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폭기념관에서 본 의학박사 나가이 다카시(永井 隆)씨 -
1978년 8월 히로시마마루(宏島丸)에서 하선(下船), 4개월간의 정신없는 휴가를 보내고 그 이듬해인 1979년 1월 다시 맡은 것이 일본의 大日海運(다이니찌카이운)의 냉장선인 Royal Lily 호였다. 총톤수 7,200여 톤에다 최고 선속이 군함(軍艦)과 맞먹는 23노트인 신조선(新造船)이었다.
일본 큐슈의 남쪽 나가사키(長崎) 항(港)에 있는 하야시가네(林兼)조선소가 처음으로 만든 것이었다. 전년도 히로시마마루(宏島丸)에서의 실적이 완벽하게 인정받은 결과이다. 신조선을 직접 인수하여 바로 처녀출항을 하게 된 것이다.
1979년 1월 20일(토) 오전에 부산 김해공항을 출발, 그날 저녁 9시에 조선소(造船所) 숙소에 도착했다. 그 순간부터 전쟁(?)이었다. 신조선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집만 지어 주고는 “네가 다 해라” 하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그것도 정해진 날짜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출항해야 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오줌 누고 뭐 볼” 짬도 없었다.
무엇보다 다행한 일은 그동안 독학(獨學)으로 익힌 일본어가 그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 선주(船主)측과 조선소(造船所)측에서도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덕분에 업무의 추진에 빈틈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선주측에서는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들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다고…. 선주측 현장 감독이 솔직히 사전에 나에 대한 조사가 있었음을 실토했다.
호떡집에 불난 듯한 열흘간의 경황 속에서도 무사히 마치고 1979년 2월 1일(목) 인수(引受) · 인계(引繼)식을 거행했다. 일본 국기를 내리고 새로운 선적국(船籍國)인 Panama 국기를 파나마 영사(領事)가 직접 게양함으로서, 국적(國籍)도 일본에서 “Panama”로, 사명(社名)도 大日海運(다이니찌카이운)에서 “Ocean carries. Co.” 바뀌었다. 조선소측 여직원이 선장과 기관장에게 꽃다발 증정을 마지막으로 밧줄을 걷고 출항해야 했다.
짓눈깨비가 날리는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부두를 떠나면서 유창한(?) 일본말로 그 동안 본선을 건조하면서 수고 많았다는 인사말을 확성기를 통해 날리자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환송이 터져나왔다. 이를 뒤로 하면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 플로리다, F. Pierce항까지의 장장 20여 일간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후에 한국측 맨닝회사 사장님에게 이 일본어 인사가 선주를 비롯한 조선소측과 작업에 임했던 많은 직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들었다)
그 와중인 1월 28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갖은 휴일날, 조선소측의 선의(善意)로 나가사키(長崎) 시내 일일관광이 주어졌다. 계절이 그런 때인지라 비가 찔끔거리는 속에서 일본인 특유의, 당장에 목이라도 껴안아 줄듯한 애교가 담긴 여(女)가이드를 따라 돌아본 나가사키시(長崎市) 가운데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것은 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처음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기에 원폭기념관과 세계를 울린 푸치니 작곡의 오페라 “나비부인”으로 유명해진,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글로버가든이었다. 일본어로는 구라바엔(Glover Garden)으로 나가사키 관광의 명소다. 스코틀랜드 출신 무역상 토머스 B. 글로버(Thomas Blake Glover)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이 밖에도 나가사키항 인근에는 우리와 관계 깊은 곳도 있었다. 한때 한국에서 건너간 밀항자를 수용한 오오무라(大村) 수용소, 우리나라 사람들의 강제노동현장으로 지금도 TV에 가끔씩 나오는 이름난 군함도(軍艦島), 이 섬은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km 떨어져 있는데 한때는 해저탄광으로 번창, 도오쿄오(東京)보다 인구밀도가 높을 정도였으나 1974년도에 폐광되어 지금은 거의 무인도(無人島)로 남아있다. 원명(原名)은 하시마(瑞島)이다.
또 450여 년 전 세계 대항해시대 중 폴르트칼 사람들이 처음으로 상륙할 때 전해졌다는 카스테라. 그때 설립하여 긴 역사를 가진 카스테라 원조(元祖) 회사가 지금도 만들어 내고 있어 나가사키의 명물이 되고 있다.
