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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 장재동 마을에 있는 진안 본당 장재동 공소는 1890년에 설립되었다. 1882년에 덕천리에 널틔공소, 1883년에 가래골 공소를 리우빌 신부(아나톨, 유달영, 1855-1893)가 설립하고 이곳에서 전교를 하였으며, 1890년에는 보두네 신부(프란치스코, 尹沙勿 1859-1915까지 전동성당 신부 역임)가 장재동 공소를 설립하였다. 1920년경에는 가래골과 장재동을 합하여 장재동 공소라고 불렀으며, 1918년 11월 19일에 드망즈 주교(플로리아노, 安世華, 초대 대구대목구장, 1875∼1938) 주례로 공소 강당 축복식을 갖었다. 1921년 10월 31일에 어은동 본당 이상화 발도로메오 신부가 이곳에 와 이듬해 7월 3일까지 거처하였다. 1964년 11월 5일에는 벽돌 구조에 함석지붕의 공소 건물이 신축되었으며 이사정 신부 재임 때 내부 수리를 하고 3년 전에 지붕을 강판 기와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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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동 공소는 진안 지역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된 공소이다. 1883년에 인근의 가래올[추동]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1890년도에는 장재동에도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공소가 설립되었다. 장재동 공소는 가래올과 장재동 지역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설립되었다. 장재동 공소는 설립 당시 27명이었던 신자가 1910년에는 106명이 될 정도로 꾸준히 교세가 늘어났다. 1918년에 건물이 설립되자 드망즈 주교는 1918년 11월 18일에 장승백이에서 장재동으로 와서 3일간 머무르며 찰고(察考)와 성사를 주었으며, 1918년 11월 19일에 성 미카엘을 주보로 장재동 성당을 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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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동 성당에서 한들 성당으로 이전하던 시기에는 이전을 결심한 이상화 신부가 1922년 6월 장재동 공소에 임시로 거처하기도 하였다. 1926년 가을에는 영신회가 창립되는데 여자 교우 30명이 연미사와 감사 미사를 위해 활동하였다. 6.25 전쟁 당시에는 강원도에서 피난 온 조 신부가 장재동으로 피신하였다. 1964년 11월 공소 건물을 이전하였고, 1988년 11월 성모상 축복식을 하였다.
■ 이상화 신부(李尙華, 바르톨로메오, 1876〜1957)
전주교구 신부. 1876년 6월 23일 충남 부여군 출생. 1895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1908년 12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고 경기도 양평 능말 본당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전북 안대동(현 함열) 본당 2대 주임(1911.5〜1913.4),경남 함양 본당(1913.4〜1918.2)을 거쳐 진안 어은동(현 진안) 본당 2대 주임(1918.2〜1921.6)으로 부임한 이상화 신부는 전임 김양홍(스테파노) 신부의 교육 사업을 이어받아 학교 경영을 하면서 전교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교세가 발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본당을 전교 전망이 큰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본당 부지로 마땅한 곳을 물색하였고, 1922년 6월 마령면 연장리 한들에 정착하여 그해 12월 목조 7칸의 성당과 목조 5칸의 사제관을 준공하였다.
이후 그는 전북 수류 본당 6대 주임(1930.12〜1935. 6)으로 전임 되었으며, 1931년에 그의 주도로 검산리에 성당, 침실, 식당이 건축되었다. 한편,김제(현 요천) 본당이 공소를 시작한지 15년 만인 1935년 6월 16일 수류 본당에 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이상화 신부는 김제 본당 초대 주임(1935.6∼1938,6)으로 임명되었고,이어 전주(현 전동) 본당 5대 주임(1938.6∼1940.4), 정읍(현 시기동) 본당 6대 주임(1940, 4∼1944.12),전주 본당 10대 주임(1944 12〜1947.4)으로 사목하였다. 광복 이 후 전주 본당 내 청년회를 주축으로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학교 설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1946년 8월에 ‘성심여학원’이 설립 인가를 받고 그 해 10월 3일 개교하였다. 이에 따라 전주 본당 주임 이상화 신부가 성심여학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안대동(현 함열) 본당 9대 주임으로 부임 한 이상화 신부는 1년 만인1950년 4월 휴양차 본당을 떠나게 되었다. 1953년까지 전주교구 부감목을 지내다가 1957년 10월 23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전주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보두네 신부 (Baudounet, Francois Xavier, 윤사물 尹沙勿, 1859-1915).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대구교구 선교사. 그는 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4년 9월 20일 사제서품을 받고 동료신부 두 사람과 함께 그해 11월 19일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도중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도착한 세 사람은 블랑(Blanc) 주교로부터 두 사람만 들어오고 한 사람은 남아서 기다리라는 편지를 받고, 제비를 뽑은 결과 보두네 신부가 남게 되었다. 그 동안 인쇄일로 나가사끼에 건너온 코스트(Coste) 부주교를 만났고, 1885년 8월에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곧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한국의 풍습과 언어를 익힌 다음 6개월 뒤에는 경상도 신나무골로 갔고 거기서 전교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어 공부에 몰두하여, 이듬해에 전라도 지방을 맡게 되었을 때에는 이젠 모국어만큼이나 한국말을 잘 구사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박해가 사라져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 시내에 정착하였는데, 그 때가 1891년이었다. 당시 전주에는 신자집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으나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몇 사람의 신부가 나누어 맡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신자수가 급격히 불어났었다. 동학란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신부는 사태가 진정되자 다시 임지로 내려가 폐허가 된 교회 재건에 전심하였다. 동학란으로 교세는 오히려 늘어나 이젠 더 큰 성당을 지어야만 했으므로 그는 모든 경비를 절약했고, 가지고 있던 말까지도 팔아 성당 건립을 위해 충당하였다. 이 때 건립한 전동 성당은 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리하여 헌신적으로 한국인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1915년 5월 27일 선종하였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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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