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4월 9일 부활주일예배 설교내용 – 부활의 소망, 그리고 나. / 復活の希望、そして自分。
본문; 골로새서 3장 1절~4절
골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1. さて、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と共に復活させられたのですから、上にあるものを求めなさい。そこでは、キリストが神の右の座に着いておられます。2. 上にあるものに心を留め、地上のものに心を引か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3. あなたがたは死んだのであって、あなたがたの命は、キリストと共に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のです。4. あなたがたの命である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と共に栄光に包まれて現れるでしょう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오늘은 기쁘고 기쁜 부활절입니다. 물론 다른 대형교회들과 같은 부활절칸타타 같은 큰 행사도 없고 해서 피부에는 확 와 닿지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받으시는 예배인 것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는데요. 그 첫째는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육체가 부활하셨던 것을 기억하는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래의 소망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육체로 부활하게 하셨던 그대로 우리도 육체로 부활시키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현재의 우리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 영생을 사는 사람으로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에 눈을 뜨고 감사와 찬양으로 지키는 절기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과거의 부활하신 증거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고, 미래에 약속된 부활의 예언은 바울의 서신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약속을 듣고 부활의 소망이 나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고, 찾아내고, 체감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살려 주심을 받았다는 약속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누리는 약속과 소망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과 2절의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삶의 우선순위가 세속적인 인생과는 다르게 세워집니다.
만일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또한 주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은 것이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위의 것,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여전히 내가 위의 것이 아닌, 이 땅의 유행이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 육신의 것을 추구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만 나의 모든 관심사가 쏠려 있다면 나는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물론 완벽하게 신비로운 체험으로, 뭔가 들뜬 상태에서 육신을 벗어난 영적으로만(소위 이슬만 먹고 사는 신선처럼?) 살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육신의 삶을 벗어나서 생활할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순조로운 육신의 삶과 복된 인생을 사는 것을 축복 중의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은 땅의 것이나, 육신의 욕심, 욕망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성령의 인격을 추구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했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선을 베풀었는지… 내가 교회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는지… 내가 얼마나 표면적으로 교회생활에 성실했는지를 수치적으로 계산하듯이 헤아리며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하나님의 마음, 예수의 가르침, 성령의 인격을 향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무엇에 매여 혹은, 사로잡혀 살고 있나요?
내게 주어진 시간, 내게 주어진 물질(재정), 내게 주어진 인간관계, 내게 주어진 삶의 영향력을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활용하면서 쓰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사명인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인격을 본받기 위해 성령의 충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위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 그리고 권한 등이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의 가르침과 성령의 인격을 받아 들이는데 활용하고 사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위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땅에 있는 것들입니다. 땅에 있는 것의 실제 예는 5절부터 9절 사이에 잘 나와 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5절~9절 읽기)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땅에 있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게 되어 있는 것들의 대부분이 속해 있습니다. 특히나 탐욕은 곧 우상숭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 또 내게 필요하지 않으면서 소유라는 이름으로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 이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계속해서 쌓아 두기만 하고 흘려 보내거나, 주님 뜻을 위해서 활용하지 않는 것이 탐욕입니다. 육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류는 이 탐욕으로 인하여 정작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증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은 땅에 속한, 육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저 겉으로 드러난 표현에 불과합니다. 우리 속담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있지요. 겉만 번지르르해 봐야 실속이 없다는 뜻이지요. 우리 육체의 인생과 땅에 속한 인생이 거의 모두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꼭 읽어 보십시오.
그렇다고 우리의 육신적인 삶이 전혀 무용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육신의 삶이 하나님께 붙들려있지 않다면 허무하게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42, 53)
썩어 없어질 육신의 것을 심더라도 썩지 않을 영생,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심을 때 그 썩을 육신의 것도 우리 영생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마 6:19-20)
육신적으로 주어진 재화와 재능과 실력을 영적인 열매로 맺게 하는 방법에 눈뜨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역,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 성령의 영역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육신으로 살기에 먹고 마시는 삶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먹고 마시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부을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 삶이 영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이러한 영생을 살며 주님께서 더하여 주시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길 축복합니다.
3절에는 우리의 존재가치에 대해 선언하기를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고,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는 것은 마치 보화가 감춰진 밭을 산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먼저는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육신이 죽었나요? 아니요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지요.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옛 생활이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에 즐기던 탐욕과 음행, 그리고 더러운 것들과 이기적인 습관들, 시간을 함부로 사용한 것들, 자신의 몸을 학대한 것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성 마카리우스 공동묘지 예화]
어떤 제자가 성 마카리우스에게 물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안에 누워 있는 시체에게 욕을 한바탕 퍼부어 보고 오게나."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마카리우스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마카리우스는 그를 다시 공동묘지로 보냈다.
