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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 지켜야 할 사명
2014. 8. 24(주일낮예배) 열왕기상 21:1-16
제가 아는 집사님 중에 미국에 이민을 가신 분이 있다. 그 집사님은 한국에서 대기업에서 금형설계를 기술자로 이사까지 하신 분이다. 그런데 미국회사에서 스카웃 제안을 받아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집사님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한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다. 금형설계사는 설계를 맡긴 회사의 사장단앞에서 영어로 프리핑을 해야 하므로 고급영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집사님은 생활영어도 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회사를 나온 후부터 집사님은 많은 직장에 이력서를 넣어야 했고, 결국 집사님이 들어간 회사는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작업반장이었다. 금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집사님은 금형이 닳거나 변형되어서 기계가 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니 늘 와이셔츠 입고 회사에 다니던 집사님이 이제 작업복을 입고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엄청 고생을 하였던 집사님은 직장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집사님은 어느 때와 같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현대자동차 임원들이 회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집사님의 후배가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일을 하다가 후배를 본 집사님은 너무 반가와서 달려가서 손을 잡고 악수를 했는데 그 후배의 말이 집사님에게는 충격이었다. 선배님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해머로 한 대 맞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집사님은 미국에 이민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집사님은 장애를 가진 딸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여 첫딸을 낳았는데 한쪽 다리에 고관절이 없는 선천성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때 의사선생님은 평생 걷지 못하고 앉아서 살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집사님이 그 아이를 데리고 고칠 수 있는 모든 병원을 다 찾아다녀서 지금은 다리를 매우 심하게 절지만 두다리로 걸어 다니고 있다. 그런데 집사님은 이제 그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간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딸이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집사님이 미국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있으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이유였다. 집사님은 온 몸이 부숴진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딸이 자립할 수 있도록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에 대부분은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이민 온 것을 후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후회하지 않고 감사하면서 힘차게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이 자립하여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이 있었던 집사님은 후회가 없는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생명바쳐서 이루고 싶은 그 무엇이 있는가?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내용을 한번 보시기 바란다. 아람의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침공하였다. 그때 아람의 벤하닷은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것이니라 고 말할 때 아합은 저항하지 못하였다. 아람의 군사력과 기세에 눌린 아합은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아합이 신하들과 회의를 했을 때 신하들이 아람의 벤하닷의 말을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벤하닷의 명령을 거역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그 전쟁에서 누가 승리하였겠는가? 아합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었는데 한 선지자가 와서 시키는대로 행하여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다. 그리고 선지자는 일 년후에 다시 아람의 군대가 침략할 것이라고 힘을 키우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합은 일 년동안 힘써 군대를 키웠지만, 일년 후 아람의 벤하닷이 침략하였을 때 그의 군사를 의지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군대는 염소떼와 같이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선지자가 와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래서 아합은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이 있을 후에 아합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왕궁 가까이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나봇이 거절하여 버린 것이다. 그렇게 거절당한 아합의 모습을 한번 보기 바란다.
(왕상 21: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하나님이 아람의 벤하닷의 손에서 사마리아를 구원하여 주었다. 그러면 그 승리를 경험한 아합이라면 이제 자신의 삶에 대하여 뭔가 다른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합은 자기 궁궐 옆에 있는 포도원을 가지지 못해서 근심하고 침상에 누워 밥도 먹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사서 그것으로 크고 놀라운 일을 계획하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채소밭을 꾸미고 싶어서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 2011년 9월 23일 중국집 배달원이 강남구 일원동의 한 교차로에서 유턴을 하던 도중에 맞은 편에서 오던 아반떼 자동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로 54세의 김우수씨는 이틀동안 홀로 병실에서 투병하다가 쓸쓸히 죽어갔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기에 가족은 아무도 없었고, 또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는 김우수씨가 죽은 후에 각 신문사는 김우수씨의 사망소식을 대서특필하였고, 온 국민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김우수씨는 7살 때 버려져서 고아원에서 자랐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그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홧김에 불을 질러서 그는 방화범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우수씨가 교도소에서 출소하기 얼마 전에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출소한 후에 자기보다 더 어렵고 힘든 어린아이들을 돕기 위하여 고시원 쪽방촌에 살면서 매달 5-10만원씩 5년동안 후원을 하고 살았다. 뿐만 아니라, 고작 70만원의 월급을 받고 살면서 종신보험에 들어서 자신이 죽으면 받을 수 있는 보상금 4천만원도 그 아이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는 것이다. 고작 70만원의 월급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죽은 후에 장례를 치루어 줄 수 있는 사람도 돈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김우수씨는 어렵고 외로운 어린시절을 보낸 김우수씨는 버려진 아이들이 자기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살았던 것이다.
비록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김우수씨의 삶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김우수씨는 아무 것도 없어도 의미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아서 힘들고 어렵게 사는 어린이들을 돕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아합의 삶은 달라야 되지 않는가? 그런데 아합은 고작 자기 눈 앞에 보이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을 자기 일생 일대의 사명으로 알고 근심하고 누워서 밥도 먹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아합의 시대에 멋진 신앙을 가진 한 사람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포도원의 주인 나봇이다. 나봇은 아합왕이 더 좋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여도, 아니 그 포도원의 값을 치루어 주겠다고 하여도 그는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왜 나봇은 왕 앞에서 그 포도원을 지키고 있는가? 사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합시대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었을 때 이세벨의 거짓에 대하여 항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세벨이 시키는대로 금식을 선포하고 불량자 2사람을 세워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증거하게 하여서 성밖으로 끌고가 돌로 쳐 죽인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세벨의 악행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이 단순히 귀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장로가 먼저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러면 나봇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적당히 살아도 되지 않는가? 그런데 나봇은 모든 사람이 다 적당히 살아갈 때 그는 자신의 땅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봇이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땅을 지키려고 하였겠는가?
