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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계암집(溪巖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령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령(金坽)의 시문집. 6권 3책. 목판본. 필사본으로 전해오다가 1772년(영조 48) 그의 현손 굉(紘) 등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상정(李象靖)의 서문과 권말에 이세택(李世澤)과 굉의 발문이 있다.
이 책은 권1∼3에 시 326수, 권4·5에 서(書) 24편, 소 2편, 제문 6편, 표·전(表箋) 4편, 전(傳)·기·녹(錄) 각 2편, 권6은 부록으로 행장 2편, 묘갈명 1편, 제문 10편, 만사 28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짤막한 절구보다는 고시·율시·배율이 많이 실려 있으며, 서는 친지와 아들·조카들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소 중 하나는 인조가 벼슬을 내려 부른 데 대하여 사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내의 유생들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5현의 문묘종사를 청한 내용인데, 이 상소는 올려지지 않았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계양유고(桂陽遺稿)
조선 말기의 학자 이계양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이계양(李桂陽 : 계양은 호이며 이름은 미상)의 시문집. 7권 3책. 석인본. 이 책은 1940년 큰아들 창(昶)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심선택(沈選澤)·서상훈(徐相勳)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간기가 있다.
권1에 시 152수, 권2에 서(書) 63편, 권3에 송(頌) 1편, 소 1편, 장 4편, 책(策) 1편, 논 2편, 사(辭) 3편, 권4에 서(序) 19편, 기 12편, 발 8편, 권5에 문(文) 21편, 설 9편, 권6에 명 4편, 묘표 8편, 잡저 10편, 권7에 경의문대(經義問對)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평이하게 자신의 뜻을 묘사하고 있다. 〈산거 山居〉·〈야회 夜懷〉·〈침상 枕上〉 등은 은일적인 생활의 고독감을 표현했고, 〈전가 田家〉는 누에치는 아낙네의 정회를 잘 그리고 있다. 〈경관춘색 京館春色〉은 서울의 객관(客館)에서 남녀간의 춘정을 읊은 것으로, 서정과 낭만이 두드러진다. 〈상시 傷時〉는 당시의 어지러운 세태를 한탄하며, 자신의 심적 갈등을 토로한 시이다. 〈서시 西施〉 또한 염정을 읊은 시로, 역사인물을 소재로 한 것이다. 〈취후 醉後〉는 청산녹수의 자연에 돌아가 세상 돌아가는 대로 마음 편히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밖에도 신부(新婦)의 아름다운 자태를 묘사한 〈신가랑 新嫁娘〉을 비롯, 〈관등 觀燈〉·〈어옹 漁翁〉·〈관해 觀海〉 등 그의 시적 역량을 평가할만한 작품이 많다.
서(書)에는 〈태극교답서 太極敎答書〉가 있는데, 향교 재산과 관련된 문제로 보낸 서찰이다. 책의 〈집도삼책 戢盜三策〉은 1894년(고종 31) 동학운동과 거듭된 흉년으로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도둑떼가 창궐하는 실정을 지적하며, 이를 근절할 방책들을 적은 내용이다.
잡저의 〈김갑두순의사적 金甲斗殉義事蹟〉은 동학운동 때 전라남도 강진의 관리로 순절한 김갑두의 사적에 대하여 쓴 글이다.
이 밖에 〈문폐 文弊〉와 〈경세 警世〉는 모두 당시의 어지러운 세태와 관련하여 이를 개탄하는 내용으로, 동학운동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권7의 〈경의문대〉는 ≪대학≫·≪중용≫·≪논어≫·≪맹자≫ 등에 관해 총 109개 항목으로 나누어 경의(經義)를 해석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계와집(桂窩集)
조선 후기의 문신 조비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 조비(趙備)의 시문집. 8권 1책. 필사본. 서문·발문이 없어 편찬경위나 연도를 알 수 없다. 권1∼6에 시 197수, 권7에 축문 2편, 제문 1편, 애사 3편, 권8에 서(序) 4편, 상량문 1편, 교서 1편이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묘갈명이 있다.
이 가운데 시는 전체적으로 담백하며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질박하고 조촐한 시어를 사용하여 서술적인 문장체를 연상시킬 만큼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주로 도학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교훈적인 주제가 많으나, 관념에 흐르지 않고 뛰어난 은유와 사실적 표현으로 교훈시의 한계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는 너무 지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다양한 시체를 구사하여 참신한 기법과 형태를 개척하고자 과감한 파격을 주저하지 않은 점이다.
