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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흔적 / 사 66:10-14, 갈 6:11-18
초대교회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있다. 그것은 최초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크리스천이란 이름은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불리어진 이름은 아니었다. 믿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뜻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불렀던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수쟁이라고 불렀는데 좋은 의미로 불린 것은 아니다. 쟁이라는 말은 멸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명칭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도 에수쟁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영광으로 알아야겠다. 일반적으로 예수믿는 사람들은 성도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구별된 사람들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붙여준 이름은 제자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신자라고 부르지만 초대교회 때에는 제자라고 불렀다. 제자라는 말은 오늘의 학생과는 다르다. 학생은 교사로부터 지식과 기능을 배우지만 제자는 스승의 인격을 배운다. 학생은 다 배우면, 그 과정을 마치면 졸업을 하지만 제자는 평생 배워야 하므로 졸업이 없다. 제자는 스승의 인격, 성품, 지식, 사상, 정신과 신앙을 본받고 닮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는 배우고 따르고 절대 순종하고 절대 신뢰하고 절대 신앙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를 본받고 닮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됨의 증거는 예수님을 닮은 흔적이 어느 부분에서라도 나타나야 한다. 내가 나를 보아도 예수 닮은 흔적이 보이고, 남이 나를 보아도 예수를 닮은 흔적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순종하면서도 흔적이 없다면 무엇으로 제자됨을 증거할 수 있겠나?
성서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는 사도 바울인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됨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고 잇다. 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짤막한 말씀이지만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헬라어로 ‘흔적’이라는 말은 ‘스티그마타’라고 하는데, 이는 로마나 희랍에서 주인이 소유물 표시로서 짐승의 몸에다 불에 빨갛게 달군 쇠도장을 찍는 표시였다.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온 노예들을 표시하는 것도 스티그마타라고 했다. 스티그마타는 불명예스러운 말인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럽게 자신에게 이 스티그마타가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수치도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것이라면 다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바울의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하는 말씀 속에는 의미심장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담겨져 있다. 당시 노예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스티그마타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했고 이 흔적을 보라고 말한다. 바울의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도전적인 언어이다.
유대인들의 몸에는 선민 이스라엘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할례였다. 유대인들은 할례받은 민족으로 선민의 흔적을 자랑삼고 있다. 할례받은 흔적을 가진 자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그토록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것은 할례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 중에는 이방인 신자를 유혹하여 할례를 강요하고, 그것으로 자랑을 삼으면서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고 할례나 무할례나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받은 자만이 존귀한 자라고 했다. 다만 자신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하였다. 이 말씀 속에는 바울의 철저한 신앙고백과 자기 존재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1. 흔적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신앙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표시는 자기 몸에 흔적을 가져야 한다. 스티그마타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주인이 소유물을 표시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가 나의 주라는 신앙고백이다. 이제 바울도 몸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바울 당시 로마 황제 치하에 있던 사람들은 황제를 큐리오스(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칭호를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됨을 입술로 증거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 처형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증거하지 못하고 은밀히 따르는 연약한 신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입술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따르다가 또 입술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라고 한 것이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곧 나는 예수의 종이요, 나는 그의 소유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소속감이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새상 사람들과는 사는 목적이 다르고 종착점이 다름을 알아야 한다. 롬 14:7-8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지금 우리 몸에는 이러한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겠다. 사도 바울이 어느 곳에 있든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존재를 바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박해자들은 그의 육체를 쇠사슬로 묶었으나 그의 영혼까지 쇠사슬로 묶을 수는 없었다. 그는 로마 항제 밑에 있었으나 그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었다. 그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의 쇠사슬에는 가이사의 흔적이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죄수복에도 가이사의 흔적이 있었으며, 식기에도 가이사의 징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하면서 지금 자신의 몸에 있는 흔적들이 그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임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우리는 어느 날인가 주님 앞에 서게 된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확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보여다오’ 하고 요구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여 드릴 것인가?
2. 그리스도인은 순종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몸에 지녀야 할 흔적은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주님의 뜻에 자기의 전 생명을 바치며 살았다. 그의 온 몸은 순종한 흔적뿐이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두 종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한 종류는 쾌락과 동물적 본능에 따라 산 죄악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요, 다른 한 종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산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몸에 흔적을 가지고 있다. 이 흔적 때문에 서로의 특징을 구별하고 알아볼 수 있다. 우리의 몸을 썩어질 몸이라고 단순히 생가하지 말라. 그 날에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보여야 할 몸이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본문에서 ‘흔적을 가졌노라’ 한 것은 예수님의 낙인을 내 등에 짊어졌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거운 짐을 진 노예의 충성스런 모습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흔적은 순종(충성)의 흔적이다. 바울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위한 순종으로 일관되어 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짊어지고 있던 예수님의 흔적은 그가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받았던 박해로 말미암은 그의 육체의 상처와 마음의 고통이었다.
