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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령(天嶺) 박사군(朴使君): 박성부(朴成阜 : 1610~1686)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후(汝厚), 호는 사졸와(四拙窩)이다. 1639년(인조17)에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부임한 적이 있다. 강수(江叟) 김훤(金楦 : 1610~?)과 동갑으로 친하여 공주(公州) 창강(滄江)에서 같이 거주하였다. 천령(天嶺) 박사군(朴使君)이란 천령(天嶺)은 함양의 고호이니 본관 함양을 가리키고 사군(使君)은 지방수령의 존칭이니 화순현감을 지낸 것을 가리키니 박성부를 지칭한다. 《明齋先生遺稿 卷38 和順縣監朴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136輯, 西溪集 卷10 和順縣監朴君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34輯》
朴成阜 1610 1686 咸陽 汝厚 四拙窩
明齋先生遺稿卷之三十八 / 墓碣銘 / 和順縣監朴公墓碣銘
人有恒言曰。居家孝友。莅官淸謹。然允蹈者鮮矣。又或修於表而歉於裏。有其始而渝其終。若夫允蹈於躬。而表裏無二。終始如一者。吾於咸陽朴公。見之矣。公諱成阜。字汝厚。大丘府使諱徹之子也。妣淑人全州李氏。其考曰縣監德溥。公以萬曆庚戌六月廿二日生。文質夙茂。不幸嬰疾。早廢公車業。年五十。始筮仕。由繕工監役。遷金吾郞。壬寅。監平澤縣。地狹民殘。公竭誠撫摩。丙午。爲繡衣所誣就理。猾胥之逃罪者構之也。竟徒配瑞山。翌年宥還。戊申。復內資主簿。己酉。除扶餘縣監。當辛亥大侵。盡心賑政。濟活甚衆。修義烈祠。表愼齋金先生遺愛碑。以寓尊賢之誠。秩滿而歸。乙卯。除和順縣監。戊午。罷歸公州之滄江。蓋江叟金公楦。公石友也。曾有暮年同老之約。至是就而居焉。杖履相從。逍遙甚適。親舊之在朝者。以公老而貧。就除利仁察訪。未幾。復歸滄江。扁所居以四拙窩。其義以爲不善▦▦。拙於行世。苦乏酒饌。拙於待客。鑿岸爲屋。拙於搆巢。借田爲農。拙於謀生云。丙寅十月。感疾。沈綿日臻。而神氣不亂。口占長律。以訣江叟。竟以是月廿三日終。壽七十七。十二月壬申。葬于靑陽縣燕子峙卯坐之原。從先兆也。公事親。至性出天。母夫人夙抱痼疾。積二十年。公晝夜侍側。藥必自煎。丙丁避兵之日。手自扶轎。及遭喪。不脫縗絰。不食蔬果。哭泣幾失明。其後丁外憂也。年已向衰。而執制一如前喪。見者皆憂其不能保。竟得無恙。始咸歎之。謂獲神祐。大丘公居家。未嘗留意家事。公經紀有法。甘旨無闕。又未嘗離側。雖深夜。不命之退。不退。退又未明而省。未嘗一日不然也。友愛弟妹。至老彌篤。末年流寓湖中。思戀之情。形於色辭。其寢疾也。語不及他。唯曰某也。今不可復見矣。仍泣下。傍人不能仰視。遇宗族。恩意周遍。雖性褊多疑者。亦感服焉。與人交。不喜翕翕。而不事畦畛表襮。人皆愛敬之。大丘公嘗定家祭禮。公一遵守不違。且以世俗忌墓輪行。非禮之正。皆自備而行之。遠代之忌。雖未得參祭。年高後猶不廢兩日行素。其篤於報本追遠。又如此。居官依大丘公遺矩。不用公物。不營私事。其自奉。盤無兼味。獨於親舊。待之優厚。民賦有逋。必賑貸之。廨宇有廢。必繕葺之。及遞歸。官庫常盈溢焉。然絶無誇衒之意。故所在雖無赫赫聲。而去後之思。久益不衰。爲平澤也。不用糴穀之耗。積置累百石。而歸後朝家有移粟之擧。搬運所縮欠。當更徵於民。遂以公所留者。充之。民始大悅。自扶餘歸也。行李只有梅査一盆而已。嘗戒子弟曰。人之少也。雖或自厲。而血氣旣衰。不免有苟且之事。汝等切勿向人干求也。又嘗曰。利之於人。爲害實大。吾平生。未嘗做一利字。汝等切宜戒之。平生。不喜聲色。雖在衆樂喧闐之場。未嘗傾耳。中年叩盆。不復卜姓。獨處二十年。泊然不以爲苦也。又不喜修飾服用。自大丘公累典大邑。以至公三爲縣宰。而如書几硯匣之微。一無所造。其爲氷蘗之節。亦非由勉慕而強爲之也。其性然爾。遇事莊愼。未嘗爲嶄截之行。而操守之確。則有不可奪者。嗚呼。此皆公之實德也。配淑人白川趙氏。觀察使廷虎之女。幽閑淑哲。閨範甚備。事舅姑。極其誠孝。大丘公性嚴少許可。見淑人。未嘗不喜。及疾革。見淑人侍側。命左右扶掖以坐曰。新婦事我孝。吾無以報。唯願新婦。永膺多福。與公同年生。乙巳五月。