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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배우는 이 시대의 문학 정신
남진원
세상이 각박하다 못해 무서워지는 세상이 되고 있다. 빙하는 자꾸 녹아내리고 ‘묻지 마, 살인’이 일상이 되었다. 이상 기후에다 연일 일어나는 산불은 사람을 공황상태로 만들기에 부족하지 않다.
마음이 바쁘고 어지러운 것은 자신의 안에 깃든 탐욕 때문이다. 탐욕에서 벗어나 범욕(평범한 욕심)의 삶을 산다면 큰 화는 면하고 행복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너는 안 그러냐? 아니, 나도 그렇다. 그렇기에 고전에서 이 시대의 문학 정신을 배우는 단초를 열어보고자 하였다.
프롤로그
누더기 몇 벌
가난에도 맘 편하면 사는 일 다 복이지,
움막 같은 집도 있고 험한 음식에 누더기 몇 벌
일상이 족할 일이지 더 무엇을 바랄 건가.
[1] 친환경적 자연 친화 사상
어떤 스님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땡볕 쬐는 한여름 날에 퍼붓는 빗줄기보다 시원한, 한 소식을 얻는다면야 …. 더 일러 무엇 하리. 그러나 구태여 저녁까지 기다릴 것은 또 무엔가.
김장생은 시조를 들고 지금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십년을 경영하야 초려 한 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을 드릴 데 없으니 둘너 두고 보리라.
- 김장생 ,(甁歌) -
조선 명종 인조 연간의 학자 김장생은 31세에 학행이 뛰어나 벼슬에 천거될 만큼 정직하고 성품이 담백하였다.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로 이름을 드러냈지만, 그 보다 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조에 담긴 사유의 넓이와 깊이다.
옛말에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다’고 하였다. 지금은 진짜 옛말이 되었다. 자고 나면 강산이 변하기 때문이다. 10년은 그 만큼 오랜 세월의 흐름이다.
김장생은 시조의 초장에서, 십년을 경영하여 집 한 채를 짓는다고 하였으니, 그것도 두 간도 아니고 한 간 짜리 초려를 말이다. 가히 선비다운 이야기이다. 일반 목수들은 열흘이나 보름이면 지을 초려를 이 선비는 10년이나 걸리니 그 솜씨와 사유에 수긍이 간다. 지금이야 초려가 아닌 단독집도 며칠이면 뚝딱 지어내는 초 문명의 시대이다.
초려(草廬)는 지붕을 짚이나 풀로 이은 아주 작은 집을 말한다. 중국의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로 모시기 위해 제갈량의 초려를 찾아갔다. 두 번이나 찾아가도 받아주지 않았는데 세 번째 가니 받아주었다. 제갈량은 초려에서 숨어 살다가 뛰쳐나와 세상을 위해 활약하였다. 거기에서 나온 말이 삼고초려(三顧草廬)이다. 그런데 김장생은 초려에서 나온 게 아니라 초려에서 살기 위해 10년이나 집을 짓는 것이다. 초려는 심심산골, 닫힌 세계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닫힌 공간이다. 그는 과연 자유로움에 속박당하기 위하여 초려를 지었던 것인가? 그것이 현실적인 초려이든 마음의 초려이든 말이다.
시조를 읽으면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닫힌 공간이면서 또한 우주를 향해 열려있는 큰 자유의 세상이다. 성큼 중장으로 들어가 보자. 한 간을 둘로 나누어 반 간은 청풍을 들이고 반 간은 명월을 들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그의 심사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강산은 들여놓을 데가 없으니 둘러놓고 그냥 본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멋들어진 모습인가.
‘십년을 경영하야…’의 시조에서 초려를 짓는 본래의 목적은 무엇일까? 노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닫힌 세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에는 비린내가 늘 배어 있다. 정권의 음모와 야욕, 암투에서 벗어나 대 자유의 품에서 노니는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 시사(詩史)에 이처럼 활달한 품격을 지닌 시조를 본 적이 없다. 옛 선비들 중에 몇몇은 간혹 지조가 있다고 해도 술 찌꺼기 같은 위세를 풍기며 정자에서, 혹은 나무 그늘 밑에서 한 잔 술과 여흥을 즐기며 음풍농월을 하는 위인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는 글이겠는가.
