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한시감상
「명명풍우교 증평중」 이수 강희맹
[ 冥冥風雨交 贈平仲 二首 姜希孟 ]
其二(기이)
冥冥風雨交(명명풍우교) 비바람 한데 섞여 어두운데
厭聞鷄亂號(염문계란호) 어지러이 닭 우는 소리 듣기 싫네
大人志功名(대인지공명) 관리들은 공명에 뜻을 두어
夙夜不憚勞(숙야불탄로) 아침부터 밤늦도록 수고를 꺼리지 않고
市人逐末利(시인축말리) 장사치들은 말리를 좇아서
百計競錐刀(백계경추도) 온갖 계교로 작은 이익 다투네
所以日復日(소이일부일) 때문에 날마다
作事繁牛毛(작사번우모) 일을 만들어 소털만큼이나 번다하네
吾今兩無謀(오금량무모) 나는 지금 두 가지 모의가 없어
萎頓安蓬蒿(위돈안봉호) 오두막살이에 정신없이 안주한다오
〈감상〉
이 시는 어둑어둑 비바람이 부는 날 평중에게 써서 준 시이다.
어둑어둑 비바람 한데 섞여 어두운데, 닭까지 어지럽게 울어 대니 그 울음소리 듣기가 싫다. 조정의 관리들은 공명(功名)에 뜻을 두어 아침부터 밤늦도록 공명을 이루기 위해 수고를 꺼리지 않고 있고, 시장의 장사치들은 장사에서 오는 작은 이익을 좇아서 온갖 계교로 서로 다투고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일을 만들어 소털만큼이나 번다해진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 관리로서 공명을 세우거나 장사치처럼 작은 이익에 관심이 없어 조그마한 오두막살이에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고 있다.
〈주석〉
〖冥〗 어둡다 명, 〖厭〗 싫다 염, 〖大人(대인)〗 벼슬이 높은 사람. 〖夙〗 일찍 숙, 〖憚〗 꺼리다 탄, 〖末利(말리)〗 상공업의 이익. 〖錐刀(추도)〗 작은 이익. 〖繁〗 번거롭다 번, 〖萎頓(위돈)〗 정신이 없음. 〖蓬蒿(봉호)〗 풀 더미.
각주
1 강희맹(姜希孟, 1424, 세종 6~1483, 성종 14):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무위자(無爲子),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1447년(세종 29) 18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73년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이조참판·판돈녕부사·우찬성을 거쳐 1482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부지런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공정한 정치를 했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한편으로 아첨하며 자기 공을 자랑한다는 비방도 들었다.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뛰어난 문장가였고 민요와 설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소나무·대나무 그림과 산수화를 잘 그렸다. 금양에 있을 때 자신의 경험과 견문을 토대로 지은 농업에 관한 저서로 「금양잡록(衿陽雜錄)」이 있고, 당시 골계전(滑稽傳)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촌담해이(村談解頤)』가 있다. 그 밖에 서거정이 편찬한 유고집 『사숙재집』 17권이 있다.
「유룡문산등절정」 김안국
[ 遊龍門山登絶頂 金安國 ]
步步緣危磴(보보연위등) 걸음걸음 위태로운 돌길을 따라 오르니
看看眼界通(간간안계통) 보면 볼수록 눈의 경계가 트이네
閑雲迷極浦(한운미극포) 한가로운 구름은 먼 포구에 아득하고
飛鳥沒長空(비조몰장공) 나는 새는 먼 하늘로 사라지네
萬壑餘殘雪(만학여잔설) 골짝기마다 잔설이 남아 있고
千林響晩風(천림향만풍) 온 숲에는 저녁 바람 울리네
天涯懷渺渺(천애회묘묘) 하늘가에 회포가 아득한데
孤月又生東(고월우생동) 외로운 달이 또 동쪽에서 떠오르네
〈감상〉
이 시는 1526년 양평에 있는 용문산에 노닐면서 정상에 올라 지은 것으로, 자신의 호탕한 기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위태로운 돌길을 따라 용문산 정상에 오르니, 시야를 막을 것이 하나도 없어 보면 볼수록 눈의 경계가 트여 막힘이 없다. 정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니 한가로운 구름은 먼 포구에 아스라하고, 하늘을 날아가던 새는 먼 하늘로 사라진다. 하늘에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골짝기마다 잔설이 남아 있고, 온 숲에는 저녁 바람이 불어 울린다. 저 먼 하늘가만큼이나 회포가 아득한데, 외로운 달이 또 동쪽에서 떠오른다(동산에 떠오르는 달처럼 커져 가는 자신의 회포를 노래함).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수련(首聯)과 함련(頷聯)에 대해 “가슴까지 확 트인다(흉차역활(胸次亦豁)).”라 평했고, 『동시화(東詩話)』에서는 함련(頷聯)에 대해 “화의(畵意)가 있다(유화의(有畵意)).”라 평하고 있다.