卒于平澤縣衙。壽僅五十六。初葬于牙山縣西。及公之葬。遷而祔焉。男長曰銑。次鉉,錪,鑂,鉁。銑。仕止司䆃主簿。未第而無年。人咸惜之。有二男三女。男曰尙淳。進士。尙浚。壻曰李泓。生員。徐宗孝。季未行。鉉三男一女。男曰尙澂,尙濚,尙淹。壻曰李宅相。錪。以薦入仕。前四山監役。二男曰尙泰,尙需。二女未行。鑂。二男二女。男曰尙永,尙沆。壻曰尹東佐。鉁。二男三女。男曰尙涵。餘皆幼。曾孫男女二十餘人。幼未盡載。拯與公之長胤主簿君。自少交好。因而獲拜於公。及公之寓滄江也。以時候之。謙卑溫厚。操存敬愼之德。藹然可見。而居處靜淨。服用淡儉。無非可欽可慕。退而未嘗不竊歎。以爲古之篤行。無以過也。監役狀公之事行。俾爲之銘。拯於前日。實承公命。僭銘大丘公墓。更不容以陋拙辭。謹撮其狀。而係以銘。銘曰。
嗟人之生。天賦爲美。笑貌聲音。梔耳蠟耳。惟公卓行。一任其眞。斷斷平生。無有緇磷。淸豈我名。節豈我貞。惟其慾寡。是以心平。我欽公德。終不可諼。銘公不愧。愧我無文。
명재유고 제38권 / 묘갈명(墓碣銘) / 화순 현감(和順縣監) 박공(朴公) 묘갈명
집안에 있을 때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항상 말하지만, 진실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어떤 경우엔 겉으로는 실천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진실한 마음이 들어 있지 않기도 하고, 처음에는 잘하다가 끝에 가서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마음으로 몸소 실천하고 겉으로 나타난 행동과 속마음이 일치하며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경우를 나는 함양(咸陽) 박공(朴公)에게서 보았다.
공의 휘는 성부(成阜), 자는 여후(汝厚)이며, 대구 부사(大丘府使) 휘 철(徹)의 아들이다. 모친 숙인(淑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현감 덕보(德溥)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 6월 22일에 태어났다. 문장과 자질이 어린 나이에 이미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병에 걸려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러다 나이 50이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선공감 감역을 거쳐 금오랑(金吾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인년(1662, 현종3)에 평택 현감(平澤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땅은 좁고 백성은 피폐하므로 공이 정성을 다해 어루만져 주었다. 병오년(1666)에 암행 어사의 무고로 취조를 받았는데, 이는 교활한 서리가 자신의 죄를 피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었다. 이 일로 마침내 서산(瑞山)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에 석방되어 돌아왔다.
무신년(1668)에 다시 내자시 주부가 되었으며, 기유년(1669)에 부여 현감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671)의 큰 흉년에 온 마음을 다해 백성을 진휼하여 목숨을 구한 백성이 매우 많았으며, 의열사(義烈祠)를 수리하고 신재(愼齋) 김 선생(金先生)의 유애비(遺愛碑)를 세워서 현인을 받드는 정성을 표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을묘년(1675, 숙종1)에 화순 현감(和順縣監)에 제수되었다가 무오년(1678)에 벼슬을 그만두고 공주(公州)의 창강(滄江)으로 돌아왔다.
