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
대보단(大報壇)
정의
조선 숙종 때,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하기 위하여 창덕궁 후원에 세운 제단.
개설
명나라가 멸망한 지 60년 되는 해인 1704년(숙종 30) 1월 10일에 숙종이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해 준 명나라 신종의 은혜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언급하다가, 나라를 다시 세워준 신종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기 위해 그를 위한 새로운 사묘(祠廟)를 건립할 것을 주장하면서 그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하지만 사묘의 건립 여부는 여러 문제 때문에 쉽게 결정되지 못하고 거의 1년 동안이나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대보단은 같은 해 12월 21일에야 비로소 창덕궁 후원에 단(壇)의 형태로 설립되었다. 대보단이 건립된 뒤에는 3월 상순에 한 차례 제사를 지냈는데, 왕이 몸소 주관하였다.
그 뒤 영조와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명나라의 건국자인 태조(太祖)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이 제사 대상에 추가되었고, 제사의 횟수도 연 1회에서 7회로 늘어났으며, 왕의 친제 횟수 역시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순조 이후 고종대까지 이어졌으나,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없어지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대보단은 창덕궁 금원(禁苑) 서쪽 요금문(曜金門) 밖, 옛 별대영(別隊營) 자리에 위치하였다. 처음에는 예조(禮曹) 판서(判書)민진후(閔鎭厚)의 주관 아래 내빙고(內氷庫) 자리에 제단을 마련하였지만, 그가 수어사(守禦使)로 제수되어 남한산성으로 부임하고 예조 참판(參判)김진규(金鎭圭)가 담당하면서 별대영 자리로 위치를 옮기게 되었다.
대보단에 대한 제사는 흔히 ‘존주양이(尊周攘夷)’, ‘복수설치(復讎雪恥)’를 바탕으로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내세운 조선중화(朝鮮中華) 의식의 상징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나라의 멸망으로 인해 끊어진 천자의 제사를 조선 왕이 대신한다는 상징성을 취하려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대보단을 설립할 때 인귀(人鬼)를 모시면서도 사묘(祠廟)가 아니라 신을 모시는 설단(設壇)의 형식으로 조성하였고, 1년에 단 한 번, 그것도 명나라가 패망한 3월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비상설적인 운영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제사의 대상이 명나라의 황제이고 조선의 왕이 직접 거행하는 제사임에도 대사(大祀)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종묘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을 막고 청나라의 간섭을 예방하였다. 당시 숙종은 대보단의 제사를 사대(事大)의 지극한 정성으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대보단의 설립은 중화의 계승보다는 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대보단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제사의 대상은 명나라 신종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749년(영조 25)에 대보단의 단유(壇壝)와 신좌(神座), 신탑(神榻) 등을 명나라 제도에 맞추는 대규모의 증·보수가 이루어졌다. 이때 나라의 태조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태조·신종·의종 세 황제를 함께 제사 지내게 되었다. 이어 1762년(영조 38)에 명나라 태조에게는 서달(徐達)을, 신종에게는 이여송(李如松)을, 의종에게는 범경문(范景文)을 각각 종향(從享)시킴으로써 제사 대상을 좀 더 체계화하였다.
제사는 처음에는 1년에 한 차례, 명나라가 패망한 3월에 지냈는데, 1749년(영조 25)에는 세 황제의 기일 및 즉위일에도 망배례(望拜禮)를 시행함으로써 제사의 횟수가 크게 늘어났다. 세 황제의 기일에는 명나라의 후손과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때 순절하거나 의리를 지킨 충신·열사·의인의 후손들을 대거 망배례에 참여시켰다. 망배례는 좁은 대보단이 아니라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나 경희궁의 숭정전(崇政殿), 춘당대(春塘臺) 등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망배례에 참여한 후손들의 수는 1796년(정조 20)에는 156명이었는데, 1800년(정조 24)에는 239명으로 증가하였다.
