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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찾아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심는다
(광복 70년, 분단 70년)
2015 부산 평화발자국
"일제에 맞선 부산사람들"
6차 평화발자국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2015년 6월 27일(토) 오전 10시~오후 4시.
일본은 한반도를 포기한 적이 없다. 식민지배를 사죄한 일도 없다. 미국의 대소봉쇄정책 덕분에 전쟁 책임과 배상에서 면죄부를 얻게 된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그에 규정된 한일협정 때문이다. 이 왜곡된 역사는 한반도 분단과 동북아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왜곡된 역사의 길을 따라 이제 집단자위권 행사를 결정하고 안보법제 개정을 통해 한반도 진출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있다. 군사대국의 길을 열어 동북아는 물론, 이제 세계로 진출하여 과거보다 더 큰 영광을 재현하려는 일본. 남요인후(南徼咽喉-남쪽은 조선의 목구멍)인 부산이 날카롭게 깨어 있어야 한다던 임진왜란의 피어린 교훈은 지금 어디에 남아있는 것일까?
이번 달 평화발자국은 지난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일제의 부산 강점을 돌아본 데 이어 강점에 맞선 부산사람들을 찾아나섰다.
“나라의 힘은 통일에 있다”
참가자들이 평화발자국을 시작한 곳은 동구 좌천동 768-1번지에 위치한 사립 일신여학교 자리. 보잘것없던 시작이 날로 번창한다(日新)는 뜻을 담은, 1895년 한 칸의 초가에서 시작한 이 학교는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통한 민족주의 의식이 일찍부터 고조되었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고등과 학생 김응수(일명 김수) 등 11명의 학생과 주경애, 박시영 선생이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옥고를 치른다. 이들의 활동을 기리고자 부산시는 만세운동기념비를 건립했는데, 이 비는 일신여학교의 후신인 동래여고에 세워져 있다.
이 비문에는 김응수가 경찰 심문 과정에서 한 발언이 새겨져 있다.
“세살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우는데 우리들은 우리나라를 돌려달라고 하는데 무엇이 나쁘냐”
이들의 만세운동으로 20일동안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졸업식 거부투쟁으로 이어지고, 경남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겨레의 넋은 국어에 있다. 사람의 값은 지식에 있다. 나라의 힘은 통일에 있다‘. 2015년, 120주년을 맞이하는 동래여자고등학교의 교훈이다.
일신여학교 자리에 꾸며진 기념관은 예수교장로회 부산노회가 맡아 운영하고 있는데, 부산노회는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평화발자국을 위해 출근하여 안내하는 성의를 보였다. 참가자들은 일신학교 여학생이라도 된듯, 당시처럼 꾸며진 교실에서 최광섭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은 후 전시물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쪽 벽에 붙여진, <증언>을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증언>(부산진일신여학교 7회 졸업생 김반수)
"3월 1일에 독립만세를 전국에서 부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여 때는 이때다 싶어 동지 일신여학교 몇 명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님께서 출가시킬 때 쓰려고 장만해 둔 혼수감 옥양목을 어머님 몰래 끄집어내어 기숙사로 가지고 가서 초저녁에는 기숙사 벽장속에 숨어 있다가 밤 열시가 넘어 창문에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에 이불을 가리고 옥양목에다 대접을 엎어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붉은 물 검은 물로 칠하여 겨우 마련한 태극기를 들고 3월 11일밤 8시경 거리로 가지고 나가 가는 사람 오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답니다. 부르다 부르다 지쳐 쓰러지면 또 용기를 내어 불렀답니다. 그 때는 여자로서 부끄럽다거나 무섭다기보다는 우리나라를 되찾아야지 하는 일념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수모를 당해가면서도 항의를 했답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정말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것을 생각하니 너무 대견스럽고 가슴 뿌듯합니다."
“분단된 조국의 해방은 진정한 해방일 수가 없다”
참가자들은 일신여학교 자리에 있는 부산진교회에서 내려와 정공단 바로 앞, 구멍가게로 이동했다.
