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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만주 길림, 13명의 독립운동가가 의열단을 창단한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한 독립운동가들, 전투는 물론 일본제국주의의 핵심요원들을 암살한다. 그들이 뜻을 함께 했던 곳, 바로 신흥무관학교다. ‘우리의 혁명운동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 놈의 생명을 용대(용서)하지 않으리’ --------------의열단이 조선 총독부에 보낸 격문 1923년 1월-----------
그 친구는 추상욱 일병, 속사포, 뺀질이긴 해도 나름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멤버야
작전은 그만 잊어요. 지금 그 몸으로는 안돼요. 이거 몸으로 하는 거 아니에요. 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야. 내 톰슨(기관단총)하고 덕남이가 남긴 폭탄 좀 챙겨줘요. 배틀 그라운드, 신흥무관학교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항일무장투쟁의 전설로 남은 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보신 영화 ‘암살’이잖아요. 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야. 그 말 멋 있죠! 저게 여러 번 나오네요.
류근/시인: 저 영화에서 조진웅씨가 처음엔 진지한 캐릭터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별안간 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야. 그러는 순간 정말 가슴이 찌릿했거든요.
이윤석/방송인: 조진흥 배우가 연기한 ‘속사포’, 이 분은 이제 신흥무관학교의 마지막 졸업생이다 라는 일종의 학업 자긍심, 아! 그 학교 출신이면 믿을만 하지! 하나 더 있다면 서약서를 남깁니다.
------------영화 <암살> 中 속사포의 서약서---------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 독립전쟁을 빨리 하고 싶다. 이런 서약서를 쓴 걸로 되어 있고 인정서 받죠.
최원정: 그런데 그 서약서가 시 같애요. 낙엽이 지기 전 이런 표현은 좋지 않아요?
이윤석: 감이 좋은데 나중에 내가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이 무장독립운동단체가 가장 유명한 게 의열단이 맞죠? 영화 <암살>도 의열단을 바탕으로 한 거죠?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정의의 일을 맹렬히 시행한다. 정의 맹열 의열단, 의열단은 이렇게 되는 거죠. 1919년 11월에 만주 길림시에서 독립운동가 13명이 모여서 무장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합니다. (의열단-13명의 독립운동가가 창단한 무장독립운동단체), 이후에 아주 굵직한 사건을 벌이는 데요. 대표적인 것이 총독부 폭파, 1924년에는 일본의 심장부까지 들어가는 도쿄의 니주바시, 이게 뭐냐하면 일본천왕이 사는 황거를 들어가는 다리예요. (니주바시-일본 천왕이 사는 황거(皇居)로 들어가는 다리), 이 다리에 폭탄 투척을 하는데 정말 천왕을 대상으로 폭탄을 던진 거죠. 영화 장면들이 저는 계속 떠오르는데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사격술은 기본이고 폭탄을 제조하고 폭파시키는 기술, 그리고 속사포를 기관총에다, 수류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최고의 암살단원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고위직을 암살하고 현장을 쑥대밭 만들고 난리가 나죠. 팡 쏘면 팍팍팍 난리가 나죠!
류근: 정말 난리 났네.
이익주: 정말 이 의열단은 그렇게 의지만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사들입니다. 이런 무장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들을 키워내는 곳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박환/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의열단의 구성이 처음 만들어질 때 열세분이셨거든요. 그런데 그중에 8, 9명이 정도가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류근: 그쯤되면 거의 신흥무관학교 동문회 수준~
박환: 그 중에서 특별히 의열단 단장으로 활동했던 분이 영화 암살이라든가 밀정 조승우씨와 이병헌 배우가 이분의 역할을 했던 분이 김원봉인데 이분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에요.
이윤석: (어깨에 힘주고 연기)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특히 의열단이 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제가 보기에는 무장투쟁 사건들이 굉장히 이상적인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그런데 1910년도 이전에는 그런 식의 독립운동은 거의 없지 않았나요?
박환: 1910년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신민회 라는 단체가 있는데 (신민회-1907년에 서울에서 결성된 항일비밀결사 조직), 1907년 그 당시 그 신민회에서 중심적인 인물이 양기탁이었어요. 양기탁의 집에서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조국의 독립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방법론에 대해서 많은 회의를 하고, 그 당시 상동교회에서 상동청년회 라는 게 있었는데 그쪽에서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서 역시 독립투쟁의 방법론에 대한 많은 고민들이 있었고 그런 과정 속에서 독립전쟁론이 부각되기 시작했죠.
이익주: 정세판단을 한 거예요. 지금 일본이 하는 걸 봐서는 언젠가는 러시아, 중국, 심지어는 미국과 충돌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정세예상을 하고 그때 우리에게 기회가 올 것이다.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뭔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된다. 이렇게 되면서 이제 독립군을 양성하자 이런 생각으로 나가게 됐던 거죠.
류근: 정세판단은 아주 능통했던 거죠.
이익주: 정확하게 맞았던 거예요.
심용환/역사 작가: 우리가 지난 주에 얘기했었던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 이 신민회의 핵심멤버들이 신흥무관학교의 창립멤버가 됩니다. 신민회에 新자 들어가잖아요. 새로울 新, 새로운 역사, 신흥무관학교도 같은 新자, 이제 나라의 현실은 절망이지만 새로운 시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걸 볼 수 있는 거죠.
