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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하는 가난한 학생의 일상은 고독하고 고단합니다. 표도르 도스토엡스키(Dostoevsky)는 죄와 벌에서 그러한 젊은 날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불쌍히 여겨줄 곳이 어디 한 군데라도 있어야 하는 데, 찢어지게 가난한 법대생 라스콜니코프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19세기 유럽의 급격한 경제성장, 극심한 빈부격차, 퇴폐와 문란을 상징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후미진 뒷골목 하숙방에서 흉금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는 유폐에 가까운 삶을 이어 갑니다. 그는 자신을 구할 사상을 골몰하다가 인류 공동의 행복을 저해하는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자신과 같은 불쌍한 서민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게 만드는 버러지 만도 못한 악덕 전당포 노파를 처단한 것입니다. 그에게 이보다 더 적법한 일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대의를 품고 저지른 살인 이후, 그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게 되어 버립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지만, 알 수 없는 우수(憂愁)와 불안이 그를 거세게 짓누릅니다. 대죄를 지은 영혼에 빛은 이내 꺼졌지만, 고뇌는 남아 있던 것입니다. 그가 미처 알지 못한 진실은 양심 있는 자는 자신의 오류를 의식하면 징역과 별개로 괴로움이 벌로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라스콜니코프의 내면에는 두 가지 소리가 있었습니다. 노파가 기생충만도 못하지 않냐며 속삭이던 소리와 그건 정말 아니라고, 아무리 가난한 자들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흡혈귀같이 추잡한 노파라 해도 우리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어떤 존엄한 형상(영역)이 있다고 엄히 꾸짖는 소리였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첫째 소리를 정의를 구현하는 양심의 소리로 알고 따랐지만, 사실은 병든 이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평범하고 현재에 순종하는 고만고만한 부류와 달리, 비범하고 미래의 주인이 될 자신과 같은 창조적 소수에게 법 따위는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고 또 마땅히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차갑게 지시하던 이성의 목소리를 따랐지만, 정작 이성의 차표에는 그가 꿈꾸던 목적지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율법을 버린 이스라엘이 더는 약속의 땅에 갈 데가 없는 지경에 이르자 국외로 추방되어 포로 생활을 하는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신학자 틸리히 (Paul Tillich)는 죄책으로 인한 괴로움이 숨기거나 회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참된 존재와 그가 지으신 만물을 향해 해서는 안 될 어떤 일을 저지르고 나면, 나 자신만의 것으로 느껴지는 죄책의 얘기가 숨겨짐과 드러남의 이중주로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책에서 도망칠 수 없고 그것을 정당한 방식으로 덮어버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과 더불어 혼자입니다. 또 그것은 모든 다른 형태의 외로움 속으로 스며들어 그것들을 심판의 경험으로 만드는 외로움입니다. 하지만 이 외로움은 우리가 스올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고, 새벽 날개를 치면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거기 계시면서 한 순간도 우리를 놔주지 않으시는 분 때문에 떨쳐내지 못하는 외로움이기도 합니다(시 139:8-10).
짐인가, 선물인가?
살인 사건이 벌어진 후 라스콜니코프가 떨쳐내지 못하는 외로움은 그의 마음에 새겨진 양심적인 신적 감각(divine sense)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칼뱅(Jean Calvin)이 언급한 절대자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이 감각은 누군가에게 싱싱한 화초 같을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시들어버린 식물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모든 영혼의 정원에 엄연히 자리하는 양심의 뿌리가 있고, 모든 만물의 극장에 엄연히 자리하는 질서의 뿌리가 있어, 철학은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자연법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라스콜니코프의 영혼에 심긴 양심의 뿌리에서 멈추지 않고, 뿌리가 심긴 대지 아래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뿌리와 맞닿은 땅 아래 깊이 흐르는 수맥에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말하는 영원법이 있습니다. 신의 섭리 아래 있는 모든 것은 영원법에 의해 규제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것에 자연법이 각인됨으로써 그 고유한 작용과 목적에 경향성을 지닙니다. 영원법이 이성적 피조물에 그렇게 분여한 것을 자연법이라 부릅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우리가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적 이성의 빛은 자연법에 속하는 것인데, 이는 신의 빛이 우리에게 각인된 것입니다. 영원법과 자연법의 관계에 대한 아퀴나스의 통찰에 대한 시편 기자의 묵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시 4:6). 라스콜니코프가 몰랐던 것은 살인과 절도를 금하는 법률이 단지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인정법 장치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도덕법과 자연법, 다시 그 너머에 있는 영원법과 신법에 연유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의 날카로운 송곳으로 실정법의 족쇄만 부수면 자유롭게 어디라도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깨뜨리고 나니 어디에도 갈 곳이 없습니다. 아퀴나스의 말처럼 인간의 삶을 제대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인정법과 자연법 외에도 영원법 혹은 신법까지 필요합니다.
