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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유일한 생명의 길, 왜 십자가인가? 베드로전서 3장 18절 설교 |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비록 한절이만 너무 영광스럽고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의로운 자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다.”
오늘 간단한 이 한절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여 성령의 구원의 역사,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불의와 미움과 죄악을 제거하는 복음의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십자가인가? 그 답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대신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의로운 자 예수께서 불의한 자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뜻은 ‘대신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까?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화목 제물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Redemption) 또는 속죄(Atonement)라고 합니다.
한번 이 세상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재판관이 간음죄, 살인죄, 도둑, 사기, 유괴 등의 무서운 죄악들을 무조건 용서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유괴 살인범이 잡혀왔습니다. 재판관이 유괴 살인범을 보니 젊은 사람인데 앞길이 창창합니다. 이에 징역 30년을 선고하자니 너무나 불쌍해서 갑자기 법정에서 그 유괴 살인범을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아! 나는 사랑이 많다. 너 죄를 졌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가 용서하마. 이제 그만 집에 가라.’
그 이후 재판관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간음범, 방화범, 도둑놈, 강도 등, 그 어떠한 죄수에 대해서도 “너희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불쌍해서 안되겠다”라고 하면서 전부 풀어 주며 용서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만일 이러한 재판관이 있다면 그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이요,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로 그 재판관을 제거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재판관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사회의 공의가 살아날 것입니다.
사람 세계도 그러한데 만일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관이시라면 절대로 죄를 그냥 묵인하고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면, 그러면서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으며 또한 의롭고 거룩한 재판관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근거 없이 무조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만일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한 분이 되실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온유의 하나님, 오래참으시는 하나님, 겸손한 하나님… 그러나 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품으로 거룩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죄의 가장 반대편에 서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그 어떤 죄라도 그냥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냥 지나가는 순간 하나님의 완전하신 공의와 거룩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재판관으로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형벌하셔야 공의와 거룩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공의롭고 의로우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려면 동시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방법은 죄는 벌하셔야 하고 우리는 살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성상 죄인이요 날때 부터 죄성을 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모든 행위들, 생각하는 모든 것들, 뱉어내는 모든 말들에는 언제나 죄로 가득찰 수 밖에 없습니다.
신문을 보면 하루라도 죄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살인, 음란, 술취함, 방탕, 마약 중독, 폭행, 변태 등, 인간이 있는 곳에는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지독한 죄인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지독히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주의 백성들의 죄를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계획을 갖게 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공의한 벌을 내리고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용서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은 대속(Substitution) 입니다. 즉, 누군가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의 대속 계획은 사실 창세 전에 이루어 진일이고, 그리고 구약 때에도 많은 부분을 드러내셨습니다.
한 예를 보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히브리인입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로서 신실한 사람이요, 모든 인류의 찬란한 영웅입니다. 그는 모든 믿는 이들의 믿음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대속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자녀가 전혀 없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그 아들은 너의 후손이 될 것이다.
그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아들이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는 너의 마음 속에 한없는 기쁨과 웃음을 줄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마른 지 벌써 수십년째 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해 사라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말로 다 표현 못할 기쁨 가운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는데, 그 아들은 사실 언젠가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나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예, 왜 부르십니까? 주님!”
“네가 사랑하는 너의 독생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너에게 보여줄 곳으로 가라.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왜 이런 부탁을 하시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니 분명히 어떠한 기적을 통해 이삭을 살릴 것이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증거합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위로 가득차고 아주 거친 곳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입니다. 후에 이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선 곳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이 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산이기도 합니다.
모리아 산은 거칠고 흉악한 산이었습니다. 젊은 이삭이 나무 장자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보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위하여 타오르는 훼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으로 올라 갔을 때 이삭이 질문합니다.
“아버지! 장작도 있고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나요?”
아브라함은 눈물로 가슴이 막힙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발언을 합니다.
“나의 아들아!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셨단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마침내 그 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산의 꼭대기였습니다.
“이삭! 손을 내밀어라.”
이삭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손을 밧줄로 묶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늙은 노인이었습니다. 반면 이삭은 힘이 철절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아무 때라도 아버지를 밀어내고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태입니다. 분명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순종하는 아들이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그 상황은 얼마든지 발버둥치고 거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손을 묶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나는 내 생명을 스스로 주노니 누가 나의 생명을 취함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합니다. 이 모습 역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던 예수님의 고백을 듣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칼을 들고 이삭을 향하여 한 걸음 나섭니다. 그 순간에 이삭은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정신적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그 고통만큼이나 큰 고통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머금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아들의 가슴을 향하여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급하게 외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네 마음을 알았다. 네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구나”
아브라함이 내리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드니 수양 한마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고 수풀에 그 뿔이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저 양을 취하고 이삭 대신 그 양으로 내게 번제로 드리라.”
사실, 그날 아브라함도 모리아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양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양은 하나님의 정하신 장소에서 아브라함과 정하신 때에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보며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다시 살아난 이삭을 안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구나”
아브라함은 당장 그 양을 잡고, 그 대신 이삭을 붙들고 얼싸 안으며 기쁨에 겨워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들 이삭 역시 자신 대신 나타난 그 양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며 한없이 기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 양을 잡으면서, 그 양의 피를 흘리면서 깨달았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하여 그 어린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삭 대신 번제를 드릴 대속의 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과정을 통하여 이 양은 상징일 뿐이며 실제로는 이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 될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메시야의 날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대속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의 그 특별한 장소를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양이 나의 아들 이삭을 대속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모세 때에는 출애굽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양을 알려 주셨습니다. 수천수만의 양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유월절 희생양으로 드려졌습니다.
유월절 그 날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하신 심판이 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로 바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지나가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
이 또한 대속의 진리입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양을 따로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유월절 양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여 길렀습니다.
어디서 유월절 양들을 따로 길렀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유월절 양을 길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예루살렘 지경에서 목자들이 양을 칩니다.
이들은 어떤 양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바로 유월절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성탄의 첫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작은 양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짜 유월절 양이었습니다.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월절 양들이 많지만, 지금 예루살렘 베들레헴에서 난 어린 아기는 ‘그 유월절양’입니다. ‘그 유월절 희생양’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양을 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외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그 때도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감람산에 오르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동문을 지나십니다.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가실 때에 무리들이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할렐루야! 다윗의 자손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동시에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한 유월절 양들도 정확히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수 없이 많은 유월절 양들이 베데스다 연못 곁의 “양의 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느 3:32, 12:39).
갈보리 산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도 오르시고, 실제 예루살렘에서 길려진 유월절 양들도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양을 검사합니다. 유월절 양은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합니다.
동시에 제사장들과 심지어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비난하고, 묻고, 따지고, 조사하면서 어디 흠이 있나 찾으려고 온갖 심문을 하지만 아무 죄나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법을 대표하는 로마 법정의 총독 빌라도에게까지 끌려가 흠이 있나 조사를 당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고백합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흠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완전하고 흠이 없는 유월절 양으로서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날 3시, 지금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각 사람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아 죽이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로마 병정들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었습니다. 장소도 예루살렘이요, 시간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산은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모리아 산입니다.
