그 한 쪽 옆 마루바닥에는 사람하나가 밑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그 안에는 땅바닥에서 마루까지의 공간이 제법 높아서 어린 우리가 허리를 굽히고 엉금엉금 기어 다닐 수 있었다. 방과 후면 몇몇 개구쟁이들이 그 밑에 들어가 장난을 치거나 기어 다니다보면 가끔 지우개나 몽당연필, 더러는 연필깎이 칼 따위를 줍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구멍의 가장 요긴한 용도는 겨울철 무쇠난로에 장작을 피울 때 장작을 갈무리 하거나, 또는 그보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른 뒤에는 난방용 조개탄을 숨기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당시 어린이들의 옷차림은 지금 생각하는 두툼한 외투나 따뜻한 겨울옷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 차려 입은 경우라 해도 검은 무명베로 중학생 교복을 흉내 낸 옷이나 무명 겹옷의 사이에 솜을 넣어 누빈 옷이 최고였고, 내복을 입지 못한 아이도 많았다. 구멍난 양말을 이리저리 덧대고 꿰매어 신고 다니거나 갈아입을 옷이 없어 겨우내 한 가지 옷만 입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불평이 없었다. 모두들 신나게 뛰어 다니며 놀았고 고샅은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아이들로 붐볐다.
늦가을 찬 서리가 내릴 무렵,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나면 새봄이 될 때까지는 목욕은 생각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더러는 설날 전후 가마솥에 끓인 물을 커다란 통에 담아 씻거나 쇠죽솥에 데운 물로 손발의 묵은 때를 벗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아이들에게는 그런 일도 호사였다.
내가 1963년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용의검사 날은, 내 마음은 늘 불편했다. 씻지 못한 목에는 때가 까맣고, 감지 못한 머리에는 서캐가 다닥다닥 붙어 있거나 냄새가 났다. 무엇보다 손은 새카맣게 눌어붙은 굳은 때가 갈라 터져 피가 나곤했다.
따뜻한 봄날을 가려 학교 앞 냇가에서 고기를 잡거나 다슬기를 주우며 시간을 보내면 손은 퉁퉁 불어 때가 허옇게 드러났다. 그때 쯤 불어터진 손등의 때를 돌멩이로 벗겨 냈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져간 비누로 머리를 감겼다. 아이들이 손에는 며칠 전 시골 장터에서 산 동동구리무를 발라주었다.
봄이면 찾아오는 보릿고개, 얼굴과 머리에는 마른버짐이 피어나고, 핏기 없는 누런 얼굴의 아이들이 생기를 잃는 그런 시기들은 모두 힘겹게 넘겨야 하는 연례행사였다.
가끔 TV에 등장하는 무쇠난로 위, 양은 도시락의 풍경은 그나마 집안 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의 호사였고 같은 시간 우물을 찾아 물을 마시거나 한쪽 구석에 앉아 먼산바라기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 봐야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들 삶의 역사였다.
그 무렵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수천 년 역사에서 자주자립의 의지가 그 만큼 행동으로 구체화된 적은 없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생전 처음 듣는 용어도 많았다. 어느 때 부턴가 아이들의 가슴에는 홍보용 리본이 일 년 내내 번갈아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반공방첩’은 물론 ‘혼분식 하기’, ‘퇴비 증산’, ‘쥐잡기’, 심지어 ‘아이를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표어가 아이들 가슴에 달리기도 했다. 어떻게든 보릿고개를 없애고 국민의 의식을 바꾸어 잘살아 봐야겠다는 열망이 그때처럼 구체화되고 행동화 된 것은 처음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고난을 이겨낸 세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발짝 삶의 현장에서 뒤로 물러나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그때는 왜 그렇게 어리석게 살았느냐고 핀잔을 주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면서 회한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결코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의 역사이고 진실이다. 그 가까운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땀 흘리고 미친 듯이 질주한 삶의 결과가 오늘이다. 그 오늘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 해방과 독립,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흘린 피와 눈물과 가난, 그 가난을 벗어나려 기를 쓰고 일했던 새마을 운동이 우리의 가까운 역사이다. 그 피와 땀이 없었다면 오늘의 민주화나 풍요로운 삶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애써 그 걸 외면하고 폄하하고 지우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학교도 그렇다. 요즘 학교는 너무 변해 버렸다. 편리하고 아름다운 첨단 기기로 장식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가까운 역사가 없다. 어렵게 살던 그때의 교실모습도 책상도, 난로도, 교과서도, 풍금과 큼직한 교수용 주판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학교의 어느 곳에도 가까운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은 없다.
유태인의 국가 기념일은 모두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날 그들은 그 고난의 역사를 되새기고 애도하고 금식하고 경건하게 보낸다. 그들은 말한다. ‘과거를 소홀히 하는 자는 몽유병 환자와 같다. 과거를 파괴하는 것만큼 큰 죄는 없다.’고 그리고 아이들에게 ‘선인들의 괴로움과 굴욕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민족이 생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교육’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슬프고 괴로운 이야기까지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치로운 역사로 가르친다.
