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정당 정치
이제까지 현대 민주정치를 간단히 돌아본 소감은 그리 고무적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권자들은 정계의 여러 가지 속임수, 특히 선거 후유증을 낳는 공허한 약속들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유권자가 직접 운전대를 잡거나 아니면 카리스마 있는 유력자에게 맡기려는 해결책 중 다수는 좋은 공공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퇴출을 어렵게 만듦으로써 정치적 책임성을 가로막는다.
고전적인 웨스트민스터 모델은 정당 책임의 수준과 명확성이 높기 때문에 크게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그런 고전적인 웨스트민스터 체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재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체제를 살살 몰아가고 소득 불평등이 커져만 가는 세상에서 분권화된 상향식 의사 결정 뒤에 몸을 숨긴다. 영국은 선거구를, 규모도 내부적 다양성도 좀 더 크게 편성해 정치인들로 하여금 대중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넓은 시야에서 고려할 수 있도록 압박해야 한다. 그 외에도 영국은 당 지도자 선출이 직선제 쪽으로 흘러가는(노동당의 경우는 아예 성급히 질주했다) 추세를 되돌려 놓아야 하고, 예비선거를 통한 후보 선출을 중단하고, 고정 임기 의회법을 폐지하고, 상원을 정당한 제2 의회로 만드는 개혁안을 포기하고, 국민투표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는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 현명하다. 영국은 일단 불문 헌법이라는 훌륭한 이점을 누린다. 따라서 이제까지 그런 유감스러운 선택들을 어쩌다 보니 내리게 된 것처럼, 거기에서 대충 어떻게 다시 빠져나가기도 자유롭다.
미국은 그보다 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미국 정치는 돈이 전부다. 프랜시스 리의 표현대로 미국 정치인은 “영속적인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 돈의 수요 측면에서는, 정당이 약하다 보니 정치인들은 믿음직한 정책을 담은 일관성 있는 전국적 공약을 제시하는 대신에 돈을 써서(이를테면 흑색선전에 비용을 들이는 식으로) 선거에서 이길 확률을 높이려고 한다. 공급 측면에서는, 유권자를 끌어오기 위한 자금을 기부자가 정치인에게 기꺼이 후원한다. 평균적으로 정치인이 돈으로 표를 얼마나 잘 매수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를 시도한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지지를 얻어야 하는 유권자층을 격분시키는 정책을 혹시 기부자가 요구하더라도 그의 비위를 밤낮으로 맞춰야 하는 악몽 속에 갇혀 있다. 정치인들은 이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컨대 유권자의 이익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는 기부자와 관계를 쌓거나 유권자의 주의를 경제 사안보다는 감정적인 사안들 쪽으로 유도한다. 그 어떤 탈출구를 택하든 좋은 공공 정책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전후 시대에 계몽된 합리성의 보루였던 유럽 대륙 역시 실망스러운 변화에 직면해 있다. 규율이 확실하게 잡힌 정당들로 구성된 연립정부가 특정 이익집단에 대한 편애를 억제할 수 있었을 때는 통치가 잘 이루어졌다. 내각 합의에 의한 재정지출 총액 제한과 유럽연합의 시장 개방 유지 방식은, 동원력 있고 용의주도한 이해 관계자들이 서로 담합하려는 유혹에 제동을 걸었다. 노동조합은 자신들이 소비자와 납세자를 대변한다고 여길 만큼 충분한 비율로 노동인구를 대표했었기 때문에 지나친 요구를 자제했으며, 고용주들은 숙련 노동자에 의존헤 제품을 수출할 수 있었으므로 장기적인 노동계약에 투자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계 시장에서 자동화로의 대전환이 일어남에 따라 산업 수출에서 유럽이 차지하던 위상이 축소되었고, 유럽 각국의 연정에 단골로 참여하던 사민주의 정당의 동원 기반인 노동조합 또한 약화되었다. 유럽 좌파가 파편화되자 유럽의 연정들은 포퓰리즘이 부추기는 외국인 혐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래도 스웨덴처럼 강력한 정당과 탄탄한 선거 연합을 갖춘 나라들은 현재까지 제일 잘해 나가고 있다. 정당 제도의 역사가 길지 않은 일부 동유럽 국가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그 나라의 제도적 출발점이 어디였든 자칫 바이러스처럼 확산될 수 있는 대중 선동을 민주국가의 시민들이 사전에 제압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정강 정책을 갖춘 강한 정당들 간에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다. 강한 정당은 유권자 개인이 원하는 것을 그때그때 제공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서로 다른 정책 대안들의 비용을 비교해 산출해 내는 집합적인 조직체다. 따라서 강한 정당이 제시하는 방안은 겉보기에는 매력이 없을지 몰라도 더 정직하고 장기적 실행 가능성도 크다. 책임 정당은 유권자의 욕구를 더 잘 충족할 수 있으며, 불만에 찬 유권자는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해법을 약속하는 포퓰리스트와 사기꾼의 손쉬운 표적이 된다.(308~310)
[출처] 책임 정당: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
Responsible Parties: Save Democracy from Itself(2018)
프랜시스 매컬 로젠블루스·이언 샤피로 지음, 노시내 옮김, 후마니타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