“내가 이 산에서 내가 준비하리라.”
여호와 이레!
바로 그 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고통과 피 범벅 속에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내가 다 지불하였다.”
제사장들은 이제 더 이상 성전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동물 유월절 양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그림자들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림자로 상징되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으로 인하여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계획은 끝난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어린양을 의지하는 자마다 아무리 불의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대속 제물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하여 그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을 믿는 자들마다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관례에 따라 무리의 요구에 따라 죄인 하나를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의로운 예수를 석방하길 원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에 넘기기로 결정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빌라도는 의도적으로 무서운 죄수 하나를 무리들 앞에 거론합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거론하였습니다.
바라바는 도둑이며 반역자, 살인자, 악한 자였습니다. 그 누가 보아도 바라바는 너무 무섭고 잔인한 악독한 죄수이기에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자신있게 질문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들 군중이 저 악명 높고 무서운 바라바보다는 분명히 예수를 사면하여 줄 것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희 무리들아! 너희는 누구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누구를 석방하랴!”
그러나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군중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사주를 받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줘? 그러면 이 예수를 어떻게 하랴?”
이 때, 예수의 형벌이 결정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따라서 예수는 도둑놈이요, 반역자요, 살인자요, 온갖 악을 행한 무서운 죄수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를 잡아 십자가에 달아 멥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세개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세개의 십자가는 사실, 정확시 세명의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의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옆에는 무서운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는 정확히 바라바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리자, 훼불을 든 군병 하나가 깊은 로마의 감옥으로 내려갑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지납니다. 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냄새가 아주 퀴퀴합니다. 한참 어두운 복도를 지난 군병 간수가 드디어 어떤 독방으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창을 들고 키를 들고 방간을 하나 엽니다.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인생 동안 내내 무서운 악을 행함으로 그 얼굴이 흉악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떤 남자가 벽을 향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수는 군병을 보자 기겁을 하며 벽 귀퉁이로 기어서 숨어들어갑니다.
훼불을 든 군병이 가까이 그 남자에게 가서 훼불을 얼굴에 비치며 말합니다.
“너 바라바야! 일어나라. 이제 시간이 됐다.”
“싫다! 나는 이곳이 좋다. 나를 내버려 두라!”
군병을 피하여 기겁하여 도망치는 바라바!!!
이때 군병이 외칩니다. “이놈 조용히 해라. 이놈아. 내가 간수로 있는 동안 너 같은 행운아는 처음이다. 너, 죽지 않게 되었다. 너는 십자가 상에서 죽지 않게 되었단 말이다. 난 내 생전에 너처럼 행운아는 처음 본다.”
“아니, 군졸 나으리?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데요.”
“이리 나와 봐! 이 나쁜 놈. 너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놈인데, 세상에 이럴 수가!”
군병은 바라바를 끌고 복도로 나와 저 멀리 갈보리 언덕이 보이는 곳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너 저기 보이지. 저 언덕. 보여 안보여? 저기 저 갈보리 언덕의 세개의 십자가가 보이냐! 그리고 그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 보여 안보여? 원래 이놈아 그 십자가는 너의 자리 아니냐? 그 십자가는 너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너를 그 곳에 못으로 박으려고 만들어 진 십자가이지. 그러나, 너는 이제 자유자다. 그 십자가에 달린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너 대신 그 자리에 달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사건 이후에 바라바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건을 정확히 전개해 나가고 계시는데 그 모든 전개의 내용이 바로 대속을 알려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죄많고 불의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바로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라바를 등장시키셔서 우리가 바라바인 것을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바라바는 도둑놈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도둑놈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까?
바라바는 반역자였습니다. 우리도 반역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반역하며 살아갑니까?
바라바는 살인자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살인자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야 말로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그 무서운 죽음에 쳐 넣은 주인공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까?
바라바는 죄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 앞에서 영원한 죄값을 치러야 할 죄수들입니다. 즉, 영적으로 하면 바라바는 바로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로 여겨지는 챨스 스펼전 목사님께서 임종하시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목사님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때, 챨스 스펄젼 목사님께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소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 그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인간 역사 속에서 최고의 신학자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을 만분지 일이라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의 육체적인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로마 군병들이 채찍하며 고문을 가합니다. 그들의 고문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 채찍은 끝이 갈쿠리로 되어 있어서 사람의 살점을 띄어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그 당시의 “왕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으로 간주한 후에 모든 악독한 말들과 무서운 폭행을 가하는 게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모독합니다. 굴밤을 때립니다. 곤봉으로 예수님을 후려 갈리고, 그리고 그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선지자라면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실컷 장난을 하며 왕 게임을 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갈보리 산, 즉, 모리아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두 손을 양 옆으로 편 후에 대못을 박습니다. 예수님 머리에는 조롱의 표시로 가시 면류관을 씌우더니, 그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자, 이제 십자가를 들어올립니다.
이때 모든 몸의 무게가 발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발로 견디지 않으면 십자가의 더 큰 고통이 온 몸에 이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하여 발로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못에 박힌 발이 몇분 견디지 못하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몸의 무게는 못 박힌 발에서 손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면 손이 그 고통을 덜어보려고 힘을 다하지만 역시 몇분 못 견디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후 십자가의 고통은 온몸에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많이 고통을 받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의도적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로마 법을 어긴 가장 악한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어 공의를 세우겠다고 개발한 형벌이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형을, execution 즉, ex: out of: cross: 십자가: ex-cruciating! 인간의 모든 것이 튀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십자가의 형벌은 율법의 저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 앞에서 인간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심한 현기증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옵니다. 구역질과 견딜 수 없는 구토와 함께 몸의 모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몸에 있는 모든 땀이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는 몸 안에 있는 모든 액체가 다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온 몸에 고통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또한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
이는 예수님이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을 말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가 기도하는 중에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 ‘같이’ 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 바닥에 떨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몇년 전 미국의 권위 있는 의사가 의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사람의 피가 땀 구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땀이 피가 된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함께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받으시는 잔에는 모든 죄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로 부터의 인류가 지은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그 잔에 담겨 있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 값이 예수님의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살인죄, 변태, 도적질, 거짓말, 폭행, 사탄 숭배, 우상 숭배, 욕설, 남의 등을 침, 언약을 깨뜨림, 유괴, 음란, 마약 등등,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지실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루시는 대속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사건으로써 그분의 마시는 잔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넣고 그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메네 기도에서 그 정신적 고통이 너무 무거운지라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잔이 무엇입니까? 이 잔은 인류 역사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는 형량인 것입니다.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땀이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릴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품 안에 영원히 계셨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영원토록 한번도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잔, 즉, 그가 대속하여 담당할 그 잔으로 인하여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그 잔의 형벌을 담당하셔야 하는 죄수가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그 잔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 공의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이 영적인 고통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지옥 자체의 고통입니다. 한 사람의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수천 수백만의 지옥의 고통을 홀로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차마 그 장면을 볼 수가 없어서, 그 슬픔을 감추지 못하셔서 하늘이 어두워 지고 바람과 태풍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장막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가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루신 단번의 제사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Once-for-All. 이번 한번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끝났습니다. 구속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Once-For-All)이라는 용어는 법정 용어입니다. 즉 “그 죄에 대하여 내가 다 치루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법적으로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계획대로 맘껏 역사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영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그 답은 나 때문입니다. 나 대신에 ….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공의로우신 법을 만족시키셔야 했는데,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영원토록 나의 죄로 인한 죄값을 갚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 갚으셨습니다. 아니 내가 지은 죄의 수백배, 수천배를 다 갚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완전한 자유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에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최고 법정에서의 선포입니다. 그 누구도 이 법정의 선포를 바꿀 자가 없습니다. 이는 한번 선포되면서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이 외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영생의 기쁨을 소유하라고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 축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치도 않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보혈만을 믿고 언제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십자가는 유일한 생명의 길, 왜 십자가인가? 베드로전서 3장 18절 설교|작성자 엔젤로테
왜 십자가인가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비록 한절이만 너무 영광스럽고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의로운 자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다.”