류근: 105인 사건으로 일제가 존재 자체를 무력화 시킬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중요한 일들을 해내고 있었던 거지요. (1911년 105인 사건-일제가 민족운동 탄압을 위해 사건을 확대조작, 신민회 인사들을 체포하고 총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
박환: 그래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신민회를 중심으로 의논을 해서 특히 해외, 서간도로 망명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죠.
이윤석: 독립운동 얘기만 나오면 위치, 지명이 너무 헷갈려요. 간도, 만주, 연해주, 연변은 또 어디예요?
박환: 제가 간단한 설명해 드리죠. 저기 압록강 건너 지역을 서간도(단둥) 라고 표현하고 서간도 지역은 지금 중국 행정구역으로 랴오닝성이고, 두만강 건너 지역을 북간도(지린, 하얼빈) 라고 하고고 중국의 행정구역으로는 지린성이라고 합니다. 서간도, 북간도, 그리고 그 위에 전체 지역을 포함해서 보통 만주라고 합니다. 저기 연해주가 있는데 동해 바다와 연해있다 해서 연해주 라고 하고요. 그래서 만주, 연해주 지역은 일찍부터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았고 1910년부터 45년까지 항일투쟁의 대표적인 근거지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류근: 그런데 무장투쟁 기지로 왜 하필 서간도를 선택한 걸까요? 제가 알기로는 서간도 하면 정말로 춥고 척박하고 황량한 땅으로 소문이 나있지 않습니까?
이익주: 맞아요. 거기가 농사짓고 살기는 참 어려운 곳이죠. 하지만 지도를 보시면 일본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가장 가까운 외국으로 간다고 하면은 서간도로 가는 거구요. 너무 멀리 가면 안돼요. 거기서 힘을 키워서 바로 국내로 잠입해서 공격을 해야 되고 활동을 해야 되기 때문에 너무 멀어서도 안되고 건너가기 쉬운 가까운 데면 꼭 서간도가 되는 거죠.
박환: 원래 만주는 한국의 옛 고토이잖아요.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죠, 그런데, 1860년에 조선 북부지역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거든요. 그 당시 조선사람들이 국경을 넘는다면 원래 사형인데, 이판사판 죽기는 마찬가진데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들 갔죠. 그래서 1905년에 을사조약이 맺어졌을 때 그때 수많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그리로 정치적 망명을 가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을 토대로 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죠.
최원정: 투쟁을 제대로 할려면 군자금이 필요한데 가난한 소작농이 대부분인 저 지역이 과연 좋은 땅이었을까요?
심용환: 그게 중요하죠 어찌됐던 소작농이 있다 라는 건 민중의 지지기반이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제 전투를 위한 자금, 군자금이 필요한데, 서간도를 위해 군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큰 손들이 있었습니다. 이항복의 후손으로 8대에 걸쳐서 정승, 판서를 엄청나게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었던 명문가, 그래서 이른바 삼한갑족 三韓甲族 이라 불렸던 서울의 거부 巨富, 이회영 일가 6형제가 모든 가산을 처분한 다음에 집단적으로 서간도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윤석: 삼한갑족이란 말은 무슨 말예요?
이익주: 먼저 그 삼한이라고 하는 거는 마한+진한+변한 인데 여기서부터 유래해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쓰여요. 그래서 삼한갑족 그러면 우리나라의 최고 가문이라는 뜻이 될텐데요. 삼한갑족이라고 불린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재산이 얼마나 됐느냐면, 지금 명동 YMCA 건물이 있습니다. 명동 YM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당성당 일부 까지가 하나의 저택입니다.
심용환: 거리가 꽤 되는데?
이익주: 그렇죠. 그 정도는 돼야 저택이죠.
심용환: 한 집이에요?
이익주: 한집, 또 지금 명동성당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을지로 내려와서 외환은행 본점이 있어요. 외환은행 본점에 이르는 한 6천평 정도의 땅이 그 집의 재산이었다고 합니다.
박환: 그 중에서도 둘째형이 이석영이라는 분인데 그분의 재산이 상당히 많았고 양주에서부터 동대문 서울로 들어오는 데까지 오는데 이석영이 다 자기 땅을 밟고 올 정도로 그렇게 광활한 땅을 갖고 있었고, 그 이석영이 바로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었는데 많은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돈으로 한 4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류근: 지금 정도엔 엄청나지만 그때도 명동이 그렇게 비싼 땅이었을까요?
심용환: 사실은 시기의 변화도 크고 돈의 가치라는게 상대적 이어서 정확하게 환산하기는 힘들고 최근에는 이회영 일가가 많이 유명해 지니까 인터넷 가운데 찾아보면 액수가 계속 올라가요. 제가 1400억까지 봤는데 그래도 근거를 따지면 당시 쌀값을 기준으로 봤을 때 약 600억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돈이죠.
최원정: 사실 우리가 이회영 선생 이름은 잘 기억하는데 지금 말씀하신 이석영 선생 이름은 잘 모르잖아요. 기부금 명단 액수도 순서대로 적어 주는게 예의인데~, 자, 우리가 이석영 이름을 어마어마한 독립자금을 투척해 주신 분들의 이름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박환: 제가 한 마디만 보태면은요. 이석영 이란 분은 그렇게 자기 전 재산을 다 독립운동에 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나중에는 베이징에서 굶어서 돌아가셨데요 그런 비극적인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윤석: 어떻게 그런 거부가 굶어서 돌아가셨어요?!
박환: 그 정도로 항일투쟁 하는데 상당히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이익주: 정말 모든 걸 다 바친 거군요.