강수(江叟) 김공 훤(金公楦)은 공과 아주 절친한 친구인데, 일찍이 만년에 함께 늙자는 약속을 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김공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살게 된 것이다. 함께 여행도 하면서 유유자적하며 지내는 터에 조정에 있던 친구가 공이 늙도록 가난한 것을 걱정하여 이인 찰방(利仁察訪)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창강으로 돌아왔다. 거처하는 집을 사졸와(四拙窩)라 불렀는데, 첫째 말주변이 좋지 못하니 세상살이에 어설프고, 둘째 술과 안주가 부족하니 손님 접대가 어설프고, 셋째 벼랑을 깎아 집을 만드니 집 모양이 엉성하고, 넷째 땅을 빌려서 농사지으니 생계가 어설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병인년(1686, 숙종12) 10월에 병에 걸려 갈수록 악화되었으나 정신은 어지러워지지 않아 배율(排律)의 시를 지어 강수에게 이별을 고하고 이달 23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12월 임신일에 청양현(靑陽縣) 연자치(燕子峙)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선영을 따라간 것이다.
공은 부모를 모시는 지극한 정성을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모친이 일찍이 고질병에 걸려 20년을 앓아 왔는데, 공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약은 반드시 손수 달여 드렸다. 병자(1636, 인조14), 정축년(1637)의 피난하던 때에는 모친의 가마를 손수 잡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밤낮으로 상복을 벗지 않고 나물과 과일도 먹지 않은 채 슬피 곡하느라 거의 실명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후 부친상을 당하자, 나이가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으나 예법을 앞서의 모친상과 다름없이 행하였다. 보는 이들이 모두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나 결국 아무 탈이 없자 비로소 모두 한숨을 내쉬며 신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부친 대구공이 집안에 있으면서 집안일에는 마음을 둔 적이 없었으므로, 공이 집안 살림을 법도에 맞게 꾸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빠뜨리지 않고 올려 드렸다. 또 부친의 곁을 떠난 적이 없어 아무리 깊은 밤이라 하더라도 물러가라 명하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았으며, 물러나더라도 날이 밝기 전에 문안을 드려 하루도 그렇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우, 누이동생과 우애하며 지냈는데 늙어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말년에 호중(湖中)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에는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굴과 말투에 그대로 드러났다. 병으로 누웠을 때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로지,
“아무개를 이제는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쳐다보지를 못하였다.
종족들을 만났을 때는 은혜를 두루 베풀어서 아무리 성격이 편벽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공에게 감복하였다. 사람들과 사귈 때는 구차하게 영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남들과 구분 짓거나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대구공이 일찍이 집안의 제사 지내는 예법을 제정해 놓았는데, 공이 하나도 어김이 없이 이를 준수하였다. 게다가 세상 풍속에 기제(忌祭)와 묘제(墓祭)를 집집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은 올바른 예법이 아니라 하여 모두 직접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먼 조상의 기일까지 제사에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틀간의 행소(行素)는 나이가 연로해진 뒤에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았으니, 조상에 대한 보본추원(報本追遠)에 충실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관직 생활을 할 때에는 대구공이 남긴 말씀에 따라 공적인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사사로운 일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밥상에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올리지 않았으나,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만은 후하게 대접하였다. 백성에게 밀린 조세가 있으면 반드시 구휼하여 빌려 주었으며, 관청의 건물이 허물어지면 반드시 수리하였다. 체차되어 돌아갈 때면 관청의 창고가 늘 가득 차 넘쳐흘렀다. 하지만, 남에게 과시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므로 재직할 때 비록 화려한 명성을 얻지는 못했으나 떠나고 난 뒤에 공을 사모하는 마음은 세월이 오래될수록 더해만 갔다. 그 예를 들면, 평택 현감으로 있을 때 환곡의 이자로 들어온 곡식을 사용하지 않고 수백 섬을 창고에 쌓아 두었다. 수령에서 돌아온 뒤에 조정에서 구황책의 하나로 곡식을 이송하라는 조처가 내려졌는데, 운반 과정에서 축난 곡식을 다시 백성들에게 징수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자 공이 비축해 두었던 곡식으로 이를 충당하니, 백성들이 그제야 비로소 크게 기뻐하였다. 또 부여 현감에서 돌아올 때 행장 속에는 단지 화분에 담은 매화 한 뿌리뿐이었다.