오늘 간단한 이 한절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여 성령의 구원의 역사,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불의와 미움과 죄악을 제거하는 복음의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십자가인가? 그 답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대신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의로운 자 예수께서 불의한 자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뜻은 ‘대신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까?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화목 제물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Redemption) 또는 속죄(Atonement)라고 합니다.
한번 이 세상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재판관이 간음죄, 살인죄, 도둑, 사기, 유괴 등의 무서운 죄악들을 무조건 용서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유괴 살인범이 잡혀왔습니다. 재판관이 유괴 살인범을 보니 젊은 사람인데 앞길이 창창합니다. 이에 징역 30년을 선고하자니 너무나 불쌍해서 갑자기 법정에서 그 유괴 살인범을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아! 나는 사랑이 많다. 너 죄를 졌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가 용서하마. 이제 그만 집에 가라.’
그 이후 재판관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간음범, 방화범, 도둑놈, 강도 등, 그 어떠한 죄수에 대해서도 “너희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불쌍해서 안되겠다”라고 하면서 전부 풀어 주며 용서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만일 이러한 재판관이 있다면 그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이요,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로 그 재판관을 제거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재판관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사회의 공의가 살아날 것입니다.
사람 세계도 그러한데 만일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관이시라면 절대로 죄를 그냥 묵인하고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면, 그러면서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으며 또한 의롭고 거룩한 재판관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근거 없이 무조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만일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한 분이 되실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온유의 하나님, 오래참으시는 하나님, 겸손한 하나님… 그러나 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품으로 거룩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죄의 가장 반대편에 서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그 어떤 죄라도 그냥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냥 지나가는 순간 하나님의 완전하신 공의와 거룩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재판관으로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형벌하셔야 공의와 거룩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공의롭고 의로우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려면 동시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방법은 죄는 벌하셔야 하고 우리는 살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성상 죄인이요 날때 부터 죄성을 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모든 행위들, 생각하는 모든 것들, 뱉어내는 모든 말들에는 언제나 죄로 가득찰 수 밖에 없습니다.
신문을 보면 하루라도 죄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살인, 음란, 술취함, 방탕, 마약 중독, 폭행, 변태 등, 인간이 있는 곳에는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지독한 죄인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지독히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주의 백성들의 죄를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계획을 갖게 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공의한 벌을 내리고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용서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은 대속(Substitution) 입니다. 즉, 누군가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의 대속 계획은 사실 창세 전에 이루어 진일이고, 그리고 구약 때에도 많은 부분을 드러내셨습니다.
한 예를 보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히브리인입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로서 신실한 사람이요, 모든 인류의 찬란한 영웅입니다. 그는 모든 믿는 이들의 믿음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대속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자녀가 전혀 없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그 아들은 너의 후손이 될 것이다.
그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아들이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는 너의 마음 속에 한없는 기쁨과 웃음을 줄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마른 지 벌써 수십년째 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해 사라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말로 다 표현 못할 기쁨 가운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는데, 그 아들은 사실 언젠가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나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예, 왜 부르십니까? 주님!”
“네가 사랑하는 너의 독생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너에게 보여줄 곳으로 가라.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왜 이런 부탁을 하시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니 분명히 어떠한 기적을 통해 이삭을 살릴 것이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증거합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위로 가득차고 아주 거친 곳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입니다. 후에 이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선 곳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이 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산이기도 합니다.
모리아 산은 거칠고 흉악한 산이었습니다. 젊은 이삭이 나무 장자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보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위하여 타오르는 훼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으로 올라 갔을 때 이삭이 질문합니다.
“아버지! 장작도 있고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나요?”
아브라함은 눈물로 가슴이 막힙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발언을 합니다.
“나의 아들아!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셨단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마침내 그 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산의 꼭대기였습니다.
“이삭! 손을 내밀어라.”
이삭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손을 밧줄로 묶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늙은 노인이었습니다. 반면 이삭은 힘이 철절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아무 때라도 아버지를 밀어내고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태입니다. 분명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순종하는 아들이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그 상황은 얼마든지 발버둥치고 거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손을 묶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나는 내 생명을 스스로 주노니 누가 나의 생명을 취함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합니다. 이 모습 역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던 예수님의 고백을 듣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칼을 들고 이삭을 향하여 한 걸음 나섭니다. 그 순간에 이삭은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정신적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그 고통만큼이나 큰 고통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머금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아들의 가슴을 향하여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급하게 외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네 마음을 알았다. 네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구나”
아브라함이 내리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드니 수양 한마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고 수풀에 그 뿔이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저 양을 취하고 이삭 대신 그 양으로 내게 번제로 드리라.”
사실, 그날 아브라함도 모리아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양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양은 하나님의 정하신 장소에서 아브라함과 정하신 때에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보며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다시 살아난 이삭을 안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구나”
아브라함은 당장 그 양을 잡고, 그 대신 이삭을 붙들고 얼싸 안으며 기쁨에 겨워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들 이삭 역시 자신 대신 나타난 그 양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며 한없이 기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 양을 잡으면서, 그 양의 피를 흘리면서 깨달았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하여 그 어린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삭 대신 번제를 드릴 대속의 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과정을 통하여 이 양은 상징일 뿐이며 실제로는 이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 될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메시야의 날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대속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의 그 특별한 장소를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양이 나의 아들 이삭을 대속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모세 때에는 출애굽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양을 알려 주셨습니다. 수천수만의 양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유월절 희생양으로 드려졌습니다.
유월절 그 날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하신 심판이 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로 바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지나가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
이 또한 대속의 진리입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양을 따로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유월절 양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여 길렀습니다.
어디서 유월절 양들을 따로 길렀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유월절 양을 길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예루살렘 지경에서 목자들이 양을 칩니다.