박환: 우당 형제들 뿐만 아니라 수원에 임면수란 분도 있고요. 경북 안동에 석주 이상룡, 천안 쪽에 석오 이동녕 선생 이라든가 수많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망명했던 것이죠.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당시 자기가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 재산의 대표적인 부분이 토지 다음에 노비잖아요. 노비도 해방을 시키고 그리고 이억 만리 만주 같은 경우는 추우면 영하 40~50도 내려갑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조국을 생각하면서 재산을 희사하고 만주로 떠났다는 것은 참 대단한 것이죠.
최원정: 해방된 노비들은 또 다 따라 갔다면서요?
박환: 네, 그렇습니다.
심용환: 제가 작년에 하얼빈 갔었거든요. 온갖 무장 다하고 딱 나가서 10분 지나니까 이가 달달달 떨리더라구요. 기본이 영하 30도가 되니까~
이익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조선의 양반들이 다 협력한 게 아니예요. 싸운 사람도 많이 있고이걸 기준으로 해서 조선에 남아서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냉정하게 평가해야되는 문제입니다.
류근: 그래서 정말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을 새삼 생각하게 되는거죠. 기존의 서간도 이주민 대부분이 가난한 소작농 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혹시 돈있는 명문가들과 합류하면 살기가 어렵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들어 보니까 처음부터 특권의식 같은게 없는 것 같은데~,
최원정: 다 내려놓고 가신 거죠~
심용환: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서간도란 공간 자체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아요. 뭐가 있느냐 하면 텃세! 그러니까 중국인들이 땅을 잘 팔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두번째 법이 또 장애물이 됩니다. 조선인은 십년이 지나야지만 토지를 매입할 수 있다는 기준이 있어 가지고 문화도 그렇고 법률도 그렇고 정착하는데 굉장히 수많은 난관들을 뚫고 갖은 노력 끝에 1911년 6월에 추가가 라는 마을에 허름한 옥수수 창고를 사들였고 거기서 신흥강습소를 열게 됩니다.
최원정: 신흥무관학교가 아니라, 강습소요?
이익주: 청나라 사람 입장에서 볼 때 한국에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몰려오고 돈도 많이 갖고 와서 여기에다 땅을 사고 대규모로 학교를 만들고 이런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먼저 경계하겠죠. 하지만 내용을 보면 중등과정 교육도 하고 거기에 군사과가 있어서 처음부터 군을 키우겠다는 이런 목표 의식을 분명히 해요. 그래서 이때 신흥강습소로부터 신흥무관학교가 시작되었다고 얘기하는 거죠.
류근: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제가 찾았거든요. 그런데 들어 보시면 다들 그카더라 싶을 만큼 귀에 익을 거예요. 제가 조금만 불러 볼게요.
신흥무관학교 교가
칼 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새나라 세울이 뉘뇨
이 노래는 신독립군가로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주로 이 노래를 불렀는데, 보니까 이 노래가 남북전쟁 때 만들어진 조지아 행진곡에서 따온 거예요. 세계적인 히트곡이었던 거죠.
박환: 따라 부리기도 좋고 경쾌하고 또 박진감이 있죠.
류근: 그래서 이 교가를 학교 생도들 뿐만이 아니라 주민들이 다 같이 불렀데요 그만큼 한인이주민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고 볼 수 있겠죠.
박환: 1911년에 유아현 추가가에 신흥강습소를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근거지를 조금 더 산 깊은 곳에 그러면서 많은 병력을 양성할 수 잇는 그런 장소를 모색해야 되겠다.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구요. 그래서 유아현 추가가 쪽에서 조금 압록강 쪽으로 내려가면 통화현 합니하 라는 곳이 있습니다. 저도 그쪽을 들어가 봤는데 계속해서 좁은 길로 가다가 큰 분지가 나오는데 은폐-엄폐된 대단히 적합한 장소에다 터를 닦았더라구요.
최원정: 찾아가고 싶어도 못찾아가겠네요.
류근: 그런대도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일제의 경계가 얼마나 심했는지 거기에 밀정까지 침투를 시켰다고 하더라구요. 서로를 의심해야 되는 판국이잖아요. 우리 안에 밀정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건 문인들은 대충 다 아는 일인데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 선생이 계시잖아요. 이분이 거기 이유형 선생을 만나러 혼자 가신 모양이에요. 그런데 안내자도 없이 가신거예요. 그러니까 밀정인줄 알고 오인 사격을 했어요. 총에 맞으셨어요. 이분이 그 사고 때문에 평생 채머리 라는 머리떨림증상을 앓으셨다구해요.
이윤석: 너무 가슴 아픈 사연인데~ 한용운 선생 말씀 들어보니까 겁은 나지만 지금, 저라도 가보고 싶어요. 첩첩 산중에 신흥무관학교가 어떻게 숨어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 할 수 있으면 확인해 보고 싶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번 직접 가보겠습니다. 여러분, 신흥무관학교 입대합니다!
일동: 잘 다녀오세요 살아 돌아오세요
----------------신흥무관학교로 향하는 이윤석--------------산넘고 물건너! 가도가도 산만 보이고 나무만 보이고~ 신흥무관학교 어디 있는 거야? 못 찾겠다! 신흥아!
박금수/전통무예 전문가: 그 지도 하나로 찾을 수 있으면 신흥무관학교가 아니지, 그 무슨 일로 왔나? 내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일세,
이윤석: 하, 교관 선생님, 반갑습니다.
박금수: 낯이 익네,
이윤석: 제가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압록강을 건너서 한국에서 왔습니다.
