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전규순
1. 하룻밤 사이에 모래산으로 변한 논
나는 8남매의 맏딸이다 우리 어머니는 딸을 내리 넷을 낳으시고 아들을 낳으시고 또 딸을 둘 낳으시고 아들을 낳으셨다. 그렇다보니 부모님은 언제나 딸은 뒷전이고 아들만 소중히 여기셨다. 우리 아버님은 가난한 농부셨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힘들고 아픈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농사일 외에 목수 일을 하셔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갔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인가(?) 여름에 홍수가 나서 들판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우리 논은 뚝방 옆이었는데 뚝이 무너져 여섯마지기 논이 모래산이 되었다. 지금이라면 포크레인으로 간단히 해결 할 수 있겠지만 60년대 당시는 세수대야와 양동이를 동원하여 부모님을 도와 날마다 논에 가서 모래를 치웠다. 어머니는 매일 울면서 모래를 치우시다 보니 눈병이 났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모래치우기를 3년이나 하니 다시 모내기를 할 수 있는 논이 나왔다. 그 논은 홍수 이후 ‘모래배미’라는 이름이 생겼다. 모래배미에 새로 모를 심던 날 기뻐하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어린다.
2. 학교에 가지 말라고요?
어린 시절은 일만하고 살아온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논에 가서 김매기를 했고, 밭에 가서 고구마, 콩, 팥 심고 캐고 거두는 일, 밭매기, 가을이 되면 논에 가서 새를 쫓ㅋ고, 집에서는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일 등등 집안일은 끝이 없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신나게 놀 때도 일을 해야 해서 섭섭할 때가 많았다. 그런 내가 중학교 입학 때가 되자 부모님은 중학교에 안보내신다고 하셨다. 88 중학교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자ㄴ 서러웠다. 부엌문턱에 걸터앉아 서럽게 울던 이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도 중학교에 ..
나도, 동생들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우등상은 기본이고 바로 밑의 동생은 말을 얼마나 똑똑하고 야무지게 잘하는지 ‘아나운서’라는 별명을 얻었고, 셋째도 넷째도 시골 작은학교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런데 우리집 딸 여섯 중에 딸 셋은 중학교까지만 보내주셨다. 중학교만 졸업한 딸 셋은 안타깝게도 날개를 펴지 못했다는 생각이ㅉ 든다. 고등학교에 보낸 딸 셋은 자신들의 힘으로 대학을대학의 경우. 이 중 한 1마쳤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옷 만드는 기술도 배우고 한복 짓는 기술도 배웠지만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아
배운 기술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신 동생들 옷을 만들어 입혀 학교에 보내면 동생들은 학교에서학교에서는, 제일 환하고 예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귀염둥이가 되어 좋아했다.
당시 농가 부업으로 ‘홀치기’라는 것이 있었다. 또래의 아가씨들이 누군가의 집에 모여서 이 일을 했는데 비단 원단에 찍힌 점들을 코바늘에 꿰어 실로 얽어 염색을 해서 옷감에 무늬를 만드는 것으로 일본에 수출을 한다고 했다.
이 일은 용돈 마련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 나는 농한기에 주로 이일을 했다.
3. 동네에서 제일 멋진 총각에게 시집갔는데...
같은 동네에서 자란 결혼적령기의 아가씨들이 마음에 품은 총각 중에는 지금의 내 남편이 단연 으뜸으로 손꼽혔다. 키가 늘씬하게 컸고 잘생겼었다. 남편의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논밭이 넉넉해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다만 흠이라면 8남매의 맏형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동네지만 내외의 구분이 심했던 탓에 동네 아줌마의 중매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결혼하기 전에 남편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3년 동안 약혼의 기간을 거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친정아버지는 살림의 밑천이었던 큰 딸을 시집보내시며 이불이며 장롱이며 그릇이며 좋은 것으로 잘 장만해 주셔서 시집가는 것을 구경나온 사람들은 시집 잘 보낸다고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장밋빛 꿈을 가졌던 결혼식 뒤에 시집살이는 혹독했다.
4.혹독했던 시집살이와 기도의 힘
남편은 아래로 남동생 셋에 여동생 넷을 두었는데 막내 시동생은 겨우 다섯 살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홀로된 시어머니는 우리가 결혼 후 건너방에 신방을 차리자 안방을 두고 가운데 방에서 주무시는 날이 많았다. 시어머니는 남편을 지나치게 의지했다. 남편은 워낙 착한 효자라서 어머니께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는데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내게 트집을 잡으셨다. ‘그 일은 왜 그렇게 하느냐 이 일은 왜 이렇게 하느냐’ 설상가상으로 시누이들은 어머니와 한통속이 되어 없던 일도 있던 일로 만들고, 있던 일도 없던 일로 만들며 애를 먹였다. 밤늦게 시어머니께 야단을 맞아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피신을 하기도 했고..., 눈물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더구나 혹독한 시집살이 속에서 임신을 하면 2개월을 못 넘기고 유산하기를 네 번이나 했다.