권2의 오언배율 〈춘일현재술회 春日縣齋述懷〉는 150운(韻)이나 되는 장시로, 자신의 개인적인 고뇌와 회의 및 정서 등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특히, 이미지 연결이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간혹 파격적인 면이 오히려 참신한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준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색에서 나온 심오한 지성미와 엄격한 절제미가 잘 조화를 이룬 뛰어난 작품이다. 서(序) 가운데 〈제야서 除夜序〉는 세월의 무상함, 인생의 허무감을 비장하게 표현한 것으로 단아하고 깔끔한 문체가 돋보인다.
〈노탄분로서 盧灘分路序〉는 한창 때의 큰뜻과 장한 기상이 사라지고 백발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친구와의 애틋한 우정을 표현한 글이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계원필경(桂苑筆耕)
영문표기 : Gyewon pilgyeong / Kyewŏn p'ilgyŏng / collection of essays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최치원의 시문집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집. 885년(헌강왕 11) 중국 회남(淮南)에서 귀국하여 그 이듬해인 886년(정강왕 1) 그의 나이 서른살이 되던 해에 당나라에 있을 때의 작품을 간추려 정강왕에게 바친 문집이다.
≪계원필경≫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계원필경≫ 20권과 아울러 ≪사시금체부 私試今體賦≫ 1권과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 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5권을 함께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고변(高騈)의 휘하에서 4년간 창작한 작품이 1만여 수나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태(淘汰)되고 그 중 10분의 1 내지 2 정도의 분량이 ≪계원필경≫ 20권으로 편집되었다.
≪계원필경≫의 제목은 “모래를 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집(桂苑集)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에 기식하며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계원필경≫은 서거정(徐居正)이 “우리 동방의 시문집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부득불 이 문집을 개산비조(開山鼻祖 ; 시조)로 삼으니 이는 동방 예원(藝苑)의 본시 (本始)이다.”라 칭하였다. 현전 최고 최초의 개인문집이다.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재직할 때의 작품인만큼 우리 나라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시문이 대부분이다.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은 고려인이며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고변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다.
문집인 ≪계원필경≫ 20권과 ≪사륙 四六≫ 1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계원필경≫이 ≪신당서≫에 실릴 만큼 국제적인 저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원필경≫ 서문 말미에 “중화 6년 정월일 전도통순관 시어사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장주(中和正月日前都統巡官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猿狀奏)”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 받은 관직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연호를 적고 있음이 특이하다.
이 때문에 ≪계원필경≫을 사대문학의 남상(사물의 처음이나 기원)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신라가 당나라의 법제를 대부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계원필경≫이 1,000여 년을 두고 인멸되지 않고 계속 간행된 까닭은 후대 과문(科文)의 한 전범(典範)으로 원용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문집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의 유려한 문체가 수많은 전고(典故)를 담은 채로 수록되어 있다.
이 문집과 함께 왕에게 올린 8권의 저술 이외에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歷≫과 문집 30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에 이를 참고하였음은 분명하다.
최치원의 정치적 경륜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 時務十餘條〉가 있다. 지금 전하지는 않지만 후세 정치가들의 상소문의 모범이 되었다.
≪고운선생문집 孤雲先生文集≫은 후대에 와서 여러 책들에 실린 최치원의 글들과 금석문에서 나온 것들을 모아 으로 후손 최국술(崔國述)이 1926년에 편찬하였다. 같은 해에 최면식(崔勉植)·최영하(崔榮夏)가 또한 편찬한 바 있다.
≪고운선생문집≫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다 요연하게 접할 수 있다. ≪계원필경≫은 최치원 자신의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은 거의 없다. 대부분 고변을 위하여 대작(代作)한 것이다. 우리 나라와는 깊은 관계가 없는 생소한 중국의 사실들로 점철되어 있다.
≪계원필경≫ 20권의 체재와 내용은 서문을 서두로 하여 권1·2에 표(表) 20수, 권3에 장(狀) 10수, 권4·5에 주장(奏狀) 20수, 권6에 당장(堂狀) 10수, 권7∼10에 별지(別紙) 80수, 권11에 격서(檄書) 4수와 서(書) 6수, 권12·13에 위곡(委曲) 20수, 권14에 거첩(擧牒) 50수, 권15에 재사(齋詞) 15수, 권16에 제문·서(書)·소(疏)·기 10수, 권17에 계(啓)·장 10수, 권18에 서(書)·장·계 25수, 권19에 장·계·별지·잡저 등 20수, 권20에 계·장·별지·제문·시 등 40수로 구성되었다.