형태
대보단은 1704년 10월 3일에 공사가 시작되어 12월 21일에 완성되었다. 대보단은 명나라의 황제들을 제사함에도 불구하고 인귀를 모시는 사묘가 아닌 설단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이것은 예제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지만, 제후국의 왕이 천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는 주장, 이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지면 사달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 종묘보다 예우를 높일 경우 나라의 체면이 손상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 때문에 사묘가 아닌 설단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제사를 지낼 때는 사묘에서처럼 단 앞에 장전(帳殿)을 세우고, 그 안에는 황색 지붕에 장막이 삼면에 드리워진 방 모양의 휘장인 황방장(黃房帳)을 만들어 여기에 신탑과 신좌를 두고 의식을 진행하였다.
대보단은 조선의 사직단 모양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단을 둘러싼 낮은 담인 유(壝)와 담장인 장(墻)이 있었다. 단의 높이는 사직단보다 1척 높은 4척이고, 사방의 넓이는 25척씩이며, 사면의 계단은 9급(級)이었다. 유장(壝墻)은 사면이 모두 37척이며, 별도로 외장(外墻)을 쌓아 행인들이 들여다보는 것을 막았다.
1749년(영조 25)에는 대보단을 증축하면서 기존 시설을 보수하는 동시에 추가로 시설물을 배치하였다. 기본 시설로는 방형(方形)의 단(壇)을 중심으로, 바깥 담장 동쪽에 신좌와 신탑을 보관하는 봉실(奉室) 3칸과 재계 장소인 재전(齋殿) 3칸을 두었다. 담장 밖 남서쪽에는 향실(香室)과 전사청(典祀廳) 5칸, 재생청(宰牲廳) 2칸, 악생청(樂生廳) 4칸 등이 있었으며, 그밖에 단의 바깥 남쪽 담장에 중문인 열천문(冽泉門)과 그 외곽에 또 다른 문인 공북문(拱北門) 등을 두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대보단배향제신목록(大報壇配享諸臣目錄)』
『대보단증수소의궤(大報壇增修所儀軌)』
『명집례(明集禮)』
정옥자, 『朝鮮後期文化運動史』, 일조각, 1988.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1998.
김호, 「英祖의 大報壇 증수와 明 三皇의 享社」, 『韓國文化』32, 2003.
이근호, 「영조의 명 태조 이해와 皇壇竝祀」, 『규장각』16, 1993.
이욱, 「조선후기 전쟁의 기억과 대보단 제향」, 『종교연구』42, 2006.
대사(大祀)
정의
국가의 정사(正祀)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제사.
개설
대사는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된 정사 중 등급이 가장 높은 제사들의 분류명이다. 국가의 제사는 대·중·소 세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처음 시작한 시기는 신라 때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雜志)」 제사(祭祀)조를 보면, 신라에서 제사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하고 대사에 삼산(三山)을 두었다고 하였다. 삼산은 습비부(習比部) 나력(奈歷)·절야화군(切也火郡) 골화(骨火)·대성군(大城郡) 혈례(穴禮)였다. 종묘와 사직 및 제천 의례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불교와 도교 및 토속 신앙 등이 결합된 삼국 각자의 독자적인 입장을 반영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983년(고려 성종 2)에 원구(圜丘)에 제사를 지내고, 988년(고려 성종 7) 12월에 5묘제(五廟制)에 의거한 종묘의 제도를 시행하기로 정하고 이듬해 4월에 태묘의 영건을 시작하여 992년(고려 성종 11) 11월에 완공하였다. 991년(고려 성종 10)에는 사직단(社稷壇)을 건립하였다. 이후 문종 때에 와서 당(唐)의 의례를 기반으로 국가 의례를 정리하기 시작하여, 의종대에 이르러 최윤의(崔允儀)의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50권으로 집약되었다.
이 책에서는 대사에 원구·방택(方澤)·종묘·사직·별묘(別廟)를 포함시켰다. 그 후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서는 고려에서 행하는 제사를 정사와 잡사(雜祀)로 정리하고, 정사는 대사·중사·소사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제사의 형식과 종류는 『상정고금례』의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인데, 다만 대사에 경령전(敬靈殿)과 제릉(諸陵)이 추가되었다.
연원 및 변천
국가 제사를 대사·중사·소사로 분류한 것은 『구당서(舊唐書)』「예악지(禮樂志)」에 처음 보인다. 이때에는 대사에 천지 제사와 종묘가 포함되었으며 사직은 중사에 속하였다. 사직이 대사에 포함된 것은 송(宋)나라 때부터였다.