행 214:19절에 보면, 실제로 그는 갈라디아 지방의 한 성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후 죽은 줄로 여김을 받아 성밖에 버려진 일까지 있었다. 그의 어깨에도 돌로 맞은 흉터가 있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올려 그가 빌립보에서 받았던 박해의 흔적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고후 11:22-28절을 보면, 그는 복음을 위하여 수없이 매를 맞았다고 증거한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태장으로 세번 맞았으며, 돌로 한번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의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고, 잠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던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육체적인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 날마다 고통이 있었다.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기의 몸에 있는 흔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몸과 마음에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충성하는 종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지닌 이 흔적들이 사실은 악한 자들이 괴롭힌 흔적임을 알고 있다. 또 이런 흔적을 지혜롭게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님으로 그날에 주님을 영광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예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다. 할례 자체의 의미보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을 피하려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태도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난이 구체적으로 나에에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최후의 날에 우리의손을 만지시며 일한 흔적을 찾는다면 어찌하겠는가?
3. 바울은 자기 몸에 나타난 예수의 흔적을 최대의 영광으로 보았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는 바울이 예수님의 노예가 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된 고난의 종이 된 것이 너무도 명예로운 것이라는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졌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지 명예롭게 생각하며 살았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라고 하였다. 갈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말하자면 현재의 환난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런 흔적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의 훈장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후 1:5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라고 하였다. 골 1:2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몸에 채우는 것으로 충분한데 육체의 할례를 가지고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면 헌신 봉사 충성 순종하는 사명의 흔적을 가져야 하겠다.
로마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후, 서시 325년 소집된 제1차 세계종교회의인 니케야 회의에 모인 감독의 수는 300명이었는데, 그 회의에 참석한 감독 중에 한쪽 눈이 뽑히거나 양손이 없는 사람, 그 외 여러 불구자들이 많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주를 위해 박해를 받은 고난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사도들이나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킨 분들 같은 흔적은 남기지 못할지라도 무릎 꿇고 기도한 흔적은 있어야겠다. 우리의 손에는 열심히 교회에 충성한 흔적이 있어야겠다. 우리의 얼굴에는 주님께 순종한 흔적이 있어야겠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다운 삶의 긍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 부요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가난하면서도 진실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여야겠다. 세상 사람들이 남을 다스리는 것을 자랑하면 우리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종의 생활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번질거리는 얼굴과 인물을 자랑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육체적 고난과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삶의 긍지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모든 자랑과 영광도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바울은 박해를 당하고 죄인으로 취급되어 매를 맞고 투옥되고 억울하게 사슬에 매이고 온몸에는 상처가 아문 흉터밖에 없는 몸이지만 이 모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삶의 가치관을 그리스도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의 최대의 영광스런 흔적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 존귀하신 몸에 인류는 잔인하게 상처를 냈다.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양을 잃으셨다. 이마는 가시에 찔린 흔적이요, 손과 발은 대못에 박힌 흉터요, 그 옆구리는 창에 찔린 큰 상처가 남겨져 있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상처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광스런 흔적으로 그 몸에 남겨두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 그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하셨다. 우리는 상처난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확증해야 한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나 박해나 고난의 흉터를 영광으로 알고 살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겠다.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메리 엄마는 얼굴에 흉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메리는 엄마가 학교에 오거나 동무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싫었다. 하루는 메리가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왜 엄마는 얼굴이 그 모양이야?’ 하면서 친구들이 놀려서 창피하다고 했다. 그때 엄마는 ‘메리야, 울지마라. 엄마도 참으로 아름다운 때가 있었단다’ 하면서 앨법을 보여주셨다. 처녀시절의 아름다운 얼굴, 결혼할 때의 행복했던 모습과 메리를 품에 안고 찍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메리야, 네가 두살 되던 어느날, 너를 잠들게 한 후 나는 시장에 갔었다. 가다가 요란한 싸이렌 소리에 뒤돌아보니 우리 동네에서 불길이 치솟기에 달려와 보니 우리 집이 불길에 싸여 있었다. 너를 살려내려고 불길 속에 뛰어들어가 가슴에 너를 안고 나오다가 화상을 입고 나는 쓰러졌었다. 후에 깨어나 보니 나는 병원에 있었고 너는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기에 엄마는 하나님께 감사해서 많이 울었단다.’ 이 말을 들은 메리는 엄마 품에 안겨서 울면서 엄마에게 용서를 빌었다. 자신을 살려준 자랑스런 엄마의 얼굴을 부끄러운 흉터로 알았던 것을 뉘우쳤다. 메리는 엄마의 얼굴을 자랑했다. 많은 동무들에게 메리 엄마의 흉진 얼굴은 천사처럼 빛나는 사랑의 얼굴로 보였다.
여자들은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우유나 오이, 달걀 등으로 맛사지를 한다. 이유가 다 있겠지만 어쨌든 잘 보일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도록 하나님 말씀으로 맛사지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심령을 씻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으로 얼굴을 단장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의 얼굴은 사랑과 평안이 넘쳐 환해질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흔적을 몸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다음 말씀에서 제시해 주고 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이 나를 대하여, 나는 세상에 대하여 못박혔다는 것이다. 세상과 나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서로에 대하여 상관할 것이 없다 할 때 여기에서만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만을 자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