우리 눈을 가린 죄의 가림막을 걷어내면, 성경의 율법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만물과 인간이 최고로 행복하게 생명을 누리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가림막 속의 율법 그 자체만 들여다보면, 복잡한 계산서처럼, 무거운 짐짝처럼, 갚아야 할 부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의 규칙이 경기를 누리기 위해 주어진 것처럼, 성경의 율법 역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닐까요? 어떤 스포츠 종목이든 경기를 즐기려면 먼저 경기 규칙을 알아야 합니다. 규칙을 모른다면 도무지 경기를 보는 재미도, 경기를 할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물론 야구나 축구처럼 규칙을 잘 아는 종목이면 다 같이 보는 재미가 있겠지만, 골프, 미식축구, 크리켓처럼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종목이라면, 경기 내내 어색하든지 자루하든지 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규정은 모든 일에 무엇이 좋은 것인지, 마땅한 것인지를 모든 종목을 만드신 마스터 하나님께 여쭈어가며 익히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우주와 만물, 인생과 역사의 근본 바탕을 이루는 법도에는 그야말로 창조자의 존재와 성품, 행동과 기대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경기와 규정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규칙은 경기의 속성만 아니라, 본질까지 연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기라도 모든 이가 규칙을 알고 함께 지켜야 재미나기 마련인 것처럼, 율법은 경주와도 같은 우리네 인생에 번거로움, 권태, 부담이 아닌, 기쁨, 환희, 보람을 가져다 주는 송이꿀과 같은 것입니다. 태양과 행성에 관한 법칙을 모르던 케플러와 그것을 알고 전율하는 천문학자 케플러 (독일의 천문학자로 모든 행성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규명한 케플러의 법칙으로 유명하다. 편집자주)가 우주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원리를 아는 만큼 질서를 알고, 질서를 아는 만큼 내재하는 아름다움까지 체험하기 마련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실정법과 인정법과 도덕법만 알면 깨달음이 반감됩니다. 어떤 선수도 경기의 규칙을 절반만 아는 채로는 기량을 보여주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법을 넘어 영원법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규정을 고스란히 숙지하고, 모든 규칙을 따라 제대로 경기하는 선수들은 소속된 팀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상대팀과도 명승부를 통해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일종의 연합, 일치, 공동의 유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때 규정은 양 팀과 관객이 모두 공동으로 누리는 즐거움을 담아내는 질그릇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마치 윔블던 테니스 결승전이 끝나던 순간, 페더러가 조코비치에게 박수를 보내고, 조코비치도 페더러에게, 또 모든 관객이 두 선수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내던 장면을 통해 명승부를 본 경이로움에 사로잡히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율법 또한 하늘 구장에서 천상의 경기를 펼치시던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상의 에덴 구장에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플레이를 펼치시고자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신을 조정하신 규정에 해당합니다. 맞춤형 규칙(rule)인 셈입니다. 사람들도 충분히 해볼만한 규칙이지요. 법과 규칙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떨쳐내면 좋을 어떤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함께 즐거운 놀이를 해보려면 필요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칼뱅은 율법을 가리켜 공동선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회질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본래 성품과 계획과 의도와 목적이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로마서 7:21을 주석하면서 칼뱅은 율법을 우리 삶이 올바르게 형성되게 하는 의의 규칙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이 호혜적 사랑으로 인간을 초대하시려고 창조 세계에 주신 선물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조정 양식(mode of accommodation)인 율법으로 인간과 하나님 간에 서로 맞추어 살 수 있는 공통 계약이 맺어집니다. 그렇기에 개혁신학자 벌코프 (Louis Berkhof)는 율법과 복음은 양자가 모두 같은 목적을 지니며 두 구성 요소는 각자 모두 은혜의 경륜 안에서 고유한 역할을 맡는다 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구약에는 복음이 없다든지, 적어도 율법 세대를 다루는 구약에는 복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후손의 약속에, 의식법에, 선지자들의 선포에 복음이 있습니다. 구약 전체에 복음의 물결이 면면히 흘러오다가 메시야 예언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합니다. 이와 동시에, 신약에는 율법이 없다거나 신약시대에는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성경에 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가치가 항구적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복음이라는 선물만 아니라 율법이라는 선물로도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율법은 하늘 아버지와 그분의 자녀들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관계, 즉 친밀한 상호성을 바탕으로 자녀의 유익을 위해 주신 사랑의 선물인 까닭입니다. 그 친밀한 관계를 조성하고 놀이를 가꾸며 만남을 깊게 하려면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기의 처음에 다소 복잡하게 보이는 규정처럼 율법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어느 규정이든지 거기에는 경기 전체를 공정하게 배려하려는 오묘한 섭리가 깔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진아웃이라는 규정도 벤치신세로 우리를 묶어두려는 의도가 아니라, 볼카운트 하면서 안타도 쳐보고 홈런도 쳐보라고 주신 것이 아닐까요? 