김장생의 시조, ‘강산을 들일 데 없어 둘러놓고 보리라’는 시구에서 풍겨오는 그 뱃심과 여유. 달관한 듯 노니는 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낸 무채색의 경전이다.
김장생의 스승은 송익필, 이율곡 등이다. 송익필이나 율곡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지조 있는 선비들이다. 그들의 정신을 배운 김장생은 벼슬보다는 학문과 교육에 더 힘쓴 인물이다. 위의 시조 종장에서 그의 인생에 대한 의도를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강산을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는 그의 생각은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에 닿아있다. 현대사회에서 심각한 환경파괴와 대기오염, 그리고 정치권의 권력 야욕에 대한 정쟁은 사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맑은 바람과 달, 강과 산 등 자연을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김장생의 친환경적인 자연친화 사상은 오늘날 인류 모두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보겠다.
[2] 우리 시대 실천적 지성
하루하루를 분주하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해도 서산마루에 걸린다. 그러나 해놓은 일은 미완의 상태이기가 일쑤이다.
이런 걸 미리 겪은 선인은 주역의 괘중에 맨 마지막의 괘를 화수미재(火水未濟)로 둔 것일까. 불이 물 위에 있으니 물이 따뜻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네 일상이 이렇듯 어긋나 있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미완은 새로운 변화를 항상 내포하고 있으니 이 또한 신바람이 날 일이 아닌가. 성리학의 대가 조식은 그의 시조에서 서산에 해진다 하며 눈물겨워 한 이유가 무엇일까.
三冬에 뵈옷 닙고 岩穴에 눈비 마자
구름 낀 볏 뉘도 쬔 적이 업건마
西山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노라
- 조식 (甁歌) -
삼동에 베옷을 입고 암혈에 눈비를 맞으며 지내는 청빈한 선비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따뜻한 햇볕은 고사하고 구름에 낀 볕살조차 쬐지 못했을망정, 해가 져서 슬퍼한다는, 고요한 슬픔이 담겨있다.
그의 삶은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를 맞는 삶이었다. 삶의 의연함과 기개가 없이는 이리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순히 가난하고 헐벗게 살아가는 거렁뱅이의 삶이 아니라, 절개를 지닌 지사가 살아가는 삶이기에 스스로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를 맞는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초장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면 우리네 인생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겉으로는 부유해 보이고 위세 등등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희비애환이 드러나는 것이다. 단순히 고단한 생활을 노래한다기보다 파란의 삶을 한 줄로 뽑아낸 명 구절이라고 생각된다. 기실, 우리네 인생사,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는 삶이 아니겠는가.
둘째 수에 이르면 고단한 삶이 절정을 이룬다. ‘따뜻한 햇볕을 쬐어도 성이 차지 않을 일인데 하물며 구름에 가린 햇볕조차 쬔 적이 없다고 하였으니 치열하고 극한적인 삶을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한다.
종장의 반전은 이 시조의 매력이다. ‘서산에 해진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햇빛도 못 받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지만 해가 진다고 하니 서글퍼진다는 말은 얼마나 휴머니즘적인가. 미움과 시기, 질투로 얼룩진 세상에서 그래도 미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밝음이 꺼져 가는 데 대한 아픔을 나타낸 남명의 인간적인 신뢰와 믿음은 또 다른 햇빛으로 비춰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으로 삶을 곡진하게 살아가는 면모를 읽고 숙연함마저 느낀다. 남명은 성리학자로 이황과 함께 우뚝한 경지를 이룬 분이다. 그러나 사화(士禍)의 진저리나는 정치판을 이미 어릴 때 체험하였기에 왕의 부름이 수 차례 있었지만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가사 문학의 대가인 정철과는 대조를 이룬다. 송강 정철은 어릴 때 당쟁과 사화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벼슬길에 나아가 정적을 가차 없이 베어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정치가 실패로 돌아간 원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명은 벼슬 자체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가 벼슬에 매달리지 않았음을 꼭 잘한 일이라고만 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평생을 학문에 힘쓰며 후학에게 실천덕목을 전한 조식의 교육자적 위상은 길이 빛날 위대한 스승의 상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끝내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서게 하였고 문하의 많은 제자들을 조정에 출사하게 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였다. 그의 몸가짐이 청정한 가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 남명의 시조에 보면 매우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는 조식의 모습은 한없이 맑은 슬픔을 띠고 있다. 남명의 시조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돌아보았을 때 거기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개와 따뜻함이 스며있다. 인생사 힘겨워도 관심과 배려 사랑이라는 따뜻함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진리를 따른다 해도 어디에서 편안함을 구할 수 있을까.