〈주석〉
〖緣〗 말미암다 연, 〖磴〗 돌 비탈길 등, 〖浦〗 물가 포, 〖渺〗 아득하다 묘
각주
1 김안국(金安國, 1478, 성종 9~1543, 중종 38):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으며, 조광조·기준(奇遵) 등과 사귀었으며, 당시 시를 잘 지었던 시인으로 알려졌고 회문시(回文詩)나 율시(律詩)를 잘 지어 상을 받기도 했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150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한 뒤 홍문관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이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각 향교에 『소학(小學)』을 나누어 가르치게 하였다.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絿) 등은 절도안치(絶島安置), 윤자임(尹自任)·기준 등은 극변안치(極邊安置)되었다. 이때 김안국도 아우 김정국 등 32명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폐천녕현(廢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대개의 지배층 관료가 그러했듯이 김안국도 재지(在地)의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시와 술을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린 그의 문인 44인 중 상당수는 이 시기에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그 뒤 정광필(鄭光弼) 등이 그를 다시 기용할 것을 거론했으나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집권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고 있을 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안로가 사사된 뒤인 1538년 홍문관 등의 현직(顯職)은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벼슬길에 다시 올랐다. 이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지냈다.
「도한강」 김일손
[ 渡漢江 金馹孫 ]
一馬遲遲渡漢津(일마지지도한진) 필마로 느릿느릿 한강 나루를 건너는데
落花隨水柳含嚬(낙화수수류함빈) 꽃잎은 물결 따라 흐르고 버들은 찡그린 듯하네
微臣此去歸何日(미신차거귀하일) 미미한 신하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
回首終南已暮春(회수종남이모춘) 종남산 돌아보니, 봄이 이미 늦었구나
〈감상〉
이 시는 32세 되던 해, 사직을 청해 낙향하면서 지은 시이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한 필의 말을 타고 한강 나루를 건너는데 아직도 벼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 행보가 느리기만 하다. 봄이라 꽃잎이 한강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고 있고 버들은 나처럼 수심에 잠겨 찡그린 듯하다. 보잘 것 없는 신하,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까(사직을 청해 낙향하는 중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는 다짐이 내포되어 있음)? 고개를 돌려 종남산을 바라보니, 늦은 봄이 저물어 가고 있다.
〈주석〉
〖嚬〗 찡그리다 빈, 〖終南(종남)〗 종남산(終南山)으로 남산(南山)을 가리킴.
각주
1 김일손(金馹孫, 1464, 세조 10~1498, 연산군 4):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 17세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에게서 『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으며, 뒤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갔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다.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世祖纂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수양산」 성간
[ 首陽山 成侃 ]
其三(기삼)
夢入首陽山(몽입수양산) 꿈속에 수양산에 들어갔더니
愁雲憑憑欲吼怒(수운빙빙욕후노) 근심의 구름 성난 듯 울부짖으려 하고
靑兕黃熊怒我啼(청시황웅노아제) 푸른 외뿔소와 누런 곰이 나에게 성내며 으르렁거려
萬丈層崖緣細路(만장층애연세로) 까마득한 절벽 위에 가느라단 길을 따라 달아나네
不知故人在何處(부지고인재하처) 친구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萬水千山日欲暮(만수천산일욕모) 많은 물과 산에 해가 저물어 가네
嗚呼(오호) 아!
忽然覺來天欲昏(홀연각래천욕혼) 갑자기 깨어났을 때 하늘이 저물어 가려 하니
萬慮關心淚如雨(만려관심루여우) 온갖 시름이 일어나 눈물이 비 오듯 하네
〈감상〉
이 시는 꿈속에 수양산에 들어간 것을 묘사한 시로, 꿈을 통해 현실세계에서 소외된 불안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낮에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수양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근심의 구름이 성난 듯 울부짖으려 하고, 푸른 외뿔소와 누런 곰이 나에게 성내며 으르렁거려 그들을 피하려고 까마득한 절벽 위 가느다란 길을 따라 달아났다. 목적지인 친구의 집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수없이 쌓인 첩첩산중의 물과 산에 해가 저물어 간다. 불안이 극도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깨어나니, 하늘이 저물어 가려 한다. 꿈속에서도 저물어 가고 있고 현실로 돌아온 세계 역시 저물어 가고 있어, 온갖 시름이 일어나 눈물이 비 오듯 한다.