이들은 어떤 양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바로 유월절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성탄의 첫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작은 양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짜 유월절 양이었습니다.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월절 양들이 많지만, 지금 예루살렘 베들레헴에서 난 어린 아기는 ‘그 유월절양’입니다. ‘그 유월절 희생양’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양을 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외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그 때도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감람산에 오르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동문을 지나십니다.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가실 때에 무리들이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할렐루야! 다윗의 자손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동시에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한 유월절 양들도 정확히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수 없이 많은 유월절 양들이 베데스다 연못 곁의 “양의 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느 3:32, 12:39).
갈보리 산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도 오르시고, 실제 예루살렘에서 길려진 유월절 양들도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양을 검사합니다. 유월절 양은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합니다.
동시에 제사장들과 심지어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비난하고, 묻고, 따지고, 조사하면서 어디 흠이 있나 찾으려고 온갖 심문을 하지만 아무 죄나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법을 대표하는 로마 법정의 총독 빌라도에게까지 끌려가 흠이 있나 조사를 당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고백합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흠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완전하고 흠이 없는 유월절 양으로서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날 3시, 지금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각 사람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아 죽이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로마 병정들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었습니다. 장소도 예루살렘이요, 시간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산은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모리아 산입니다.
“내가 이 산에서 내가 준비하리라.”
여호와 이레!
바로 그 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고통과 피 범벅 속에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내가 다 지불하였다.”
제사장들은 이제 더 이상 성전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동물 유월절 양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그림자들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림자로 상징되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으로 인하여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계획은 끝난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어린양을 의지하는 자마다 아무리 불의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대속 제물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하여 그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을 믿는 자들마다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관례에 따라 무리의 요구에 따라 죄인 하나를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의로운 예수를 석방하길 원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에 넘기기로 결정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빌라도는 의도적으로 무서운 죄수 하나를 무리들 앞에 거론합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거론하였습니다.
바라바는 도둑이며 반역자, 살인자, 악한 자였습니다. 그 누가 보아도 바라바는 너무 무섭고 잔인한 악독한 죄수이기에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자신있게 질문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들 군중이 저 악명 높고 무서운 바라바보다는 분명히 예수를 사면하여 줄 것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희 무리들아! 너희는 누구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누구를 석방하랴!”
그러나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군중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사주를 받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줘? 그러면 이 예수를 어떻게 하랴?”
이 때, 예수의 형벌이 결정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따라서 예수는 도둑놈이요, 반역자요, 살인자요, 온갖 악을 행한 무서운 죄수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를 잡아 십자가에 달아 멥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세개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세개의 십자가는 사실, 정확시 세명의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의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옆에는 무서운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는 정확히 바라바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리자, 훼불을 든 군병 하나가 깊은 로마의 감옥으로 내려갑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지납니다. 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냄새가 아주 퀴퀴합니다. 한참 어두운 복도를 지난 군병 간수가 드디어 어떤 독방으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창을 들고 키를 들고 방간을 하나 엽니다.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인생 동안 내내 무서운 악을 행함으로 그 얼굴이 흉악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떤 남자가 벽을 향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수는 군병을 보자 기겁을 하며 벽 귀퉁이로 기어서 숨어들어갑니다.
훼불을 든 군병이 가까이 그 남자에게 가서 훼불을 얼굴에 비치며 말합니다.
“너 바라바야! 일어나라. 이제 시간이 됐다.”
“싫다! 나는 이곳이 좋다. 나를 내버려 두라!”
군병을 피하여 기겁하여 도망치는 바라바!!!
이때 군병이 외칩니다. “이놈 조용히 해라. 이놈아. 내가 간수로 있는 동안 너 같은 행운아는 처음이다. 너, 죽지 않게 되었다. 너는 십자가 상에서 죽지 않게 되었단 말이다. 난 내 생전에 너처럼 행운아는 처음 본다.”
“아니, 군졸 나으리?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데요.”
“이리 나와 봐! 이 나쁜 놈. 너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놈인데, 세상에 이럴 수가!”
군병은 바라바를 끌고 복도로 나와 저 멀리 갈보리 언덕이 보이는 곳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너 저기 보이지. 저 언덕. 보여 안보여? 저기 저 갈보리 언덕의 세개의 십자가가 보이냐! 그리고 그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 보여 안보여? 원래 이놈아 그 십자가는 너의 자리 아니냐? 그 십자가는 너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너를 그 곳에 못으로 박으려고 만들어 진 십자가이지. 그러나, 너는 이제 자유자다. 그 십자가에 달린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너 대신 그 자리에 달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사건 이후에 바라바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건을 정확히 전개해 나가고 계시는데 그 모든 전개의 내용이 바로 대속을 알려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죄많고 불의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바로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라바를 등장시키셔서 우리가 바라바인 것을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바라바는 도둑놈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도둑놈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까?
바라바는 반역자였습니다. 우리도 반역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반역하며 살아갑니까?
바라바는 살인자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살인자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야 말로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그 무서운 죽음에 쳐 넣은 주인공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까?
바라바는 죄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 앞에서 영원한 죄값을 치러야 할 죄수들입니다. 즉, 영적으로 하면 바라바는 바로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로 여겨지는 챨스 스펼전 목사님께서 임종하시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목사님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때, 챨스 스펄젼 목사님께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소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 그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인간 역사 속에서 최고의 신학자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을 만분지 일이라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의 육체적인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로마 군병들이 채찍하며 고문을 가합니다. 그들의 고문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 채찍은 끝이 갈쿠리로 되어 있어서 사람의 살점을 띄어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그 당시의 “왕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으로 간주한 후에 모든 악독한 말들과 무서운 폭행을 가하는 게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모독합니다. 굴밤을 때립니다. 곤봉으로 예수님을 후려 갈리고, 그리고 그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선지자라면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실컷 장난을 하며 왕 게임을 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갈보리 산, 즉, 모리아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두 손을 양 옆으로 편 후에 대못을 박습니다. 예수님 머리에는 조롱의 표시로 가시 면류관을 씌우더니, 그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자, 이제 십자가를 들어올립니다.