일찍이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사람이 젊을 때는 더러 자신을 면려하지만 혈기가 쇠하고 난 뒤에는 구차해지기 마련이니, 너희는 절대로 남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로움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악은 실로 막대하다. 그래서 나는 평생토록 ‘이(利)’ 자를 써 본 적이 없다. 너희는 절실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은 평생 여색과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아무리 풍악이 시끄럽게 연주되는 곳에서도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중년에 부인을 잃은 뒤로는 더 이상 장가를 들지 않고 20년을 홀로 지내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여 이를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또 사용하는 물건을 꾸미기 좋아하지 않아 대구공이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았을 때부터 공이 세 번 현감을 맡을 때까지 책상이나 벼룻집 같은 사소한 것조차도 전혀 만들지 않았다. 그 청빈한 생활은 또한 억지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성품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떤 일을 당하면 신중하게 대처하여 각박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으나 확고하게 지키는 사안에 있어서는 아무도 그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아, 이상은 모두 공이 실제 갖춘 덕행들이다.
부인 숙인(淑人) 배천 조씨(白川趙氏)는 관찰사 정호(廷虎)의 따님으로, 조용하고 현숙하여 규방의 범절을 매우 잘 갖추었으며 효성을 다해 시부모를 섬겼다. 대구공이 성품이 엄격하여 좀체 남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숙인을 볼 때는 언제나 좋아하였다. 병이 악화되었을 때 숙인이 곁에서 모시는 것을 보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축하여 앉히게 한 다음,
“새아기가 나를 효성으로 섬기는데 나는 보답할 것이 없구나. 오직 새아기가 오래도록 많은 복을 받기를 기원하겠다.”
하였다. 부인은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을사년(1665, 현종6) 5월에 평택현(平澤縣) 관아에서 별세하니, 향년 겨우 56세였다. 처음에는 아산현(牙山縣)의 치소 서쪽에 안장하였다가 공을 안장할 때에 옮겨다 부장(祔葬)하였다.
장남은 선(銑)이고 다음은 현(鉉), 전(錪), 훈(鑂), 진(鉁)이다.
장남 선은 벼슬이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에 그쳤으며, 과거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장수를 누리지도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둘에 딸 셋을 낳았다. 아들은 진사 상순(尙淳)과 상준(尙浚)이고 사위는 생원 이홍(李泓)과 서종효(徐宗孝)이며, 막내딸은 시집가지 않았다.
둘째 현은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상징(尙澂), 상영(尙濚), 상엄(尙淹)이고, 사위는 이택상(李宅相)이다.
셋째 전은 천거를 받아 벼슬에 나아갔으며 사산 감역(四山監役)을 지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상태(尙泰)와 상수(尙需)이며, 딸 둘을 두었는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넷째 훈은 아들 둘에 딸 둘을 두었다. 아들은 상영(尙永), 상항(尙沆)이고, 사위는 윤동좌(尹東佐)이다.
다섯째 진은 아들 둘에 딸 셋을 두었다. 아들은 상함(尙涵)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증손은 아들딸 모두 합해 20여 명이 되나 어려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공의 장남 주부군과 어려서부터 교분이 있었으므로 이로 인해 공을 뵐 수 있었다. 공이 창강에 우거할 적에 때때로 문안을 드렸는데, 겸손하고 온화하며 조심하고 신중한 덕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집안에서는 차분한 모습이었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모두 담박하고 검소하였으니, 어느 것 하나 흠모하지 않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돌아와서는 언제나 감탄을 하여 옛 성현의 독실한 행실이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셋째 아들 감역군이 공의 행장을 지어 와서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지난번에 공의 명을 받고 외람되이 대구공의 묘갈명을 지어 준 적이 있어 더 이상 글재주가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삼가 행장을 요약하고 이어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사람의 삶이란 / 嗟人之生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가장 아름다운 법 / 天賦爲美
웃음소리 음악 소리 / 笑貌聲音
귀에 가득하여도 / 梔耳蠟耳
공의 뛰어난 행실은 / 惟公卓行
한결같이 천진하도다 / 一任其眞
공의 확고한 일생은 / 斷斷平生
물들지도 갈리지도 아니하니 / 無有緇磷
청렴함을 내 어찌 이를 것이며 / 淸豈我名
절개를 내 어찌 곧다 하겠는가 / 節豈我貞
오직 욕심이 적었기 때문에 / 惟其慾寡
마음이 평안할 수 있었다네 / 是以心平
내 공의 덕을 흠모하여 / 我欽公德
끝내 잊을 수가 없으니 / 終不可諼
공의 명을 쓴 것은 부끄럽지 않으나 / 銘公不愧
나의 부족한 글재주는 부끄럽도다 / 愧我無文
[주-D001] 의열사(義烈祠) : 백제의 명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고려의 명신 이존오(李存吾) 등을 제향한 사우(祠宇)로서, 1576년(선조9)에 부여 현감으로 있던 홍가신(洪可臣)이 건립하였다.