「본전(本傳)」에 중국 사신도 성간(成侃)의 시를 보고 탄복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중국 사신 예겸이 사명을 띠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성진일이 남을 대신하여 그를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예겸이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동국 문장이 중국보다 못지않다.’ 하였다(華使倪謙奉使東來(화사예겸봉사동래) 成眞逸代人作送行詩(성진일대인작송행시) 倪謙見之(예겸견지) 不覺屈膝曰(불각굴슬왈) 東國詞藻(동국사조) 不減中國矣(불감중국의)).”
〈주석〉
〖憑憑(빙빙)〗 왕성한 모양. 〖吼〗 울다 후, 〖兕〗 외뿔소 시
각주
1 성간(成侃, 1427, 세종 9~1456, 세조 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 성임(成任)의 아우이고 성현(成俔)의 형이다.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 유방선(柳方善)의 문인으로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집현전에 들어가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30세에 병으로 죽었다. 용모가 추하고 성격이 괴팍해서 웃음거리였다고 하며, 훈구파의 폐쇄적인 의식에 불만을 품은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경사(經史)는 물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하여 문장·기예(技藝)·음률·복서(卜筮) 등에 밝았다. 강희안에게 준 시 「기강경우(寄姜景愚)」에서는 천고에 신기함을 남길 예술은 어떤 것인가 묻고, 개성 있는 표현을 모색하면서 문학과 미술이 조화되는 경지를 추구했다. 「신설부(新雪賦)」에서도 문학하는 자세에 관심을 보였다. 패관문학인 「용부전(慵夫傳)」에서는 세상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맞설 자신이 없으므로 게으름에 빠져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고 했다. 저서로는 『진일재집』이 있다.
「신묘세 자춘조하 불우 종불득파 천택구갈 민심유작」 김안국
[ 辛卯歲 自春徂夏 不雨 種不得播 川澤俱渴 悶甚有作 金安國 ]
杲日朝朝出(고일조조출) 밝은 해는 아침마다 떠오르고
遮雲不作霖(차운부작림) 구름은 끼나 비가 오지 않네
過夏何所用(과하하소용) 여름이 지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堪笑野人心(감소야인심) 촌사람의 마음이 웃을 만하구나
〈감상〉
이 시는 신묘년(1531)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오지 않아 곡식을 뿌릴 수 없고 시냇물이나 연못이 모두 말라 버려 근심이 심하여 지은 것으로, 김안국의 애민의식(愛民意識)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봄부터 여름이 되기까지 밝은 해는 아침마다 떠올라 맑은 날이 계속되니 비 올 기미는 안 보이고, 하늘에 구름은 끼지만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어 파종(播種)도 못 하고 있다. 여름이 지나서 비가 온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허탈한 웃음이 나올 만하다.
그의 농민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병진정사록』에도 간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모재는 성품이 순일하고 부지런하며 상세하고 치밀하여 만약 방아를 찧을 때면 싸라기와 쌀겨도 함께 거두어 저장하였다가 춘궁기(春窮期)에 굶주린 백성을 먹이도록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물질을 낼 때에 모두 쓰일 곳이 있도록 마련하였으니, 마구 없애 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혹시 비방하면 웃으며 말하기를, ‘범인(凡人)은 마음이 거칠고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니라.’ 하였다(慕齋性精謹詳密(모재성정근상밀) 如舂杵則碎米細糠(여용저칙쇄미세강) 幷收藏之(병수장지) 以賑春飢(이진춘기) 嘗曰(상왈) 天之生物(천지생물) 莫非有用(막비유용) 暴殄不祥也(폭진불상야) 人或譏之(인혹기지) 笑曰(소왈) 常人心麤(상인심추) 聖人心細(성인심세)).”
