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
2023. 7. 2(맥추감사주일) 요엘 2:28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은 안다는 야다라는 단어는 공부해서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찬수 목사님은 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들었다. 위에 형님 누나가 있었으니 아마 늘 음악을 틀어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늘 클래식을 들었던 이찬수 목사님은 지금도 FM의 클래식을 틀면 그 음악을 거의 다 안다. 그런데 한번도 공부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노래의 제목과 작곡자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고 한다. 그래도 음악이 나오면 콧소리로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음악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베토벤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배경 속에서 운명을 지었는지를 다 안다. 그런데 태어나서 한번도 운명이라는 곡을 들은 적이 없어서 그 음악이 나와도 아무런 느낌과 감정이 없다.
그러면 누가 음악을 아는 것인가? 물론 음악 공부를 하고, 또 그 음악을 많이 듣는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그런데 음악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늘 듣는 사람은 그 음악이 나올 때 콧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또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음악공부만 한 사람은 아무리 음악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음악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음악으로 위로와 기쁨을 누리려면 음악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가? 요엘선지는 남유다 8대 왕이었던 요아스 시대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을 잘 섬기던 요아스는 점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갔다. 그렇게 요아스가 하나님을 버렸을 때 전대미문의 메뚜기 재앙으로 유다는 고통하게 되었다. 그 재앙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다(욜1:4)고 기록하고 있다. 팥중이, 떼뚜기, 느치, 황충은 모두 메뚜기이다. 그런데 각기 다른 이름으로 메뚜기를 표현한 이유는 심각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래서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 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욜 1:11),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욜 1:12)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메뚜기의 재앙으로 온 유다백성들이 고통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요엘을 통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가? 그 이유가 요엘 2장 28절이다. 함께 읽기 바란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지금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취되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였다. 그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던 120명 문도는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와 또 불의 혀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의 위에 임하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였을 때 사람들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을 하였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바로 요엘서 2장 28절이었다.
무슨 말인가? 요엘 2장의 이 말씀이 성취되면서 신약의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신약의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요엘은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본다고 하였다. 여기서 장래일, 꿈, 이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푼 구원과 은혜를 깨달아 알아서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노래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교회의 모습이다. 신약교회는 나는 지혜가 없어서 아무 것도 못해! 라고 말하는 자녀가 없고, 내가 왕년에 라고 말하는 노인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낙도섬선교회 대표인 박원희 목사님이 선을 보러 갔다. 아가씨를 만나러 가서 먼저 화장실을 들렀던 목사님은 거기서 한 자매를 보며 주여 저 자매를 제 아내로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만남의 장소로 가는데, 그 자매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자매는 주여 저 사람만은 아니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 때 상견례를 약속하고, 세 번째 만나서 결혼날을 잡았다고 한다. 정말 속전속결로 결혼을 했는데, 목사님이 결혼을 약속한 후에 있었던 일이다. 사역으로 인하여 자주 만날 수 없었던 목사님은 한번은 빌라에 사는 자매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는데, 자매가 다시 내려와서 자기가 목사님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늦은 밤에 버스에 탔는데, 제일 뒤자리에 앉아 자매를 보았다. 그때 자매도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목사님을 보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로수도 돌고, 빌딩들도 돌고, 하늘의 별과 달도 다 목사님과 자매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그 황홀함을 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러한 황홀함을 경험해 보았는가? 목사님은 이것이 영광이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서로 바라볼 때 너무 좋아서 세상의 염려와 부끄러움은 다 사라져 버리는 상태를 영광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그 영광의 상태를 누리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향하여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래서 우리가 고개를 돌려 하나님 너무 사랑합니다 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 영광을 누려서 염려와 근심은 다 사라지고 기쁨과 감격이 충만해 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사람을 실제적인 삶은 어떠하겠는가? 먼저 구약을 보면 여호와의 신에 충만한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위하여 그 앞에 서야 했다. 아니 그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한 다윗은 사울왕을 피하여 도망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고, 다니엘의 3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뜨거운 풀무는 두렵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넉넉히 이겨나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칼에 맞아 순교하였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유대인들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고 결박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고난의 길을 감당해 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 힘든 고난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이다. 대제사장인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래서 22절, 24절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진 그 영광을 제자들에게도 주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준 이유는 삼위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처럼 교회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기쁨과 감격이 넘쳐나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떤 시련과 고난도 넉넉히 이기며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대제사장적 기도를 하는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어려움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하여 넉넉히 이겨나가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기도에 합한 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은 갈대와 같이 연약하지만, 또한 생각하기 때문에 가장 강한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팡세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을 한 후에 이렇게 기록한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싸고 하나의 점으로 나를 삼킨다.
그러나 사고에 의해서 나는 우주를 감싼다.
너무 멋있지 않는가? 우주라는 엄청난 공간 안에서 나는 점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주에 싸여져 있는 나이지만, 그런 작은 내가 생각으로 그 우주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생각을 우리는 어디에 쓰고 있는가? 2017년 10월 18일 개봉한 루터라는 영화를 보면 중세교회는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은 교회의 무덤에 묻지를 않았다. 그런데 루터는 큰 고통을 가지고 살다가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교회 무덤에 직접 묻었다. 루터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세교회는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원칙을 가지고 사람의 죽음을 대하였다. 그런데 루터는 큰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자살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안타까워 하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랬던 루터는 직접 삽을 들고 땅을 파서 자살하여 죽은 사람의 시체를 교회 공원묘지에 묻은 것이다. 물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은 그 사람의 죄를 하나님이 허용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렇게 해서 죽은 한 사람을 너무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자 루터의 생각이었다. 당시 로마카톨릭은 우주를 감쌀 수 있는 그 생각이 고정되어서 그냥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그 생각으로 하나님을 묵상하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찾아서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루터는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종교개혁자가 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성령이 임한 성도의 삶이 아니겠는가?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마음과 생각이 오직 하나님께 집중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찬양하고, 고백하고, 증거하는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넉넉히 이기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우리 자여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안에 있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복된 교회,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