그렇지만 종묘와 사직의 제사의 연원은 삼대로까지 소급된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당우립오묘(唐虞立五廟)’라 하고 ‘하씨인지(夏氏因之)’라 하였으니, 종묘는 하(夏)나라 때 이미 건립되어 그 뒤로 계승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주(周)나라의 종법봉건제하에서 각국은 시조묘를 건립하고, 시조를 계승한 역대 왕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종묘를 건립하였다. 『예기(禮記)』나 『의례(儀禮)』를 보면 태조는 처음으로 봉해진 국왕이며, 시조는 태조로 불리고 그를 계승한 소(昭)·목(穆)은 종(從)이 되었다.
소·목제에 따른 종묘 제도는 후한 때에 와서 동당이실(同堂異室)의 제도로 바뀌었다. 명제가 임종 때 침묘(寢廟)를 일으키지 말고 세조묘의 경의실(更衣室)에 신주를 모시라는 유조(遺詔)를 내렸다. 뒤를 이은 장제가 그 유조를 어기지 않고 경의실로써 구별하여 현종묘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 동당이실의 제도가 조선초기 종묘 건립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
사직단 건립의 연원은 1431년(세종 13) 11월 황희(黃喜)와 맹사성(孟思誠) 등이 사직신의 위패에 쓸 칭호를 의논한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곧 『주례(周禮)』「소사도(小司徒)」와 『예기』「제법(祭法)」에는 ‘제후가 국사(國社)를 건립한다.’라 하고, 『당개원례(唐開元禮)』 제주제사직의(諸州祭社稷儀)에는 ‘사신(社神)은 후토구룡씨(后土句龍氏)를 배향하고, 직신은 후직기(后稷棄)를 배향한다.’고 하였다. 1177년(송 순희 4)의 『사사직의주(祀社稷儀注)』와 『홍무예제(洪武禮制)』의 부주현제사직의식(府州縣祭社稷儀式)을 통해 신위판과 신호 등의 사례를 들고 있다.
기곡제(祈穀祭)는 원구단이 남교(南郊)에 위치하여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와 함께 가장 중시되었다. 중국에서는 송대에 원구제와는 별도로 기곡과 대우(大雩)를 대사로 규정하였다. 조선에서는 원구제를 시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풍운뇌우(風雲雷雨)와 선농(先農)의 제사를 지내는 남교에서 기곡제를 지냄으로써, 그 상징성과 왕의 친제에 의한 왕도 정치의 명분을 세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절차 및 내용
대내적으로 황제국임을 자임한 고려에서는 천지의 제사 중 가장 격이 높은 원구와 방택의 제사를 지냈다. 원구제는 호천상제(昊天上帝)를 정위(正位)로 하고 고려태조를 배위(配位)로 하며 동·서·남·북·중의 오방제(五方帝)를 종사(從祀)하는 제도였다. 천명(天命) 사상에 기반한 통치권자의 정통성 및 천하의 주재자로서의 자존 의식을 드러낸 이 의례는 농업과 관련된 기곡과 기우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기도 하였는데, 맹춘 상신(上辛)에 지내는 기곡제와 맹하에 지내는 우사(雩祀) 두 종류가 있었다. 그렇지만 축판(祝版)에는 ‘고려국왕신왕모(高麗國王臣王某)’라 호칭하여, 제천 의례라 하나 천자 의례로 시행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방택제는 1031년(고려 현종 22)부터 1127년(고려 인종 5)까지 시행했음을 전하는 몇 개의 기사만이 전할 뿐 제사 의례와 제도상의 규식 등에 관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초에도 이에 관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폐지되었던 듯하다.