구멍가게 앞에는 가게 주인인 정성연 선생과 최천택 선생의 아드님이신 최철 선생이 나와계셨다. 두 분 모두 첨예한 투쟁을 벌인 항일 투사의 유족들이다. 정성연 선생은 일제 말 학생 비밀 결사조직인 순국단의 폭약연구책이었던 정오연 의사의 동생분이다. 두 분과 먼저 기념사진을 찍은 후 최철 선생을 따라 최천택 선생 생가가 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좌천동 중앙로가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최천택 선생의 생가자리여서, 참가자들은 그 부근 골목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최철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천택 선생은 1986년 태어나 부산진 육영재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부산공립상업학교(지금의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2학년이던 1912년,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등사하여 학우들에게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동기생인 박재혁(朴載赫), 왕치덕(王致德), 오택(吳澤) 등과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또 연행되는 등 그의 투지는 꺾일 줄 몰랐다.
1919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경상도 지역을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3·1운동 때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도록 독려하였다. 1920년 9월경 박재혁이 부산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밝히자 함께 거사를 논의한다. 9월 14일,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단식중 순국하였으며, 최천택도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으며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
의열단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기도 한 그는 이후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신간회(新幹會) 부산지회장을 역임한다. 그가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구금, 구속된 것은 54차례. 8·15광복도 옥중에서 맞이하였다.
광복 뒤에도 선생은 “분단된 조국의 해방은 진정한 해방일 수가 없다”며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빨갱이’로 몰려 육군 특무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혁신계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하였고 1961년 11월 17일 사망하여 좌천동 뒷산 증산대 기슭 옥성사에 안장되었다.
소천 최천택 선생. 그는 모든 외세를 배격한, 부산이 자부할 만한 토박이 운동가다.
“분노의 대신동 아리랑”
참가자들은 봉고차를 타고 구덕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일제 당시 부산 공설운동장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역사적인 학생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0년 11월 21일, 일본군 노다이(육군대좌)의 총지휘로 경남학도연합 군사대연습이 부산, 경남의 중등학생들을 경기관총과 38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동군(부산제2상업학교(한국인학교), 부산중(일본인학교), 부산제1상업학교(일))은 구포역에서 김해방면으로, 서군(동래중학(한), 마산중학(일), 진주농(한), 진주중(한))은 진영역에서 김해방면으로 진격하는 모의 전투훈련을 실시하였다. 민족차별에 한국인 학생들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중에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식은 전년도 우승교(동래중학교)가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일본 당국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조선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다.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교 학생들이 항의했지만 묵살되었다. 결국 폐회식에서 일본인 심판장이 일본인 학교를 우승학교로 발표하자, 조선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차별에 항의하며 동래중과 부산2상 학생들은 폐회식에서 일장기 하강식때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마침내 울분이 폭발하여 운동장은 아수라장의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놀란 경남지사와 노다이, 경찰이 도망이 치자 학생들 1,000여명이 시내를 행진하면서 '황성옛터' '아리랑' 등을 부르면서,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하고 외쳤다. 학생들은 중앙동 부근에서 재집결하여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기로 하고, 8시경 항거의 횃불은 영선고개를 거쳐 부산터널 부근 노다이 관사로 향하였다. 그러나 노다이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돌을 던져 외등과 관사의 유리창을 모두 깨버렸다. 밤 10시경, 부산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학생들을 현장에서 검거한다. 200여 명의 학생들이 검거되었고, 주모자 15명이 투옥되었으며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의 징계가 있었다. 김선갑(金銑甲), 김명수(金明洙)는 출옥 2주일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부산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대규모적인 항일투쟁 중에서도 최후의 것에 속한다. 일제의 엄중한 보도 관제만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광주학생 의거보다 더한 전국적인 규모로써 확대되었을 것이다.
참가자들은 구덕운동장 한 곳에 자리를 펴고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했다. 점심 후에는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며 소감도 나누었다. 대부분 “참 좋은 프로그램이다”, “많이 배우게 된다”고 발표했다.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말씀들이다.
