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장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終不爲大, 故能成其大.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
일삼아라, (마음이) 무위할 때. 일하라, (마음이) 일부러 일삼아 일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을 때. 즐겨라,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기른) 채소의 맛이나 가축의 고기 맛 뿐만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게 자란 잡초의 맛이나 짐승의 고기 맛을). 살펴라, (유위가) 작은 것일지라도, 마치 (유위가) 큰 (바인) 것처럼. 살펴라, (유위가) 적은 것일지라도, 마치 (유위가) 많은 (바인) 것처럼. 원망(이 일어나고, 작을 때, 그것)을 갚고, (갚을 때) 덕스러움(德; 無爲)으로써 하라. 어려운 바를 꾀하라, 그 쉬운 바(무위)에서. 큰 바를 일삼아라, 그 작은 바(무위)에서. (이른바)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천하가) 쉽게 여기는 바(유위)에서 일어나고, 천하의 큰 일은 반드시 (천하가) 작게 여기는 바(유위)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성인은 (천하가) 끝끝내 (유위가) 큰 바를 일삼지 않게 하고, 따라서 (천하는) 그 (무위가) 큰 바를 이루게 된다. 이른바, (천하가 유위에 대해) 허락하는 바를 쉽게 하게 되면, (천하는) 반드시 (무위에 대해) 믿는 바를 적어지게 하게 되고, (천하가 유위에 대해) 쉽게 여기는 바를 많아지게 하게 되면, (천하는) 반드시 (무위에 대해) 어렵게 여기는 바를 많아지게 하게 된다. 따라서 성인은 오로지 (천하가 유위를 비롯되게 되는 바) 그것을 어렵게 여기게 하고, 따라서 (천하는) 끝끝내 (그 적어지게 하는 바와) 어렵게 여기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爲無爲, 事無事, 爲之, 於無爲之時, 事之, 於無事之中. 或曰, 以無爲, 而爲, 以無事, 而事也. 蓋爲之, 於無爲, 然後始無爲, 而爲. 其實, 一義也. 吳幼淸曰, 不早爲之, 於其, 始. 則易者, 漸難, 細者, 漸大, 心力, 俱困. 雖欲無爲, 其, 可得乎.
위무위爲無爲, 사무사事無事는 “일삼아라, (마음이 아직) 무위無爲할 때. 일하라, (마음이 아직) 일부러 일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을 때”라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주석가는 일컬었다. “(위무위爲無爲, 사무사事無事는 마음이) 무위無爲한 바로써 일삼아라, (마음이) 일부러 일삼아 일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로써 일하라는 말이다.” (마음이) 무위無爲할 때, 일삼는다는 말은 이른바 (마음이) 무위無爲한 바로써 일삼는다는 말이다. 그 바탕이 하나인 말이다. (따라서 중국 원元나라 때) 오징(吳澄, 1249~1333)은 (『도덕진경주道德眞經註』 제54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마음이 유위有爲하기 전에) 일찍 일삼지 않게 되면, 이것이 비롯되게 된다. 쉬운 것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는 바, 작은 것이 점점 커지게 되는 바, 마음의 힘이 고달픔을 갖추게 되는 바. (따라서) 무위無爲를 일삼고자 할지라도, (어찌) 그것이 얻어질 수 있겠는가?”
味無味, 味人之所不味也. 如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而樂之, 不啻若芻豢, 是, 亦所謂味無味也.
미무미味無味는 세상 사람들이 맛보지 않는 바를 맛보라는 말이다. (제35장의) “도道가 입으로 내놓는 바는 담백하다! 그것은 (일부러 일삼은) 맛을 가지는 바가 없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즐겨라,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기른) 채소의 맛이나 가축의 고기 맛 뿐만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게 자란 잡초의 맛이나 짐승의 고기 맛을)”, 이것이 이른바 미무미味無味의 뜻이다.
大小多少, 則視小如大, 見少如多, 皆愼微之意. 下文, 所言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卽此義也.
대소다소大小多少는 “살펴라, (비록 유위有爲가) 작은 것일지라도, 마치 (유위有爲가) 큰 (바인) 것처럼. 살펴라, (비록 유위有爲가) 적은 것일지라도, 마치 (유위有爲가) 많은 (바인) 것처럼”이라는 말로서, 이른바 (비록 유위有爲가 작고 적어서) 어렴풋한 것일지라도 (마치 유위有爲가 크고 많은 바인 것처럼) 삼가라는 뜻이다. 다음 문장, 도난어기이圖難於其易, 위대어기세爲大於其細, 이른바, 그러한 뜻이다.
怨之所起, 恒不在大. 唯不能忍於其小. 而後輾轉馴致於不可解. 報之, 以德. 則不唯能忍而已.
원망이 일어나면, 늘 그러하게 큰 바에 자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어나고) 작을 때, 참아질 수 없게 되면, 이후에 커져서 풀어질 수 없는 데 이르게 된다. (그러나 원망이 일어나고, 작을 때) 그것을 갚고, (갚을 때) 덕스러움德으로써 하게 되면, (그것이 일어나고, 작을 때, 풀려지게 되고, 따라서 그것을) 참지 않게 될 따름이다.
