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차 고조선유적답사회 대원들은 몽골에 도착하여 홉스콜로 가는 도중에
엄청나게 많은 소 떼와 양 떼들을 만났다.
대원들은 가축들을 만나면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축 사진을 찍었다.
작년과 올해 두해에 걸쳐 몽골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지만
몽골의 도로 사정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약 390년 전의 동몽골과 만주의 도로사정도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몽골의 말들은 준마는 하루에 350km을 가고 일반 말들은 약 150km를 간다고 하는데
성익이 동몽골을 방문하여 소를 구입하러 돌아다닌 길들도
놀랄 정도의 힘든 형극의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1637년에 이르러 조선에는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번져 가축들이 모두 병들어 죽어버렸다.
전쟁에 이어 엄청난 재난이 계속되어 농민들은 농사를 폐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국 191개에 이르는 섬지방과 오지에 있는
국영농장의 남아있는 소들과 군마들을 지급하여 농사에 도움이 주려고 했지만
2차례의 전쟁과 100년동안의 4차례의 정기적인 우역(牛疫)으로 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인조는 1636년(병자년)에는 흉작과 구제역으로
각 능묘에 국가의례인 오향대제(五享大祭)를 페지하였고,
다음해에는 종묘의 삭망제(朔望祭)를 폐지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병자년에 구제역으로 평안도에서만 1,580마리의 소가 죽었다.
이 전염병은 남부지방을 거쳐 일본 서부지방까지 전파되어
일본 서부지방의 모든 소들이 몰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 당시 기록(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6권 인조 16년 6월)을 살펴보자.
인조는 대신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하여 다른 나라에서 건강한 소를 들여오기로 결정하고 무관 성익을 파견한다
"비국 낭청(6품 종사관) 성익(成釴)이 소로 무역하는 일로 몽골(蒙古)에 들어갔다.
심양에서 서북쪽으로 16일을 가서 오환(烏桓)왕국에 도착했고
3일만에 내만(乃蠻)왕국에 도달했다.
또 동북쪽으로 4일을 가서 자삭도(者朔道)왕국이었고, 북쪽으로 3일만에 몽호달(蒙胡達)왕국에 도달하고,
또 동쪽으로 가서 투사토(投謝土)왕국, 소토을(所土乙)왕국, 빈토(賓土)왕국에 도달했다.
소 181두를 사가지고 돌아왔는데 평안도 역읍에 나눠주어 농사짓는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인조 임금의 명을 받아 심양에 도착한 낭청(郎廳, 6품 종사관) 성익은
심양관에 머무르고 있는 소현세자(1612년~1645년)를 예방하고 도움과 조언을 구한다.
소현세자는 淸과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 중간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고국 농촌의 비참한 상황을 전해들어
제일 유능한 몽어(蒙語)역관 4명을 붙여주고 바로 동몰골로 출발시킨다.
이 때 수행했던 역관들은 조효신, 김경신(金敬信), 정백란(鄭伯鸞), 이형장 4명이었다.
몽골에 갔던 성익과 역관들은 좋은 소를 구하기 위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하다가
동몽골의 여러 왕국를 거쳐 결국에는 조선에서 필요로 하는 우수한 종자의
훌륭한 소들를 모두 구해 역관 조효신, 김경신과 함께 조선으로 귀환하게 된다.
옛 지도와 고문헌을 조사해보니 몽골에서 맨 마지막에 도착한 투사토왕국과 빈토왕국은
청나라 호르친 6호쇼의 하나로
호르친은 "활과 화살을 후대하고 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칭기스 칸 당시의 호르친은 동몽골의 6만호에도 소속되지 않은 특별한 행정단위였다,
당시의 호르친은 200,000명 이상의 속민을 가지고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세력을 유지한채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성익이 방문했을 당시에 투사토왕국과 빈토왕국은
현재 몽골 동부 지림 아이막(Jirim)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동몽골에서 살아있는 건강한 소들를 이끌고
2,000km를 이동하는 것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종 4년(1663년 7월29일) 병조에서 아뢰기를 "평안병사(平安兵使)가 궐원으로 비변사에서 천거하도록 할 때
공조판서 이완, 성균관대사성 민정중, 동지중추부사 유혁연 등이 성익을 천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성익은 동몽골에 소를 구입하러 가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지삼(枝三)과 남초(南草)을 가지고 갔다."