지금 세대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눈물겹도록 고마워하게 되는 날 우리의 앞날은 탄탄해 질 것이다.
가까운 역사를 모르고서는 먼 역사도 의미가 없고, 고난의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외면하고는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연달래 꽃길
2015년 5월 4일. 5월 초 답지 않게 무덥던 날씨가 오늘은 서늘한 가을 날씨 같다. 모처럼 C와 함께 대구의 명산 팔공산을 찾았다.
이제 막 신록이 무르 익어가는 계절이지만 산마루에는 아직 연초록의 새싹들이 부끄러운 듯 손바닥을 벌리고 있다.
해발 1193m의 비로봉에서 동봉을 거쳐 팔공산의 주능선을 따라 갓바위까지 가는 7.3Km의 마루금 산행은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동화사 시설지구에서 비로봉까지의 접근거리 3.6Km와 갓바위에서 주차장까지 약 2Km의 하산길까지 합하면 모두 13Km에 이르는 산행이다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닐뿐더러 해발 1000m 전후의 마루금에는 오름과 내림, 그리고 아름답지만 험준한 산세가 어설픈 등산객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기도 한다.
산길은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리면 안 된다. 급하게 걷는 발자국 소리나 빨리 오르려고 끙끙대는 신음 소리도 들리면 안 된다.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향기짙은 솔바람이나 연달래의 연분홍 꽃잎을 하늘거리게 하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내 존재가 사라진 그런 움직임으로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에는 내가 없어야 한다.
오랜 세월 나는 철따라 그 길을 여러 번 걸었지만 그 길에 연달래가 그렇게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연달래는 진달래를 닮았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 진달래는 참꽃, 먹을 수 없는 연달래는 개꽃이라 천대했다. 하지만 철쭉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꽃으로, 진달래보다 꽃도 크고 진달래가 제 수명을 다하고 질무렵 진달래의 화려함과는 다른 은은한 연분홍 꽃과 초록의 잎들이 함께 피어나는 꽃이다.
진달래를 생기발랄한 처녀라 한다면 연달래는 한 단계 성숙한 무르익은 새댁이라 할까!
이 길의 연달래는 어느 핸가 다녀온 소백산의 연달래와는 그 느낌이 사뭇다르다. 그곳은 연달래가 군락을 이루거나 터널을 이루고 있었고 온 산이 연분홍으로 물들어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소백산의 그 풍만한 꽃무리와는 달리 이곳 팔공산 능선의 연달래 꽃길은 있는 듯 없는 듯, 7Km의 마루금 내내 쉬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많게는 한 무더기로, 때로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한 두 그루씩 수줍게 서서 사랑하는 이를 멀리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서운함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옷고름만 만지작거리는 옛 우리네 여인들처럼 거기 그렇게 있었다.
그 정경이 가슴에 밟혔음일까 나는 그날 느리게 느리게 걸었다. 그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달래 꽃길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산은 나에게 정복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내달리는 속도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몇 시간 만에 어떤 험한 산길을 완주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산을 다녀오긴 했는데 그 산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별로 남은 것이 없었다.
고은 시인은 노래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그러니까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산길에는 거친 숨소리만 있을 뿐 많은 것을 보지 못한 채 지나치고 만 셈이다.
등산을 할 때는 산의 참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른 봄,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관목들 사이로 노랗게 피어나는 생강나무 꽃을 시작으로 보일 듯 말 듯 낙엽 사이에 피어있는 노루귀 꽃, 그리고 천자만홍으로 온 산을 물들이는 진달래꽃에 이어 오솔길 한 모퉁이 보랏빛으로 수줍게 핀 애기붓꽃까지 함께 길동무를 해야 한다.
그래서 늦가을의 단풍에만 황홀해 할 것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 외롭게 핀 여러 종류의 산나리들과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주황색으로 산을 장식하는 동자꽃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산길의 메마른 바위틈, 이끼들 사이에 볼 품 없지만 노랗게 핀 바위채송화와 기린초의 강인함에도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올라 갈 때도 볼 수 있는 그 꽃은 천천히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있을 때만 보이는 환희의 꽃이다. 그래서 산길을 걷지만 산에는 내가 없어야 한다. 그 거대한 자연의 품에 동화된 나는 그냥 한 줄기 바람이고, 한 송이 야생화이고 싱그러운 이파리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동화됨으로써 나는 비로소 산의 순리에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닐 것인가.
산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듯하다. 천천히 흐르는 산속 시간의 여울 속에 나는 연달래의 그 은근하고 귀부인 같은 자태에 흠뻑 젖어든다. 그래서 이 연달래 길은 빨리 걸을 수가 없다. 꽃과 숨을 고루며 얘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천천히 더 천천히 걷고 싶은 길이다.
팔공산 산마루에는 해마다 그때가 되면 걷고 싶은 연달래 꽃길이 있다.
첫댓글 지금의 사문진 나루는 어떻게 변했는지 가 보고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산길을 오를때는 가뿐숨소리가 들리지 않아야한다 산에서는 내가 없어야한다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