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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히 자라는 씨앗 / 겔 17:22-24, 막 4:26-34
지난 한주간 큰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지방자치 선거요, 하나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이다. 지방자치선거에서 왜 민자당이 패했을까? 지역바람이 불어서일까? 서울은 민주당이 싹쓸이 했는데도 지역바람인가? 그러면 경북에서는 왜 무소속이 많이 되었을까? 더구나 경남까지. 이는 민자당이 정치를 잘못한 까닭이다. 처음에 개혁을 한다고 했을 때는 인기가 80%까지 올랐다. 그런데 그 뒤 이회창 국무총리의 사임 뒤부터 인기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개혁보다는 사정이란 말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지금의 사정을 달라졌을 것이다. 백화점 붕괴사건도 부실공사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사전에 미리 에방이 가능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곳이 우리나라에는 도처에 넣려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려고 이러나 하는 심정이 된다. 그러면서 하루빨리 이 나라가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유는 마가복음 특유의 기사이다. 복음은 그 자체 안에 잠재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들어서 씨로 표상했고, 하늘나라를 설명했다. 씨를 심은 다음에는 싹이 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어떤 일도 인간에게는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이미에서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라 했다. 인간의 염려와 노력이 발효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자연의 힘의 합작의 산물임을 암시한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하늘나라가 성취되는 것은 갑자기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순서에 따라서 곧 과정을 밟아서 성취된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추수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이다. 심판은 동시에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성취를 뜻한다. 낫을 댄다는 말씀은 무서운 심판을 뜻하면서 다른 한편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 비유의 말씀은 인간은 그저 씨나 뿌려놓고 자고 깨고 하는 동안 곡식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씨를 싹트게 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결국 누가 하느냐? 인간의 위치가 무엇이며, 인간이 해야할 한계가 무엇인가? 창조자와 피조자의 한계를 표현하고 창조자의 절대적 권한에 피조자는 순응해야 하는 것을 말해 준다. 결국 하늘나라는 인간의 변덕스러움으로도 안되고 인간의 지혜와 어떠한 계획으로도 하늘나라 건설은 불가능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의 힘만이 하늘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어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려 놓았다’는 말씀에서 인간은 땅에 씨를 뿌리는 존재인 동시에 인간은 씨를 만드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어떤 결정적 결과를 만드는 권한은 없고, 그 결과를 위해서 돕는 심부름꾼의 역할 정도 밖에 못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생업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일을 벌려놓고 치밀한 계획과 관리로 일이 성취된다고 보통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씨뿌리는 정도밖에 효험이 없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뚜껑을 열고 일이 성취되느냐 안되느냐의 궁극적 문제는 그런 인간의 역할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성취되는 것이고, 안되는 것은 별 수단 방법 또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도 안된다.
오늘의 문명이 발달된 것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오해하고 착각을 하기 쉽다. 곧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없이 인간이 다 할 수 있다는 망상이다. 생물측정학이란 학문에서는 인간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과거 창조자께서 고안하고 창조한 모든 것은 이제는 다 낡아버리고 케케묵은 멋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고 선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새 인간이 태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우주인이라고 한다. 이제 인간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 인간의 기술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됐다. 인간의 기술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수천리 떨어져 있는 것도 다 내다보게 되었고, 하늘의 아름다운 무지개는 신비스러운 존재인양 생각해서 성서에서도 무지개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운행하신다고 했는데 그 무지개를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으며, 석탄에서 나일론이 나오고 양말이 쏟아져 나오게 하며, 흐르는 강의 물줄기를 달라지게 할 뿐만아니라 사람까지도 인공수정으로 만들고, 하나님께서 이미 지어놓으신 생물학적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가 있다고 해서 이제 인간이 못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이미 해 놓으신 것은 다 낡아서 인간이 새롭게 창조해 나가야 한다고 큰소리치게 되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인간 없이 모든 것은 다 정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빼앗았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쉽게 생각하면 그럴 듯하기도 하지만 이제 인간들이 창조자가 되고 보니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의 대업까지 맏고 보니 인간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안되고 바쁘게 돌아가야 되고 그래서 시간이 더 없고, 신경질만 더 많아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는 고요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없이 빠쁘게만 돌아가야 하는 것, 거기서 생기는 신경질적 현기증만이 있게 된 것이 오늘의 인간 실존이라는 말이다.