당시 평안도의 남초는 쌀보다 비싸고 귀했으며 여진족이나 청(淸)에서 높은 가격을 쳐주었다.
조선은 당시 전쟁을 치루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성익은 교역상품으로 최고의 상품가치를 지닌 남초를 가지고 가서
몽골인들에게 남초의 효능을 설명하고 몽골 소들과 교환하였다.
이후 몽골 소들이 잘 증식되고 종자 개량을 거쳐 대한민국에 우수한 한우로 보존되었다.
<병자호란 직후(1637~1644) 朝淸 관계에서 ‘淸譯’의 존재>한국문화 40권-2007년 12월 발표 논문, 264p 인용, 김 남 윤
<몽궐의 문화와 자연지리>127p 인용, 1999년 9월 발간, 민속원, 저자 박원길
몽골 12세 소년인 앨댄바드는 우리 탐사대원중에 제일 어리지만
여행의 안내나 텐트생활에서, 길 안내할 때 항상 앞장을 섰다.
점심 식사를 하던 강가에서는, 재빠르게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와 보여주었다.
앨댄바드는 모기씨 조카로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아 대원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었다.
주상현 남서울대 교수님
정의영 사장이 강가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어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강가를 바라보고 있는 김상수 교수와 물가의 앨댄바드
산을 넘어가다가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다.
어워에는 파란 하닥이 걸려있다.
야생화
사슴돌과 사진가
몽골 청동기시대 대형 적석 유구(히루기수르)
몽골 청동기시대 #대형적석유구(히루기수르)와 사슴돌
몽골 청동기시대 히루기수르
사슴돌을 설명하시는 안동립 대장
탁본한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다
몽골 청동기시대 #대형적석유구(히루기수르)
청동기시대 대형적석유구(히루기수르)-사진가 이효웅
사슴돌과 청동기시대 대형적석유구(히루기수르)
몽골 청동기시대 #대형적석유구(히루기수르)
대장을 따라 정상으로 가는 대원들
오랜 세월 비로 깍여 드러난 독특한 산의 모양
야생화 촬영
길
無
양떼 목장
돌궐의 무덤형태는 사방 4군데에 큰 돌을 세운다.
몽골 초원과 야산에는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제사유적과 무덤이 존재한다.
저리거와 모기氏
정호영· 주상현 대원-센 베노(안녕하세오!)
버스 뒷좌석-센 베노(안녕하세오!)
몽골 초원의 우산
하루에도 사계절이 다 나타나는 몽골의 8월 날씨는 아주 요상스러웠다.
한 낮에는 35도까지 올라간다.
비포장도로를 넘어오면서 홍승원 단장님의 미숫가루를 만들어드리고 나서
남은 분량을 먹고 조금 지나 물을 먹었는데
갑자기 탈이나서 속이 거북하고 숨이 멎을만큼 끔직했다.
갑자기 가슴이 아주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달리는 차안에서 갑자기 가슴이 막히고 속이 머슥머슥하더니
토하려고 해서 봉지를 준비했는데 전혀 나오는 것은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텐트를 칠 때는 괜찮았는데 다시 긴장이 풀어지니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뱃속에 있는 것을 다 비우고 그냥 누웠다.
수지침을 맞고나서 텐트에 일찍 들어와 그냥 잤는데 아주 힘든 하루 밤을 맞이했다.
아침에 일어나 누룽지를 끊여서 조금 먹으니 속이 편안해졌다.
힐링여행을 하면서 야영시에는 임시 화장실를 만들어 사용하고 출발시 에 다시 텐트를 달 접었다.
버스를 정말 안전하게 운전하는 '아르온벌드' 기사와 기념사진을 찍다.
센 베노(안녕하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