박금수: 어, 그런데 자네 나이가~ 우리 학교에 60을 넘으신 형님들이 계시긴 한데~그분들보다 나이가 많으면 그런데~ 그리고 몸도 좀~
이윤석: 제가요 이 몸으로 살아봤는데 나름 쓸만해요. 그리고 여기 최저 입학연령이 18세 맞죠?
박금수: 음, 맞네!
이윤석: 딱, 맞혀서 왔네, 제가요 오늘 딱 18세가 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십팔세예요~48,
박금수: 거 쓸데없는 걸 물어 봤네, 아무튼 의지가 있다고 하니 내 학교로 안내함세,
이윤석: 고맙습니다.
박금수: 이쪽으로 산쪽으로 가다보면~ 이곳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일세~ 자, 이렇게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 지어졌다네,
이윤석: 정말 비밀기지의 카리스마가 팍팍 느껴집니다.
박금수: 신흥무관학교에는 18개의 교실이 있어, 자네 나이랑 똑 같네, 자, 이곳엔 연병장이 있고 그 안쪽에는 병영막사가 있어
이윤석: 오, 나팔부도 있고 취사장도 있네요. 사무실에다가 식당도 따로 있고 숙직실까지 있어요. 여기는?
박금수: 이곳이 바로 내무반 일세,
류근: 우리 군대 있을 때와 똑 같은데~
박금수: 자네가 생활할 곳이지, 이렇게 생도들의 이름이 적힌 총이 있는데~ 총이 왜 안들어오지? 자, 총을 한번 잡아보세,
이윤석: 오, 총이 들어오네요. 고맙습니다 선배님들, 열여덟살입니다! 열여덜, 반갑소 동지!
박금수: 이렇게 생도들의 이름이 적힌 총들이 있는데 자네에게도 하나주지!
이윤석: 저두요! 고맙습니다. 교관님! 총에서 나무 냄새가 납니다. 이게 나무 총인 거 같은데, 목총!
박금수: 개인 총을 모두에게 지급할 수 있는 자금이 없어, 그래도 열심히 훈련받다 보면은 언젠가는 제대로 된 무기를 갖출 날이 올 것이야
이윤석: 알겠습니다.
박금수: 자, 그럼, 우리 신흥무관학교에 일과시간을 한번 살펴보세,
이윤석: 와, 새벽 6시에 나팔소리와 함께 기상을 해서 3분 안에 복장을 갖추고 보건체조를 한다. 그리고 나서는 하루 종일 군사교육을 하고 훈련을 계속하는 거예요.
박금수: 그렇지, 우리 교과목이 우선, 1교시 총검술 돌려쳐! 핫! 따라하게! 방아쇠가 밑으로 가게 잡아야지, 그렇지 찔러! 돌려쳐!
이윤석: 죄송합니다.
박금수: 2교시 유격술 유격! 유격! 유격! 그 외에도, 전술학, 군사학, 병기학, 축성학 등등 아주 많은 과목이 있다네.
이윤석: 그런데, 교관님, 생각보다 너무 빡쎄거든요, 교과서 같은 건 없습니까? 제가 앉아서 하는 건 잘 하는데~
박금수: 공부 쪽으로 좀 괜찮은가, 자네? 그러면 자네 혹시 이 책을 알고 있나?
이윤석: 이 책은 유년필독, 압수출판물 엄청 귀한 거 아닙니까?
박금수: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이제 금서들이 바로 교과서일세, 우리의 말과 지리, 역사를 알아야 민족의식을 함양할 수 있지. 신입생도 이윤석, 신흥무관학교 입교를 환영한다!!
이윤석: 고맙습니다. 신흥무관! 교과서는 금서~ 교관은 금수~
최원정: 신흥무관학교 오리엔테이션을 함께 보셨습니다. 진짜, 강철 같은 어떤 정신력과 체력이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이윤석씨 아주 굉장히 걱정이 되었는데~ 아, 이윤석씨가 보고 놀랐던 유년필독이 무슨 책인데? (유년필독 1907-우리나라 역사와 지리교육을 위한 초등학교 교과서),
이익주: 유년필독이란 책이 있는데요. 유년은 어린이, 어린이가 반드시 읽어야 될 책, 이런 뜻이죠. 1907년에 현채 라는 분이 쓴 교과서예요. 여기 보시면 을지문덕, 요즘 우리도 모르는 을지문덕의 초상이 여기 있는 거죠. 이건 상상화인데 을지문덕 이란 존재를 조선시대에는 안가르쳤어요. 개화기에 외세의 저항에 이긴 경험, 이런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을지문덕을 찾아낸 것이죠. 여기 이렇게 거북선 그림이 있어요 이렇게 우리 역사 속에서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 이런 역사 속에서 민족정신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고, 또 여기에 뭐가 있냐면 만주 일대가 원래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는 내용이 들어와 있는데 요즘은 우리가 역사 시간에 다 배우고 전 국민이 아는 국민상식이지만 이 때만 해도 이걸 아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그것을 이 책에 담아서 이제 신흥무관학교에 온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겁니다. 정말 말한대로 우리 역사를 알아서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 자긍심 이런 걸 갖도록 한 거죠.
심용환: 당시 회고록을 보면, 눈 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도 훈련을 감행했다.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최근 군대에서는 눈이 너무 많이 오거나 하면 훈련 안하고 쉬거든요. 지금은 보급품이라는 게 잘 나오잖아요. 이때는 옷이나 제대로 갖춰 입었겠어요. 교관들 조차 홑옷만 입었다는 게 당시 기록인데, 그렇게 홑옷만 입고 아침 체조에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에는 받은 벌은 추위보다 매서웠다. 정말 추운데서 정말 철저하게 독립이란 정신 속에 교육을 시켰다니까 생각해 보세요.