종묘는 제후오묘(諸侯五廟)의 원리에 따라 태조와 4대조를 모셨으나, 동세일묘(同世一廟)가 원칙이었다. 한식과 납일(臘日)의 제사, 사시(四時) 제향을 합쳐 매년 여섯 차례의 제향과 3년에 한 차례의 협제(祫祭), 5년에 한 차례의 체제(禘祭), 그리고 삭망제(朔望祭) 등이 있었다. 축문은 친행(親行)에는 축책(祝冊)에 쓰고 섭행(攝行)에는 축판에 쓰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송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별묘는 친진(親盡)된 국왕을 모신 사당이고, 경령전은 태조와 4대 선조의 어진(御眞)을 모신 곳이었다.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신 제단으로, 국가와 농사의 상징이었다. 고려시대의 사직제는 수축(修築)과 신축 혹은 기고류(祈告類)의 제례 행사에 관한 내용이 전부이다. 정기 제사와 관련된 실제 행사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제사 시일은 중춘(仲春), 중추(仲秋)와 납일로서 송의 제도와 같았다. 규모는 사단과 직단이 따로 있으며, 너비 5장, 높이 3척 6촌이며 사방으로 층계를 내었다. 다만 유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아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의 신위는 북쪽에서 남향하도록 규정하였으며,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배위로 하였다. 대사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으로 태뢰(太牢)를 쓰지 않고 소뢰(小牢)를 사용하였음이 특이하다. 고려의 대사는 무신난 이후 점차 무너져 가다가 몽고 간섭기를 거치면서 와해되었다. 원명(元明)교체기에 복구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명의 간섭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국가 제사 전례의 정비를 서둘렀다. 태종조 후반과 세종조에 그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추진되어 『세종실록』 「오례」로 나타났는데, 이때에는 대사에 사직과 종묘만이 남았다. 고려시대의 제사인 별묘와 경령전, 제릉, 천자의 예인 원구와 방택은 제외하였다. 영녕전(永寧殿)이 추가된 것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와서이다. 결국 조선시대 국가 제사의 대사는 종묘와 사직 및 영녕전 세 가지였다.
그렇다고 원구제가 전혀 행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초의 원구제는 국가의 사전 체제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세종대 중반까지 천재지변을 당하면 국왕이 참석하지 않는 기우제 혹은 기곡제만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세조 때에 와서 원구제를 복구하여 1457년(세조 3)에 호천상제(昊天上帝)와 황지기(黃地祇) 등 천지에 제사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 제사 시일은 매년 정월 15일로 정례화하였다. 그러나 예종대 이후 폐지하고 말았다.
조선시대의 종묘와 사직은 곧 국가의 상징이었다. 태조의 즉위교서에서는 첫 번째 강령으로 “천자는 7묘(七廟)를 세우고 제후는 5묘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을 세우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라고 하여, 좌묘우사(左廟右社)의 건설 계획을 밝혔다. 그에 따라 1394년(태조 3) 12월에 한성의 궁궐과 종묘의 건설에 착수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다.
종묘 제도는 제후 5묘제의 원칙에 따라 시조와 4대조를 포함하는 다섯 신위를 봉안하는 제도였다. 4대를 벗어나 친진이 된 신주는 체천(遞遷)하였다. 태조는 이 제도에 따라 그의 4조를 왕으로 추봉하고, 종묘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개성에 임시로 조성된 종묘에 신주를 모시고 장자인 이방우(李芳雨)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다가,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완공함으로써 이곳으로 이안(移安)하였다. 그 후 1410년(태종 10) 7월에 태조가 훙서(薨逝)하여 그 신주를 부묘(祔廟)함으로써 종묘의 5실은 모두 차게 되었다.
1421년(세종 3) 4월에 정종이 훙서하자 그 부묘가 논란이 되었다. 이미 5묘가 다 찬 상태였으므로 정종의 신주를 어떻게 모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논의 결과 송나라의 예를 본떠 별도로 사조전(四祖殿)을 건립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종묘제는 동당이실제(同堂異室制)와 세실제(世室制)가 복합된 형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봉안해야 할 국왕의 신주가 증가함에 따라 증축이 불가피했다. 그리하여 1546년(명종 1)에 4칸을 증축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광해군 초에 복원하였다. 그 이후 1726년(영조 2)에 4칸, 1836년(헌종 2)에 4칸을 증설하여 현재와 같은 19실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사조전의 건립은 1421년 7월에 종묘의 서쪽에 터를 잡고서 공사를 시작하였다. 태종은 그 사당의 명칭을 영녕전이라 하였다. 그해 10월 영녕전이 완공됨에 따라 12월에 목조(穆祖)의 신주를 종묘에서 영녕전의 제1실로 이안하였다. 종묘에서는 익조(翼祖)의 신주가 제1실로 이안되고 그 이하의 신주도 차례로 옮겨졌다. 이후 종묘에 새 신주가 부묘될 때마다 친진이 된 익조와 도조(度祖)·환조(桓祖)의 신주가 차례로 영녕전에 체천되었다.
