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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통화 운동: 진정한 나눔을 위한 대안적 경제 시스템
이 원 규 / 미내사클럽 사무국장
1. 무한히 열려 있는 체계로서의 지역 통화
지역 통화가 상징하는 '나눔과 풍요의 녹색 경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진정한 나눔이란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한글에 대해 깊은 조예를 가진 어느 분은 우리말을 풀 때 단어의 어근이 되는 각각의 음에 ‘ㅎ’을 붙여 해석하곤 합니다. 그렇게 보면 '나누다'의 말 뿌리는 '낳다'와 '눟다(누다)'가 되겠지요. '낳다'란 새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그리고 '누다'란 배설이며, 이 몸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나눔이란 서로가 누는 것을 통해 서로를 낳는(相生) 관계에서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면 식물이 배설하는(누는) 산소는 인간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한 에너지원이 되고, 인간이 배설하는 이산화탄소는 식물의 에너지원이 됩니다. 즉 내가 '누'는 것이 너에게는 '낳'는 원동력이 되고, 네가 '누'는 것이 나에게는 '낳'는 원동력이 되는 관계,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나눔의 관계라고 보여집니다. 일방적인 나눔은 잘라냄이며, 고갈을 의미합니다.
'낳다'는 생산적입니다. 태어나게 하고, 새롭게 하고, 무질서에서 질서로 옮아감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에너지원이며, 생동감과 활력을 줍니다. 반면 ‘누다’는 배설의 의미입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배설이란 내가 사용하고 남은 것, 더 이상 내게 쓸모 없는 것, 버려지는 것 등을 뜻합니다. 그러나 버려진다는 것은 '나'를 위주로 생각했을 때만 그렇습니다. 전체를 볼 때 버려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진정한 풍요의 개념이 나옵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한 순환을 뜻하며, 무엇이든 늘 새롭게 다른 부분에서 쓰여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연이야말로 늘 그러하며, 여기에서 우주는 원래 풍요롭다는 관점이 나옵니다. 나 위주의 관점이 아니라 '너' 즉 상대방을 함께 고려하여 상호 교환을 이루는 체계이지요. 그래서 인간과 식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상생의 관계가 됩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상대의 엔트로피가 내게는 역엔트로피가 됩니다. 즉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하는 운동이 되는 것이지요. 과학은 우주가 질서에서 무질서로만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하지요. 엔트로피란 더 이상 쓸모 없어져 버려지는 것이 있다는 말을 어렵게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법칙은 인간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 아닐까요? 물이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위치 에너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물이 떨어지면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는 에너지가 있으므로 위에 있을 때는 질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떨어진 물은 더 이상 위치 에너지를 이용할 수 없으므로 쓸모 없는 무질서 상태로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래와 같은 모든 바다 생물의 입장에서는 높은 곳에 있는 물은 쓸모 없지만 모두 떨어져 바다로 모여들면 이용할 수 있는 물이 됩니다. 태평양 고래대학에서는 떨어져 내린 물이 질서 상태이고, 증발하여 다시 산으로 간 물은 무질서 상태로 간 것이라고 가르칠지도 모르지요. 우주는 무한 순환하는 열린 체계인 것입니다. 이렇듯 지역 통화는 결코 쓸모 없는 사회 구성원은 없으며, 모두가 유효하다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지역 통화는 무한히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
2. 지역 통화란 무엇인가?
한 지역 혹은 한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돈을 의미하는 지역 통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작게는 몇몇 사람이, 크게는 주식 회사 정도의 규모로 자신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발행해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체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역 통화에 있어서 각 개인은 기존 화폐와 달리 거래 상대자가 신뢰하는 한 얼마든지 돈을 스스로 발행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을 발행한다고 해서 개인마다 조폐 공사를 보유하고 있어 돈을 찍어낸다는 것은 아니고, 가입자가 등록소에 계좌를 얻어 역시 계좌를 가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일정량의 서비스를 받고 지역 통화를 그의 계좌에 넣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상대의 계좌에 들어간 만큼의 돈이 자신의 계좌에서 빠져나갑니다. 처음 회원이 되어 지역 통화가 없는 사람도 상품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데, 이 때 그의 계좌에는 서비스 받은 만큼의 마이너스(-) 잔액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계좌에 잔액이 없거나 마이너스인 사람에게 무엇을 믿고 상품을 팔거나 서비스를 해주겠습니까?