박환: 확실한게요 제가 몇 년전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통화현 합니하에 직접 갔었거든요. 그런데 산골짜기 이다보니까 추위는 영하 30~40도 이상의 체감온도로 너무 추워서 진짜 혼났어요. 보통 추운게 아니예요.
최원정: 한 겨울에 행군한 경험있는 분들 얘기가 발이 제일 시럽다면서요. 방한화가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양말이 있었겠습니까. 동상 걸린 사람이 많았을텐데~
이윤석: 제가 해봐서 아는데요. 장갑 이런 거 사치고 방한화는 너무 추우니까 자체 제작을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궁금해 할 것 같애서 제가 지금 착용을 하고 왔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겨울 필수 아이템~ 공개합니다.
최원정: 뭐예요, 짚신에 붕대를 감고~
류근: 한번 벗겨 봅시다 발싸개네~ 풀 같은 게 보이는데~야생풀과 붕대로 만든 방한화—
이윤석: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박환: 근데 이게 회고록들에 따르면요. 열흘씩 신고 있어가지고 냄새가 보통 진동 하는게 아니었다는 기록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매일 갈아 신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오랜 기간 동안 저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아서
류근: 이건 뭐예요?
박환: 통화현 합니하 부근에 야생초들인데 솜, 가죽같은 방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으까 이런 야생초로 발을 둘둘 감아서 이렇게 했을까 정말 안타까운 생각들이 드네요.
최원정: 딱 보아도 따뜻해 보이지는 않거든요.
이윤석: 이게 급하니까 이렇게 한거지 오직 춥고 방법이 없으니까 이렇게 까지 한 거죠. 저도 그걸 보여들릴려고 많은 분들이 보는 앞에서 발연기 했네요. 자, 철수하겠습니다.
류근: 겨울에도 경제적으로 짚신을 신었을까 설마 그건 아니겠죠.
최원정: 동상은 너무 흔한 거였겠어요.
이윤석: 그 당시 기록이 있어요. 영하 40도의 시베리아 추위에 여름 모자 홑저고리 밑빠진 짚신만 신었다 (김경천-불쌍한 독립군!)
최원정: 발동상 방치하면 굉장히 심각해지는데~
심용환: 이때는 꽁꽁 얼어가지고 손톱이나 발톱이 빠지는 경우가 되게 흔했데요. 빠진 손톱, 발톱을 칠판에다 쭉 걸어놨데요. 우리가 이 만큼은 힘들게 훈련하지 않았느냐 힘들게 했으니까 어떻게든지 반드시 조국의 독립을 이뤄내 보자 하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요!
최원정: 상황이 이렇게 안좋은데 한참 먹을 나이들 이잖아요. 계속 운동도 하고 노동도 하고 뭘 먹고 지냈나요?
이익주: 정말 먹는 것도 형편이 없었죠. 중국 사람들 한테서 식량을 사는데 제대로 된 게 없어서 좁쌀을 사요. 그런데 이게 좁쌀이라고 하는게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한 2~30년간 썩혀서 뚜껑을 열면 쉰네나고 바람 불면 날아가는 가축용 좁쌀, 이걸 사다가 밥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밥에 반찬은 콩기름에 절인 콩장, 이거랑 그 밥을 먹는데 그나마도 많은게 아니어서 한두 숟가락 먹으면 끝났다고 해요.
박환: 식사와 관련해서 또 이런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이석영 이사장께서 1913년 5월에 통화현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가 새로 만들어졌을 때 생도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돼지를 크게 잡아서 학생들에게 특식으로 먹였는데 워낙 기름기를 먹은게 없어가지고 그걸 먹고 모든 학생들이 배탈 나고 난리가 났다 라는 기록이 있어요. 그 정도로 먹은게 열악했어요.
심용환: 그러니까 상황을 보면 대강 예상이 되는게 뭐냐면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이런 것들이 결국은 제 손으로 지어서 만들 수 밖에 없구요. 뒤에 있는 이 사진, 유익하게 남아있는 신흥무관학교 영농사진인데, 자세히 보시면 농사짓는 모습이예요. 농사만 지었던게 아니라 교복과 교모를 직접 만들어서 착용했다, 자급자족이죠!
이윤석: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까 농사지어야죠, 훈련받아야죠, 공부해야죠, 춥죠, 배고프죠, 이게 완전히 극한체험이 따로 없는 거예요.
최원정: 이 모든 걸 극복하는 힘이 또 나라를 되찾겠다는 그 의지 하나잖아요.
신흥무관학교 교관들은 전문 군사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교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가 거금의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에 혈안이 된 교관들이 있었는데 남만주 3천이라 불린, 신동천, 지청천, 김경천 그런데 지청천과 김경천의 과거가 놀랍다. 바로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던 것,
최원정: 신흥무관학교 교관들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구요?
이익주: 맞아요. 김경천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 지청천은 27기, 해가지고 선후배 사이입니다. 지청천 같은 경우는 대한제국 시절에 국비유학을 가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대한제국이 강제병합 당하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거죠. 어쨌든 이 사람들이 1919년 5월달에 함께 탈출을 합니다. 간도로 들어가서 신흥무관학교로 갑니다.
이윤석: 근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어떻게 탈출을 하였을까요?