〈주석〉
〖徂〗 가다 조, 〖播〗 뿌리다 파, 〖杲〗 밝다 고, 〖遮〗 가리다 차, 〖霖〗 장마 림
각주
1 김안국(金安國, 1478, 성종 9~1543, 중종 38):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으며, 조광조·기준(奇遵) 등과 사귀었으며, 당시 시를 잘 지었던 시인으로 알려졌고 회문시(回文詩)나 율시(律詩)를 잘 지어 상을 받기도 했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150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한 뒤 홍문관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이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각 향교에 『소학(小學)』을 나누어 가르치게 하였다.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絿) 등은 절도안치(絶島安置), 윤자임(尹自任)·기준 등은 극변안치(極邊安置)되었다. 이때 김안국도 아우 김정국 등 32명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폐천녕현(廢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대개의 지배층 관료가 그러했듯이 김안국도 재지(在地)의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시와 술을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린 그의 문인 44인 중 상당수는 이 시기에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그 뒤 정광필(鄭光弼) 등이 그를 다시 기용할 것을 거론했으나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집권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고 있을 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안로가 사사된 뒤인 1538년 홍문관 등의 현직(顯職)은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벼슬길에 다시 올랐다. 이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지냈다.
「증거정주인구리김진」 황정욱
[ 贈居停主人舊吏金珍 黃廷彧 ]
少年刀筆吏稱佳(소년도필리칭가) 젊어서 서기로 명성이 있었으나
老去還悲五色迷(노거환비오색미) 늙어서는 도리어 슬프게도 오색도 구분 못 하네
迷路世間吾亦爾(미로세간오역이) 세간의 미로에선 나 역시 그러하니
白頭筇杖笑相携(백두공장소상휴) 흰머리에 지팡이 짚고 웃으며 서로 끌어 주네
〈감상〉
이 시는 거정(居停)의 주인인 옛 관리였던 김진에게 준 시로, 김진은 협주(夾註)에 의하면, “김진은 젊어서부터 유능한 관리였으나, 나이가 들자 소경이 되어 사물을 보지 못했다(珍自少爲營吏(진자소위영리) 臨老(임로) 靑盲不視物(청맹불시물)).”라고 기록되어 있다.
1구와 2구에서는 젊은 시절과 노년 시절의 김진의 모습을 노래하여, 젊어서는 유능한 관리였으나 늙은 지금에는 오색(五色)도 구분 못 할 정도로 눈이 멀었다며 젊음과 노년의 대비(對比)를 통한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3구와 4구에서는 황정욱 자신의 문제로 시선을 옮겨 청맹(靑盲)이 된 김진과 세간의 삶에서 길을 잃은 혼란한 자신과 대비(對比)시키면서, 웃으며 서로 끌어 주는 쓸쓸한 만년의 자조(自嘲)로 끝을 맺고 있다.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황정욱을 포함한 조선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시(詩)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이행(李荇)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충암(冲庵) 김정(金淨)·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란히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조선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수신(盧守愼)은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정욱(黃廷彧)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달(李達)이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필(權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我朝詩(아조시) 至中廟朝大成(지중묘조대성) 以容齋相倡始(이용재상창시) 而朴(이박) 訥齋祥(눌재상), 申企齋光漢金冲庵淨鄭湖陰士龍(신기재광한김충암정정호음사룡) 竝生一世(병생일세) 炳烺鏗鏘(병랑갱장) 足稱千古也(족칭천고야) 我朝詩(아조시) 至宣廟朝大備(지선묘조대비) 盧蘇齋得杜法(노소재득두법) 而黃芝川代興(이황지천대흥) 崔白法唐而李益之闡其流(최백법당이이익지천기류) 吾亡兄歌行似太白(오망형가행사태백) 姊氏詩恰入盛唐(자씨시흡입성당) 其後權汝章晩出(기후권여장만출) 力追前賢(역추전현) 可與容齋相肩隨之(가여용재상견수지) 猗歟盛哉(의여성재)).”
〈주석〉
〖刀筆吏(도필리)〗 문안(文案)을 담당하는 관리. 〖爾〗 그러하다 이, 〖筇〗 지팡이 공, 〖携〗 끌다 휴
각주
1 황정욱(黃廷彧, 1532, 중종 27~1607, 선조 4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1580년(선조 13)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문젯거리였던 종계변무에 성공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호조판서로 승진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했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으로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지고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병조판서로 전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하여 강원도에 가서 의병을 소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임해군(臨海君)·순화군과 함께 안변(安邊)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보낼 항복권유문을 쓰라고 강요받았다. 이에 거부했으나, 그의 손자와 두 왕자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아들 황혁(黃赫)이 이를 대신 썼다. 그는 항복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썼는데, 이를 입수한 체찰사가 항복권유문만을 보내고 사실을 밝힌 글은 전해 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듬해 부산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항복권유문이 문제가 되어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1597년 풀려났다. 관각삼걸(館閣三傑, 정사룡(鄭士龍), 노수신(盧守愼))의 한 사람으로 문장·시·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시는 독창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뒤에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도상유기암 암상유화 유향가애 시이기지」 김정
[ 途上有奇巖 巖上有花 幽香可愛 詩以記之 金淨 ]
利路名途各馳走(이로명도각치주) 이익(利益)의 길과 명예(名譽)의 길로 각각 내달리느라
阿誰寓目賞幽芳(아수우목상유방) 누가 눈을 두어 그윽한 꽃을 감상했겠는가?