율법 역시 공동체 속에서 서로 정죄하고 심판하라고 주신 가혹한 무기가 아니라, 서로 사랑을 촉진하라고 주신 달콤한 선물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보여주는 청사진(blue print)인 것입니다. 신학자 다우이(Edward Dowey)의 말처럼, 본래 율법은 자비로운 아버지로부터 자녀에게 흐르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율법은 관계양식(mode of relation)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는 근본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타락 이전에도 그랬듯 그리스도안에 다시 들어오면 유죄를 선고하는 부정적 쓰임새(negative use)말고, 율법의 주목적인 하나님과 인간을 연합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우리로 진정 행복을 누리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게 하고, 감사를 보여드리게 하는 신적 선물로 작동해야 제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조주와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소통하고 교제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공유하게 돕는 유쾌한 수단인 것입니다.
왜곡된 법, 위태로운 인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즐거이 실천해보도록 주신 규정이 율법이지만, 탐욕과 기만으로 가득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권력가들이 사익을 위해 쥐어튼 실정법 체계가 라스콜니코프의 눈에 공정한 경기의 규정으로 보일 리 만무할 것입니다. 모두 갈 만한 곳이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는데,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만드는 악법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마음에 증오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법이 아닌 법을 만든 이들의 심보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타락 이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양식이던 율법의 본래 기능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율법이 더는 선물로 여겨지지 않고, 신성에 대한 감각과 양심은 남아 있지만, 율법의 본래 기능은 실행되지 않게 됩니다. 율법은 더 이상 상호 소통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도 피할 수 없는 균열을 인식하는 얄궂은 거울이 되고 맙니다. 그런 율법은 서로 연합할 자리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려주는 고발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가가 만드는 온갖 규정들은 굴레나 고삐와 다를 게 없고, 인간을 마치 물건처럼 취급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라스콜니코프는 이런 법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고, 법을 만든 이의 대표로 노파를 지목한 것입니다. 그가 모든 이를 외톨이로 만든 원흉이니, 노파를 모든 이(이)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이(이)라고 여기고 죽였습니다. 그는 악법을 죽이기 위해 법 자체를 죽이고 맙니다. 그는 단 한번뿐인 인생을 인류 공동의 행복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마치 벽돌 한 장을 나르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정법을 거칠게 분쇄하면서도 인정법, 자연법 급기야 신법까지 손을 대는 결과가 어찌 될지 예측하지는 못한 듯합니다. 자기 좋을 대로 일을 저지르면, 그의 양심에 지을 수 없는 금이 간다는 것을 몰랐던 까닭입니다. 어스름한 초저녁 같던 그의 젊은 날은 환한 정오는 고사하고 깜깜한 자정으로 급락하고 맙니다.
펠릭스 쿨파 Felix Culpa
도스토엡스키는 본래 감미로운 선물이지만, 이제는 무거운 짐짝이 되어버린 율법을 복귀할 길을 똑똑한 법대생 라스콜니코프가 아닌, 가련한 매춘부 소냐에게서 찾습니다. 무능하고 고약한 부모아래 생활고에 허덕이는 동생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춘부로 살아가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내가 끝까지 당신을 따라갈 테니 죄를 외면하지 말고 당당히 죄 값을 치르세요 라고 말합니다. 이에 아무 데도 갈 곳 없던 그는 소냐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쏙 빼닮은 소냐의 복음 안에서 더 이상 율법은 팍팍한 짐도 아니고, 어려운 임무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율법을 실행하게 하는 통로인 소냐의 도움으로 라스콜니코프는 새로운 마음과 능력을 받으면서 법의 의미가 사뭇 달라짐을 깨닫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가난에 찌든 방에서 함께 성경을 읽는 살인자와 매춘부는 이상하게 서로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차디찬 시베리아 수용소든 어디든 함께 가겠다는 소냐의 약속을 받은 마음에는 눈 녹듯 증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노파를 죽일 때 자신도 죽이는 일을 벌였다는 진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참회와 더불어 자수를 고민합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외칩니다. 지금 당장 나가서 교차로에 서서 우선 당신이 더럽힌 저 땅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춘 다음, 온 세상을, 사방을 향해 절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큰 소리로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라고 말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다시 생명을 보내 주실 거에요. 갈 거지요? 마지막 날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마 5:18)시던 주님의 말씀은 그에게 삼나무 십자가를 걸어주는 소냐의 음성을 통해 전해집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며 조금씩 망해가는 (집회서 19:1) 속된 사람들 같지 않고 율법의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인정하고 용기 있게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고.