이때 모든 몸의 무게가 발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발로 견디지 않으면 십자가의 더 큰 고통이 온 몸에 이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하여 발로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못에 박힌 발이 몇분 견디지 못하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몸의 무게는 못 박힌 발에서 손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면 손이 그 고통을 덜어보려고 힘을 다하지만 역시 몇분 못 견디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후 십자가의 고통은 온몸에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많이 고통을 받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의도적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로마 법을 어긴 가장 악한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어 공의를 세우겠다고 개발한 형벌이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형을, execution 즉, ex: out of: cross: 십자가: ex-cruciating! 인간의 모든 것이 튀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십자가의 형벌은 율법의 저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 앞에서 인간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심한 현기증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옵니다. 구역질과 견딜 수 없는 구토와 함께 몸의 모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몸에 있는 모든 땀이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는 몸 안에 있는 모든 액체가 다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온 몸에 고통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또한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
이는 예수님이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을 말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가 기도하는 중에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 ‘같이’ 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 바닥에 떨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몇년 전 미국의 권위 있는 의사가 의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사람의 피가 땀 구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땀이 피가 된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함께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받으시는 잔에는 모든 죄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로 부터의 인류가 지은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그 잔에 담겨 있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 값이 예수님의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살인죄, 변태, 도적질, 거짓말, 폭행, 사탄 숭배, 우상 숭배, 욕설, 남의 등을 침, 언약을 깨뜨림, 유괴, 음란, 마약 등등,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지실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루시는 대속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사건으로써 그분의 마시는 잔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넣고 그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메네 기도에서 그 정신적 고통이 너무 무거운지라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잔이 무엇입니까? 이 잔은 인류 역사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는 형량인 것입니다.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땀이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릴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품 안에 영원히 계셨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영원토록 한번도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잔, 즉, 그가 대속하여 담당할 그 잔으로 인하여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그 잔의 형벌을 담당하셔야 하는 죄수가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그 잔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 공의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이 영적인 고통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지옥 자체의 고통입니다. 한 사람의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수천 수백만의 지옥의 고통을 홀로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차마 그 장면을 볼 수가 없어서, 그 슬픔을 감추지 못하셔서 하늘이 어두워 지고 바람과 태풍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장막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가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루신 단번의 제사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Once-for-All. 이번 한번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끝났습니다. 구속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Once-For-All)이라는 용어는 법정 용어입니다. 즉 “그 죄에 대하여 내가 다 치루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법적으로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계획대로 맘껏 역사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영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그 답은 나 때문입니다. 나 대신에 ….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공의로우신 법을 만족시키셔야 했는데,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영원토록 나의 죄로 인한 죄값을 갚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 갚으셨습니다. 아니 내가 지은 죄의 수백배, 수천배를 다 갚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완전한 자유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에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최고 법정에서의 선포입니다. 그 누구도 이 법정의 선포를 바꿀 자가 없습니다. 이는 한번 선포되면서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이 외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영생의 기쁨을 소유하라고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 축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치도 않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보혈만을 믿고 언제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십자가는 유일한 생명의 길, 왜 십자가인가? 베드로전서 3장 18절 설교|작성자 엔젤로테
격랑 속의 고요함
마가복음 4장 35절~41절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고요한 가운데의 고요는 참 고요가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함을 얻어 와야 비로소 이것이 타고난
마음의 참 경계인 것이다'---동양인의 지혜를 모았다고 하는 중국고전채근담에 있는 말입니다.
사람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번화하고 소란한 환경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얻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참 고요인 것입니다.
소란한가운데서 고요함을 찾을 줄 알고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자기만의 고요함을 찾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만 진정 고요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대처하는 스타일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환경에 좌우되는 종속적 인간입니다.
학술적인 용어로는 이렇게 되는 것을 어시밀레이션(a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어컬처라이제이션(acculturiz-ation)이라고도 합니다.
동화(同化)라는 뜻이지요.
환경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는 사람은 곧 동화적(同化的) 존재인 것입니다.
언제나 남을 따라가면서 동화하기를 잘하는 체질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섞이면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슬퍼합니다.
남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그를 미워하고, 한 대 맞으면 한대 때리고, 격한 가운데에 들어가 욕을 당하면
나도 욕을 보이는 타입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존재란 아예 없는 사람입니다.
그 인격은 오로지 환경의 산물(産物)일 따름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산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항거(抗拒) 체질의 인간형입니다.
환경에 늘 반항하는 역설적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학술적인 용어로는 이런 체질을 디시밀레이션(di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부동화(不同和)내지 이화(異化) 작용을 뜻합니다. 언제나 거스르고 퉁깁니다.
반항해야만 되는 줄 압니다. 반항이야말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고 뜻도 모르면서 일단 반항부터 하고 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살아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순히 나오면 자기가 지는 줄로 압니다. 덮어놓고 '노우' 해야 됩니다.
'아니요!' 해야만 자기가 살아남는 줄 아는 이 철저한 반항심------
현대의 젊은이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남의 말을 다 들어 보지도 않고, 깊이 생각해 보는 법도 없이, 무조건 '노우'입니다.
반드시 젊은이들만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소위 기성 세대들도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입니다.
이를테면 혼사(婚事) 문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얼마나 똑똑한지 아십니까?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줄 아는 분별력과 사고력을 지닌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배우자를 택할 때에도 서로의 장래문제나 부모님의 기호(嗜好)까지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선택을 합니다.
그렇게 '이 사람이다' 싶어 아름답게 교제하다가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을라치면 그 부모님들의 반응이
대부분 어떤지 아십니까? 무조건 안된다고 고개부터 가로젓습니다.
아들딸들이 신중하게 선택하여 사랑하고 있는 그 당사자를 한번 만나도 보지 않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노우!" 하는 것입니다. 이 무슨 심사입니까? 이래서 시끄럽고 복잡해집니다.
때로는 우리 교역자들이 중재자가 되어 일단 만나보도록 기회를 마련합니다.
만나 보고 나서는 "좋다"고 말하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불신(不信)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살아오면서 속고 배신당하는 동안 불신이 체질화된 것이지요.
그러한 불신 체질이 병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자기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아니요!" 하고 철저하게 반항합니다.
반항으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려는 것---소인배들의 자기 방어요, 어리석은 자들의 체질입니다.
셋째는 초월적 인간형입니다.
초월적 존재, 초연한 사람---학술적 용어로는 트랜센덴털리즘(transcendentalism)이라고 합니다.
일이 잘된다고 교만하지 않고, 억울함을 당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야단스럽게 떠드는 자리에 가서도
조용함을 찾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뜻과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살아갑니다.
요즘흔히 들려오는 말로 '주체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체'는 어디에서 찾는 것입니까?
따라가면 주체가 생깁니까? 반항함으로 주체의식이 살아납니까?
참된 주체의식, 자기 개성, 자기 존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환경을 초월한 초연적(超然的)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격자가 됩니다.
이렇게 초월할 때에 개혁하고 창조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맹종(盲從)도 아니고, 맹목적인 반항도 아닙니다.
원수의 말이라도 들어야 할 말은 듣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갈 길은 가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엄연히 가야 할 자기 길을 가는 인격,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본문을 깊이 상고해 보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에 놀라는 제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하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습니다마는 참으로 놀라야 할 것은 그 능력이 아닙니다.
풍랑 속에서도 고요하게 주무시는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풍랑과는 아무 상관없이 초연하신 예수님의 모습, 그 위대한 인격, 그 놀라운 샬롬, 평화---
이것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놀랄 것을 놀라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에 놀라고있는 것입니다.
풍랑 때문에 놀라는 것도 어리석지만 풍랑을 고요케 하시는 능력, 단순히 그 능력 때문에 놀라는 것
역시 유치한 반응입니다. 정말로 놀라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한다면 그밖에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을 정말로 경외하는 사람은 이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깜짝깜짝 놀라며 사는 사람은 세상일에 놀랄 것이 한가지도 없습니다.
정말로 고민해야 할 것을 진정으로 고민하며 사는 사람은 시시한 일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본문 중에서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크심을 말합니다.