심용환: 일단 의지의 소산이죠. 김경천 같은 경우는 탈출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일종의 꾀병인 거죠. 실제로 밥을 굶으면서 아픈 척하고 그러니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병가를 냅니다. 일단은 고향으로 돌아온 거죠. 서울로 돌아와서 뭘했나 학교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감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죠. 그때부터 거의 매일 같이 당구치고 밤에 맨날 술집에 가서 술 마시고,
류근: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눈 속임이었다~
이윤석: 일명 약골작전, 한량작전~
심용환: 그리고 어느날 홀연히 아까 말씀한대로 지청천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을 감행하죠.
최원정: 일본 육군사관학교 란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게 아니에요.
박환: 그렇죠, 지청천 같은 경우는 서울에서 명문가 집안이었고요. 김경천 같은 경우는 부친이 대한제국의 고위장교였어요. 3.1운동이 벌어지니까 국내로 가서 뭔가 조국을 위해서 일조를 해야 되겠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됐던 것이죠. 그래서 만주로 망명을 했고 그 당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나왔던 신팔균, 신동천 이란 인물과 만나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류근: 일본으로서는 정말 충격이었겠어요. 자기들 수족이 되라고 교육을 시켜놨는데 어느날 그냥 독립군으로 넘어가 버린 거잖아요.
심용환: 사실은 몸만 간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게 뭐냐 당시 일본군에 들어 왔었던 신병서, 새로운 군사훈련서겠죠. 그와 함께 병서까지 아예 함께 다 가지고 왔죠. 그래서 당시 일본 당국하고 조선총독부가 너무 심각한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이들을 잡기 위해서 무려 5만엔의 현상금까지 걸었습니다.
이윤석: 인재도 유출되고 기밀도 유출되고~ 망한건데 여기서 잠깐 제가 또 하나 공개해 드릴게 있는데~ 오늘 처음에 시작할 때 그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있잖아요. 그리고 낙엽이 지기전에 무기를 들고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 이런 선언문이 인상적이라고 했는데~ 선언서가 사실은 김경천의 일기에 나옵니다.
박환: 그 일기가 경천 아일록이라고 해서 김경천 장군이 쓴 것인데요. 김경천 장군은 본명은 원래김광서고, 지청천 장군 같은 경우는 본명이 지대형, 이런 식으로 알려져 있었거든요. 그 다음에 신동천 같은 경우는 신팔균, 이런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독립운동 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가명을 많이 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계속적인 추적을 받게 되기 때문에 가명을 쓰게 되고요. 특히 이 세분은 동지적 결속을 위해서 천자를 돌림자로 쓴 것이죠. 신동천 김경천 지청천,
류근: 그런데 정말 재밋는게 이름에 경천동지가 들어가 있어요. 驚天動地(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든다)가 느껴지지가 않습니까,
이윤석: 사실 이분들이 일본군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을 분들인데~
박환: 그렇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서 일본군에 계속 있었던 분들은 일본의 고관대작으로 있는데 실명을 밝히기에는 그렇습니다만 그런 분들이 대다수였구요. 3-1운동후 김경천, 지청천 망명으로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망명을 하게 되는데요. 이분들의 망명이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 국내에 있는 청년들한테 끼친 파장은 어마어마하게 컸던 것이죠. 그래서 신흥무관학교도 국내에서 대규모로 망명해 오는 애국청년들을 담아 낼 수 있는 그런 어떤 연병장이라든가 학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하현 고산자 라는 곳에 한 3만 여평 광활한 연병장과 막사-숙소를 구비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재정비하게 되었습니다. (1개의 본교와 여러 개의 분교운영),
이윤석: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진거네요.
이익주: 본교가 있고 여러 개의 분교가 생기는 규모가 커진 거죠 이것을 체계적으로 운영합니다. 그래서 본교에서는 2년제 고등군사반, 여기서는 고급간부를 양성하는 거에요. 그리고 분교에서는 초등군사반, 그래서 여기에서는 독립군 군인을 양성하는 거죠. 이래서 간부도 양성하고 군인도 양성하고 이게 한참 때 한 기수가 60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까 규모가 굉장히 큰 거죠. 구성도 다양해서 연령대가 10~50대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박환: 1920년까지 3~4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요. 만주지역에 당시는 신흥무관학교가 가장 중심적이지만 나자구 무관학교 또 중소국경지대에 미산무관학교가 있었거든요. 이쪽에서도 많은 무관이 양성이 됐습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 만큼 많은 무관생도들이 양성된 곳은 없었을 정도로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은 엄청 컸다 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윤석: 그러면 이후로도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후배들을 쭉~ 쭉~ 배출하면서 잘 나갑니까?
이익주: 규모가 커지니까 노출이 더 잘 되죠. 그래서 집중적인 견제대상이 되니까 아무래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졌을 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간도지역을 관할하는 중국과 손을 잡고 간도지역의 애국지사들 그리고 가족들을 살해하고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한국 사람들을 학살하고 본격적인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펼치면서 결국 1920년에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닫게 됩니다.
최원정: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분(?)의 방송출연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금수 박사님, 다시 나와 주세요.
---------------------박금수: 신흥무관학교 독립군들은 계속해서 싸웁니다. 자, 여러분들, 청산리 전투 아시죠. 1920.10.21부터 26일까지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 21~26일까지-독립군이 10여 차례에 걸친 격전 끝에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독립군과 일본군이 10여 차례에 걸쳐 치른 격전입니다. 1920년대에 전세계 전쟁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첩으로 꼽히는데요. 자, 여기서 그 질문1: 청산리 전투하면 누구?