朝朝暮暮空巖上(조조모모공암상) 아침마다 저녁마다 부질없이 바위 위에서
浥露臨風獨自香(읍로림풍독자향) 이슬에 젖고 바람 맞으며 홀로 향기 내네
〈감상〉
이 시는 길을 가던 도중 기이한 바위 위에 꽃이 피어 있었는데, 그윽한 향기가 사랑할 만하여 시로 기록을 남긴 것으로, 꽃에 가탁하여 당시(當時)의 세태(世態)를 비판(批判)하고 있다.
기이한 바위 위에 그윽한 향기를 뿜는 꽃이 피어 있지만, 아무도 눈을 두어 그 꽃을 감상하려 하지 않는다. 이익과 명예를 향해 내달리기 때문에 시선을 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아침마다 저녁마다 부질없이 바위 위에서 찬 이슬에 젖고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홀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김정(金淨)은 이 꽃처럼 누가 보아 주는 이 없어도 자신의 길을 가고 있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해 이익(利益)과 명예(名譽), 두 길만을 위해 치닫고 있다. 자신은 그러한 세태(世態)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金淨)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기묘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충(元冲)이요, 호는 충암(冲庵)이다. 중종 2년에 장원으로 뽑히어 청관(淸官)과 요직을 역임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청원하여 순창(淳昌) 군수로 보직되어서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신씨(愼氏, 중종의 첫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를 청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사론(邪論)이라 가리켜 마침내 죄를 입었다. 정축년에 뽑아 부제학(副提學)을 제수하였고, 기묘년 여름에 형조 판서에 올렸다. 사화가 일어났을 때 곤장을 쳐 제주(濟州)로 유배시키고 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였다. 공은 천성이 충효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였으며, 죽음에 임하여서도 낯빛이 변하지 아니하고 형제에게 글을 보내어 늙은 어머니를 잘 봉양할 것을 당부하였다.
공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형님의 아들 철보(哲葆)로 뒤를 잇게 하였다. 철보의 아들 성발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의 조카인 응교(應敎) 천우(天宇)가 공의 유고(遺稿) 몇 편을 모아 『충암집(冲庵集)』을 만들어 세상에 간행하였다(慶州人(경주인) 字元冲(자원충) 號冲庵(호충암) 我中廟二年擢壯元(아중묘이년탁장원) 歷敭淸要(역양청요) 爲親乞補淳昌(위친걸보순창) 與潭陽府使朴祥聯名上疏(여담양부사박상련명상소) 請復愼氏(청부신씨) 朝議指以爲邪論(조의지이위사론)
竟被罪(경피죄) 丁丑擢授副提學(정축탁수부제학) 己卯夏陞刑曹判書(기묘하승형조판서) 及禍作(급화작) 杖配濟州(장배제주) 賜自盡(사자진) 公天性忠孝(공천성충효) 學問精深(학문정심) 臨死顏色不變(임사안색불변) 貽書兄弟(이서형제) 以善養老母勉之(이선양로모면지) 公無後(공무후) 以兄子哲葆爲後(이형자철보위후) 哲葆之孫聲發登文科(철보지손성발등문과) 公之堂姪應敎天宇(공지당질응교천우) 取遺稿若干編(취유고약간편) 爲冲庵集(위충암집) 刊行于世(간행우세)).”
〈주석〉
〖馳〗 달리다 치, 〖阿誰(아수)〗 누가. 〖浥〗 젖다 읍
각주
1 김정(金淨, 1486, 성종 17~1520, 중종 15):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菴)·고봉(孤峯).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사림파를 대표했으며, 기묘사화 때 제주도에 귀양 갔다가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써서 기행문학의 성격을 바꿔 놓기도 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것이 명분에 어긋난다 하여 신씨 복위를 주장하며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 기묘사화로 인해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옮겨졌으며, 다시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했으며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도왔다. 사림파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주장했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偉勳削除) 등과 같은 개혁을 시도했다. 시문에 능해 유배생활 중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특히 경치를 보고 기개를 기르자고 읊을 뿐 지방마다의 생활풍속은 무시했던 이전의 기행문학과는 달리 제주도의 독특한 풍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저서에 『충암집(沖菴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