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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자. / 二重言語で話せる者。(2022년 7월 10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21:37~40
행 21:37 ○바울이 병영 안으로 끌려 들어갈 즈음에, 그는 천부장에게 "한 말씀 드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천부장이 "당신은 그리스 말을 할 줄 아오? 38 그러면 당신은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키고 사천 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오?" 하고 반문하였다. 39 바울이 대답하였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의 유대 사람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내가 한 마디 말을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40 천부장이 허락하니, 바울은 층계에 서서, 무리에게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하였다.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을 하였다.
37. パウロは兵営の中に連れて行かれそうになったとき、「ひと言お話ししてもよいでしょうか」と千人隊長に言った。すると、千人隊長が尋ねた。「ギリシア語が話せるのか。38. それならお前は、最近反乱を起こし、四千人の暗殺者を引き連れて荒れ野へ行った、あのエジプト人ではないのか。」39. パウロは言った。「わたしは確かにユダヤ人です。キリキア州のれっきとした町、タルソスの市民です。どうか、この人たちに話をさせてください。」40. 千人隊長が許可したので、パウロは階段の上に立ち、民衆を手で制した。すっかり静かになったとき、パウロはヘブライ語で話し始めた。
연일 더운 날씨와 국내외의 뒤숭숭한 뉴스들로 온전한 컨디션과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선적으로 감사와 찬양의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날 동행해 주신 흔적의 일부를 떠올리며 일기로 남기며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무더위나 혹은 주변의 이런 저런 좋지 않은 소식들을 들리면 잠시 한숨이 나오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그래도 이런 답답함과 장애물들이 나에게 주신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소망으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런 태도는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뭔가 다 이룬 것처럼 잘난 체 하거나, 그저 애써 참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더위가 내 생각만큼 잘 지나가지 않는다 느껴지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답답한 현실과 비극이, 걱정과 염려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동시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 느끼고 계시고, 주님과 내가 그 현실의 치열함을 함께 보고 있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도 다시금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고, 맡겨 주신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실질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동행하시는 숨결을 체감하실 수 있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바울은 천부장의 등장으로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폭행은 멈추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군사들의 들쳐 매고 병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할 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얌전히 그대로 있는 것이 대부분의 반응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천부장에게 예상 밖의 부탁을 합니다. 바로 유대인 군중들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군의 병영 안으로 들어가면 유대인 군중들에게 자신이 믿는 복음의 은혜를 고백할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위기의 때에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붙들기 위해서 애를 썼던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고위층인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부탁을 말 하였습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그가 헬라어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잠시 당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로마제국에 반란을 도모하다가 붙들린 이집트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당시 로마의 본토에서는 라틴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와 중동,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고대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헬라어로 말할 줄 알고 있다는 것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소아시아와 지중해 동부 연안지역에서 활동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 만큼 바울이 실력을 갖춘 인재였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요. 헬라어를 이해하는 지식인이며 고위층인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하며 바울은 소통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혹은 고위층이 되기 위해서 헬라어를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헬라어를 자연스레 말할 수 있는 환경인 길리기아의 다소라는 도시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외국에 흩어져 살 던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할 때 꼭 자신들의 말(즉 히브리말, 아람어)로 성경과 율법을 가르쳤었지요. 그러한 환경에서 태어난 바울은 특별히 자기 민족에 대한 열심과 열정이 있는 부모를 통해 유대의 율법과 언어와 관습에 능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헬라어도 할 수 있고,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인의 말, 즉 아람어라고 불리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언어를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몇 주 전에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를 소개하면서 문화와 종교의 경계인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 바울도 언어적인 관점에서는 디모데와 같은 경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물론 그는 유대인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혈통적인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그의 태생은 소아시아, 즉 터키 지역의 다소(타르수스)라는 로마제국의 주요한 행정도시였기에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를 몸에 자연스레 익히며 자라게 되었던 것이지요. 마치 일본 땅에서 한국인 부모 슬하에 태어나 일본어가 익숙하며, 일본의 문화와 관습을 더욱 친근하게 배우게 되는 저희의 아이들과 같은 형편이지요.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이 익숙하지만, 결코 일본인이 아니기에 또한 한국말과 한국문화와 한국의 관습들에 대해서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습득할 수 있고, 습득해야 할 처지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헬레니즘의 언어 문화적 영향 아래에 자라났지만, 동시에 유대인으로서의 언어와 정체성에 대해서 각별한 삶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지요.