그 마음과 그 영혼, 그 몸, 그리고 그 위대한 능력이 고요함으로 나타나고있습니다.
확정되어지고 있습니다.
성서신학적 이야기입니다마는
오늘의 성경 본문을 원어 성경으로 읽어 보면 '메갈레'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여러분, 영어에 '메가톤(megaton)'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영어에서 보통 큰 것을 빅(big) 혹은 그레이트(great)라고 하지만 아주 큰 것을 나타낼 때는
메가(mega)라는 말을 붙입니다. 이 '메가'라는 것이 원래 헬라어입니다.
가장크다는 말이지요.
다시 우리들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주 크다는 뜻을 가진 '메갈레'가 어디어디에 쓰였는지 알아봅시다.
첫 번째로 "큰 광풍이 일어나며"에서 광풍의 크기를 말할 때에 쓰였습니다.
원문을 보면 '메갈레 아네무'라 했습니다. 광풍 중에서도 아주 큰 메가톤급 광풍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명령하여 바다가 고요해진 장면에서 쓰였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는데 원문에서는 역시 '메갈레'가 쓰였습니다.
'갈레네 메갈레'---- 아주 큰 메가톤급의 고요함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심히 두려워하여"에 '메갈레'가 쓰였습니다.
'포본메간'---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사람들이 메가톤급으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메가톤급이 세 개입니다.
큰광풍이 메가톤급이요, 고요함이 메가톤급이요, 놀라는 마음이 메가톤급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 사는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극에서 극으로---모든 것이 메가톤급입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요동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반응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풍랑 가운데에 가만히 주무시고 계셨지만 풍랑이 일고 있는 것은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너무 깊이 잠드셔서 풍랑이 이는 줄도 모르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풍랑을 알면서도 고요함을 찾아 편히 쉬실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요,주님의 마음이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비행기 안에서 취하는 태도들도 참 가지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세 시간씩이나 날아가면서 한잠도 못잡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꼬박 열세 시간을 버팁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식사는 그대로 밀어놓습니다.
그리고는 벌벌 떨고앉아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그런 분께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이 있는 분이신지
무서워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죄가 많은가 보다.'여러분, 사람의 공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죽을까봐 걱정이고, 둘째, 지옥갈까봐 걱정입니다.
사실이지 비행기 여행만큼 신나는 것도 드물지 않습니까?
저는 탈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탑니다.
옛날에 태어났다면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것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비행기 덕분에 하늘높이 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뿐만 아니라 시간마다 음식잘 주니 좋고, 승무원들이 이모저모 신경 써주니 불편한 데 없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전화 오지 않아 제일 좋습니다. 만사 태평입니다.
비행기 타고 가다 사고 나면 어쩌냐고요? 그게 무슨 걱정입니까?
사고 나면 하늘나라로 직행할 것 아닙니까?
비행기 타고 많이 올라왔으니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모르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니 참 불행한 일입니다.
시끄러운 소리, 하다못해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도 의인에게는 단잠이 있습니다. 고요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요, 영적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장 26절을 보면 "믿음이적은 자들아!" 하고 꾸짖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이지 환경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믿음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문제도, 격동하는 사회 문제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문제라고 우리 주님이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믿는확실한 믿음---바로 그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로 보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오늘도 내 운명을 좌우하시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안기듯이 이 풍랑 속에서도 평안과 고요함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은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 중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고요하셨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십니다.
다음날 아침이면 저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긴장된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눈앞에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부조리하고 모순된 빌라도의 재판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도망가 버리는 뼈아픈 배신도 있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고독이 있습니다.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고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왜입니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결코 예수님 혼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것을 믿고 계셨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풍랑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까짓 풍랑으로 해서 하나님이 손해보실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생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풍랑을 타고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가는 중입니다.
그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사나운 풍랑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형편입니다.
짐은 다 풀어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열 나흘 동안을 굶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가지고 말합니다. "배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2-25)."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다 이루어질 것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풍랑으로 인하여 괴로워하십니까?
이 풍랑 때문에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 수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지언정 이 격랑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거나 하나님의 일에 한치라도 지장을 줄 수는 없음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자---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사역을 확실히 믿는 사람한테는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존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 모든 뜻이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내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내게 향한하나님의 경륜이 그 누구의 실수, 그 누구의 잘못으로도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풍랑도 하나님의 사역을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이것을 믿는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경륜과 동요는 별개의 언어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경건한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이요, 고요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사람들은 격동합니다. 벌벌 떱니다. 소란을 피웁니다.
이것이 가장 나약하고 불신앙적인 태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한 사십일 년 전 쯤 부산에서 부교역자로 일을 볼 때의 이야기입니다.
원목이신 박목사님과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신문 배달하는 소년이 신문을 던져 주고 갑니다.
그런데 신문에도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먼저 신문을 드립니다. 목사님이 다 읽으신 다음에 보려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신문을 둘둘 말아쥐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저도 지금 신문을 보아야 되겠는데요.
그래서 "목사님, 신문을 가지고 어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목사님은 신문을 펴들고 큰 글자만 보여주십니다. "이게 이렇게 됐어."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서 신문을 펴놓고 "하나님, 이것 보십시오" 하면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들 떠드는 것입니까? 떠든다고 해결이 됩니까? 이 동요와 격동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밑으로 내리달을 뿐입니다.
이 격동, 이 격랑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이 닥쳐올 때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체포되는 순간베드로는 칼을 휘두르고, 횃불을 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을 가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 : 11)."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당신께서 마셔야 할 십자가의 잔을 생각하실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죄인은 당황합니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믿을수록 점점 더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정말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내가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 말마따나"천당 지옥을 믿지는 않지만 만일에 있다면 틀림없이 지옥일 것"이라고---
믿거나 말거나 정말 천당 지옥이 있다면 내가 갈 곳은 지옥이지 별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불 신앙의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언제든지 최악의 경우만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언제나 최선의 경우를 생각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바라봅니다.
내 생각이나 내 지혜와는 다르지만 이 풍랑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뜻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이 비상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풍랑을 꾸짖으십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꾸짖는다는 말을 원문에서 찾아 보면 '에페티메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귀신을 내쫓을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25절의 '꾸짖어 가라사대'를 원문에서 찾으면
역시'에페티메센'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타협적인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격랑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명령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내가 격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요함으로 격랑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격랑을 밀어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초연한 모습입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터툴리안은 말했습니다.
"교회는 배요, 세상은 격랑하는 바다이다." 항해 중에 배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침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뜻이 그 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힘은 고요에 있고, 그 속에서 확증됩니다.
오히려 그 격랑 때문에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가 만 주의 주되심이 거기에서 확증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 풍랑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믿음을 가지고 다음에 오는 격랑 속에서 고요함을 찾아나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 이 지혜, 이 고요함 속에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성공하려면 3P(three P)가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P자로 시작되는 세 가지
---페이션스(patience), 프랙티스(practice), 피스(peace)가 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인내가, 둘째는 실천력이, 그리고 셋째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인내와 실천력이 있어도 평화가 없으면 헛일입니다. 학생들이 시험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고요해야 합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마음의 안정과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중의 고요가 아니라 격랑 속의 고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랑 속에서도 조용함을 찾아 쉬시던 주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고요함 속에 고요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현장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어디에나 고요함이 있습니다.