회원들 모두가 지역 통화로 서비스를 주고받겠다는 동의를 하고 등록하므로 초기에는 지역 통화가 없이도 서비스를 받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거래가 늘어감에 따라 개인적인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동안 이루어진 그 사람의 거래의 신뢰도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마이너스 잔액인 사람이라도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면 서비스를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거래 내역에서 신뢰도가 낮은 사람은 작은 마이너스 잔액만 있어도 서비스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체계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한 개인의 모든 거래 내역이 회원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지 공개된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 그의 신뢰도가 평가됩니다. 거래 내역서에 주고받은 기록이 많은 이는 신뢰도도 높고 그의 서비스 질도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비스의 질이 낮다면 아무도 그의 서비스를 다시 신청하지 않을 테니까요. 모든 거래는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상대의 신뢰를 평가할 수 있는 거래 내역의 정확한 기록과 공개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계좌에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이자가 전혀 붙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자가 붙지 않는 돈이므로 써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받게 되고 자꾸 씀으로써 거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이너스(-) 잔액이 아무리 많아도 이자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빚을 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지역 사회인에게 더 많이 제공해야 함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 다음, 이 돈은 등록소의 컴퓨터 내에 기록되어 있는 숫자이기 때문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가지고 지역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남아 있는 계정의 플러스(+) 잔액은 지역의 누군가가 많은 서비스를 제공했거나 상품을 제공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지역 통화는 그 지역 내의 경제 활성화에만 이바지할 수 있을 뿐 유출되어 지역 경제를 망치지는 못합니다. 물론 이것이 지역간 거래를 막을 수도 있지만 이는 각 지역별 시스템 간의 통화 교환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역 통화를 사용해 얻는 이익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첫째 현금의 부족을 느끼지 않습니다. 언제나 발행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둘째, 이자가 붙지 않으므로 은행돈을 빌리는 것보다 비용을 절감하게 됩니다. 또 플러스(+) 계정을 저축해 봐야 아무런 이윤이 생기지 않으므로 비축하기보다는 사용할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이는 결국 지역 내의 교역 활성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환경을 보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지역 통화는 이제 개인들 간의 기술 제공과 물물 교환의 차원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즉 비즈니스가 가능한 것입니다. 건전한 경제의 한 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지역통화 운동의 회원 사례
배주희 씨와 주은경 씨는 모두 주부입니다. 동시에 2002년 월드컵 통역 봉사 요원이며 영어와 일어학원 강사입니다. 이 분들이 처음 fm(미내사 지역 통화)에 가입했을 때의 동기를 들어보면 앞으로 fm 시스템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가 분명해 집니다. 이들은 뭔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그저 그것이 좋아서 가입했습니다. 배주희 씨는 미국에서 6여 년을 거주하고 돌아와 현재 모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주부입니다. 강사료는 교통비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뭔가를 하기 위해 그 일을 합니다. 주은경 씨는 일본 산케이신문에서 5년간 근무한 일본통입니다. 현재는 이제 막 아이를 가진 주부여서 적극적 활동을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경찰청 일본어 통역관이며 월드컵 통역 자원 봉사자이고 일본어 학원 강사입니다. 이 분들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가입한 것입니다.
시스템 회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 사이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주는 의무로서가 아니라 재미와 즐거움으로 서비스를 해주는 선물을 주는 사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스템이 움직이는 경제 활동을 우리는 '선물 경제'라 이름한 바 있습니다.
4. 생태 화폐로서의 지역 통화
녹색 돈, 녹색 금, 녹색의 잔디 위를 구르는 돈 등 지역 통화를 일컫는 많은 표현 속에는 ‘녹색’이란 말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녹색이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인 환경 보전에 대한 것은 잊혀진 듯합니다. 미국 이타카 지역의 지역 통화인 아워(HOUR)를 연구하는 진 캘리는 지역 통화가 왜 생태를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통화 체계인지를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이타카 머니(HOURS)는 지역 내에서 생산된 상품의 그 지역 내에서의 판매를 촉진한다. 따라서 이 상품들은 멀리 운송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운송으로 생기는 공기 오염을 줄인다. 또한 식품의 경우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방부제를 칠 필요가 없다.
2. 이타카 머니는 지역 내에서 사용되고 재투자되므로 자신이 사용하는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즉 환경을 보전하고 유지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자신이 의도적으로 선택하기가 쉽다(즉 상품들이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져 오므로, 유기 농산물과 같이 환경 보전과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생산자의 상품을 주로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이타카 머니는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직거래 방식을 구축한다. 당신이 먹을 음식을 재배하고, 집의 건축에 쓰일 재료를 만드는 사람을 직접 안다면 그의 환경 기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4. 만일 우리의 부(富)가 지역에 남아 산업을 활성화시키면 지역 사회는 좀더 자급자족이 된다. 그것을 통해 우리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며 경제 패턴을 변화시켜 안정성을 유지시킬 가능성이 생긴다."