영녕전의 제일(祭日)과 제품(祭品)을 종묘와 견주어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되었다. 종묘보다 제품을 낮추고 제사 설행의 빈도를 줄여야 하는데, 영녕전의 신위가 종묘의 신위보다 선대이므로 이 문제의 해결에 적잖은 어려움이 따랐다. 여러 논란 끝에 세종은 영녕전에는 춘추 대향만 설행하고 생뢰(牲牢)와 제품은 종묘에 견주도록 정하였다.
이 춘추 대향은 종묘 제향과 같은 날에 행해졌으므로 국왕이 친행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1422년(세종 4) 윤12월에 영녕전의 춘추 대향은 대신이 섭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또한 헌관(獻官) 1명이 삼헌례(三獻禮)를 하던 것을 대사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3명의 헌관이 삼헌례를 행하는 것으로 행례 절차를 고치고, 제사 시일은 춘추의 맹월 상순으로 정했다.
사직단은 종묘의 완공과 거의 동시에 경복궁의 서쪽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돌신주와 신패는 『홍무예제』와 고려의 제도에 의거하여 만들었는데, 신패에는 태사지신(太社之神)·태직지신(太稷之神)이라 하였다. 그러다 1431년에 황희 등이 논의하여 송나라 제도와 『홍무예제』 및 건국 초기의 옛 제도에 의거하여 신위판을 만들되, 신호(神號)를 제법에 의거하여 국사지신(國社之神)·국직지신(國稷之神)이라 쓰고, 후토씨와 후직씨는 그전대로 배향하여 제사지내게 하였다.
『국조오례의』를 보면, 사직단은 국사(國社)와 국직(國稷)의 두 제단으로 구성되었다. 그 규모는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 “사는 동쪽에 있고, 직은 서쪽에 있다. 두 단은 각각 사방이 2장 5척이고, 높이가 3척이다. 사방으로 섬돌을 내는데, 각각 3층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석주(石柱)는 길이가 2척 5촌이며 사방 1척이라 하였으며, 유(踰)는 사방 25보 곧 15장이라 하였다.
사직제가 대제라고는 하지만, 조선초에 왕이 직접 제사를 올린 예는 극히 드물었다.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던 당시 치자(治者)들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종묘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관심은 높지 못하여 주로 기우제를 지냈다. 이외에 왕세자 책봉 등 국가의 대사가 있을 경우에는 사직에 고유하였으며, 기청(祈晴)과 보사제(報祀祭)도 행해졌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이상 기후로 한재(旱災)와 흉년이 심해지자 사직제가 강조되었다. 중종대부터 중시되기 시작한 기곡제는 처음에 선농단(先農壇)에서 지내다가, 광해군대에 이르러 사직단에서 사직제와 별도로 정월에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규정에 의거하여 국왕의 친제가 이루어지고 섭행을 상례로 삼았다가, 1744년(영조 20)에 간행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사직 기곡제가 대사로 등재되었다.
조선후기에 경모궁(景慕宮) 제향이 신규로 대사에 편입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경모궁 제사를 왕이 친행할 때는 대사로 거행하도록 한 것이다. 경모궁은 한양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건립되었다. 그 후 대한제국 건국 후에 국격(國格)에 맞는 국가 의례의 재정비가 추진되어 원구제가 복구되었다. 원구단은 경운궁 동쪽의 남별궁(南別宮) 터인 회현방(會賢坊)에 건립되었다.
원구제는 황제국의 의례인 제천 의례로, 정위는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황지기이며, 종향위(從享位)는 대명야명(大明夜明)·북두칠성·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주천성신(周天星辰)·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악(五嶽)·오진(五鎭)·사해(四海)·사독(四瀆)·명산대천(名山大川)·성황(城隍)·사토(社土)이다. 1899년(고종 36) 12월에 조선 태조가 배천(配天)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대한예전(大韓禮典)』
김해영, 『조선초기 제사전례 연구』, 집문당, 2003.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등(鐙)
정의
국가 제사 의례에 사용된 주요 제기(祭器)로서 대갱(大羹)을 담는 그릇.