“겨레의 백대사표 백산 안희제”
백범 김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백산(안희제)의 손을 통해 나왔다”고 했다. 그 만큼 독립운동에서 안희제의 역할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 많은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참가자들의 발걸음은 대청동에 위치한 백산기념관 앞에 다다랐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 참가자들은 해설사들로부터 백산선생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들었다.
안희제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인재양성을 결심하고 3개의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는 곧 독립운동의 최전방에서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때 만난 것이 바로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大倧敎)다. 그는 훗날 대종교 3대 교주가 되는 윤세복(尹世復), 광복 후 정치인으로 활동한 서상일(徐相日) 등과 1909년 10월 대동청년단(大東靑年黨)을 조직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역할에 눈을 뜬다.
안희제는 1914년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만주 항일무장단체와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할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만든 회사였다. 이후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원을 들여 1919년 최초의 주식회사인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거듭난다. 당시 100만 원은 오늘날 40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포목과 건어물을 주로 판매하던 백산상회는 백산무역으로 전환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국제적 거점이 된다.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 아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은 목숨이 열 개라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안희제가 상해 임시정부나 만주 항일독립투쟁에 얼마의 자금을 어떻게 전달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해방 후 확인해보니 한 푼의 누락도 없이 일치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철저했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처이자 국내외 독립운동 기지였다. 국내에는 서울ㆍ대구ㆍ원산 등 18개소, 중국에는 안동ㆍ봉천ㆍ길림 등 3개소의 지점을 만들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한편 이 지점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활동을 교류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연락사무소이자 독립신문의 배부처로써 활용되었다. 또한, 백산상회는 장학사업으로 ‘기미육영회’를 설립하여 장래 독립운동에 활약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일본과 영국, 독일 등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은 “안희제는 백산상회를 통해 우리 민족 경제의 근대적 효시를 보여주었다. 왜 돈을 버는지, 왜 사업을 해야 하는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를 위해서 기업가가 어떤 가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평가한다.
1927년 백산상회의 정체를 알게 된 일제의 끈질긴 탄압으로 백산상회는 문을 닫는다. 이후 안희제는 중외일보 등 언론을 활용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만주로 넘어가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발해농장을 마련한다. 이를 통해 그는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이상국가(理想國家)인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을 독립 조선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안희제는 1943년 유명을 달리하였으나,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신시배달국’의 꿈은 후세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부산경찰서 자리는 지난 4월에도 와보았던 자리다. 익숙한 길이지만 다른 역사로 만나니 새로운 길이다. 참가자들은 이번 평화발자국의 마지막 일정인, 박재혁 의사에 의해 폭파당했던 부산경찰서 자리로 이동했다.
박재혁 의사는 초량에서 태어나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부산전기회사 전차 차장으로 근무하고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하였다. 이후 1920년 3월 일시 귀국하였다가 8월 상해로 가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 원을 받아 그해 9월 부산으로 귀향하여 의열투쟁을 모색하다가 9월 14일 부산경찰서를 폭발하게 된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혹독한 고문으로 생긴 폐병 때문에 고생하다 형 집행 전에 스스로 단식으로써 옥사하였다.
그는 왜 부산경찰서 폭파투쟁에 나선 것일까?
1919년 대규모의 만세운동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이에 대해 참혹한 억압으로 맞섰다. 호소, 시위, 항의 등 평화적인 방법의 반일운동은 한계가 있다는 데 공감한 독립인사들이 혁명적인 활동에 공감하게 된다.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의열단이 주로 탄압의 대명사인 일본경찰서에 대한 폭력투쟁을 벌이게 된 배경이다.