진 캘리의 말처럼 환경에 미치는 지역 통화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익명성을 벗고 서로 알고 지낼 수 있는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역 통화는 서로 알고 지내기 운동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5. 국내 지역 통화 운동의 전개 과정과 현황
1983년 캐나다의 마이클 린튼이라는 사람이 시작한 이 시스템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1600개 이상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환경 활동가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영국에서 가장 널리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1996년 『녹색평론』이 간간이 소개한 적이 있고, 1997년 12월 미내사(미래를내다보는사람들)클럽이 『지금여기』라는 회원지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이 지역 통화 운동을 소개했습니다. 이 때 구체적인 지역 통화 운동을 소개하고 나서 참으로 좋은 체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남과 나누는 체계, 받기보다는 주기에 초점이 맞춰진 체계, 그래서 미내사 회원들 위주로 (1998년) 3월부터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내게 남는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남을 돕기, 내가 가진 재능과 기술을 이용해 타인에게 도움 주기, 그러면서도 내가 즐거운 일을 하기에 스스로도 기쁜 일, 서비스를 받은 사람은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됨. 이것이 fm 시스템 가입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여기』에 몇 번 기사가 소개되고 회원들이 서서히 거래를 시작하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분은그것 참 재미있군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또 몇몇 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일종의 경제 시스템인 이 체계를 통해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것 참 재미있다라는 반응으로 거래가 활성화하고 몇몇 사회 활동가들의 마음을 부추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것은 참으로 가치 있고 신나는 일이라는 생각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4월 20일, 새로운 천 년의 준비를 위한 밀레니엄 대학을 열고 있는 새문명아카데미에서 국내 최초로 미내사 fm 시스템을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세계의 미래 화폐 개발 현황과 한국의 실험 사례’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날 강연장에는 우리 고대의 시장 경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해 온 좌계 선생, 연대 매체란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고안하고 그 실행을 위해 고심해오고 있던 송희식 변호사,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 체계라며 열성을 보인 한국불교환경교육원의 유정길 사무국장 등 많은 분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한국은행에 계신 분, 모 사회 단체에 계신 분 등 몇몇 분들이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이 분들의 신선한 열정에 가리워지고 말았습니다. 그후 얼마가 지난 6월 14일 종로 가회동 미내사 사무실에서 지역 통화 설명회를 가졌습니다. 유정길 사무국장의 적극적인 홍보로 이날 모임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특히 삼성지구환경연구소의 황진택 박사,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이창우 박사, 한국소비자보호연구원의 이득연 박사 등 여러 연구자들과, 그 외에도 한국도시연구소, 녹색연합, 녹색교통운동, 유네스코(한국위원회), YMCA 녹색가게 등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이 참석하여 물줄기의 흐름에 조화가 더했습니다.
같은 해 6월 15일은 한국에서 지역 통화가 다시 태어나는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전날 모임에 참석한 분의 귀띔으로 이 정보를 알게 된 조선일보에서 미내사 fm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후 2주일 동안 fm 시스템 가입 문의와 시스템 구축 문의가 쇄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입한 인원이 100여 명이었습니다. 6월 17일부터 지역 통화는 국내의 많은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재 회원은 모두 500여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불교환경교육원의 유정길 사무국장, 인천정보통신센터의 강형원 국장, 구리YMCA의 정석구 총무, 대구 전지역 로타리클럽의 박명환 대표, 청년정보문화센터의 정성원 사무국장 등 지역 통화의 새로운 중심 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천정보통신센터가 구축한 시스템은 인하대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대구 중구청에서는 ‘경제활성화센터’라는 이름으로 지역 통화를 시작했습니다.
또 한 가지 놀랍고도 당연한 사실은 정부 부처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행정자치부에서 자료를 받아갔고, 서울 서초구청과 경남 창원시청에서 자료를 요청했으며, 원주 한살림운동본부와 양천의 생협 운동본부, 참여연대와 심지어는 모 군부대에서 사병들을 대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요청도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행정자치부에서는 올해 재정적 지원까지 하게 되었으며, 서초구청에서는 직접 시스템을 구축했고, 송파구에서는 송파자원봉사센터가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시스템이 획일적으로 구성되고 일정한 모습을 띠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좋은 예가 동작구청의 자원봉사은행입니다. 동작구청에서는 구내의 6개 사회복지관에 컴퓨터를 설치하여 계정을 온라인화하고, 참여자 개개인에게 통장을 지급하여 기존의 화폐와 흡사한, 그러면서도 지역 통화의 특징을 그대로 닮은 시스템을 시작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또 한 곳 녹색연합의 월간지 『작은것이아름답다』팀에서 ‘작아장터’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곳들이 모두 거래에 있어서 화폐라는 개념을 넣어서 움직인다면, 작아장터는 교환과 거래에 있어서 아예 화폐라는 매개체를 없애버린 시스템입니다. 여기서는 대가 없이 A에게 물건을 주고, 대가 없이 B에게 서비스를 받습니다. 즉 회원으로 가입하면 ‘작아장터’라는 8페이지 분량의 소식지를 받게 되는데, 회원들은 이 곳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과 받고 싶은 목록을 기록하여 서로간 주고받음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화폐의 개념은 없지만 그 이상과 취지는 지역 통화 시스템과 같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1999년에 20여 개 시스템이 구축되어 활동에 들어갔고, 올해 들어서는 더욱 다양한 공공 단체와 시민 단체에서 시스템 구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관악주민연대와 청주시청, 안양시청, 양천구청, 평택참여자치시민연대, 성남시민연대, 군산품앗이, 군산노동자의집, 천안YMCA, 대구 날뫼터, 강원도 로터리클럽, 영강교회, 인하대 생협연대, 아산YMCA, 춘천YMCA, 충북 농촌선교훈련원, 열린사회시민연합, 전주 근로자선교상담소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단체와 기관들이 시스템을 이미 구축했거나 구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6. 국내 지역 통화 운동의 평가