그중 원폭기념관에서 본, 자신이 암 환자에다 같은 원자탄의 피폭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을 구해준, 나가사키(長崎)의과대학 교수이자 의학박사인 나가이 다카시(永井 隆) 씨의 헌신적 사연을 인상 깊게 보았기에 그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이기는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의사로서 그가 사랑한 평화와 인류애(人類愛)의 실천이 일본사람이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세계 제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宏島)에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시민 20만 이상의 사상자(死傷者)를 냈다. 그리고 바로 3일 뒤에 나가사키(長崎)에 두 번째 원폭이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날라감과 동시에 약 15만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이 미국에 항복함으로 세계 제2차대전이 막을 내렸고, 우리나라도 광복을 되찾았다.
실은 두 번째 원폭 투하지점은 좀 더 위쪽인, 키타큐우슈 (北九州)시(1940년에 내가 태어난 곳)의 고꾸라(小倉)가 예정이었으나 전날 떨어뜨린 폭탄의 구름탓으로 하늘이 흐려 아래가 보이지 않아 미군 B29 폭격기는 나가사키(長崎)로 내려가 투하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1945년 8월 9일 11시 02분이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폭심지(爆心地)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있던 浦上(우라카미) 천주교회와 永井 隆(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재직 중이던 나가사키 의과대학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은 물론이다.
나가이 다카시(永井 隆) 박사는 1908년 일본 시마네현(島根)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전기도 수도도 없는 먼 시골로 이사를 했다. 당시엔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라 병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부친과 모친이 밤마다 등불을 켜놓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의학을 연구하는 것을 이불 밑에서 보면서 자란 그는 그때 후에 자신도 의사가 되어 병든 사람을 도와주자는 생각을 굳혔다고 했다. 어릴 적에 공부를 잘 한 탓에 주위 사람들은 그가 후에 일본 제일의 도오쿄도대학(東京大學)에 갈 줄 알았는데, 나가사키(長崎) 의과대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7년 후 바로 이곳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고 시작은 일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운동은 잘하지 못했지만 몸집이 커서 농구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대학 부근에 있던 우라카미(浦上) 천추교회 근처의 모리야마(森山)씨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 집은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도 천주교(天主敎)의 독실한 신자(信者) 집안이었다.
1932년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를 정해야 했는데, 어릴 때 감기로 인한 심한 질병을 앓은 후 청력(聽力)이 크게 떨어져 잘 들을 수가 없어 의사로서 청진기를 사용할 수 없어 방사선(放射線)의학과를 선택을 했다.
1933년 중일(中日)전쟁 중에 그는 입대하여 중국에 파견되어 군의관의 보조역할을 했다. 이때 하숙집 모리야마(森山)씨의 딸인 미도리(緑) 양으로부터 소포가 왔는데 ’성서(聖書)‘였다. 평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때는 진지하게 읽고 결국 그도 독실한 천주교인이 되었고 미도리(緑) 양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1937년에 다카시(隆)는 정식 군의관(軍醫官)으로 다시 중국에 파견됐다. 그는 일본 병사뿐 아니라 중국 군인과 시민들에게도 똑같이 치료를 해주었기에 많은 현지 중국사람들이 몰려와 1939년은 한 해 4천 명의 중국인을 도와주었다. 1940년에 귀국한 다카시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조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의 그는 대학교수로서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사람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상냥한 사람으로 대학 주변 사람들에게서 ‘아버지 같다’는 평판을 얻었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44년에는 그는 의학박사가 되었지만 일은 더욱 바빠졌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연이어 전쟁터로 끌려 가버려 인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당시에 유행했던 폐결핵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결핵검사를 위해서는 매일 X레이검사를 해야 했지만 전쟁 중이라 각종 물자의 결핍으로 필름이 없어 다카시는 직접 기계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봐야 했다. 이러자면 많은 X레이 선을 몸에 쬐게 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환자를 구하기 위해 계속했다.
매일 매일 일에 쫓겨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은 이미 자고 있었다. 때로는 과로로 쓰러지는 일도 있었지만 아내인 미도리(緑)씨가 잘 보살펴 주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족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거라고 다카시는 가정의 귀중함을 깊이 느꼈다. 1945년 6월 다카시는 결국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명은 백혈병(혈액암)으로 역시 방사선이 원인이었다. “앞으로 3년밖에 살 수 없다.”고 의사가 말했을 때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