풍랑 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면 고요하고, 고요한 바다에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폭풍과 전쟁과 어려운 역경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계신 곳에 참고요가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평생 칼빈을 연구한 어느 분이 말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어찌나 두려워했던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격랑 속에서 초연한 고요를 가질 때,
여기에 승리의 생활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수도원의 방향은 이것입니다.
벧후 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국화 옆에서”라는 서 정주 시인의 시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봉쇄 수도원을 세우고 들어와 살며 하나님과 마음껏 울면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 소원이 이제 오늘부터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준비였습니다.
오늘부터 정식으로 출발입니다.
방향이 속도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속도는 조금 느리더라도 이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중요합니다. 첫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눈위에 발자국을 첫 번 내는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합니다. 뒤에 사람은 그 발자국을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2013년 4월 28일.
영국 선덜랜드에서 마라톤이 있었습니다. 결승선에 들어온 선수 중 한 명을 빼고는 5,000여 명이 실격처리 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2위로 달리고 있던 선수가 지정된 코스를 잠시 벗어나 달렸다가 다시 원래 코스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2위 선수부터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모두 잘못인 줄 몰랐습니다. 주최 측이 경로 표시를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앞 사람만을 따라가던 5,000명이 선수들은 전체 42.195㎞에서 고작 264m를 덜 뛰게 되어 결국 모두가 실격처리가 되었습니다.
제1차 관심 하나님과 합일
무슨 단체든지 목적이 있습니다.
학교는 학생들을 잘 교육하여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회사는 경영을 잘 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신앙생활 잘 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다가 천국가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수도원의 목적도 분명합니다.
수도원의 제1차적 관심은 수도하는 이들이 <하나님과 합일>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된 우리는 늘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가지는 줄기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수도원의 제1차원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 원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입니다.
한 수도사가 동굴속에서 수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수도사는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목적입니다.
사냥을 좋아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나가 길을 잃었습니다. 밤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맹수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려 왔습니다. 맹수 밥이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산속에서 양떼를 몰고 다니며 목축하는 소년이 나타났습니다. 길을 잘 알고 있기에 왕을 산밖으로 인도하여 드렸습니다. 생명을 살린 왕은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소년은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한번만 우리 집에 오셔서 산속을 헤메시던 생각을 하시며 하룻밤만 주무시고 돌아 가주세요.”
왕은 그렇게 약속하였습니다. 궁중으로 돌아 와서 신하들에게 산속 목동집 방문 일자를 말해 주었습니다. 신하들은 길을 닦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을 다시 짓었습니다. 왕이 잘 방을 잘 만들었습니다. 최고 고급 가구들을 날라 왔습니다. 산속에 대궐이 생겼습니다.
이것 저것 구하지 말고 왕 한 분만 구하면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수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합일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수도의 목적입니다.
재벌집으로 시집간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동정심이 많아서 그 많은 물질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도와 주었습니다. 남편은 이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산이 자꾸만 없어지는 것같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를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과 인생관이 다르니 같이 살 수없소. 당신이 우리 집에 들어 온 후 우리 집 재산이 가난한 이들에게 흘러 가고 있소. 얼마 안 있으면 내 재산이 다 없어질 것같은 마음이 생겼소. 당신에게 허락하니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것을 하나 가지고 당신 친정으로 돌아 가시오.”
이 여자는 남편의 속셈은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혼이 목적이 아니라 돈을 너무 좋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여자는 태연하게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좋아요. 오늘 밤 나는 이 집에서 가장 귀중한 것 하나를 들고 집으로 돌아 가겠습니다. 가기 전에 같이 마지막으로 술이니 같이 해요.”
남편은 아내의 마지막 소원이니까 들어 주었습니다. 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여자는 마시는 척하고 따라 버렸습니다. 남편이 술취하자 남편을 마차에 실고 집으로 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술에서 깨어난 남편은 자기가 일어난 집이 어디 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아내가 있었습니다.
“여보! 여기가 어디요?”
“우리 집으로 돌아 왔어요. 가장 귀중한 것 하나를 가지고 가라고 하셨지요? 내게 가장 귀중한 것은 당신이예요. 재산은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을 가지고 왔지요.”
남편은 감동이 되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잘 살았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남편만 있으면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 모시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면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수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합일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안에서만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1차 관심 “나”
수도의 2차 관심은“나”하나입니다. 코람데오입니다. 하나님앞에 단독으로 섰을 때 정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수도사는 안수하지 않습니다.
수도사가 되어 입문식만 거행합니다. 안수받으면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도는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습니다. 수도하지 않아도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수도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한번 수도를 중단한 수도사는 다시는 수도사로 받아 주지 않습니다.
수도원은 기도원과 다릅니다.
방문자에 관심 갖지 않습니다. 물론 수도사중에 한 명은 방문자 영접 담당을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수도사들은 모두 자기 할 일에 충실합니다. 방문자는 동참하든지, 구경하든지 자유입니다.
아토스 수도사들은 “예수 기도”를 하면서 자기 수도를 하였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기도를 하였습니다.
성경을 반추 동물처럼 되새기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 기도는 다음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셋 중에 아무 것이 사용하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한번 사용하기 시작한 말은 계속 그 말로 반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기도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자기 낮추는 것이 영적 건강에 최고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단계에서 이렇게 낮춥니다.
“나는 티끌보다 못 한 존재입니다.”
야곱은 이 단계에서 이렇게 낮춥니다.
“나는 지렁이같은 존재입니다.”
바울은 이 단계에서 이렇게 낮춥니다.
“나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베드로는 이 단계에서 이렇게 낮춥니다.
“나는 안개와 같은 인생입니다.”
예수 기도에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기도 매듭”입니다. 양털로 12매듭, 33 매듭, 50 매듭 또는 100개 매듭이 있습니다. 양털을 사용하는 이유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목자되신 예수님을 연상하며 기도하도 합니다. 한 개씩 넘기면서 기도합니다. 지금은 묵주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내용도 중요하고 형식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정교회 수도사들은 수도사 서원을 받을 때 한 손에는 십자가를 쥐어 줍니다. 다른 손에는 양모 매듭 묵주를 선물로 받습니다.
수도원은 하나님과 합일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자기 수도가 우선입니다.
3. 이웃 사랑
수도원은 그리스도의 최후 명령을 최초의 관심사로 가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 구원이라는 말은 영혼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잊었습니다.
중국에 들어간 선교사 묘지 말입니다.
“이 곳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선교사가 들어 온 후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이 말이 우리 석천리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 곳에 우리 수도원이 들어오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우리 수도원이 들어 온 후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동네 사람들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저들의 필요를 따라 접근하여야 합니다. 트렉터를 사서 땅을 갈아 주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수도원 노동력으로 저들의 일손을 도와 주기도 하여야 합니다.