(레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나봇은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한구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아니 나봇은 토지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는 그 신앙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팔수가 없어서 아합왕에게 그 땅을 내어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한구절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나봇이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나봇의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나봇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로마에서부터 유다를 구원할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로마에서 유다를 구원하면 유다의 백성에게 큰 칭송을 받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를 구원하지 않고 어리석게도 빌라도의 법정에 죄수로 잡혀가고 있는 것이다. 유다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였는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 한구절 한구절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 고난의 십자가을 짊어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간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도 나봇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바울이 마지막 갇힌 감옥을 중심으로 해서 바울순교기념교회를 세워두었다. 교회당 벽면은 아름다운 조형물과 그림으로 장식이 되어져 있고, 천장은 파란 바탕에 별이 총총하게 그려져 있다. 이번 여름에 이찬수목사님이 그 교회당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가이드하는 집사님이 왜 천장에 별을 그려놓았는지 아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사님은 천장에 별이 그려져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사실 바울이 갇혔던 감옥은 초대교회 많은 성도들이 순교한 순교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의 목욕탕을 만드는데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사용하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은 중노동과 학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서 목욕탕을 다 만든 후에 그 기독교인들을 바울이 갇혔던 그 감옥으로 데리고 와서 다 죽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성버나드가 이곳에 와서 묵상하며 기도하는데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간 초대교회 성도들이 아름다운 별이 되어 승화되어져 가는 환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 버나드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시를 썼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85장이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억울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또 목숨을 잃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이것이 은혜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채소밭을 가지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소유에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 구원받은 사람으로 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고민하며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 바란다. 받은바 은혜가 있어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붙잡고 그 말씀 한구절 지켜내기 위하여 다가오는 모든 환란과 핍박을 이겨내는 그러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그런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 1759년 요크셔의 부요한 가문에서 태어나 캠브리지를 졸업한 사람이다. 할아버지가 시장을 2번이나 역임하였고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영국의 수상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만큼 그는 그는 엄청난 부자에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의 허망함을 느껴서 2년동안 여행을 하다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지은 존 뉴턴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뉴턴은 노예무역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들을 성적으로 폭행하고, 죽이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엄청난 폭풍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경험하고 크게 회개하여 영국국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뉴톤은 평생을 노예제도 폐지를 위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뉴톤에게 윌버포스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 뉴톤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게 내 인생에 가장 끔찍했던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저 많은 수많은 흑인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기지 못하고 그들을 죽이고, 성적으로 학대며 살았던 내 인생이었다네. 영국의 98%가 기독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노예를 팔아서 그 수익으로 영국전재산의 30%를 감당하고 있다면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없으니 자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사의 심정으로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하게 ..
존 뉴톤은 그것을 도전하였고, 윌리엄 윌버포스는 그 말에 진정한 정치인의 소명을 안고 그의 인생을 던졌다. 1787년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나에게 2가지 소명을 주었는데 그것은 노예무역의 폐지와 관습의 폐지이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이 일을 위하여 살았다. 그 당시 영국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종호의 학살(Zong massacre)에 대한 판례가 있다. 1781년 유례없이 많은 노예를 싣고 항해하던 종호는 대서양을 횡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적지인 자메이카를 지나쳐 480Km를 더 항해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62명의 노예와 선원이 사망하였고, 또 역풍을 맞으면서 돌아가려면 십수일이 걸리는데 물은 4일치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선장은 11월 29일에 54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바다로 던졌고, 그 다음 12월 1일에 42명의 남성을 바다로 던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36명을 더 죽였다. 그 일로 인하여 노예 10명은 선원들의 비인도적 행위에 항의하여서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종호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재판의 내용은 142명을 죽인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 과다한 보험금을 청구한 것에 대한 재판이었다. 후에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인 그랜빌 샤프는 선원들을 살인 행위로 고발하였지만 법원은 선원의 행위가 살인이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 영국의 모습이었다. 132명의 사람을 죽였을 때 그 모습을 보던 다른 흑인이 괴로워서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사건을 두고 그들은 단순히 개와 돼지를 죽이는 것으로 보았지 살인행위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도살업이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 나오는 양고기가 맛이 있듯이 노예무역은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나오는 이익은 영국을 복되게 한다.
이러한 시대에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하여 평생을 바치는 삶을 살았다. 그 결과 많은 오해와 반대에 시달리며 2번의 테러를 당하여 평생을 고질병으로 고통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아니 그렇게 부요했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말년에는 파산직전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윌리엄 윌버포스는 이러한 것에 굴하지 않고 50년동안 싸워서 결국 노예제도를 폐지토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회가 노예제도 폐지를 선포한 사흘 후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의 수상이 될 수 있는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사명이 있어서 이러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훗날에 사람들은 윌리임 윌버포스를 향하여 바보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때로는 핍박을 받고 소외를 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세상 속에 사람의 참된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