1928년 창립 9주년 선언에 따르면, 의열단은 23차례의 크고 작은 암살 및 파괴활동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 등이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이 이른바 의열단 선언이다. 폭력투쟁으로 독립과 사회변혁을 이룰 것을 천명한 이 선언은 애국청년들을 항일전선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의열단 투쟁의 시작이 바로 박재혁 열사다. 그는 의열단원이 되어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의열단은 1920년 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계속 부산경찰서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되자 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 암살을 계획한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무역상인으로서 싱가포르에 와있던 단원 박재혁을 상해(上海)로 소환하여 부산경찰서장 암살을 지시한다.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이 고서수집가라는 사실을 탐지하고 많은 중국고서를 사들여서 고서상(古書商)으로 위장하였으며, 그 고서더미 속에 폭탄과 전단(傳單)을 감추었다. 고서에 관심이 많은 하시모토(橋本秀平)는 박재혁의 면회 요청을 쾌히 승낙하였다. 박재혁은 하시모토(橋本秀平)와 단독으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좌하여 고서를 보여주는 척하다가 전단을 서장 앞에 뿌리면서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은 다 알고 왔다”고 말하고, 서장의 죄를 일일이 열거한 다음, 폭탄을 서장 앞에 던졌다. 폭탄이 터지자 두 사람은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박재혁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않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고 결심한 뒤 단식과 함구로 9일이 지난 후 순국하였다. 중상을 입은 경찰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도 사망하였다.
박재혁 의거 후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1920),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1921),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에게(1922),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1923), 김지섭이 도쿄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1924),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1926) 폭탄을 던지거나 습격하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로서 천백만 자기 동포를 환기해서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자는 것이요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완전히 구축하고 진정한 동아시아의 행복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라고 의열단 활동의 의의를 설파했다.
김영범 대구대 교수는 의열단에 대해서
“표적을 특정해 놓고 정확히 그런 목표를 매번마다 바꿔 가면서 공격을 했지, 무차별로 살상하지는 않았거든요....불특정 다수를 살상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런 시도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그런 점에서 불특정 다수를 살상해서 공포심을 크게 일으켜서 정치적 효과를 달성하겠다는 테러와는 의열단의 활동을 상당히 다르다”고 평가하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를 물리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하려 했던 부산의 항일 투사들의 족적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 중국 등의 힘겨루기가 치열해지고 있는 지금의 정세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자주적인 태도를 갖고 어려운 상황에 대처해나가지 않으면 큰 위협에 직면해 일제강점의 악몽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일정이었다.
“광복로에서 평화와 통일의 노래를 부르다”
참가자들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상기된 표정으로 광복로 시티스팟으로 이동했다. 주말 오후, 정말 많은 시민들이 오가는 장소다.
한진중공업 노조가 빌려준 앰프차량을 세워놓고, 참가자들은 계단에 앉았다. 홍슬민 양과 방영식 목사의 노래공연은 오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세우기에 충분했다. 특히 방영식 목사의 노래는 광복로 거리에 쩌렁쩌렁 울렸다. 한일협정을 폐기하고 외세의 오판을 교정하여 자주독립의 기운으로 평화 통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기운을 얻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노래처럼 평화의 기운이 부산에 넘쳐나기를 소망해본다.
이제 하반기에는 ‘친일매국을 꾸짖다“(9월), ”해방과 귀환“(10월)을 주제로 평화발자국을 진행하게 된다.
수고하신 해설사님들, 집행을 도와주신 운영위원들, 참여하신 회원과 시민들게 감사드린다.
<소감 몇 마디>
- 공간 바깥에만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어서 좋았습니다. 일신여학교, 최천택 선생 자제분 등 한 분 한 분이 옛 기억 속의 사실을 진실로 전하시려는 모습, 감동입니다. 역사의 흔적에 증언이 더해지면서 공감의 진폭이 더욱 커지는 느낌입니다. 시대별로 코스를 정하여 답사를 하니 건물의 변천까지 눈에 들어옵니다. 두루 혜안을 갖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작금의 시대 정신이 구 일본의 재침략이 노리는 역사의 재현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네요.
- 백산 안희제 서생의 탁월한 민족경제론에 감동했습니다.
- 평통사 같은 의열단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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