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난집 비유를 보면 먼저 어릴 적 뜻도 모르고 따라 불렀던 카사비앙카 노래가 떠오른다.
한 술 더 떠 '불이 나면 빨간집.. 불꺼지면 하얀 집.." 이라고도 한 게..
카사비앙카는 하얀집이란 이태리 말이라는데.. 어째서 불에 타는 빨간집이 나오는지..^^
<법화경>의 '불난집' 비유는 워낙 유명해 모른다면 이상한 사람일 정도.
그것을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하여 성문.연각. 보살 셋[삼승]을 하나[일승]로 귀일시킨 것이라 하였고,
일승은 <법화경> 가르침이라 한다.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면..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 그리고 소가 끄는 수레가 선물이다.
양이 끄는 수레는 성문승(聲聞乘)이다.
중생의 근기가 일천하여 듣고 보고 체험하는 인연을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단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우리도 어지간한 일은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기 전에는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마음이 닫혀 있고 순결치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소가 끄는 수레는 연각승(緣覺乘)의 상징이다.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단계이니 달리 벽지불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스스로의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불이 나자 곧바로 불이 난 줄을 알고 집 밖으로 나간 아버지처럼.
그러나 중생은 불길을 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화상의 위험에서도 집안의 유희를 뿌리치지 못한다.
수레라는 선물이 있기까지는 불난 집을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승(菩薩乘)의 상징이라 하는데 이는 우주의 연기적 질서를 다 깨치고 그 궁극의 공함을 체득한 단계로 설명된다.
출처 : 금강신문(http://www.ggbn.co.kr)
라고 대부분이 알고 있으리라.
저렇게 아는 게 잘못은 아니나.. 불교는 애매하지 않고 분명하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면..
위 설명은 부족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삼승이라 하여 보살승은 소승에 들어가 있고 일승은 흰소가 끄는 큰수레[일승]라 비유했다.
그럼 보살승과 일승의 차이는 소 크기가 다를 뿐이라는 건가?..
또 하나 문제는 성문이나 연각이라 불리는 상좌부 수행자들은 작은 수레이기에 성불은 불가능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대승불교 운동은 당시 주류인 상좌부(Theravada)를 비판하면서 나온 불교운동이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기존의 것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상대를 실제 이상 나쁜 것처럼 선전한다.
상좌부를 소승이라 부르는 게 좋은 예다.
상좌부는 개인 수행 중심인 수행 불교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이 보살이란 대중을 위한 불자에게 비핀받아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
아니 보살의 지침이라 하는 6바라밀인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반야바라밀 가운데..
지계[계]와 선정[정]과 반야[혜]는 소승이라 불리며 비판당한 상좌부 불교 수행의 중심이다.
상구보리 화화중생에서 상구보리에 전념하는 게 상좌부다.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에서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로 오르려는 것과 같으니.."
라고 하는 것은 계정혜를 닦지 않는 불자를 경계하듯이 대승에서 소승은 심장처럼 자리하고 있는 데..
어찌 성문승 연각승이라 하며 비웃을 수 있으리요.
성문승이라 함은 4성제를 으뜸으로 삼고 수행하는 불자요,
연각승이라 함은 12연기를 으뜸으로 삼고 수행하는 불자다.
묘하게도 <반야심경>을 보면 공 가운데에는 12연기가 없고, 4성제도 없다고 했다.
곧 12연기나 4성제는 허물이 있다는 게 된다.
<반야심경> 나오듯 4성제와 12연기가 허물이 있다면 그것에 의존해 수행하고 있는 불자는 비판받을 수있을 것 같은데..
어떤 불자들이 비판받을만한 수행을 하고 있었나?..
초기 상좌부 시대에 상좌부는 비판받을 만한 수행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온다.
석가세존이 살아 계실때나 초기 상좌부 시대에 아라한은 다음 생에 몸을 받지 않음[불수후유]을 스스로 자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경지에 이른 아라한이 점점 줄어들어..
과연 후세에 몸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이들까지 아라한이라 칭하는 상좌부 시대가 온다.
이와같은 상좌부 상황을 보면서 대승불자들은 4성제와 12연기를 닦는 상좌부를 비판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비판당하는 상좌부는
'불교는 아트만이 사라지는 공부라 가르치지만 실제에서는 아트만[자아]이 사라지지 않는 불교' 라 할 수 있다.
4념처 수행을 통한 4성제를 닦던 12연기법을 닦던..
그리고 일승이라 스스로 자처하며 소승에 넣어버린 보살승은 어떤 불교인가?..
스스로 대승불교라 자처하는 데 안으로 들어가면
윤회하는 자아가 있고..
업겁을 통해 보살행을 하면 마지막 자아가 사라지고 부처가 된다는 대승불교라 하겠다.
그러면 일승이라 하여 커다란 흰소에 비유한 법화불자란 어떤 불자일까?..
커다란 흰소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반야부에서는 공이라 하고..
상불경보살은 "당신은 (미래에) 부처님이십니다..()^^.." 라고 보고 있는 게 된다.
그러니 내가 보살행을 열심히 실천하면 분명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다 라고 결심하고
보살행을 실천하면..
그가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현실은..
상불경보살님이 상대의 진면목인 "공"을 말해주어도 오히려 보살을 미친 놈 취급하여 자기를 놀린다며 달려들지 아니하던가..
다시 불난집 비유를 보자.
불이 난 줄 모르고 집 안에 머물고 있는 아이들은 어떤 상태인가?..
자아라는 껍질에 싸여 본 모습을 잃고 생사를 반복한다.
그들의 아버지는 외쳤다.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물건이 여기에 있다.
문 밖에는 아니들이 좋아할만한 양 수레, 사슴 수레, 소 수레도 있지만..
너희들이 마지막 아상까지 버리려 한다면
바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고 하얀 소[공] 수레를 타야만 한다고 이끄는 것이다.
가끔 나에게 보살승이라는 작은 수레는 반야부를 비유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반야부는 당시 상좌부와 맞서서 비판의 앞장섰던 대승부 부파다.
그렇게 격력하게 상대를 향해 맞다뜨려가려다 보면 상대를 분명하게 뚜렷이 세워야 되는만큼 자신 역시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공'을 바탕으로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을 세울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본 법화불자는 반야부를 비판하며 소승이라 부른 게 아닌가 한다.
(그 당시 대승불교라 자처하지만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불국토인 정토에 환생한다고 가르치는 파가 있었다고 들었다)
'불난집 비유'를 보면 <잡아함경. 197. 시현경>에 나오는 문장이 보인다..
"비구들아, 일체(一切)가 불타고 있다. 일체가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안(眼)이 불타고 있고, 색과 안식과 안촉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이·비·설·신도 마찬가지이며, 이와 같이 의도 불타고 있고, 법과 의식과 의촉과 의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불타고 있고, 성냄의 불로 불타고 있으며,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생·노·병·사·근심·슬픔·번민·괴로움의 불로 불타고 있느니라."
<시현경>에 나오는 불은 마음에 생긴 불이니 일반인의 눈으로는 볼 수 없겠지.
<법화경>의 '불난집'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