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두두리(Homo duduri)
2026. 6. 28(주일낮예배, 전교인출석주일) 마가복음 10:46-52
여러분은 요즘 삶에 대한 질문이 있는가? 니체는 시작점이 같아도 질문이 다르면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니체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한다. 한 농부가 2명의 아들에게 각각 밭 한마지기와 은전이 든 주머니를 유산으로 주었다. 큰 아들은 그 돈을 가지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이 돈을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물었다. 그때 사람들은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고, 그 돈을 잘 간직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래서 큰 아들은 밭은 방치하고, 은전을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큰 아들은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달랐다. 둘째아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그리고 은전으로 송아지를 사서 키웠는데,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은 힘들었고, 어떤 날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물을 길어 날라야 할 때도 있었다. 또 전재산인 송아지가 병든 날에는 송아지 외양간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둘째를 향하여 사람들은 괜히 욕심부리다 있는 것도 다 잃어버릴꺼다 라고 하면서 비웃었다. 그러나 동생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힘들고 어려운 길을 계속하여 걸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을 때 형님의 은전은 그대로 항아리에 있었지만, 그것을 살 수 있는 것은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물가가 그만큼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의 송아지는 소 떼를 이루었고, 그의 농장에는 풍성한 열매가 가득하였다. 니체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잃지 않을까만 생각한다. 그런데 부요해진 사람은 무엇을 만들어 낼지를 생각한다. 시작점이 같아도 질문이 다르면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가난은 지갑보다 먼저 정신에서 시작된다.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돈의 부족이 아니라, 두려움에 길들여진 생각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삶에 대하여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3년동안 공생애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갈 때 있었던 사건이다. 그 때 길에 앉아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나사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친다. 그 부분인 마가복음 10장 47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을 따르는 여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그 예수님을 향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간청하였다. 자세히 보기 바란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소원이 없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부르는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하여 간청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왜 여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 부르고, 또 기대와 목적이 없었겠는가? 성경에서 여리고가 제일 먼저 기록된 곳이 민수기 22장이다. 40년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건너편에 장막을 쳤는데, 성경은 요단 건너편 여리고 맞은편이더라(민 22:1)고 기록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을 친 그 장소를 알리기 위하여 대표적인 장소를 말하고 있는데, 그 장소가 여리고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여리고의 입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을 건너 여리고와 싸어서 승리한다. 그때 하나님은 모든 전리품을 여호와의 곳간에 넣으라고 명령하였는데, 아간은 시날 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세겔과 오십세겔 되는 금덩이를 숨겼다. 20세겔의 화폐는 아간이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모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금 50세겔되는 금덩이는 한 집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 집 안에 금 50세겔(153돈, 575g)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당시 여리고 사람들의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간이 시날 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을 감추었는데, 여기서 시날은 두 강사이 라는 의미로 유브라데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말한다. 그런데 그 멀리에서 만들어진 외투를 여리고 주민이 입고 다녔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여리고는 고대로부터 부요한 성읍이었다. 그런데 그 여리고는 예수님 당시에도 부요하였다. 그 성읍에는 무역이 발달하였고, 많은 사람이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여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간청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부르는 것이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친구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조롱 썩인 호칭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디매오이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떻게 바디매오는 기대함을 가지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자와 무리의 차이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해 보았다. 그리고 자료를 찾아보니 무리는 함께 찬양함으로 감격하지만, 어렵고 힘든 순간이 되면 그 감격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제자는 그 감격으로 고난을 이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고 설명한다. 무리는 구경꾼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제자는 성숙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베푸실 때 무리는 구경만 하지만, 제자는 그것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저는 무리와 제자의 차이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대가 없고, 또 예수님이 베푼 은혜를 받아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는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기대와 소망이 있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리인가? 제자인가?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알았던 여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한 어떠한 기대와 소망도 없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 예수로 알았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 2016년에 개봉한 펠레 전설의 탄생이라는 영화가 있다. 1940년 브라질 빈민가에서 자라던 펠레는 축구를 하던 아버지로부터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브라질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징가축구를 배웠다. 공을 발사이에 넣고 뛰기도 하고, 또 공을 높이 찬 후에 가위차기로 골을 넣기도 하는 묘기와 같은 축구를 배우면서 펠레는 선수의 꿈을 키웠다. 그런데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우루과이에 역전패한다. 그때 펠레는 내가 브라질을 위하여 월드컵 우승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월드컵 우승을 꿈꾸게 된 펠레는 산토스 FC 유소년팀에 입단하였지만, 감독이 유럽식 축구를 강요했기 때문에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축구에 대한 자신감은 점점 떨어져 버렸다. 그래서 펠레는 축구를 포기하고 유소년팀에서 도망을 한다. 그때 산토스 FC에 들어가게 해 준 스카우트가 펠레를 만나 다시 돌아가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말해 준다. 그래서 다시 구단으로 돌아간 펠레는 징가축구를 하여서 멋진 골을 넣고, 축구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다. 그리고 브라질은 징가축구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 후 펠레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출전하여 6골을 넣으며 브라질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월드컵 트로피를 3번이나 들어 올린다. 펠레는 그 당시 모두가 무시하던 징가축구로 월드컵을 3회나 들어 올리는 유일한 선수가 된 것이다.
이것이 쉬워 보이는가? 바디매오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또 기대없이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임을 신앙으로 고백한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고백한 바디매오는 잠잠하라는 사람들의 꾸짖음을 듣게 된다. 사람들은 나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동료가 된다. 그런데 나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사람들과 다른 말을 했기 때문에 잠잠하라는 꾸짖음을 듣는 것이다. 그래도 바디매오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같은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8절) 하고 고함을 친다.
저와 여러분이 만약 바디매오였다면 사람들의 꾸짖음에 어떻게 반응하였겠는가?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질러(48절)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다. 그렇게 흔들림 없는 고백으로 예수님을 찾는 바디매오를 예수님은 부르시고,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그때 바디매오는 무엇을 구하였는가? 51절을 읽기 바란다.
(막 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만나주었다. 그래서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었다. 그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한다.
만약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면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바디매오는 거지였기 때문에 평생 구한 것은 한 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한 푼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바디매오는 구걸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자신을 멸시와 천대한 자들에게 벌을 내려 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그들을 멸하여 달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였겠는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한 바디매오는 이제 그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에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았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세상이 자신에게 해 줄 수 없는 보기를 원한다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바디매오를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 라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보게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
그러면 바디매오가 어떻게 눈을 떠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는가? 인공지능이 빠르게 일상을 바꾸는 시대에 제 68회 서울국제도서전이 6월 24일-28일 코엑스에서 열리는데, 그 축제의 주제가 인간선언 호모 두두리이다. AI가 있어서 쉽게 모든 답을 얻을 수 있는 이 시대에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인간이 가져야 하는 질문을 품고 그것을 연구하고 밝히는 일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전은 우리의 신앙에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질문하는 인간이 되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 또 나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 알아갈 때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제 질문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질문이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