≪계원필경≫ 권1∼5까지는 고변이 황제에게 올리는 표와 장을 최치원이 대필한 것이다. 권6∼권10까지는 고관대작들에게 주었던 공문별지(公文別紙)이다. 권11은 유명한 〈격황소서 檄黃巢書〉를 비롯한 격문과 서(書)로 짜여져 있다.
이들은 대체로 받는 이들을 설득시키는 힘이 강한 변려문으로 많은 고사를 인용한 화려한 문체이다. 풍부한 고사와 적절한 대구(對句)와 압운(押韻)은 후세인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최치원의 변려문은 이덕무(李德懋)와 홍석주(洪奭周)에게 “중국에서 유행이 지나 한물간 문체를 모방한 아류(亞流)에 불과하다.” 고 혹평을 받았다. 그의 문재(文才)는 역시 후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계원필경≫ 권15의 〈재사〉 15수는 당대(唐代)의 도교(道敎)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고, 권16의 〈보안남록이도기 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越南)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권17에서 사도상공(司徒相公)인 고변에게 중국 역대의 영웅들을 나열하여 그에게 대비시키며 칭송한 〈기덕시 記德詩〉 30수는 주제가 너무 노골화되어 시로서의 품격을 잃고 있다.
시를 통하여 그의 상사인 고변을 장량(張良)에 비유하여 천하를 평정한 국태민안의 주역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또, 〈안남 安南〉이라는 시에서는 남만(南蠻)인 안남을 마음껏 멸시하고 있다.
≪계원필경≫ 권20은 귀국 직전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자신의 정감을 읊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 〈사허귀근계 謝許歸覲啓〉에서는 자신의 짙은 정회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삼가 저는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지금 벌써 스물 아홉이 되었읍니다. 백 번 천행(天幸)으로 살아나 덕문(德門)에 의탁함을 얻고, 갑자기 관영(官榮)을 더하여 이에 명복(命服)을 더럽혔으니, 일신에 조우(遭遇)가 만 리에 빛납니다. 따라서, 멀리 있는 어버이는 문에 기대이던 생각이 조금 위로될 것이고, 떠났던 자식은 벼슬을 얻은 것이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이별한 지 오래되고 바다에 뜰 길이 먼지라 머무르려니 까마귀의 정에 마음이 상하고 떠나려니 견마(犬馬)의 그리움을 품게 됩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잠깐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와서 모셔서 우러러 어지신 봉토에 의탁하여 영원히 비루한 자취를 편안하게 하겠습니다.”
〈사허귀근계〉에는 조국과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과 당나라에서 얻은 영광이 얽힌 착잡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금의환국(錦衣還國 ; 출세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감)의 꿈에 부푼 최치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당나라에서 얻은 모든 영광을 고국의 어버이에게 보인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당나라를 떠나 고국에 가 있다. 이에 귀로의 뱃길의 무사함을 비는 간절한 마음이 〈제참산신문 祭巉山神文〉에 절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최치원은 토속신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것처럼 보이며, 중국의 민속신앙에도 긍정적이었다. 민속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신라 화랑도의 풍류(風流)를 유불선(儒佛仙)을 수렴하는 주체로 파악한 그의 의식과도 접맥된다.
≪계원필경≫에는 시가 60수 정도 된다. 그 중에서 권17의 시 30수는 송덕시(頌德詩)인만큼 문학적 가치에는 한계가 있다. 권20의 시 30수는 이와는 달리 진솔한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혁명을 노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야소 野燒〉에서는 난세에 옥과 돌이 구분도 없이 타버리는 현실을 박진감 있게 노래하고 있다.
≪계원필경≫의 〈산정위석 山頂危石〉에는 자존(自尊)의 긍지와 이기적인 세태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다. 그가 귀국할 무렵에는 당나라도 이미 국운이 쇠퇴되어 있었다. 신라 또한 계림황엽(鷄林黃葉 ; 신라가 가을을 맞이하여 잎이 누렇게 됨. 나라가 망할 대가 됨)의 만종이 울리는 때였다. 그는 후삼국의 난세에서 반유반선반불(半儒半仙半佛)의 내면적 갈등에서 신음하기도 하였다.
≪계원필경≫은 고변을 위한 대필과 공식문서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중국의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 나라의 저술에 머무르지 않고 동양의 명저로 자리를 굳힌 책이다.