시스템 구축을 문의해오는 곳을 살펴보면 크게 네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 공공 기관입니다. 이들은 1998년 초 한국 경제에 IMF 구제 금융이라는 위기가 닥쳐오고 실업자들이 늘어날 때 경제 활성화와 실업자 구제를 그 첫째 목적으로 지역 통화제를 시도한 곳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공공 기관들이 시작은 좋았으나 그 결과가 눈에 띄게 크지 않자 점차 포기하거나 손을 떼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윗사람이 시도할 것을 지시하고 아랫사람이 실천해야 하는 데서 생기는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신념을 가지고 시작한 이가 끝까지 지속해나갈 수 있을 때 지역 통화는 자리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시도해보려는 청주시청과 같은 공공 기관들도 있습니다.
둘째, 시민 단체들입니다. 시민 단체에서 일하는 분들의 대다수가 사회 정의와 인간 평등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경제 활성화의 도구로 보기보다는 공동체 운동과 생명 살리기, 환경 보전의 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단체들이 열악한 재정 기반으로 인해 실질적인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셋째, 종교 단체들입니다. 많은 기독교 단체들과 몇몇 가톨릭, 불교 단체에서 시스템 구축을 문의하고 시도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선(善)을 기반으로 서로 돕는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며 시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형상 관의 지도 하에 있지만 뜻있는 단체장을 둔 시민 단체들입니다. 송파자원봉사센터나 중앙대 사회복지관 등은 재정적 지원의 여러 부문을 관이나 후원 단체에서 받고 사회 복지에 뜻을 둔 단체장이 의지를 갖고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이들은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미 구축된 지역 통화 시스템들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총괄적으로 볼 때 지역 통화 시스템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는 회원들의 거래가 그리 활발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먼저 신뢰의 기반이 구축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아직 시스템을 통해 의식주가 해결되지 못하며, 거래액이 커질 경우 세무상 문제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적극적인 시도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한 예로 올해 10월에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fm 회원 한 분은 지역 통화 회원들의 서비스를 통해 여러 준비물들을 해결하고자 시도했습니다. 한복에서부터 폐백 음식, 드레스, 비디오 촬영, 가구 준비 등이 그 목록들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스템과 시스템 간의 연계도 고려해 보았습니다. 즉 미내사 fm에 없는 서비스가 송파 SM에는 있으니 우리 회원이 송파 SM의 서비스를 받도록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시스템 운영진이 상대방의 지역 통화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도를 통해 시스템 간의 연계라는 새 장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결혼을 준비하는 그 회원은 3, 4가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거리상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는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원이 지역 통화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데는 이 체계가 참으로 뜻있고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식을 하는 회원들이 많아질수록 여러 가지 문제들은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7. 향후 전망과 과제
영국의 지역 통화 발전 단계를 보면 1985년 처음 소개되기 시작하였으나 92년에 이르러서야 5개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92년 말에는 40개에 이르렀습니다. 신뢰 기반이 마련된 이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하여 94년 275개, 96년 350개에서 현재 전국에 600여 개 이상의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한국에 이 시스템이 소개된 지도 2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더욱 그 가능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1년여 기간 동안 기존의 시스템들이 얼마나 견실하게 활동하느냐에 따라 국내에서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면, 자기 지역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크기에 관계없이 협조 체계의 하나로서 구축을 생각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한 예로 이미 생기기 시작한 학습을 위한 교육 통화나 옷 교환 시스템, 아파트 한 동에서 아이 돌보기 시스템을 구축한다든가, 서울과 지방간 출장이나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끼리 숙박 교환 시스템을 만드는 등, 각각의 자주 사용될만한 시스템을 만들어 도움을 주고받는다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정과 감사를 느끼게 되어 좀더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큰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원규: 1962년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생태, 환경, 뉴에너지, 신과학, 의식 개발 관련 해외 첨단 정보를 국내에 전하는 미내사클럽 사무국장, 미내사 정보지인 격월간지 『지금여기』 발행 겸 편집인, 히어나우시스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