개설
중국 송나라 철종 때 진상도(陳祥道)가 편찬한 『예서(禮書)』에는 ‘등(登)은 와두(瓦豆)이다. 『의례(儀禮)』에는 ‘등(鐙)’ 자를 썼으니, 그것은 대갱을 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등은 국을 담는 형(鉶)과 짝을 이루어 둘은 각각의 제사에서 동일 수량으로 진설되었고, 상호 밀접한 연관성 때문에 항상 ‘형’과 함께 거론되었다.
등에는 조미하지 않은 담박한 국인 대갱을 담았고, 형에는 간을 하여 오미(五味)의 맛을 낸 화갱(和羹)을 담았다. 『예기(禮記)』의 정씨(鄭氏) 주(註)에 ‘대갱은 육즙뿐이요, 양념이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저민 날고기뿐이니, 다만 고기를 삶아서 그 즙만 마시고, 양념을 칠 줄은 알지 못하였다. 뒷세상 사람이 제사지낼 적에는 이미 옛날의 제도를 존중하는 까닭으로, 다만 육즙만 담아 놓고 이를 대갱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중국 고대 때부터 있어온 것으로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의 『세종실록』「오례」에 처음으로 관련 도설(圖說)이 확인된다. 이후 성종대의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대한제국 시기의 『대한예전(大韓禮典)』 등 역대 전례서 및 의궤에 ‘등’의 도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세종실록』「오례」에 중국 고대의 삼례(三禮), 즉 『주례(周禮)』, 『의례』, 『예기』의 하나인 『의례』에 “등(鐙) 자를 썼다.”라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등의 연원은 『의례』의 편찬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형태
굽이 달린 제기로, 뚜껑이 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종묘의궤(宗廟儀軌)』
『대한예전(大韓禮典)』
마조제(馬祖祭)
정의
나라에서 말[馬]의 조상인 천사방성(天駟房星)에게 지내는 제사.
개설
마조제는 전근대에 말, 특히 전투력의 근간인 전마(戰馬)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시행되었다. 이것은 말과 관련된 다른 제사, 즉 말을 타는 방법을 창안한 마굿간의 토신(土神)과 후토(后土)를 합한 마사(馬社), 말을 해치는 재앙의 신인 마보(馬步), 그리고 처음으로 사람에게 목방(牧放)을 가르쳐준 신인 선목(先牧) 등에 대한 제사와 함께 거행되었다. 제단 역시 마사단·마보단·선목단 등과 함께 전관목장(箭串牧場) 안에 있었다.
마조제는 고려시대에 소사(小祀)로 국가 제사에 포함되었는데, 조선시대에도 역시 소사로 설정되어 정3품관이 왕의 명을 받아 시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5세기에는 4군 6진의 개척 및 여진 정벌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의 영향을 받아 국가 제사로서 꾸준히 시행되었지만, 16세기 이후에는 군사력 특히 기병의 전투력이 약화되면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군사와 관련된 제사가 관왕묘(關王廟)·선무사(宣武祠)·민충단(愍忠壇) 등 명나라와 연관된 제사를 중심으로 재편됨에 따라 재건되지 못하였고, 결국 18세기에 공식적으로 국가 사전(祀典)에서 제외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는 마조제가 소사의 항목에 포함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의식이 수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제단 규모는 넓이가 9보(步), 높이가 3척(尺)으로 사면에 계단[四出陛]이 있었으며, 낮은 담인 유(壝)는 25보였다. 그리고 제사의 폐백을 태우는 요단(燎壇)이 별도로 있었다.