남명은 정치 참여에 배제 당했지만 서산에 해지니 눈물겨워 한다는 휴머니즘적인 인간성에서 그의 인품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많은 제자들이 구국의 길에 앞장섰음을 보면 우리 시대의 실천적 지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3] 사랑을 껴안은 아름다운 정서
이번에는 미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고자 한다. 광활한 대륙을 자랑하는 중국에도 미인들이 많았지만 한국의 미인들과는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중국의 미인들은 모두 망국의 길로 이끈 주역이었다. 말희는 하나라를 망하게 하고, 달기는 상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포사는 주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고 서시는 오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우리의 경우에는 사랑의 진정성이 심금을 울릴 정도이다.
조선 최고의 지성적인 미인 홍랑이 삼당시인의 한 분인 최경창에게 보낸 시조에는 사랑의 정이 실처럼 감겨 있다. 시조를 통해 연모하는 정을 전했을 뿐인데도 그것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이다.
묏버들 갈아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 창밧긔 심거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 홍랑 (청구영언) -
조선 시대 기녀 홍랑의 작품이다. 실하고 좋은 산 버들의 가지를 골라 꺾어서 님이 계신 곳에 보내니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아 달란다. 혹시 밤에 비가 내려서 심어둔 버드나무 가지에 새 잎이 돋아나거든 자신인 줄로 알아달라는 것이다.
삼당시인, 최경창에 대한 연모의 정을 그린 작품이다. 최경창이 북도평사라는 벼슬을 받고 북쪽 지방인 경성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홍원의 관기였던 홍랑은 따라가서 시중을 들었다. 그때 최경창을 사랑한 홍랑은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자, 쌍성까지 따라가 배웅하였다. 홍랑은 돌아가는 길에 함관령에 이르러 날이 저물고 마침 비가 내렸다. 그때 버들을 보고 최경창에 대한 그리움을 시조로 써서 보냈는데 그 시조가 ‘묏버들…’이란 시조이다. 그 후 최경창이 병으로 죽자, 홍랑은 다른 사내들이 자신을 넘볼까 우려하여 얼굴을 못 쓰게 만들고 그의 무덤을 지키며 일생을 보냈다. 홍랑이 죽자, 최씨 문중에서는 최경창의 무덤 아래에 그녀의 무덤을 썼다고 한다.
한 생을 이어가는 삶에는 누구에게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홍랑은 미천한 기생의 신분이었음에도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랑의 고귀함이 어려 있다. 홍랑의 시조가 가녀린 여인의 속삭임처럼 들려오는 것 같으나 시의 구절마다 스민 뜨겁고 아린 사랑의 정조는 아무나 할 수 없는 비범하고도 연연한 기운이 스며있다. 그러하기에, 홍랑의 사랑은 싱그러움과 약동하는 봄의 활기처럼 날렵하면서도 무게가 있다.
원래 버들은 물이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버들을 보낸다는 것은 사랑의 생명을 흘러 보낸다는 뜻이다. 간절한 마음의 표징을 버들잎으로 대신한 것이다.
고려시대 저 유명한 정지상의 한시 ‘송인(送人)’에서는 봄 초록의 싱그러움 속에 이별의 아픔을 극대화하였다.
雨歇長提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別漏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은 날
임 보내는 남포에는 봄날의 설운 노래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를 것인가?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평양의 대동강 강 언덕에는 푸른 생명감으로 봄빛이 가득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야 하니, 이별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대동강 강물이 마를 라야 마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해마다 연인들의 이별로 강물에 눈물이 더해지기 때문이란다.