창조자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은 마치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느냐 하면 어린이 놀이터에서 목마를 탄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목마는 빙글빙글 돌아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도 아무 결론없이 끊임없이 돌기만 하는 목마를 타고 있으면 정신이 어리둥절 해진다. 목마를 탓을 때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서 빨리 달리는 것 같고 무엇을 하는 것 같으나 알고보면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맴돌던 그 자리에서만 들까불다가 일단 목마에서 내리면 쓸쓸함 밖에 아무것도 없게 된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한다고 야단법석을 해봐야 부귀, 영화, 실패, 낙담, 분주함 그리고 신경질 그밖에 아무 것도 없고 그나마 다 지나가고 보면 삭막화하 그지없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자가 되면 굉장히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으나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쉴 새가 없게 되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모든 신경병, 노이로제에 걸렸고, 무엇을 창조했다는 공과가 있자마자 더 큰 것을 만들려고 고민만 더하게 되었으며, 마음 놓고 잠 한숨 못자는 인간들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이 창조자가 되고보니 모든 것을 자기가 해야 하기 때문에 돌봐줄 자도 없어졌고, 자기가 자기를 지키자니 울타리만 더 높여야 하고, 가시철망으러 둘레를 뒤덥고도 무서운 세상이라고 벌벌 떨게 되었으며,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자유로이 나다닐 수 없게 된 무서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스스로 창조자가 되고 보니, 부러운 것이 없을줄 알았는데 마음 편한한 날이 없게 되었고, 긴장만 더 조장되고 문만 더 꼭꼭 닫아 걸어매야 살 수 있잇게 된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성서는 인간은 인간이지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창조자가 혹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비정상이고 병든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씨뿌리는 것 이상의 것을 못하는 존재이다; 씨앗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며 교만을 떨어봐야 결국 인간답지 못한 무서운 함정에서 뻐져나올 수 없는 가련한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씨를 뿌린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27절은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씨뿌리는 존재요, 씨를 뿌린 다음에는 오직 밤에는 자고 낮에는 깨는 것이 고작이다. 여기서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잠을 잔다는 것은 전적인 신뢰를 뜻한다. 잠에서 일어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깨닫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주제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가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다. 그것은 표현에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난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생각, 창안, 계획들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사람이 창조자인체 하고 위대한 것을 창조했다고 더 큰 의욕에 불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겨우 목마나 타는 격이요,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며, 결국 지쳐서 꼭 병에 걸리지, 하나님 하시는 일을 제가 할 수 있다고 교만을 부릴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때로 곱게곱게 피는 백합꽃을 입히시는 하나님,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는 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잊고 제나름대로 살려고 한다. 일이 좀 잘되면 제 힘, 능력, 지혜, 재능이 강해서 그런 줄 알고 날뛰고, 일이 좀 안되면 그만 이 세상 벌써 다 산 것 같이 경솔한 것이 인간들이다. 제가 잘나서 사는 줄 아는 인간이 마치 창조주나 된 것처럼 야단이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아랑곳없이 당신의 계획대로 진행하신다.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공주의 새를 보라. 현대 과학의 공이 놀랍지만 그것마저 어디 제 잘나서 되는 일이냐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이냐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못할 때 그것도 목마를 타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항해에 자신이 있고 완벽한 기술이 있다 해도, 물 위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서 살라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역시 밤에는 자고 낮에는 깨는 일밖에 그 이상의 것을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씨를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고 익어가게 할 수 있는 분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독일의 모르트케란 분은 사회에 많은 공로가 있던 분이다. 그에게도 인생이 석양에 다가와서 모든 공직에서 은퇴를 하려고 할 때, 그 분을 존경하던 후배들이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가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이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이생을 살고 싶다’라고 하였다. 평범한 말이지만 깊은 진리가 있다. 사람 눈에 보기에는 굉장한 공로자이고 유명한 사람인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그것들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가 자고 깨고 하는 동안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사는 것이 더 보람되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위대하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이적을 행하시고 굉장한 사업을 해놓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이 정말 매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 그는 세상에서 큰 사업도 할 수 있었고 큰 혁명을 일으켜서 세상 집권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겠다고만 한다면 온 민중들이 모두 호응해서 단번에 위대한 사업이 성취될 것이나, 바로 그 성취되려는 찰나에 조용히 빠져나와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께 물어보시고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에 조용히 경청하셨다는데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생각할 때 신앙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하늘나라를 이룰 수 있는 위대한 힘이다. 신앙은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믜 행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백합화가 어떻게 아름다운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겠다.
아직도 인간이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망상이란 것도 깨달아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아도 추수 때는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하려는 것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조용히 관망하고 순종하며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것들이 인간이 위대한 일을 한 것보다, 창조자가 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것보다 더 귀하고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자고 깨고 하는 동안 하나님이 해 놓으신 아름답고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여유있게 신뢰의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1995-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