마조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2년(태종 13) 4월에 소사로 규정되었는데, 이때 제단의 규모는 고려시대의 그것과 동일하였다. 그러다가 태종대 말년에 사방이 2장 1척, 높이가 2척 5촌, 1유의 형태로 축소되었다. 그 규모가 제후국의 체제에 맞추어짐으로써 고려시대에 비해 대폭 축소된 것인데, 성종 연간에 편찬된 예전(禮典)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마조제는 성종대까지 지속되었지만, 그 뒤부터 효종대까지는 그 시행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영조·정조 시대에 제사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몇 차례 있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결국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정조대의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는 현재 시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사의 대상에서조차 제외함으로써 완전히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마조제는 중춘(仲春)의 중기(中氣) 후 강일(剛日) 가운데 길일을 택하여 시행하는데, 3품관이 제관(祭官)으로서 의식을 주관하였다. 사용되는 희생은 돼지 1마리로, 제사 전날 헌관(獻官)이 희생과 제기를 검사하였다.
제사는 소사의 격에 맞추어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 등 3일의 재계를 거친 뒤 시행되었다. 전체 의식은 4단계로 구성되었다. 1단계는 헌관이 신위에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인데, 세 차례 향을 올린 뒤, 폐백을 올리고, 부복(俯伏)하는 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2단계는 작헌례(酌獻禮)로, 헌관이 술잔을 올린 다음 축문을 읽는 초헌례와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아헌례, 세 번째 술을 올리는 종헌례로 이루어진다. 3단계는 신위에게 올린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수조(受胙)의 과정이다. 4단계에서는 행례(行禮)가 끝난 후 뒷마무리를 한다. 변두(籩豆)를 거둔 뒤 폐백을 태우는 것을 지켜보는 망료(望燎) 의식을 행하고, 신위판을 봉안하며, 헌관 이하가 퇴장하는 등의 순서로 이어진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명사(明史)』
『송사(宋史)』
이범직, 『韓國中世 禮思想 硏究』, 일조각, 1991.
논총간행위원회, 『동봉신천식교수정년논총』, 경인문화사, 2005.
한형주, 『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일조각, 2002.
망기(望祈)
정의
산천의 소재지까지 갈 수 없을 때, 특정 장소에 설치한 제단에 신위를 모시고 멀리서 해당 산천 쪽을 바라보며 지내던 기고제.
개설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는 일정한 주기마다 지내는 정기제와, 기원하거나 아뢸 일이 있을 때 거행하는 부정기제인 기고제(祈告祭)로 구분할 수 있다. 망기는 그중 산천에 지내는 기고제 가운데 하나로, 해당 산천의 제단이 있는 지방까지 갈 수 없는 경우 가까운 곳에 설치한 제단에 신위를 모시고 해당 산천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내용 및 특징
망기를 지낼 때는 술잔을 올리는 헌관(獻官)이 신위 앞에 섰을 때 신위 너머의 산천을 바라보는 형식을 갖춰야 했으므로, 신위가 단(壇)의 안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의 국가 전례(典禮) 중 망기의 형식으로 거행한 의례는, ‘시한북교망기악해독급제산천의(時旱北郊望祈嶽海瀆及諸山川儀)’와 ‘구우영제국문의(久雨禜祭國門儀)’ 등이 있었다. ‘시한북교망기악해독급제산천의’는 날이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기 위해 북교(北郊)에 단을 설치하고, 큰 산과 바다와 강 즉 악·해·독과 오방(五方) 산천 등 총 19위의 신위를 모시고 지내던 제사를 말한다. 그에 비해 ‘구우영제국문의’는 비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을 때 날이 개기를 빌기 위해, 도성의 사대문에서 해당 방위 산천의 신위를 모시고 지내던 기청제였다.
영조대 이후에는 왕이 직접 북교에 나아가 거행하는 기우제인 ‘친제악해독기우의(親祭嶽海瀆祈雨儀)’와, 도성이 아닌 지방의 성문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원하던 ‘구우주현영제성문의(久雨州縣禜祭城門儀)’ 등도 망기 형식으로 거행하였다.
변천
『서경(書經)』「순전(舜典)」에는 ‘왕이나 제후가 산천에 망제를 지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9주(州) 즉 전국의 명산(名山)·대천(大川)·5악(嶽)·4독(瀆)을 바라보면서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예조(禮曹)에서 올린 「기우계목(祈雨啓目)」에, 북교에서 망기를 행할 때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예에 따라 재랑(齋郞)으로 하여금 ‘운한편(雲漢篇)’을 외우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16년 6월 5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서경(書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