애경사에 특별히 같이 하여야 합니다.
브라질 오지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선교사 멜란드 부부는 평생 5번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 백인
멜란드 부부가 풀리어 인디언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인디언들은 그를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백인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과거에 자기들을 괴롭혔던 이들이라는 증오심이 들어 있었습니다.
2. 존경하는 백인
그러나 이들은 비난과 조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인디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인디언들이 병에 걸리기만 하면 질병을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부부는 인디언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그 부부를 <존경하는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3. 인디언 백인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들 부부는 인디언들과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인디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언어도 배워 유창하게 되었습니다. 10년만에 인디언들과 같아졌습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그를 <인디언 백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4. 하늘의 천사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는 길을 가다가 가난한 어린 소녀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들 부부는 길거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안방처럼 앉아 부상당한 소녀를 정성껏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던 추장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하늘이 보내 에서 내려온 천사같습니다.”
그 후 인디언들은 그들 부부를 <하늘의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5. 브라질의 성자
지금 브라질 사람들은 그를 <브라질의 성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같이 이들 부부는 이름이 5번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싶습니다.
옛날에 가장 무서운 병은 문둥병이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문둥병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문둥병을 고치는 약이 나와서 아무 염려없습니다. 의학을 발달시킨 이들에게 참으로 감사하여야 합니다.
하와이 호노루루에 있는 아이에아(Aiea) 감리교회 부흥성회 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카라우파파(Kalaupapa)라는 곳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문둥병자가 생기면 이 섬으로 보냈습니다. 우리 나라 문둥병자들은 소록도로 보냈던 것과 같습니다.
하와이는 태평양 가운데 있는 섬으로 공해가 전혀 없고, 뱀이 전혀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1830년 중국 상선이 다녀간 후에 문둥병자가 생겼습니다. 그 병균은 <사람만 살기 좋으냐? 나도 살기 좋다>라는 식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급속도로 퍼진 문둥병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1832년 하와이 인구는 124,049명이었습니다. 그러나 30년 후 1860년에는 66,894명으로 줄었습니다. 반 정도가 문둥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이런 중에 카메하메하(Kamehameha)가 하와이 근처 132개 섬을 모두 통일하고 첫 왕이 되었습니다. 카메하메하는 문둥병자때문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부 예산의 10%를 문둥병자 치료와 돌봄에 사용하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들을 포기하기로작정하고 격리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도망쳐 나올 수 없는 섬 카라우파파에 가두기로 하였습니다.
뒤에는 600 M 절벽이라 오를 수 없고, 앞에는 상어 떼가 득실거리는 바다라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문둥병으로 조금만 의심이 되어도 배에 태웁니다. 그리고 해변가로 와서 내려놓으려고 하면 죽음의 땅인 것을 알고 내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대나무로 만든 죽창으로 몸을 찔러 바다로 던져졌습니다. 피냄새를 맡고 상어떼들이 덤벼들었습니다. 굶주린 상어들은 삽시간에 이들을 잡아 먹었습니다. 항구 시설이 되어 있지 않기에 배를 육지까지 바짝 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에서 문둥병자들을 바다로 떨어뜨리면 헤엄쳐 가야합니다. 육지까지 가는 도중에 상어 밥이 된 이들이 많았습니다. 설사 육지까지 다행스럽게 헤엄을 쳐나온다 하더라도 살았다고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온 문둥병자들이 10일분의 양식을 빼앗으려고 죽이는 일이 허다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미엔이 이 곳에 와서 같이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며 복음을 전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벨기에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오른 손은 하와이 카라우파파에 묻혔습니다. 그 곳 문둥환자들이 너무나 시신 일부라도 달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리빙스턴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빙스턴의 시신도 불리되어 몸은 영국에 심장은 아프리카에 묻혀 있습니다. 너무나 시신이라고 가지려고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복음화 율이 높은 곳에 문준경 전도사가 사역하였던 증도입니다. 90%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대단한 지역입니다. 우리 마을도 그렇게 되도록 우리 수도원이 주민을 사랑하고 주님께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수도원이 실질적으로 시작합니다.
내일부터 나는 3일 금식기도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 수도원은 하나님과 합일이 최고 목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수도가 그 다음 목표입니다. 이 모두는 영혼구원으로 분출될 것입니다.
기도실을 만들고 6월 4일 첫 번 주신 기도응답입니다.
6월 4일 주일
나는 이 수도원에 나무를 심어 그 가지와 잎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할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고 싶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진하게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 수도원을 찾아 올 것입니다.
이 수도원을 찾는 이들의 영혼은 아름답게 신부단장하여 나가게 될 것입니다.
강 문호 수도사
너를 따르는 이들은 나를 따르는 이들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고, 네가 추구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
너와 나와는 하나가 되어 있다.
언젠가는 세상이 너를 알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너를 좋지 않게 여기는 자는 자기 영혼에 흠집이 생길 것이다.
나는 너를 넓게, 높게, 깊게 그리고 크게 만들 것이다.
너에게 은총을 나누어 줄 권세를 주고 싶다.
너는 영적 선물을 주어도 주어도 다 줄 수 없을 만큼 내가 뒤에서 공급할 것이다.
수도원 시작 음성을 마음에 두면 되리라
1. 네가 결정하였으나 내가 보장하리라.
I assure that even you have already made a decision.
2. 새 일을 헌 방법으로 하지 말라.
Don’t take a old way on a new project.
3. 하고자 하는 일에 아무 하자가 없다.
There is no fault on what you are going to do.
4. 너만이 회개할 것이 있다. 회개하면 이루리라.
There is repentance on your own then you will achieve your goal.
5. 비영리적인 일을 영리적으로 하지 말라.
Don’t work commercially on non-commercial project.
6. 경건속에 나귀 울음소리가 있다.
There is donkey’s crying in piety.
천보산 기도원 원장
천보산 기도원 우 정제 권사가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기도 중에 나온 글이라면서 주었습니다.
축시
충주 봉쇄 수도원 강 문호 목사님
충 ; 충성된 종이라 부르심에 감격하여
주 ; 주께 바친 한 평생 행복하여라.
봉 ; 봉한 샘, 덮은 우물 마시려 몰려 온
쇄 ; 쇄도하는 무리, 겹겹이 둘렀는 데
수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품고
도 ; 도닥이며 안식주는 봉쇄 수도원
원 ; 원대로 베푸시는 넉넉한 사랑 고마워라.
강 ; 강물로 넘치는 생명수 갈급한 심령 적시고
문 ; 문 열린 하늘 나라 천상의 음성 들려오니
호 ; 호산나 찬미하며 주님 높이는 삶 되리라.
사 ; 사슴의 발, 민첩히 달려 놓은 곳 밟으리니
님 ; 님과 함께 걷는 걸음 복되고 아름답도다.
나에게 주신 음성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가 2년 동안은 지독히 고독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2년만 참으면 그 때부터 새로운 사역이 시작될 것이다. 2년만 하루 6시간 씩 영적 생활하면서 참으라.”
그렇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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