바울은 현실적으로 이렇게 두 언어 사이에서 때로는 곤란을 겪기도 하고, 혹은 때로는 나름대로의 유익함을 누리며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우리 아이들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때로 온전한 언어의 뉘앙스를 알지 못해서 오해도 생기고, 사회적인 배움에 있어서 조금 뒤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두 언어를 사용하기에 두 언어가 가진 묘한 느낌을 모두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나보다 둘을 경험해야 해서 갖는 어려움도 있지만, 하나보다 둘을 경험했기에 이해하고 수용하며 포용할 수 있는 폭과 지평은 더욱 넓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바울은 두 언어를 통해 보다 확실히 복음에 대한 눈이 열리고, 마음이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2장에 앞으로 전개될 바울의 설교를 통해 그 확장된 영역에 대해서 고백하는 바울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에 앞서 저는 바울이 두 언어를 모두 활용하고 때와 장소에 맞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그에게 삶의 자리를 맡겨 주시고, 인도하신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대부분의 우리교회의 성도님들은 일본에서 한국인으로서 살기에 2중언어의 어려움과 유리함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소수의 일본인 성도들께서는 직간접적으로 우리말과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제한적으로나마 경험하고 계십니다.
만일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든,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를 접하는 일본인이든... 우리가 한 가지 언어만 사용하고, 한 가지 정서로만 소통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면 이런 복잡하고 독특한 경험을 몸을 체감하기 어렵겠지요. 물론 한 언어와 한 정서의 환경에서도 복잡하고 다양한 내면의 충돌은 일어나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두 언어의 환경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고유하고 독특한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다가, 성도들도 마찬가지의 두 언어의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언어를 통해 배우게 되는 독특하고 고유한 영적인 매력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하늘의 언어와 지상의 언어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매력입니다. 보기에 따라서 이러한 삶의 자리도 매력이라기보다 어렵고 힘든 고난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여지도 분명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직접 뵙고, 그 음성을 실제적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으시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계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하시나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는 이들의 고충에 대해서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8-9)
분명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존재하고 계시지만, 우리의 눈이 그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으니 하나님의 음성을 육성으로 듣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씀하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흩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 11:9)
제가 여러분과 함께 이 말씀을 통해 주목하고 싶은 점은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이중언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고유한 매력과 지평을 경험하게 하듯이,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고 거듭나서 구원의 자리에 있는 성도는 하늘의 언어와 지상의 언어라는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고유하고 매력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늘의 언어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고백하는 언어와 표현입니다. 지상의 언어란 마찬가지로 이 땅의 현실적인 가치관을 고백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사람의 존재는 그 언어를 통해 양육되고, 성장한다는 말입니다. 이 철학자의 생각을 빌어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늘의 언어인 성경말씀의 가치관이 우리의 존재를 지키고, 양육하고, 성장하도록 보호하는 집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언어, 하늘의 언어로 지어진 집에서 살아야 거듭난 자로서의 건강한 성장을 해 나아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수도 없이 많은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특히 시편 119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필수적인지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시 119:160)
단지 시편의 기록만이 아니라, 성경은 수시로 이보다 더 많은 구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어인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중요한 일인지를 남겨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중언어의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유일한 사명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영혼의 언어와 육신의 언어라는 이중언어의 환경에 서 있습니다. 열심히 배워서 두 언어에 모두 실력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그런 의식이 없이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영혼과 육신의 이중언어를 배우고 활용하는 일에 모두 동참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상의 언어를 알고, 하늘의 언어를 알고 있는 우리가 아직 하늘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도 육신의 언어로만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자신의 욕구를 해갈해 보려는 시도를 이제 제어할 때입니다. 바울이 헬레니즘 문화와 정신의 말인 헬라어를 말하고, 히브리인의 말인 아람어를 말할 수 있었듯이 우리의 언어가 지상의 언어이면서 또한 동시에 하늘의 언어이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정해지는 상황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단지 말을 지혜롭게 잘 하는 것도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그 말을 말씀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리의 사명이 증거하는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지상의 언어를 잘 하는 것만큼, 하늘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헬라어와 히브리말을 적절한 때에 사용하여 소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늘의 언어를 성경을 통해 배우고, 내가 말할 수 있는 지상의 언어로 이웃과 소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그 깊이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찬양합니다. 이번 주간도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아름다운 흔적들을 발견하고 바라보며, 넉넉하고 여유로운 감사의 고백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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