광장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은 그의 영혼에 갑자기 무슨 발작처럼 하나의 불꽃이 타오르더니 갑자기 불길이 되어 그를 휘감습니다. 그의 내부에 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누그러지고 눈물이 왈칵 솟구칩니다. 그리고 그는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집니다. 행복한 죄(Felix Culpa)의 감정이 밀려옵니다. 잘못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고 죄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똑바로 보게 된다는 복된 대죄, 훗날 그는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하지만, 육신이 자유롭던 시절보다 더 삶을 사랑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기고 더 많이 아끼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실정법이 아무리 엉터리 같아도 하나님의 법은 나와 모두의 유익을 위한 선물이라는 진리가,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 덕분에 진실로 믿어진 까닭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는 갈 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가 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은 충분하고도 넉넉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송용원 목사 미국 예일대학교와 영국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연구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가르치고 있다(조직신학). 저술로는 칼뱅의 공동선(IVP), 하나님의 공동선(성서유니온)이 있다).
① 러시아 작가 도스토엡스키의 죄와 벌, 영어로 Crime and Punishment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1년 여름,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일이다. 죄와 벌을 읽기 시작했다. 너무 어려웠다. 재미없었고 이해를 못하였다. 지금 성경적으로 비유를 한 해설서를 읽으니 쉽게 이해가 된다. 글 쓴 이에게 감사한다.
② 찢어지게 가난한 법대생 라스콜니코프는 19세기 유럽의 급격한 경제성장, 극심한 빈부격차, 퇴폐와 문란을 상징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후미진 뒷골목 하숙방에서 흉금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는 유폐에 가까운 삶을 이어 갑니다. 그는 자신을 구할 사상을 골몰하다가 인류 공동의 행복을 저해하는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자신과 같은 불쌍한 서민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게 만드는 버러지 만도 못한 악덕 전당포 노파를 처단한 것입니다. 그에게 이보다 더 적법한 일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대의를 품고 저지른 살인 이후, 그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게 되어 버립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지만, 알 수 없는 우수(憂愁)와 불안이 그를 거세게 짓누릅니다. 대죄를 지은 영혼에 빛은 이내 꺼졌지만, 고뇌는 남아 있던 것입니다. 그가 미처 알지 못한 진실은 양심 있는 자는 자신의 오류를 의식하면 징역과 별개로 괴로움이 벌로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③ 도스토엡스키는 본래 감미로운 선물이지만, 이제는 무거운 짐짝이 되어버린 율법을 복귀할 길을 똑똑한 법대생 라스콜니코프가 아닌, 가련한 매춘부 소냐에게서 찾습니다. 무능하고 고약한 부모아래 생활고에 허덕이는 동생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춘부로 살아가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내가 끝까지 당신을 따라갈 테니 죄를 외면하지 말고 당당히 죄 값을 치르세요 라고 말합니다. 이에 아무 데도 갈 곳 없던 그는 소냐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쏙 빼닮은 소냐의 복음 안에서 더 이상 율법은 팍팍한 짐도 아니고, 어려운 임무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율법을 실행하게 하는 통로인 소냐의 도움으로 라스콜니코프는 새로운 마음과 능력을 받으면서 법의 의미가 사뭇 달라짐을 깨닫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가난에 찌든 방에서 함께 성경을 읽는 살인자와 매춘부는 이상하게 서로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차디찬 시베리아 수용소든 어디든 함께 가겠다는 소냐의 약속을 받은 마음에는 눈 녹듯 증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노파를 죽일 때 자신도 죽이는 일을 벌였다는 진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참회와 더불어 자수를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