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고릿적 이야기가 되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생일에 시루떡을 해서 밥상 위에 올려 안방 윗목에 두고,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정성들여 마련한 아침밥을 먹는 것이면 생일을 걸게 쇠는 것이었다. 아마도 시골이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생일선물 같은 건 개념에도 없었다. 요즘은 생일을 맞은 아이는 물론 축하하는 사람들도 종이로 만든 고깔모자를 쓰고 주인공 나이만큼 개수의 양초 불을 케이크 위에 켜고 작은 폭죽을 팡팡 터뜨리며 공중으로 색색의 종이테이프를 쏘아 올리고 ‘생일 축하합니다~’를 합창을 한 다음 주인공이 소원을 빌며 후 불어서 촛불을 끄는 것이 우리의 생일 풍속도이다. 엄마 아빠는 물론—사실 젊은 엄마 아빠들은 어렸을 때 그렇게 생일을 축하받았을 것 같기도 하다—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손주들이 그렇게 하니 기꺼이 따라하며 즐거워하는 분위기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아이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도 기쁜 일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아이들이 귀한 세상에서는 사회적으로도 그보다 더 경사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다보니 아이의 생일이 어쩌면 탄신일이라고 높여 칭해져야할 정도로 거의 성스러운 날이 되었다. 탄신일이나 탄생일은 임금이나 공자, 예수와 같은 위인이나 성인의 생일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한 성인의 생일을 어떤 사회가 명절로 삼으면 축제일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탄생일은 아마도 예수의 생일인 성탄절일 것이다. 성탄절의 종교적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로서의 문화 현상이 가진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가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에 축제일로서 가장 성대했던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장 떠들썩했던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후에 크리스마스는 문화 현상으로서 점차 세력을 잃고 차분해지더니 지금은 사뭇 조용해졌다. 그러한 사회문화적 변화가 다른 종교로부터 제기된 형평성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에 대한 언론들의 자중자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즘은 크리스마스가 조용히 지나간다. 백화점 등 특별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를 구경하기도 쉽지 않고, 거리에 울러퍼지는 캐럴을 들을 수도 없으며 우편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고 받는 일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에 비해 1970년대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대부분의 10대나 20대의 젊은이들이 마음이 설렜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들뜬 분위기였다. 거리 여기저기 전파사에서 틀어주는 상쾌한 캐럴이 산타 할아버지가 빨간 코의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신나게 모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주었다. 유치원생부터 중고등학생까지는 직접 카드를 만들어 우표와 함께 씰—결핵 퇴치 기금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도 봉투에 붙여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냈다. 나에게는 중학교 때 미술 시간 실기 테스트의 일환으로 만들었던 크리스마스카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색도화지와 금박지나 은박지를 자르고 오려 붙이고 수채화 물감으로 언덕 위 조그만 교회당 건물을 그리고 거기에 풀을 점점이 뿌린 다음 그 위에 은가루를 뿌리면 눈 내리는 교회당이 나타났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성 파트너와 어울려 소위 올나이트 파티를 벌였고, 그런 분위기에서 대도시의 번화가는 밤이면 몰려나온 젊은이들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렀다. 서울에서는 명동이, 광주에서는 충장로가 그랬다. 그래서 그때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말이 생겨났고, 그게 상당한 사실성을 얻었었다. 그때 파티를 즐겼던 이들이 지금 60대나 70대 어르신들이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아직 어둠이 지배하는 새벽 4시쯤 대문 밖에서 낭랑한 캐럴 새벽송이 채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의 귓가에 들려왔다. 교회의 중고등부나 청년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동네 골목길을 돌며 예수 탄생의 기쁨을 노래했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잠결에 들리는 그 노랫소리는 신기한 작은 즐거움이었다. 교회 앞마당이나 도시 광장에 세워진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휘감고 있는 수많은 꼬마전구들이 깜박이며 반짝이는 색색의 별빛들은 한 편의 황홀한 판타지였다.
크리스마스와 관련해 가장 보편화된 문화적 현상이 산타클로스이다. 혹시 당신도 어렸을 때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준다고 잠시라도 믿었었던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많은 아이들이 아마도 열 살 전후까지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연령대가 조금 내려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아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믿은 적이 없다. 생일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선물을 택배하는 산타클로스를 믿는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내 딸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걸 믿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애의 연기력에 내 아내와 내가 감쪽같이 속았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우리 부부는 그날 밤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벽에 걸린 커다란 붉은 양말 아래 평소 아이가 바라던 선물을 그 애가 깰까봐 서로 눈짓 교환하며 조심조심 갖다 놓고, 아침이 되어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 선물을 보며 신기해하는 표정을 짓는 딸아이의 모습을 대하며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산타클로스는 정말 신통한 분이야, 네가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딸아이가 4학년 때 우리의 거짓말은 민망하게 들통나고 말았으며, 우리는 딸아이가 순수의 한 조각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사회문화 현상으로서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고 조금은 들뜨게도 했다. 그게 외래문화니까 배척해야한다는 데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좋은 건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삼으면 된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도 기독교가 문화 생산력에 있어서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서양문화의 양대 원류 중 하나로 여겨지는 히브리즘(Hebraism)까지 연결하지 않더라도 중세부터 근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음악, 미술, 조각, 건축, 문학 등 실로 모든 문화 분야에서 풍성한 산물을 만들어 냈다. 다른 어떤 종교의 문화적 산물도 풍요와 다양성에 있어서 기독교의 그것에 필적할 수 없다. 그 중 한 부분이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문화적 산물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캐럴 음악이 있고,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있고, 사슴 마차를 몰고 하늘을 날아와 굳이 굴뚝을 통해 들어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산타 할아버지가 있고, 작은 별빛들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고, 서툴지만 정성껏 만들어 보낸 크리스마스카드가 있어서 그것들이 추운 겨울 우리의 마음을 잠시라도 따뜻하고 설레게 했었다. 게다가 요즘처럼 아이가 귀한 시대에는 크리스마스 베이비들이 생겨난다면 그것도 금상첨화가 아닐까?
어쨌든 나는 핼러윈보다는 크리스마스가 더 친근감이 드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서 산타클로스가 루돌프 사슴 마차를 타고 날아오는 크리스마스는 점점 시들어가고, 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밤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핼러윈이 점점 기세를 떨쳐간다. 핼러윈도 흥미로운 풍속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유래와 의미가 우리의 정서에 쉬이 와 닿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훨씬 더 보편적 호소력이 있다. 그 날은 세상과 인간을 죄와 고통,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탄생한 날이다. 달리 말하면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날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강탄(Nativity)이라고도 한다. 기원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의 삶보다도 훨씬 더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고통이 심할수록 구세주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그만큼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024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도 근본적으로 두렵고 불안하며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는 종교적 의미를 떠나 사회문화적 풍속으로서도 밝고 따뜻하고 희망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첫댓글 대학 시절, 크리스마스 시즌은 늘 설레었죠. 대문 안에 떨궈진 카드 봉투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새삼 떠오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