[주-D002] 신재(愼齋) 김 선생(金先生) : 신재는 김집(金集)의 호이다. 김집은 1623년(인조1)부터 1627년까지 부여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주-D003] 행소(行素) : 죽은 이를 위해 고기나 고기가 든 음식을 먹지 않고 채식(菜食)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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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溪先生集卷之十 / 誌銘 十首 / 和順縣監朴君墓誌銘
府君諱成阜。字汝厚。姓朴氏。其先咸陽人。忠佐仕高麗爲判三司事。封咸陽府院君。與李益齋齊名。高祖諱瑜。典籍。曾祖諱黎獻。司饔直長。祖諱忠生。濟用判官。考諱徹。大丘府使。有循吏名。妣淑人全州李氏。禮安縣監德溥之女。府君生于光海二年庚戌六月二十一日甲午。幼有美質。文詞夙成。嬰疾早停公車。年五十。補繕工監役。同春宋公時居銓。人有賀者。而宋公亦自喜。顯宗二年辛丑。勞敍遷義禁府都事。壬寅。爲平澤縣監。縣小而民困疲。殫心撫摩。修擧廢墜。藏粟之贏。積至累百。旣去而民受其賜。在官五年。爲猾吏所誣。逮繫徒配瑞山。丁未宥還。戊申。敍內資主簿。己酉。爲扶餘縣監。及辛亥歲大侵。力振貸而民獲濟。修義烈祠閣金文敬遺愛碑而人知勸。甲寅。秩滿歸。行李蕭然。乙卯。爲和順縣監。戊午。罷。前數年。旣連哭二子。桑梓絶戀。又無可歸。嘗與故人江叟金楦有暮年同老之約。金居公州之滄江。至是赴初約。賃屋就其隣而住焉。兩老人杖屨相從。逍遙甚適。當路有憫府君之老貧者。就除利仁察訪。是歲壬戌。數年復去職。歸滄江。丙寅十月。感微恙。爲詩訣江叟。竟以十月二十三日終。壽七十七。十二月壬申。葬于靑陽燕子峙負卯之原。從先兆也。府君愷悌溫粹有至性。親疾。寢不解帶。藥必手煎。李淑人沈綿床褥二十年。而焦憂如一日。及喪則哭泣幾失明。丙申。丁外憂。年幾向衰。執制猶前。人憂其不保。方大丘公之在堂也。脫落細故。不問有無。府君實經紀家事。甘旨不闕。未明省寢。終日侍左右。不命之退。雖深夜不敢退。友愛弟妹。至老彌篤。凡有過失。不以色辭。諄諄戒飭。晩而流落湖中。常思戀不去懷。臨沒則念之。涕下曰。今不可復見矣。在傍者皆爲之慼然。敎子弟甚嚴。與人交亦不爲翕翕。亦不設畦畛。遇宗族恩義周遍。尤不喜聲色。中年叩盆。不畜媵御。泊然獨處者近二紀。居官淸約。案無兼味。稚幼呼飢。獨於親舊。待之優厚。民租有逋。捐廩以貸去。而庫藏盈溢。廨宇繕葺。民之慕之。久而不衰。配淑人白川趙氏。觀察使廷虎之女。幽閑淑哲。閨範甚備。大丘公性嚴少可。疾革而顧淑人侍側。命左右扶坐曰。新婦事我孝。吾無以報。惟願新婦永受多福。其得於尊章者如此。與府君同年。乙巳五月。卒于平澤縣齋。壽五十六。初葬牙山縣西。及府君之葬也。遷而祔焉。五男。銑,鉉,錪,鑂,鉁。銑,鉉,鑂。皆先府君亡。銑仕止司䆃主簿。有二男三女男。尙淳,尙浚。壻李泓,徐宗孝,李師欽。尙淳進士。泓,宗孝。俱生員。鉉一男一女。男尙淹。壻李宅相。錪以薦入仕。前四山監役。二男二女。尙泰,尙需。壻李挺朝,李廷彥。鑂一男一女。男尙沆。壻尹東佐。鉁二男三女。男尙涵。壻李宇襄。餘皆幼。曾孫男女。二十餘人。多不能盡錄。世堂與府君爲中表。監役君托以壙誌。辭不獲。謹銘曰。
端人淑士。世豈多見。潔而無瑕。如氷一片。乃繼乃承。先規不偭。載銘示後。率玆無勌。
서계집 제10권 / 지명(誌銘) 10수(十首) / 화순 현감(和順縣監) 박군(朴君) 묘지명
부군은 휘는 성부(成阜), 자는 여후(汝厚)이고 성은 박씨(朴氏)이다. 그 선대는 함양인(咸陽人)이다. 충좌(忠佐)가 고려에 벼슬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익재(李益齋 이제현(李齊賢) )와 명망이 나란하였다. 고조 휘 유(瑜)는 전적(典籍)이고, 증조 휘 여헌(黎獻)은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이고, 조부 휘 충생(忠生)은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이다. 부친 휘 철(徹)은 대구 부사(大丘府使)인데 순리(循吏)로 알려졌다. 모친 숙인(淑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예안 현감(禮安縣監) 덕보(德溥)의 따님이다.