일동 대답: 김~좌~진~
박금수: 네, 청산리 전투=김좌진, 봉오동 전투=홍범도, 그런데 말이죠, 청산리 전투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대활약을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어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할 독립군이 배치될 때 지금 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이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초빙이 돼었습니다. 또 신흥무관학교 교관인 이범석과 생도 박영희 김훈 백종걸 강화진 오상세 이운강이 각각 사관연성소 연성대장 사관연성소 학교단장 종군장교 제4중대장 소대장 서리 등을 맡았습니다.
북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이장녕 참모장
박영희 사령부 부관 겸 사관연성소 학도단장
이범석 연성소 본부교관 겸 연성대장
김훈 종군장교와 소대장
백종렬 구대장과 종군장교
강화진 구대장과 중대장 서리
오상세 중대장
이운강 소대장 서리
이윤석: 워낙 많으니까 그러면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운 전술, 훈련을 독립군에게 그대로 전수했겠네요.
류근: 그뿐만이 아니겠죠. 아까 김경천 지청천 장군이 일본의 신병서를 들고 탈출했다고 했잖아요. 일본군 전술을 손바닥 보듯이 다 보고 있는 거지요.
박금수: 자, 청산리 전투에서 서막을 열었던 백운평 전투를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이곳이 전투현장인데요.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 지금의 청산리 마을에서 2km 더 들어가면 나오는 백운평이구요 그리고 이곳이 실제 전투현장이었던 직소계곡입니다 (청산리 직소계곡), 폭이 굉장히 좁구요 좌우 양편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요. 위에 오솔길이 있는데 일본군은 이 길을 지나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류근: 제가 예비역 육군병장으로 봤을 때 매복전에 딱 입니다. 정말 첩첩산중에서 훈련했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에게 최적의 작전환경이라고 판단됩니다.
박금수: 네, 맞습니다. 10월 21일 아침 9시 일본군이 직소계곡으로 진입합니다. 이렇게 맨 앞에는 장교가 가고요 일본군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이런데 우리 독립군들은 이 계곡 속에 자연 지형을 이용해 가지고 미리 매복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매복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실제로 일본군 척후병들이 발견을 못해요. 길에서도 맑고 흐리고 온도를 재가면서 매복이 있나 없나 굉장히 자세하게 척후를 하고 오는데도 독립군들을 발견을 못합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들어오니까 매복해 있던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거리가 한 열 걸음 10미터 밖에 안되는거죠. 이런 상황에서 신호가 울리자 600여명의 독립군이 일제히 총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20여분간의 교전 끝에 결과는 일본군 200명 사망, 바로 독립군이 승리를 했던 것입니다.
이윤석: 이 정도면 대승인데~, 그러면 우리 독립군이 꽤 굉장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네요, 교관님! 근데 아까 왜 나에게 목총을 줬어요?
박금수: 백운평 전투에서 독립군이 노획한 무기는 600여정의 소총과 권총들이 있었어요. 특히 가운데 권총이 김좌진 장군이 사용했던 마우저 C96권총과 같은 종류라고 합니다. 그리고 6정의 기관총이 있었습니다. 맥심 기관총이라고 하는데요. 또 박격포, 지금 쓰는 것하고 비슷한 형태의 박격포도 2문이나 있었습니다.
이윤석: 그러면 최소한 한 사람 앞에 소총 한 정씩은 돌아갔다는 얘기인데, 교관님! 저는 왜 목총들고 훈련을 했나요?
박금수: 이윤석씨가 입교했을 때는 워낙 초창기였어요. 하지만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 군자금이 이전에 비해서 넉넉하게 지원이 된데다가, 러시아에서 혁명 이후에 내전이 발생한 상황이어서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죠. 러시아제 소총 한 자루를 보여드리면 이것이 바로 러시아제 소통 M1892이라는건데, 흔히 모신나강 이라는 소총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바로 장전을 해서 쏘는 것인데, 이것도 실제총은 아니고 모조총입니다.
이윤석: 그리고 참고로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씨가 사용한 총이 모신나강 총이었습니다.
최원정: 일단 한번 남겨 보세요. 저도 한번 들어보게,
박금수: 재미있는 기록도 있는데요. 독립군에 투신한 신흥무관학교 교관 중에 일본 육사출신이 두분이나 계셨죠. 이들 덕분에 일본식 전술을 구사하는 독립군은 일본군과 군복까지 비슷해서 싸우는 모습만 보면 사실은 구별이 쉽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개 자욱한 계곡에 갇힌 일본군들이 서로를 독립군으로 오인해서 밤새 싸우다가 전멸했다고 합니다.
류근: 아이, 바보들~
박금수: 이렇게 청산리 전투에도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제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가 되겠습니다.
박환: 예컨대 지청천 장군 같은 경우는 광복군 총사령관을 합니다. 수많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독립군들 뿐만 아니라 광복군, 그 후에 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신흥무관학교가 했다 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광복군->대한민국 국군).
최원정: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는 됐지만 이후에는 독립운동의 맥을 꾸준히 이어온 거네요. 독립운동의 요람, 톡톡히 했습니다.
심용환: 그때 신흥무관학교에서 하던 선열의 시범이라고 하는 조국과 겨례에 대한 맹세 3가지가 있습니다.
선열의 시범
1.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2. 나는 겨례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3.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상사를 잊었노라
그러니까 조국애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최원정: 오늘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존재를 확인을 해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았나요.