따라서 최치원의 진면목은 오히려 ≪고운선생문집≫에서 찾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는 후삼국의 난세를 살면서 국론의 분열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하면서 방랑의 삶을 살다가 만년에는 해인사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참고문헌>>三國史記
<<참고문헌>>新唐書
<<참고문헌>>東文選(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76)
<<참고문헌>>崔文昌侯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참고문헌>>孤雲集(崔濬玉編)
<<참고문헌>>韓國의 名著(玄岩社, 1980)
계은문집(桂隱文集)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지사 이면주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지사 이면주(李冕宙)의 시문집. 4권 2책. 석인본. 1965년 후손 상휘(相徽)·진재(震宰)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말에 진재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69수, 소 6편, 유차(遺箚) 1편, 권2에 서(書) 43편, 잡저 3편, 서(序) 5편, 기(記) 2편, 발지(跋識) 4편, 상량문 2편, 고유문 2편, 제문 13편, 묘지명 2편, 묘갈명 6편, 권3에 행장 1편, 유사 3편, 권4는 부록으로 연보·정종목록(正終目錄)·행장·묘비명·유사·고유문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시에는 〈한도팔경 漢都八景〉의 연작시(連作詩)를 비롯하여 서정이 강하게 투영된 〈화매 畫梅〉·〈추야 秋夜〉·〈산거 山居〉 등과 김흥락(金興洛)·이교영(李敎英) 등에 대한 만시 등 다양한 작품이 고루 실려 있다.
소 가운데 〈사정언겸진육조소 辭正言兼陳六條疏〉는 무고를 당하여 무주에 좌천되었다가 1864년(고종 1) 사면되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을 때 올린 것으로, 국정에 대해 입지(立志)·강학(講學)·애민(愛民)·용인(用人)·숭검(崇儉)·통변(通變) 등 6개 조항으로 대별하여 의견을 제시하였다.
〈을사팔조소 乙巳八條疏〉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국정이 침탈됨을 원통히 여겨 국정의 쇄신을 촉구한 것으로, 당시의 국내사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청참오적소 請斬五賊疏〉는 을사오적의 처벌을 상소한 것이다.
서(書)는 주로 김숙(金熽)·이헌영(李0x9C97永)·조병호(趙秉鎬) 등과 시사(時事)에 대해 의논한 것들이다.
그 밖에 잡저에는 ≪주역≫ 공부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학역의례 學易儀例〉와 〈영해박씨족보서 寧海朴氏族譜序〉·〈내곡지 柰谷誌〉 등이 있다.
부록인 행장·연보 등에는 당시의 혼미한 정국과 정계의 움직임 등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암고서박물관·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계은유고(溪隱遺稿)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립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립(李廷立)의 시문집. 1책. 목판본. 권두에 이항복(李恒福)의 서문과 권말에 이광좌(李光佐)의 발문이 있다.
전(箋) 6편, 계(啓)·교서(敎書)·사문(赦文)·비답(批答)·소·서(序)·기·상량문·제문·부(賦) 각 1편, 시 186수, 부록에 묘지명·시장(諡狀)·사제문(賜祭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가운데 〈평난공신사사연전 平難功臣謝賜宴箋〉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반란을 평정시킨 대소공신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연회를 베풀 것을 권유한 내용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일신의 생사를 생각하지 않고 종묘사직을 위하여 역경을 극복한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내려, 후대에 진충사국(盡忠事國)의 귀감이 되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참역괴정여립사문 斬逆魁鄭汝立赦文〉에서는 역적 정여립의 엄단을 촉구하였다. 〈처강호우기군부 處江湖憂其君賦〉는 지방의 벽촌에 은거하는 한 선비가 국사를 걱정한 의제(擬題)로서, 재덕이 부족하고 경륜이 천박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평화로운 시대가 되게 보필하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근심이라고 하였다.
시는 대부분이 지우들간에 증별한 것으로 감동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 〈효기 曉起〉는 천지만물이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휴식함으로써 다시 내일을 준비하는 원리를 생각하며, 새벽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느낀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계음만필(溪陰漫筆)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윤흔의 만필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윤흔(尹昕)의 만필. 3권 3책. 필사본. 권1에 기대승(奇大升)·성수침(成守琛) 등 78편, 권2에 성세창(成世昌)·장주(莊周) 등 105편, 권3에 이언적(李彦迪)·조지(趙摯) 등 10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인물·역사·경전·지리·문물·제도·풍속·예절 등 광범위한 내용을 일정한 순서나 체계 없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기존재 奇存齋〉는 기대승의 인품을 기술한 것으로, 그의 성품이 강직하여 비록 스승이라도 옳은 일에 대하여 양보하지 않았다고 평하였다.