부군은 광해(光海) 2년 경술년(1610) 6월 21일 갑오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훌륭한 자질이 있어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졌으나 질병에 걸려 일찍 과거공부를 중지하였다. 50세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보임되었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 송공(宋公)이 당시에 전조(銓曹)를 맡고 있었는데, 공을 선공감 감역에 보임한 일을 하례하는 사람이 있었고 송공 또한 스스로 기뻐하였다. 현종(顯宗) 2년 신축년(1661)에 공로로 서용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승천되었다.
임인년(1662)에 평택 현감(平澤縣監)이 되었다. 현은 작고 백성은 곤궁하였는데 부군이 마음을 다해 위무하고 실추된 것을 거행한 결과 저장되어 있는 곡식 중의 여유분이 수백 석이 되었다. 부군이 이미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관직에 있는 5년 동안 교활한 아전에게 속임을 당하였는데 그 일로 인하여 체포되어 서산(瑞山)에 도배(徒配)되었다가 정미년(1667)에 용서받고 돌아왔다.
무신년(1668)에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에 서용되었다.
기유년(1669)에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는데 신해년(1671)에 이르러 큰 흉년이 들자 힘껏 구휼한 덕분에 백성들이 구제되었으며, 의열사(義烈祠)의 건물과 김 문경(金文敬 김집(金集) )의 유애비(遺愛碑)를 보수하여 사람들이 존현(尊賢)을 권면할 줄 알게 하였다. 갑인년(1674)에 임기가 차서 돌아올 적에 행장이 텅 비었다.
을묘년(1675, 숙종 1)에 화순 현감(和順縣監)이 되었다가 무오년(1678)에 파직되었다. 이보다 수년 전에 이미 연이어 두 아들을 잃어서 고향에 대한 미련이 끊어진 데다 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일찍이 오랜 벗인 강수(江叟) 김훤(金楦)과 노년을 함께 보내자고 약속하였는데 김훤이 공주(公州)의 창강(滄江) 가에 살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처음 약속을 이행하여 그 이웃에 집을 세내어 거주하였는데 두 노인이 한가하게 거닐며 유유자적하였다. 그런데 늙고 가난한 부군을 불쌍히 여기는 당로자(當路者)가 있어 곧 이인 찰방(利仁察訪)에 제수되니 바로 임술년(1682, 숙종 8)이었다. 몇 년 뒤에 다시 관직을 그만두고 창강으로 돌아왔다.