이번는 욕설 대신 칭찬을 하라고 했다. 그는 또 시키는 대로 했다.
돌아온 그에게 마카리우스가 물었다.
"자네가 욕설을 퍼부어 대니까 시체들이 성을 내던가?"
"아닙니다"
"그럼 칭찬을 하니 그들이 좋아하던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죽은 것은 반응이 없습니다. 내가 나의 옛 생활, 육신의 생활, 탐욕의 생활에서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것들에 반응하지 않고 끌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줄어든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관심이 없으니 매이거나 미혹되거나 혹은 시험에 들어 마음이 요동치지도 않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이전엔 누군가 나를 욕하면 그 모욕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잡니다. 어서 일어나서 더 새롭고 강력한 욕을 퍼 부어주고 와야 속이 시원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자존심이 살아있고, 복수심이 살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러한 땅에 속한 삶이 죽고, 그런 육신의 생활이 죽으면 더 이상 남이 나를 욕하고, 중상하고, 거짓을 말하는 것에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육신의 삶이 죽었기 때문이죠.
거듭나기 이전에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이 생각나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소유욕이 죽었기 때문에 소유에 대한 갈급함과 반응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에 대해 나의 옛 자아와 그 생활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듭나기 이전에 땅에 속한 것을 추구하던 삶이 죽으면 그렇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억지로 노력하거나 몸부림치지 않아도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땅의 삶이, 육신의 삶이, 옛 생활이 죽은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옛 생활이 죽은 삶은 그냥 그렇게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생활이 죽고, 육신의 정욕이 죽으면 그 자리에 생명의 씨앗이 심겨집니다. 육신의 탐욕이 씨앗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남아 내 마음속으로 감춰지듯이 내면화되는 것이지요. 원래 내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그 영적인 생명이 이제야 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위에 속해 있는 것, 영적인 것들과 같은 특징을 갖습니다. 바로 우리의 육신의 눈에 곧바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부활의 약속이 당장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진 우리의 영적인 생명과 그 자라나는 모습도 세속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지 않는 남들과 비교해서 참 답답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요.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성령의 인격을 추구하는 것이 참으로 궁색하고 고생스럽게 느껴질 때도 많아요. 심지어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의 경험도 만나게 되지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삶이 세속적인 관점으로는 매우 불쌍하게 여겨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그러나 우리 육신의 삶이 위의 것을 추구할 때 진짜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압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믿기 때문이지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23)
생명이 있는 밀알이 한 알 심겨서 죽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합니다. 도토리 한 알이 심겨서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서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량의 또 다른 생명의 도토리가 열매 맺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아니, 다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그 생명을 믿습니다. 세속적인 시각과 가치판단만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의 비밀이 우리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 숨겨 두신 그 비밀, 그 열매의 소망을 잃어버리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령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감춰진 그 생명의 비밀은 마침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게 감춰진 그 생명은 그냥 이렇게 감춰져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생명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립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리라고 해서 무작정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 놓고 앉아만 있으라는 것이 아니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기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기회에 따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렇게 살면서 내게 주신 실력과 재력과 은사들을 타인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흔히 종말의 때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하여 말할 때는 미래의 소망으로서만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종말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현재의 우리가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힘을 의지하고 믿는다면 이미 그 생명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성령의 능력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되실 때 우리의 생명이 맺는 열매는 실제가 됩니다. 이렇게 감춰진 생명이 드러날 것을 약속하는 것이 또한 부활의 약속입니다. 부활의 약속과 소망은 이처럼 우리에게 열매 맺을 기회를 줍니다.
부활한다는 것은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부활의 약속을 누리며 종말과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사는 삶이 인생을 살면서도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영생의 약속을 갖고 있으면서 이미 그 열매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고 참으로 행복하게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을 믿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시간이 걸린다는 과제는 남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고, 예약되어 있는, 반드시 열매 맺게 되어 있는 그 부활의 소망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은 단지 기독교의 종교적 명절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우월함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낸 어떤 날 중에 하나도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 거듭난 성도의 진짜 모습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날입니다. 부활로 인한 재림의 소망을 가진 여부로 우리의 믿음은 그 강건함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인 크리스천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새로운 안식일로 지키면서, 예배를 반드시 지키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일성수의 진정한 가치이고,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 주간의 첫날인 주일을 지키는 우리가 이 땅의 시대정신이나 유행보다 위에 속한 것을 우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있었고, 현재 우리의 모습에서 나타날 것이며, 이미 내 삶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의미는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생각하며, 그 열매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믿습니다. 열매를 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삶의 자리를 지켜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