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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성도를 위한 기도.
본문: 에베소서 1장 15절~19절
1: 15 ○그러므로 나도, 주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서, 16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내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15.こういうわけで、わたしも、あなたがたが主イエスを信じ、すべての聖なる者たちを愛していることを聞き、16.祈りの度に、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起こし、絶えず感謝しています。17.どうか、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神、栄光の源である御父が、あなたがたに知恵と啓示との霊を与え、神を深く知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18.心の目を開いてくださるように。そして、神の招きによってどのような希望が与えられているか、聖なる者たちの受け継ぐものがどれほど豊かな栄光に輝いているか悟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19.また、わたしたち信仰者に対して絶大な働きをなさる神の力が、どれほど大きなものであるか、悟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교회는 성도들의 기도로 유지고 성장합니다. 수많은 기도의 간증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응답을 통해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가는 생활을 지켜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다운 성도를 통해 교회다운 교회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기도응답을 통해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하게 체감할 수 있는 신앙생활의 주요 통로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기도와 기원에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이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성도들은 타인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영성이 풍성한 신앙의 선배들도 타인을 위한 기도로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아시시의 프란시스인데요. 그분은 ‘평화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은 기도를 남겼습니다. 그 기도를 찬양곡으로 부르기도 하지요.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시작하는 찬양가사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기도는 타인을 채워줄 때 나까지 채우시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도가 나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의 축복의 기도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도 있어요. ‘주의기도’는 특별히 각자의 개인의 영성을 지키는데 큰 힘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에베소 지역에서 교회로 모이던 교인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기도제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교회와 성도를 지켜 주는 중보와 축복의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도 바울의 기도를 배워 우리의 기도는 그 지평이 확장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복된 생활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도 지평의 확장을 통해 영적이고 능력이 풍성한 기도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17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기도에 관해 나누겠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지혜를 구하고, 또한 계시를 구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잠언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지혜에 관하여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잠언은 말씀하시길… 지혜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잠언 1:7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멀리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지식을 얻고 싶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로운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묘안이나 꼼수를 지혜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서 교묘하게 빠져 나가는 것을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때때로 어떤 묘안으로 위기를 모면하거나, 사소하지만 기분 좋은 이득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운 나머지 속이 편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편 우리도 그런 속된 지혜를 사용하고 싶을 때가 많지요. 세속적인 지혜와 성경적인 지혜는 분명히 그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사도는 지혜와 함께 계시의 영을 구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리적인 에너지라고 정의한다면,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하시는 모습과 증거들을 육안으로 보이도록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화)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3년 동안을 벌거벗고 지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지금 옷을 벗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여인이었던 고멜과 결혼하였습니다. 음란한 여인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저 존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응답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영분별’이라는 것입니다. ‘영분별’이라고 하면 소위 더러운 영, 거짓의 영, 마귀의 역사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굳이 특별한 능력으로 분별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시지 않는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악한 영의 역사(활동)이거나, 사람의 역사(활동)입니다.
100달러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이들은 수시로 100달러 진폐를 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손의 감각이 진짜 화폐를 알고 있으면 그와 다른 것은 가짜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계시로 보여 주시는 일, 은혜에 속한 일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영적인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줄 아는 지혜를 받았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교회로 모인 우리 서로는 서로를 위해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바울은 성도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리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망을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소망)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것 중에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소위 아까도 말씀드린 영분별을 한다는 분들은 육신적으로도 뭔가를 본다고 말을 하는데요.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진짜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서를 통해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본다고하면서육신에속한것을보고있거나,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영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실제로는 아무것도 못 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는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뜻은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부르심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부르심의 소망, 하나님의 마음을 소망으로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의 소망은 영광스러운 상속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고, 무엇을 상속받는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부활의 나라입니다. 영생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영생을 상속 받기 위한 소망입니다.
(예화) 군 제대 후 태평양 호텔의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다시 학교로 복학하게 될 때의 일… 때때로 일상생활의 지리멸렬함에 낙심이 될 때… 주님이 주시는 생각. 이게 끝이 아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성도를 위해서, 또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자연스럽게 이 땅에서의 형통한 삶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의 형통함을 구하는 만큼 영생에 대한 소망이 커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영생을 향한 부르심의 소망을 갖게 될 때, 그 영광스러운 상속을 소망하는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될 때 이 땅에서의 형통함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이 땅에 매이지 않고, 마음이 빼앗기지 않아야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우리는 안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미 우리에게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믿어지지 않고,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다른 것들을 갈급해 하게 됩니다. 세속적인 것에만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세속적인 유혹으로 인한 갈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내면이 채워져 있기 때문이지요.
(예화) 2011년 동북대지진이 나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졌을 때 한국의 대부분 지인들은 일본은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어서 속히 안전한 한국으로 들어 오라고 권하였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아이들이 있으니 잠시라도 안전하게 피했다가 돌아가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어떤 예화를 통해서 주신 생각이…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어디든 안심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인지의 기준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지의 여부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그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어떤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는 20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 주일에 함께 더욱 심도있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세가지 기도제목은 한 줄기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 마음을 품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부르심의 소망을 품게 되지요. 그 영광스러운 소망에 눈이 뜨인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헤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나게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감동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로 모이게 됩니다. 예배자의 모임으로 맺어진 관계가 바로 이 땅의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다운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는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제목이기도 하지만,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맺은 관계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미리 우리에게 귀띔해 주시는 것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바울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 기도의 제목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행하실 일을 귀띔해 주시는 것이라고 이해 할 수 있지요.
교회가 이 땅에서 구하고 지향해야 할 모든 사업과 사역, 존재의 최종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위해서 구해야 할 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개개인의 많은 비성경적인 희망사항이 있습니다. 그 희망사항도 나름대로 모두 귀하고 좋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 육신적인 희망사항을 교회를 통해서 완벽하게 이루려고 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중화요리 집에 가서 삼계탕을 주문하는 것과 같지요. 물론 식당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찾아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증거로 세워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가 응답할 수 있는 것을 받으면 자신의 희망사항이 잠시 보류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은 그 희망사항보다 훨씬 아름답고 복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사춘기 때의 이상형과 결혼하지는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저와 잘 어울리고 적확한 인연과 살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가족들과 살고 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쓴 한동대 이지선 교수님은 15여년 전 만난 사고로 자신의 외모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 꿈을 꾸던 인생의 비전도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멋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지선 교수님은 말합니다. 그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고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아름다운 자신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혜와 계시의 영이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더운 날씨에도 포기하지 않고 교회에 나아와 찬양하고 예배하는 이들 안에는 성령님께서 이미 동행하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그 능력으로 완성하신 영광스러운 상속과 부르심에 합당한 소망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영생의 소망과 그 영광스러운 상속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운 시련만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나의 희망사항이 모두 소멸되어 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손해에도, 시련에도, 희망사항의 소멸에도 빼앗기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당장의 환란과 고통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합시다. 그리고 마음의 눈이 열리기를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부르심의 소망과 영원한 상속으로 더욱 완벽하게 회복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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