병인년(1686, 숙종 12) 10월에 작은 병에 걸려 시를 지어 강수와 영결하고 마침내 10월 23일에 졸하니, 향년 77세였다. 12월 임신에 청양(靑陽) 연자치(燕子峙)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군은 개재(愷悌)하고 온수(溫粹)하였으며 지극한 성품이 있어, 어버이가 병환을 앓자 잠잘 때도 띠를 풀지 않았고 약은 반드시 손수 달였다. 이 숙인(李淑人)이 20년 동안 병석에서 고질을 앓았으나 한결같이 마음을 졸였는데 상을 당하여서는 곡읍(哭泣)한 나머지 거의 실명할 뻔하였다. 병신년(1656, 효종 7)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 당시 부군의 나이가 노쇠해지기 시작하였으나 모친상과 똑같이 집상을 하니 사람들이 부군이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부친 대구공(大丘公)이 살아 계셨을 때에 작은 일을 제쳐 두고 가산의 유무를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부군이 실제로 집안일을 꾸려서 좋은 음식을 빠뜨리지 않았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안부를 살펴 종일토록 좌우에서 모셨는데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으면 한밤중이 되더라도 감히 제멋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아우와 누이를 우애하여 늙도록 더욱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무릇 과실이 있더라도 안색과 말에 드러내지 않고 자상하게 타일렀다. 만년에 호중(湖中)에 유락(流落)할 적에 항상 마음속으로 그리워하였는데 임종할 때에 그들을 생각하여 눈물을 떨구며 말하기를, “이제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니, 곁에 있던 자들이 모두 이 때문에 서글퍼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칠 적에는 매우 엄하게 하였으며, 사람들과 교유할 적에는 지나치게 어울리지도 않고 담을 쌓지도 않았으며, 종족을 대우할 적에는 은혜와 의리를 두루 베풀었으며, 더욱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년에 아내를 잃고는 첩을 두지 않은 채 담박하게 홀로 산 것이 근 20여 년이었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검소하여 밥상에 반찬이 변변찮았으므로 아이들이 주림을 호소할 정도였으나 친구에 대해서만은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백성들의 세금에 포흠이 발생하자 녹봉을 덜어 갚아 나가 창고는 가득하고 관아는 수선되니 백성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오래도록 줄어들지 않았다.
부인 숙인(淑人) 배천 조씨(白川趙氏)는 관찰사 정호(廷虎)의 따님으로 차분하고 지혜로워 규범(閨範)이 몸에 잘 갖추어졌다. 대구공은 성품이 엄격하여 남을 허여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병이 심해지자 곁에서 시중들던 숙인을 돌아보고는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앉히게 하고는 말하기를, “새아기는 효성으로 나를 섬기는데 나는 보답할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새아기는 많은 복을 길이 받으라.” 하였으니, 시어른에게 이처럼 사랑을 받았다. 부군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을사년(1665, 현종 6) 5월에 평택현(平澤縣)의 현재(縣齋)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56세였다. 처음에 아산현(牙山縣)의 서쪽에 안장하였다가 부군을 안장하기에 이르러 옮겨서 합장하였다.
5남을 두었으니, 선(銑), 현(鉉), 전(錪), 훈(鑂), 진(鉁)인데, 선과 현과 훈은 모두 부군보다 먼저 죽었다.
선은 벼슬이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에 그쳤고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상순(尙淳), 상준(尙浚)이고 사위는 이홍(李泓), 서종효(徐宗孝), 이사흠(李師欽)이다. 상순은 진사이고, 이홍과 서종효는 모두 생원이다.
현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상엄(尙淹)이고 사위는 이택상(李宅相)이다.
전은 천거로 입사(入仕)하였으니 전(前) 사산 감역(四山監役)이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상태(尙泰), 상수(尙需)이고 사위는 이정조(李挺朝), 이정언(李廷彦)이다.
훈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상항(尙沆)이고 사위는 윤동좌(尹東佐)이다.
진은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상함(尙涵)이고 사위는 이우양(李宇襄)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증손 남녀가 20여 명이므로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세당은 부군과 내외종간이다. 감역군이 묘지명을 부탁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삼가 명을 붙인다.
단정하고 선량한 인사를 / 端人淑士
세상에서 많이 볼 수 있으랴 / 世豈多見
깨끗하여 흠이 없는 것이 / 潔而無瑕
한 조각 얼음과 같았나니 / 如氷一片
이에 뜻을 이어 받들어 / 乃繼乃承
선대의 규범을 어기지 않았도다 / 先規不偭
명에 실어서 후손들에게 보이니 / 載銘示後
이를 따라 게을리 하지 말지어다 / 率玆無勌
ⓒ 한국고전번역원 | 공근식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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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齋先生遺稿卷之十 / 書 / 與朴和順 成阜 ○[己未六月十八日]
再獲陪晤俱欠從頌。旣退冞切瞻仰。高軒淸謐。歊赩難到。杖几相對。世紛不及。恨此失計西遷。塊蟄窮谷。無由一致身於座邊。以慰孤懷也。先狀文字。謹復詳閱。竊謂德業之著見者。雖非一端。而若撮而論之。則在漢書。合入於循良之傳。以此區區僭見。要以此爲主。而吾尼又是最爲蒙澤之地。故首以爲言。而銘以申之。且皆實跡實效。不敢沒略。辭雖似繁。在我尼民之義當然也。今以下敎之故。反復三四。而終不覺其多。不免只就其中。去其若干宂字而呈上。未知尊意以爲如何。惟是筆力拙陋。終不堪傳後。更看益增汗懼。不知所以容喩也。己未六月十八日。
명재유고 제10권 / 서(書) / 박 화순(朴和順) 성부(成阜) 에게 드리다
두 번이나 모실 기회를 얻었는데 한 번도 조용하게 오래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집에 돌아온 뒤 우러러보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집이 맑고 고요하니 찌는 듯한 더위도 이르기 어렵고 어른을 마주하니 세상의 번잡함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스럽게도 생각을 잘못하여 서쪽으로 옮겨와 궁벽한 골짜기에 흙덩이처럼 움츠리고 지내며 좌하(座下)의 곁에 한 번이라도 나아가 천지간에 외로운 회포를 달랠 수가 없습니다.