이윤석: 한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면 신흥무관학교에서 너무 춥고 배고프게 고생을 했는데 어쩌면 지금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혹시나 춥고 배고프지는 않는지 하는 걱정이 드는데 인터뷰를 하나 봤어요. 예전에 의병순국의 현장 사진을 본 적이 있잖아요. 그분들 중의 한분 후손인데 이런 얘기를 했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려면 자식을 낳지 말라 내 자식이 독립운동 한다면 나는 극구 말리겠다 후손으로 사는게 너무 힘들다.” 최소한 이런 말은 듣지 않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되겠다 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최원정: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서 광복 후에 또 우리나라에서 한 자리씩 요직을 차지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있겠지만 아마 지청천, 김경천 그런 선생님들은 죽는 날까지 편치 않으셨죠?
박환: 김경천 장군 같은 경우는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서 비극적 삶을 마감하셨고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해서는 우당 이회영 선생뿐만 아니라 석주 이상룡, 필동 임면수 등 많은 분들이 알려져 있지만 지금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끊임없는 노력과 항쟁과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우리의 광복이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잊혀진 인물들에 대해서는 무리가 애정과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이익주: 지난 시간에 신민회, 오늘은 신흥무관학교, 정말 우리는 쉬지 않고 싸웠어요. 식민지가 된 나라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서 싸운 나라죠. 그것이 뒤에 해방에 밑바탕이 됐다고 생각 한다면 근대사를 암울한 역사로만 생각 하지 말고 암울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느냐는 방향에서 다시 주목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낯선 이국 땅에서도 항일을 멈추지 않았던 신흥무관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분 모두의 가슴이 뜨거워졌으리라 믿습니다. 가슴 뜨거워지는 근대사 이야기는 다음 주에도 이어가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6화, “신흥무관학교”에서 정리).
① 도산 안창호는 먼 훗날 독립을 위해 신민회를 조직했고, 1907년 신민회와 상동교회 청년회는 일제의 조선 강점시, 우리나라의 독립 방법론에 대해서 고민, 그런 고민 속에 독립 전쟁론이 부각,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보고 미일전쟁도 충분히 예상 정세판단, 그 전에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고로 독립군 양성은 필수라는 결론,
② 독립군 양성지역은 압록강 건너 서간도가 최적, 북간도와 연해주에도 동포들이 많이 살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이 관건인데, 서울의 명문가, 巨富, 우당 이회영 일가 6형제는 독립군 군자금으로 모든 가산을 처분 서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설립, 그 중에서 둘째형 이석영이 상당히 많은 지원, 서간도는 1910~45년까지 항일투쟁의 대표적 근거지,
③ 그 외에, 수원에 임면수, 경북 안동에 이상룡, 천안에 이동녕,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망명,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토지 다음에 노비도 해방을 시키고, 노비들도 주인을 따라갔다고, 만주는 추우면 영하 40~50도, 혹독한 악조건 속에서도 조국을 생각하면서 재산을 희사하고 만주로 떠났다는 것은 참 대단한 결단, 결단, 고개가 숙여진다.
④ 독립운동가들은 서간도와 만주에서 중국인들의 텃세! 문화차이와 토지매입의 법률적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1911년 6월에 추가가 마을에 허름한 옥수수 창고를 매입, 거기서 신흥강습소 개설, 중등과정 교육과 군사과 훈련, 처음부터 독립군 육성목표, 신흥무관학교는 신흥강습소로부터 출발, 유년필독 교과서, 우리 말과 지리, 역사를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함양, 일본육사 출신 김경천, 지청천 엘리트 교관들, 국내 많은 젊은이들의 신흥무관학교 지원 촉매제 역할,
⑤ 신흥무관학교 영하 30~40도 혹한에서도 훈련 감행,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이 열악해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추운데서 철저하게 독립이란 정신 속 교육훈련, 식사와 관련한 일화, 이석영 이사장 1913년 5월 통화현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 설립했을 때 생도들 사기진작 위해 돼지를 크게 잡아서 학생들에게 특식, 기름기를 먹은게 없어, 모든 학생들이 배탈고생, 학교 자급자족으로,
⑥ 신흥무관학교는 본교가 있고 여러 개의 분교로 체계적 운영, 본교 2년제 고등군사반, 고급간부 양성, 분교 초등군사반, 독립군 군인 양성, 한참 때 한 기수가 600명 정도, 입대연령 10~50대까지, 1920년까지 3~4000여명의 졸업생 배출, 신흥무관학교가 가장 중심적, 나자구 무관학교, 미산무관학교, 일제의 방해로 1920년에 신흥무관학교 폐교
⑦ 청산리 전투(1920.10.21~26)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 대활약, 10여차례 전투 끝에 일본군을 대파, 세계 전쟁사에 찾아보기 힘든 대첩, 청산리 전투=김좌진,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전투 직소계곡 600여명 독립군 매복 일본군 유인 매복지역 10미터까지 접근 총공격, 20여분 교전후 결과 일본군 200명 사망, 독립군 승리, 대한의열단도 신흥무관학교 출신군인들이 주도
⑧ 성재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고, 지청천 장군은 상해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외손자가 독립기념관관장, 김경천, 홍범도 장군의 말년이 비극적이라는데 가슴 아프다. 이제 대한민국도 잘 살게 되었으니 모든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을 최고로 도와주어야, 김좌진 장군 아들, 김두한, 김두한 딸, 김을동 前국회의원, 김을동 아들, 탤런트 송일국, 송일국씨는 대학생들 데리고 자비로 만주 청산리 전투현장 답사하는 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