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국립박물관>
1. 박물관대강
명칭 : 김해국립박물관
위치 : 경남 김해시 가야의길 190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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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의 중심에 국립박물관이 있어 위상도 맞고 튼실하게 잘 꾸며놓은 박물관이 내실도 갖추어 좋다. 단지 고고학 분야만 전시품 대상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지만 이처럼 성실하게 눈에 보이는 자료라도 전시해두니 유물 보관 차원에서는 일단 안심이 된다.
다 밝혀내지 못한 가야국의 많은 흔적들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속적 탐구의 중심이 되면 좋겠다. 아울러 문학적 유물에 대한 가치 또한 박물관 전시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함께 인정하고 관련 사료라도 전시해주면 좋겠다. 심지어 삼국유사 관련 분야 전시조차 없으니 말이다.
문학적 유산은 보이지 않는 역사에 대한 탐구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실용성과 함께 유물을 아무리 많이 발굴해내도 밝혀낼 수 없는 역사적 추측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전의 사실도 모든 유물로 다 고구해낼 수 없는데, 몇 천 년 전의 역사임에랴.
박물관 뒷편은 구지봉이다. 구지봉 얕은 산길을 따라가면 고인돌과 가야건국신화에서 알 여섯개가 담긴 금합이 내려와 차례로 깨어지며 여섯 아이들이 탄생했다고 추정하는 탄생지를 건너 허황후릉에 이른다.
1) 박물관 소개
국립김해박물관은 고대국가의 하나인 가야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1998년 7월 29일 문을 열었습니다. 가야의 건국 설화가 깃든 김해시 구지봉 기슭에 자리 잡은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의 문화재를 모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부산·경남 지역의 선사 시대 문화상과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된 변한(弁韓)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가야는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역사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유물·유적을 발굴함으로써 가야사를 복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국립김해박물관은 다른 국립박물관들과 달리 고고학 중심 전문 박물관으로 특성화되어 있습니다.(박물관 홈피 안내문)
2) 가야국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
가야는 변한(弁韓)의 12소국, 소국 연맹체, 초기 고대 국가 등의 단계를 거쳤다. 서기전 1세기 낙동강 유역에 세형동검(細形銅劍) 관련 청동기 및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의 문화 기반이 성립되었다. 서기 2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에는 12개의 변한 소국들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에 김해의 구야국(狗邪國: 金官加耶)이 문화 중심으로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이를 변한 소국 연맹체 또는 전기 가야연맹체(加耶聯盟體)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 5세기 초에 몰락하고,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5세기 후반의 전성기에는 22개의 소국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괄하여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분열하였다. 그리하여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멸망하고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나머지 가야 제국(諸國)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3) 순장 : 가야의 순장 문제]
순장(殉葬)이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 행위를 말한다. 순장 그 자체는 하나의 장례 풍습에 불과하지만, 사람을 강제로 죽여서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예속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시행 여부가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지표로 생각되기도 한다.
신라나 가야 지역에는 전형적인 순장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이 다수 존재한다. 가야의 순장 사례는 대략 4세기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확인되었다. 묘제 상으로는 나무덧널무덤, 움식 돌덧널무덤, 굴식 돌덧널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연맹장(왕)을 비롯한 가야 소국들의 최고 지배층이 순장 시행의 주된 집단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순장의 사례를 통하여 가야 사회가 왕이나 소국 지배층을 비롯한 귀족과 평민 및 노예 등의 3계층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장이 실시된 것을 가지고 고대 노예제 사회나 전쟁 노예의 성행을 추론할 수는 없다. 오히려 순장은 왕이 천신(天神)의 후손으로 여겨지던 세계관과 관계가 깊으며, 당시의 왕권은 주민들의 반(半) 자발적 복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순장제는 전형적인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하지 못한 초기 국가나 그 이전의 소국 연맹체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 사회에서 순장제가 성행했던 것도, 각 단위 소국 한기의 권력 및 연맹장의 권력이 강화되었지만 아직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가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4) 가야 철기문화
서기전 2세기 말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유이민이 남하함에 따라, 서기전 1세기 이후 경상남도 창원과 경상북도 경주 지방에서 위만조선계의 청동기·철기 복합문화가 나타났다. 서기 이후 이 문화는 순수 철기 문화로 진전되어갔으며, 늦어도 2세기 전반에는 창원 지방에서 철기 제작뿐만 아니라 철 생산이 개시되었다.
2세기 후반 이후 가야의 철 생산 주류가 창원에서 김해로 이동되면서 한(漢)나라의 새로운 기술이 유입되어 철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단조 철기가 증가되었다. 이때 이후로 김해 가야국은 한반도 각지 및 일본열도에 철을 수출하면서 세력을 성장시켜나갔다. 낙동강 하류의 김해 및 부산 지방에서는 2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엽까지 납작도끼형 덩이쇠를 철소재로 생산하여 유통시켰으며, 4세기 후반 이후로는 본격적인 덩이쇠를 생산하였다.
5~6세기에는 제철 기술이 가야 각지로 분산되어 김해·부산 뿐만 아니라 함안·합천·창원 등지에서도 제철의 증거라고 보이는 덩이쇠와 미늘쇠를 생산하였다. 가야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열도는 5세기 말엽부터 자체적인 철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가야의 철기에는 농기구, 무기, 갑주, 마구 등이 있다. 철제 농기구로는 서기전 1세기에 끌, 쇠망치, 쇠손칼, 따비, 낫, 쇠도끼 등이 나타났고, 4세기 이후로는 쇠스랑, 쇠삽날, 가래, 살포 등의 농기구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5~6세기에는 실용 농기구가 무덤에 부장되지 않게 되고, 대가야 세력권을 중심으로 축소 모형 철제 농기구가 부장되었으니, 이는 가야에 특정한 농경 의례가 생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제 무기로는 서기전 1세기에 쇠단검, 쇠투겁창, 쇠꺽창 등이 나타났고, 2세기 후반 이후로는 새로이 쇠장검, 고리자루 큰칼, 슴베 있는 쇠화살촉 등이 추가되었다. 3세기 후반 이후에는 좀 더 관통력이 향상된 단면 마름모꼴 쇠투겁창과 목 있는 쇠화살촉이 나타나서 무기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5~6세기에는 목 긴 화살촉이 새로이 나타나고, 철제 무기에 장식적인 요소가 나타나서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큰칼이나 화살통 등이 유행하였다.
가야의 철제 갑주는 4세기에 종장판 혁철 투구와 종장판 정결 판갑옷을 위주로 발전하였다. 5세기에는 미늘갑옷이 나타나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종장판 정결 판갑옷은 5세기 중엽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반면에 5세기 후반에는 삼각판 판갑옷, 횡장판 정결 판갑옷, 챙 달린 투구, 충각부 투구 등이 소형 고분 위주로 나타났다. 5~6세기의 가야 지역에는 말투구와 말갑옷도 성행하였다.
가야의 마구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후 3세기 무렵까지 S자형 봉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철제 재갈이 나타나 마차용으로 쓰였다고 여겨지나, 4세기에는 기승용 마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4세기의 마구에는 f자형 봉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재갈, 원형 판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재갈, 목심철판 발걸이, 심엽형 말띠드리개 등이 나타났다. 5세기에는 마구에 장식적인 요소가 채택되어, 금은으로 꾸민 내만타원형 판상 재갈멈추개, f자형 판상 재갈멈추개, 검릉형 말띠드리개를 위주로 분포되었고, 이는 일본열도에도 널리 보급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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