어르신 선친의 행장(行狀)을 삼가 반복해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드러난 덕업이 한 가지만이 아니나 총괄해서 논한다면 《한서(漢書)》 가운데 〈순리전(循吏傳)〉에 합당할 듯하니 구구한 저의 참람된 견해로는 이런 내용을 위주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우리 이산(尼山)은 은택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기 때문에 맨 앞에 이에 관한 말을 하였고 명(銘)에 다시 언급하였습니다. 또 실제의 행적과 공효는 빠트리거나 간략하게 할 수 없어 다 기록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글이 번다한 듯하지만 우리 이산 백성들의 의리로 보아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하교한 말씀 때문에 서너 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만 끝내 번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단지 내용 가운데 쓸데없는 글자만 몇 자 없앤 다음에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생각건대 제 글 재주가 졸렬하고 비루하여 끝내 후세에 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다시 볼수록 땀과 두려운 마음이 더욱 생겨나니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미년(1679, 숙종5) 6월 18일-
[주-D001] 박 화순(朴和順) : 박성부(朴成阜 : 1610~1665)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후(汝厚)이다. 1639년(인조17)에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부임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西溪集 卷10 和順縣監朴君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34輯》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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藹然淸謹一必醇。吾幸於今見古人。兩世同庚偏義重。十年薰德更情親。香山故事方稱壽。白鶴新詩遽返眞。病蟄莫趨蒿里餞。薤歌窮谷獨霑巾。
명재유고 제3권 / 시(詩) / 박화순(朴和順) 성부(成阜) 어른에 대한 만사
청근한 일심이 너무나 순박하니 / 藹然淸謹一心醇
운 좋게도 오늘날 옛사람을 보았네 / 吾幸於今見古人
양세가 동경이라 정의가 각별하고 / 兩世同庚偏義重
십 년간 훈도 받아 정분까지 친하네 / 十年薰德更情親
향산의 고사 있어 장수를 기렸는데 / 香山故事方稱壽
백학의 신시는 문득 저승길로 떠났네 / 白鶴新詩遽返眞
이 몸은 병이 들어 상여 따라 못 가고 / 病蟄莫趍蒿里餞
산에서 만장 지어 홀로 눈물 적시네 / 薤歌窮谷獨霑巾
[주-D001] 향산(香山)의 …… 기렸는데 : 향산의 고사는 당나라 백거이(白居易)가 향산에서 노진(盧眞), 장혼(張渾) 등 장수를 누리는 여덟 노인들과 더불어 구로회(九老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주(詩酒)로 즐긴 일을 말한다. 여기서는 박성부(朴成阜)가 장수를 누린 것을 가리킨다.
[주-D002] 백학(白鶴)의 …… 떠났네 :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太子)였던 왕자교(王子喬)가 직간(直諫)하다가 서인(庶人)으로 폐위당한 뒤 신선술(神仙術)을 배워 하얀 두루미가 되어 떠났다는 전설에서 인용한 말이다. 《神仙傳》 그러나 백학의 신시(新詩)는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현 (역) | 2006
尹昌世->2.尹煌->윤선거(尹宣擧) 1610년(광해군 2)~1669년(현종 10) 노서선생유고(魯西先生遺稿)
尹昌世->3.尹烇->1.윤원거(尹元擧) 1601년(선조 34)~1672년(현종 13)
용서선생문집(龍西先生文集)
尹昌世->3.尹烇->7.金楦(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