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22 ㅡ 끌려온 소의 눈동자 (지호이야기1) (사소)
처음 만난 건 십여 년 전, 아파트에서 과외 교습소를 하고 있을 때 일이다. 큰 등치에 삐딱하게 앉은 폼이 딱 봐도 전적으로 엄마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소 같았다. 학부형을 잠시 나가시라 했다.
" 너 공부하기 싫구나. 그럼 내가 엄마를 설득해줄게."
학생은 푹 퍼져 앉아 머리카락으로 듣는 폼이 수작 부리지 말라는 느낌이다.
" 지호야! 억지로 공부시킬 생각은 없어. 그러니 안심해. 네가 다른 게 하고 싶은 게 있니? 여기 왔으니 얘기라도 해봐. 내가 좀 더 살았으니 도움 되는 말이라도 해줄 수 있을지 모르잖니?"
" 제가요. 하고 싶은 게 없어요."
만사가 귀찮고 심드렁한 모습에 반항기도 보였다.
" 네가 좋아하던 게 혹시 없었니? 초등학교 때 말이야. 운동이라든가 요리라든가, 한 번쯤 꿈꿨던 게 있을 것 같은데? "
" 다 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 그래, 지금은 그럴 수 있어. 나도 네 나이땐 그랬던 것 같아. 그럼 집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렴. 꿈이 있어야 계획을 세우잖니? 오늘은 내가 사정이 안된다고 엄마한테 둘러댈 테니... "
아이가 편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느꿨다. 이럴 때 학생 태도 때문에 공부를 못 가르치겠다고 하면 학부형은 집에 돌아가서 학생을 더 닦달할 것이고 무엇보다 부모가 학생보다 더 절망할 것이다.
'어떻게 말씀드리지?'
상담 오기 전부터 학생의 공부 의지가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이미 전화로 들었고, 학부형은 임종 직전 환자를 데리고 명의를 찾는 간절함으로 찾았을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지호 엄마가 상처를 덜 받을 화법을 생각해야 했다. 고민을 하는 사이, 학생이 방안 책꽂이며 공부 책상으로 쓰는 엔틱 식탁이며 고개를 돌려서 이리저리 구경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삐뚜름히 의자에 기대던 허리를 세우고 뻗장다리를 잡아당겨 바로 앉는다.
" 근데요. 저도 공부할 수 있나요? "
" 공부하기 싫은 것 같던데... 왜? "
" 근데... 이게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서요."
회피하던 소의 눈동자는 진지한듯 그녀를 바라봤다. 판단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학생은 한 번 얘기를 시작하자 이제 제법 많은 얘기를 했다.
" 아무도 안 물어봤거든요. 그냥 공부하라고만 했지. 저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 없었어요. 학원에 가면요. 무조건 등록하라고 하고요. 그냥 나오래요. "
그리고는 본인이 한때는 공부를 잘했다는 얘기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는 얘기, 손가락 신경을 다쳐서 그 꿈을 포기하니 공부가 하기 싫어졌고, 성적이 곤두박질치면서 고등학교에선 잠만 잤다는 얘기, 그래서 대부분의 과목이 2학년 땐 더 이상 떨어질 필요가 없는 9등급이 돼버렸고, 학교 선생님들도 다 내놨고, 가끔 기분 나쁘게 자고 있는데 분필을 머리통에 날린다는 얘길 했다.
소위 학생이 다니는 명문고는 컷이 높아 점수가 낮은 학생은 입학이 안되는 곳이고, 모든 게 성적 순위로 결정되는 곳이었다. 지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지옥을 겪고 있는 거였다. 그녀는 갑자기 지호가 태도를 바꾸는 이유에 관심이 갔다. 밤새 게임을 하다 늦게 잠이 들었던 모습이 역력했고 정신이 채 깨지 않은 상태에서 끌려 온 부시시한 모습인데 눈동자는 진실을 담고 있었다.
ㅡ 이후 계속 됨 ㅡ
첫댓글 근데요, 저도 공부할 수 있나요, 라니.... 조금 웁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아구야! 뮤즈님을 울리면 안되는데...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니 부디 눈물을 거두시어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