인종이 죽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복상문제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는데, 이 때 스승 이황(李滉)의 의견에 반대하여 교정하였다. 뒤에 이황은 기대승이 아니었으면 만고의 죄인이 될뻔하였다고 술회하였다는 일을 예로 들었다.
〈기묘사화〉에서는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명리를 탐하는 소인배임을 지적하고,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이언적 등의 죽음을 탄식하였다.
그 밖에 김인후(金麟厚)·조경양(趙景陽)·김계휘(金繼輝)·노수신(盧守愼)·김안국(金安國)·김시습(金時習)·이준경(李浚慶)·유성룡(柳成龍) 등의 인물에 대한 평론과 일화를 소개한 것이 있다.
또한, 〈갑자사화〉·〈신임사화〉·〈임진왜란〉 등 국가의 변고와 화란에 대하여, 사건과 관련된 인물·사실 등을 기록한 것이 있다. 그리고〈강릉편 江陵篇〉·〈월정사〉·〈동선역 洞仙驛〉·〈환선정 喚仙亭〉 등은 경관을 능란한 필치로 묘사하고, 그 곳에 대한 전설과 일화를 적은 것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계음집(溪陰集(조팽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조팽년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조팽년(趙彭年)의 시문집. 6권 2책. 목활자본. 1899년 후손 창하(昌河)·면형(冕衡) 등이 편집, 박정양(朴定陽)의 후원으로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권말에 면형의 후서가 있다.
이 문집은 권1∼3에 시 272수, 부 15편, 권4·5에 논 2편, 전 2편, 표 1편, 문 1편, 서(書) 3편, 기(記) 1편, 잡저 1편, 권6은 부록으로 행장 1편, 묘표 1편, 호성공신도감정문(扈聖功臣都監呈文) 2편, 전지(傳旨) 1편, 주봉서원축문(胄峰書院祝文) 1편, 금릉창의록부(金陵倡義錄附)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용만술회 龍灣述懷〉와 〈남귀부 南歸賦〉에는 임진왜란 당시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의주까지 갔을 때 느낀 참혹한 정경과 비참한 피란생활이 잘 묘사되어 있고, 뒤에 서울로 돌아올 때의 상황과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강개한 우국충정이 담겨 있다.
〈상이통제 上李統制〉는 이순신(李舜臣)에게 올린 시로,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여 왜적을 무찌른 공로를 찬양하고 더욱 힘써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장량(張良)과 제갈량(諸葛亮) 등 옛날 중국의 명장들을 제목으로 삼아 지은 시에는 그들의 충성심을 간접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도 〈역수비가부 易水悲歌賦〉라든가 〈범순인론구채확론 范純仁論救蔡確論〉에서는 나라를 위하는 단심을 비유하여 묘사하고,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는 데도 공사가 있어 공에서는 사가 개입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잡저인 〈독서강요〉에서는 학문을 하는 방법은 독서에 있고, 독서의 근본은 경(敬)을 위주로 하고 심지를 확고히 가지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宣祖實錄
계음집(溪陰集(조한빈))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조한빈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조한빈(曺漢賓)의 시문집. 4권 1책. 석인본. 1964년 9대 손 남황(南璜)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경연(奇慶衍)의 서문과 권말에 11대손 원영(瑗永)의 발문이 있다.
본문의 권수에 영사원종공신녹권(寧社原從功臣錄券) 1편, 권1·2에 부 1편, 시 127수, 권3에 서(書) 2편, 설 1편, 서(序) 2편, 발 2편, 제문 5편, 권4는 부록으로 가장 1편, 행장 1편, 묘표 1편, 시 6수, 서(書) 2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영사원종공신녹권〉은 1628년 유효립(柳孝立)이 광해군을 상왕으로 하고 인성군공(仁城君珙)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적발한 데 대한 공훈의 녹권이다. 시는 서정적인 자연시와 병자호란 때의 정황을 서술한 것으로서 당시의 실상파악에 도움이 된다.
설 가운데 〈예설〉은 인간에 있어서의 예의 중요성과 예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논술함과 아울러, 인의·도덕이 음양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역설한 내용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