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본질로 비본질을 보는 신앙
2025. 7. 13(주일낮예배) 로마서 14:6
한 선교사님이 큰 교회에 초청받아 설교하게 되었다. 수천명이 모인 교회 강단에 선 선교사님은 제일 먼저 저는 3대지 설교를 하려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에 성도들의 얼굴은 오늘 설교 길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시쿤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선교사님은 첫번째 대지는 지구상에 20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였다. 그러자 교인들은 누가 모르나? 하는 반응으로 설교에 대한 관심을 더 멀리하였다. 그때 선교사님은 이제 두번째 대지입니다 하는 말에 성도들의 눈은 크게 띄여졌다. 그리고 선교사님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왜냐하면 3대지 설교에서 첫번째 대지를 말씀하는데 10초 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가 굉장히 짧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선교사님의 설교에 집중하였을 때 선교사님은 두번째 대지는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 사실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빌어먹을 현실입니다. 이 말에 성도들은 놀람과 분노로 어떻게 목사님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하면서 옆 사람과 수근거리기까지 하였다. 그때 목사님은 이제 세번째 대지를 말씀드리겠다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말한다.
세 번째 대지는 오늘날 크리스찬의 진정한 비극은 20만명의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것보다 빌어먹을 이라는 말 한마디에 더 크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1분이라는 아주 짧은 설교를 하였지만,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것에 집중하고 반응하고 있는가?를 강력하게 전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가? 열왕기하 5장은 나아만 장군이야기가 나온다. 나병에 걸려 있었던 아람이 군대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여자 아이의 말을 듣고 엘리사에게 간다. 그리고 나아만은 엘리사가 명한 대로 요단에 일곱 번 몸을 씻으므로 그의 피부가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한다. 당시 엘리사는 선지학교가 있었고, 그 선지학교에는 가난한 생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아만이 주는 예물은 엘리사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선지학교 건축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아만이 준 예물이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고 선지학교를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아만의 주는 예물을 받지 않았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예물을 받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흙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나아만이 엘리사를 떠나 아람으로 가고 있을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쫓아간다, 그리고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선생님이 요청이라고 하면서 은 한달란트와 옷 두벌을 요구한다. 그러자 나아만은 은 두달란트와 옷 두벌을 게하시에게 준다. 그래서 은 두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은 게하시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엘리사는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영원히 미치게 될 것이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게하시는 나병에 걸리게 되었다.
게하시가 왜 나병에 걸려야 했는가? 게하시가 엘리사의 사환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우리 주인이 나아만의 나병을 고쳤으니 그 수고에 대한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일에 반응한 것이다.
이러한 게하시의 모습이 안타깝지 않는가? 영국의 스로스츠란 죄수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 교도소 생활을 하고, 가죽 채찍으로 50번씩 8차례나 맞았지만, 그의 삶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교도소를 전전하는 스로스츠는 경찰과 교도관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스로스츠가 구세군 숙박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출옥한 후에 구세군 출옥자 보호소에서 18년간 봉사를 하였는데, 그가 변화된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400번의 가죽 채찍이나 40년간의 교도소 생활로도 변화되지 않은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 불과 1-2분만에 변화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변화될 수 없었던 스로스츠가 변화된 것이다.
그런데 나아만도 마찬가지이다. 아람의 군대장관으로 왕이 섬기는 신을 섬겼던 나아만은 나병에서 고침받을 수 없는 자였고, 또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였다. 그런데 나아만은 여자 아이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은 요단에 몸을 일곱 번 담그라는 말에 화를 내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였던 나아만은 깨끗함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게하시는 왜 이것이 안되었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쓸 때 로마교회는 날(절기)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유대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려 하는데, 이방신자들은 주의 날을 지키려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특별한 절기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절기를 지켜야 하나?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날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는 주일만 지키면 되는가? 아니면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음식문제로 갈등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였는데, 문제를 그들이 제단에 바쳐서 섬긴 제물을 시장에서 팔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상숭배한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갈등이 있었다.
여러분 생각에는 우상숭배한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오늘 본문이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몇가지로 설명하는데, 2가지만 살펴보기 바란다.
1. 행위가 아니라, 그 행동의 이유(본질)를 보라(6절).
시인이자 숭실대 교수인 최승호 시인이 쓴 북어, 아마존 수족관, 대설주의보 등의 작품이 수능모의고사에 단골로 출제가 되었다. 그래서 최승호 시인이 그 수능문제를 풀어보았는데, 3문제 중에 한문제도 맞추지 못하였다.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출제위원은 작가의 의도를 자신들이 학문과 상황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정답이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작가도 모르는 작가의 의도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러한 모습이 있지 않는가? 오늘 본문 6절을 읽기 바란다.
(롬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갈등하고, 또 우상숭배한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을 하고 있는 로마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그 행위로 판단하지 말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본질을 보라고 가르친다.
무슨 말인가? 우상숭배한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하여 채식만 하는 성도가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의만 챙기는 외식주의자다 라고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이 왜 고기를 먹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기를 먹는 사람을 향하여 저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는 자들이다고 답을 정하지 말고, 이유를 살펴서 그 사람이 얼마나 주의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경외하는 형제의 나와 다른 신앙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한 형제임을 기억하라(15절)
(롬 14: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음식과 절기 문제로 비판하고 있는 그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한 믿음의 형제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먹는 음식의 문제로 인하여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금하고, 도리어 그 형제가 넘어지지 않도록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절기문제와 음식문제로 갈등을 가지고 있는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이다. 당시 로마교회는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우상숭배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얽매여 서로를 비방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지금 네가 비방하는 그 형제가 누구이며,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를 살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말고, 사랑으로 세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바울의 권면이 성취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은 성찬식을 거행한다. 우리가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성찬을 통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받으면서 ①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와 기쁨을 올려 드려야 한다. 그와 아울러 예수님께서 ②그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교회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하여 서로를 돌아보아 격려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공동체로 세워져 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다름이 있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지금 가진 고민들도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성찬의 떡과 잔을 받으면서 그 다름을 비방의 도구로 삼지 말고,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형제 안에 있는 복음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형제와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갈 수 있는 힘을 얻는 이 떡과 잔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7세기 대주교였던 마르코 안토니오 도미니스는 이런 말을 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이 모든 것에는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