終不爲大, 事之, 大也. 能成其大, 德之大也. 愼之於其, 始之微, 而其, 終也. 天下, 無難事. 此, 所謂成其大也. 輕諾寡信, 亦不能愼始之一端也.
종불위대終不爲大는 (천하의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가 커지게 한다는 말이다. 능성기대能成其大는 (천하의) 덕스러움德·無爲)이 커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성인은) 삼가게 한다. (천하) 그것이 그 (유위有爲가 작고 적으며) 어렴풋한 바를 비롯하는 바를. 따라서 (그 천하의 유위有爲가 작고 적으며 어렴풋한 바를 비롯하는 바) 그것이 끝나게 된다. (따라서) 천하는 (일삼기) 어려운 일을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이것이 성기대成其大의 뜻이다. (천하가 유위에 대해) 허락하는 바를 쉽게 하게 되면, (천하가 반드시 무위에 대해) 믿는 바가 적어지게 되는 일은 또한 (그 유위有爲가 작고 적으며 어렴풋한 바를) 삼가지 않음이 비롯하는 하나의 사례이다.
凡人之, 所易, 而聖人, 難之. 故曰猶難之. 難之者, 難於其, 始也. 無難者, 順於其終也.
세상 사람들은 (유위有爲를) 쉽게 여기지만, 성인은 그것을 어렵게 여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성인은 천하가) 오로지 (유위有爲) 그것을 어렵게 여기게 한다.” 그것을 어렵게 여기게 한다는 말은 그것이 비롯되게 되는 바를 어렵게 여기게 한다는 뜻이다. 무난無難은 (그 무위無爲에 대해 믿는 바를 적어지게 하는 바와 어렵게 여기게 바) 그것이 끝나는 바를 좇게 된다는 말이다.
此章, 專言審幾愼微之道. 蓋老子, 所謂無爲無事者, 如此與.
이 장은 (유위有爲가 작고 적은) 기미를 살피고, (유위有爲가) 어렴풋한 바를 삼가는 방법에 대해 오롯하게 일컫는다. 노자가 일컬은 “(마음이) 무위無爲하게 하라, (마음이) 일부러 일삼아 일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라”는 말, 그것과 더불어 같이 한다.
夫後世淸談之士, 猖狂簡傲, 以遺落世事爲高, 而馴致亂亡之禍者, 相去若霄壞矣
따라서 후대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220~589) 청담淸談을 일삼았던 사람들, (이른바 세상일에 대해) 미친 듯 날뛰고, (세상일을) 미친 듯 벗어나며, (세상일에 대해 일부러 일삼아) 대쪽 같(이 곧)고, (세상일을) 업신여기며, 세상일을 내버리고, 세상일에 대해 멀어지는 것을 (받들어) 높임으로써, (세상일을) 어지럽히고 망가뜨리는 데 이르고 이른 사람들, (노자와) 더불어 떨어진 거리가 하늘과 땅(이 떨어진 거리)과 같다.
或問, 於孔子曰, 以德報怨, 如何.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 報德. 朱子曰, 以德報怨, 可謂厚矣. 然以聖人之言, 觀之, 則見其, 出於有意之私, 而怨德之報, 皆不得其平也.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에게 물었다. “덕스러움德으로써 원망을 갚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원망을) 갚는 덕스러움德이 어떠한 것입니까? (무위無爲가) 곧은 바로써 원망을 갚아야 합니다. 이른바, 덕스러움(德; 無爲)이 (그 원망을) 갚는 덕스러움德이 되어야 합니다.” 주자朱子는 주석했다. “덕스러움(德; 無爲)으로써 원망을 갚는 일, (무위無爲가) 두터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자의 말, 그것을 (잘) 살펴보면, (공자의 뜻을) 알아차리게 되는데, (공자의 뜻은) ‘(원망을 갚는 덕스러움德) 그것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있는 사사로움(私; 有欲)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그러한) 덕스러움(德; 有爲)으로써 원망을 갚는 일은 그 (무위無爲가) 평평한 바를 얻는 바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愚謂, 或者之問, 施恩以報怨也. 老子之言, 修德而忘怨也. 其指, 固不同矣. 然誦老子之言, 而不得其意, 則其, 弊. 必將有矯情市譽. 如郭解之爲者. 此, 吾夫子之訓, 所以爲萬世之法也.
(나는) 어리석지만, 일컫는다. “어떤 사람의 물음은 은혜로움을 베풂으로써 (상대의) 원망을 (저절로 그러하게) 풀어버리는 일에 관한 것이다. 노자의 말은 (원망을 받은 사람이) 덕스러움德을 닦음으로써 (상대의) 원망을 (저절로 그러하게) 잊어버리는 일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그 가리키는 바가 같지 않다. 따라서 노자의 말을 외우면서 그 뜻을 얻지 못하는 일, 이른바 그것은 폐단을 낳은 일이다. (따라서) 반드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일부러 일삼아) 바로잡게 되고, (덕스러움德의)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내다 파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마치, (한漢나라 때, 건달이면서, 의義의 이름을 빌림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협객俠客으로 불렸던) 곽해郭解의 행위처럼. 이것이 공자의 가르침이 만세萬世의 법칙을 일삼게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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