친정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전주에 유명한 한의원을 찾아내 한약을 지어 먹였고, 다섯 번째 임신을 하자 친정 동생이 자취하는 자취방에 나를 보내 몸과 마음의 안정을 찾게 했다.
그렇게 큰 아이를 출산하고부터는 유산이 되지 않아 두 딸을 낳고, 이어서 아들 둘을 더 낳았다. 나는 친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일을 많이 하고 고생하여 시집가서도 고생한다고 생각하고 내 딸들은 어떻게든 공부를 잘 시키고 일을 시키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하지만 농사일을 하면서 시골구석에서 아이들을 잘 기른다는 것이 어렵게만 생각 됐다.
내 몸이 부숴져라 일을 해도 여전히 끝이 없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몸이 마르기 시작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전신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원대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하여 온갖 검사를 했지만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의사들의 실험대상이 된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트레스에서 오는 통증이었다.
그런 내게 친정어머니께서 기도하시는 권사님을 모시고 오셨다. 권사님께 기도를 받으니 통증이 가셨다.
결혼 전 친정에서 희망이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친정어머니는 넷째까지 딸을 낳으시고 먼저 신앙생활을 하신 친척들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교회에 나가 정말 아들을 낳으시고 신앙생활을 잘하셨다. 친정어머니는 농사일로 바쁘고 힘든 생활 속에서 새벽기도를 쉬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도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비록 상급학교에 진학은 못했어도 겨울에는 교회연합으로 성경학교가 열려 십리길 이십리 길을 걸어다니며 성경을 공부하고, 여름에는 교사강습회에 참석하여 성경과 함께 아동교육에 대한 공부를 하며, 교회에서 어린이부 교사로 봉사 했는데, 결혼 후에는 교회에 겨우 출석하기도 버거웠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강력한 기도의 능력을 체험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통증으로 고생을 하고 기력이 쇠해서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기도원에 가서 한 달을 보내며 기운을 차리고 집에 와서도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었다.
4. 일단 숨통을 열고...
나는 아이들만큼은 제대로 교육을 하고 싶었다. 딸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익산 시내에서 독서실을 하는 친정 막내 동생에게 보냈다. 어린 아들 둘만 내가 데리고 있다가 그 아이들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내가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익산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아이들을 데리고 분가를 했다. 남편은 동네에서 이장 일을 맡고 있었고, 시어머니와 함께 시골집을 지켰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라 젊은 시절부터 이장이 되어 최근까지 40년을 이장으로 ㄹ보냈다. 위로 두 딸은 할머니께 시집살이 당하는 엄마를 보면서 일찍 철이 들었다. 큰 아들은 사춘기 시절부터 방황하여 내가 몸이 아파 잘 돌보지 못한 값을 치르게 했지만 지금은 아주 성실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익산 시내로 나와 아이들 학교생활 뒷바라지를 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남편 없이 혼자 네 아이를 데리고 차를 몇 번이나 ㅊ 자연농원이나 민속촌에 갔던 일은 지금도 자녀들이 가끔 이야기 한다.
5.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네 자녀들은 모두 직장과 사업에 안정적이다. 자녀들이 잘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여 손주들을 열심히 봐주었다. 덕분에 자녀들은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게 살고 있다. 아직 막내는 결혼 하지 않았지만 세 자녀는 손주를 둘씩 안겨 주었고 큰 딸의 아이, 작은 딸의 아이, 큰 아들의 아이를 차례차례 돌봐주는 육아전담 할머니로 살았지만 그도 잠시인 듯 큰 손주가 벌써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다. 우리 부부는 네 자녀와 손주들까지 큰 딸을 중심으로 해마다 2박3일 혹은 그 이상으로 국내외를 여행하여 행복하게 지냈다. 손주들이 더 커서 대학에 가고 성인이 되어도 함께 여행하며 살고 싶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권사님을 따라 새로운 교회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다시 열심히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새벽기도회에 나가 주님과 만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나는 권사직분을, 남편은 집사직분을 받고 주일마다 함께 예배를 드린다. 교회에서는 오카리나 찬양대와 성가대로 봉사하며 너무 감사하다.
무엇보다도 학교교육에 목말랐던 내가 복지관에 나와서 이것저것 공부하고 여러 가지 수업을 들을 수 있어 ㅅ신나고 재밌다. 젊은 시절 쓰리고 아픈 기억이 많지만 그런 시간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어 모든 일이 감사하고 행복하다.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