허황된 과장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전해오는 것은 그만큼 이별의 정서를 극대화한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홍랑의 시조에서처럼, 슬프고도 이별의 정한이 배어 있는 7언 절구의 한시이다.
홍랑과 정지상은 한 시대를 뛰어넘는 인물이다. 작품 역시 한 사람은 민족 고유의 시조 작품이고 다른 사람은 한시 작품이다. 두 사람의 작품에 흐르는 공통적인 사랑과 한의 정서는 비슷하다. 홍랑은 버들잎을 통해, 정지상은 눈물을 통해 한의 정서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홍랑은 작품에서, 사랑을 껴안은 은근과 끈기의 아름다운 정서가 배어있음을 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희망의 끈을 연결시켜 놓은 점이 정지상의 작품과는 다르다. 정지상은 희망보다는 한을 고조시키는데 더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을 지키는 데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욱 인턴스네스(intenseness)하다고 할 수 있겠다.
[4] 삶에도 의미가 있으니 …
운수라는 말이 있다. 늘 가까이 하던 사람들과의 이별이 아픈 것은 운수가 다했기 때문이다. 만화방창의 봄날이면 화원에는 나비와 벌이 쉼 없이 날아들지만 입추가 지나 입동과 동지에 접어들면 적막과 쓸쓸함이 감돈다. 계절의 운수가 다 했기 때문이다. 금년은 다시 없는 극한의 더위에 온 국민이 몸살을 앓았다. 허나 불과 2주가 지나자 열기는 식고 지금은 언제 그리도 폭염에 시달렸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계절이든 사람이든 떠나가면 모두 그리움으로 남는다. (물론 원수지간이면 아주 시원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아름다운 그리움은 정든 추억을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사이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 겨워하노라.
- 원천석 (청구영언) -
조선 태종 임금의 스승이었던 원천석의 시조이다. 원천석은 고려 임금을 모시던 분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에 은거하였다.
어느 가을날, 원천석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찾아가 보니 화려하던 고려의 왕궁은 간 곳 없고 그 자리에 풀만 우거진 것을 보고 시절의 변화와 왕조의 덧없음을 노래하였다. 원천석이 본 것은 운수였다. 오백 년의 왕조도 운수가 다해 왕궁터엔 풀만 무성하고 목동의 피리소리만 스치고 있는 것이다.
운수(運數)는 소리가 없이 다가와서는 흔적도 없이 가버린다. 적출(寂出) 적멸(寂滅)의 도(道)이다. 삶과 죽음, 가고 오는 것, 기쁨과 슬픔 모두가 운수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 운수에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이다. 애틋한 심사를 달랠 수 없는 것은 운수가 박(薄)하여 그 시절의 모습이 너무 깊이 삶의 뿌리에 박혀 떠나지 않기 때문이고 기쁨이 큰 것은 운수가 대발(大發)했기 때문이다.
도로는 곳곳마다 포장되어 가는 곳 마다 땅의 기운이 죽어가고 여기저기에서는 산업쓰레기가 배출되어 환경오염으로 치닫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또한 문명이란 운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에서 그나마 기쁨이 있다면, 원천석이 고려 궁터를 찾은 것처럼 옛것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무상하게 변해도, 한 번 맺은 인연의 고삐를 놓지 않는 작자의 아름다운 심지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 세월이 변해도 곧은 지조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서도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마음의 뼈에 새기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바람결에 티끌처럼 흘려보낸다.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뼈에 새길 수 있는 사람도 몇이 되지 않는다. 운수 따라 세월이 변하고 운수 따라 사람이 떠나가도 아름다운 사람은 빛과 그림자처럼 남아 그리움을 불러온다.
그래서 그리움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누구나 세월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간다.
산업화되고 인간을 닮은 로봇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과연 사람의 행복 지수는 얼마나 될까. 행복보다는 불행한 운수가 우리 미래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삶에도 의미가 있으니, 자칫 그걸 잊는다면 원천석처럼 우리 역시 눈물겨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 남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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