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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신학
제 3 부 이스라엘의 요청되지 않은 증언
<1>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증언 : 이스라엘의 요청되지 않은 증언에 대한 목적과 성격
1. 요청되지 않은 증언에 대한 여러 가지 모티브들
왜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요청되지 않은 증언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백성이 단순히 시끄럽게 관심을 유도하는 자기 선전자들이기 때문이며 백성들이 극구 요청되지 않은 증언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긍정적이고도 좋은 이유들이 존재하는데 증인은 단순히 돕기 원하며 가능한 한 가장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은 ‘요청되지 않은 증언’을 하나님에 대한 신학으로 한정시켜 자신의 언어 표현을 통해 계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증인의 역할을 하면서 그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관심들을 즐기고 있으며 자기표현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이 지나칠 정도로 터무니없는 과장된 것은 야웨에 대한 이스라엘의 증거가 열방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시 96:10). 이스라엘은 야웨를 중심으로 세부적인 것을 제시하며 야웨에 대한 네러티브의 묘사에 있어서 다른 등장인물들을 스케치하여 넣어 야웨를 특정 문맥 속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이스라엘은 특별히 통찰력을 가지고 야웨에 대한 언어 표현을 하고 이중 어떤 관계성들이 야웨의 성격에 밀접하게 그리고 본질상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고자 ‘연관관계들’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 요청되지 않은 증언에 대한 여러 가지 모티브이다.
2. 야웨와 파트너들과의 자유와 열정의 연계
야웨의 파트너란 중립적인 용어는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성이 지닌 역동성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야웨는 결코 홀로 계시지 않으며 언제나 관계 가운데 계신 야웨라는 관계성에 대한 것으로 ‘야웨께서 창조하신다, 구원하신다, 명령하신다, 인도하신다’라는 표현들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야웨는 강력하고도 변혁적인 동사들의 능동적 주체 혹은 주어로 야웨의 파트너들은 야웨의 행동의 대상들이며, 야웨께서 실행하시려고 결정하신 바가 이루어지는 대상으로서의 수혜자들이다. 야웨는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위에 계시는 초월적 존재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상호관계의 차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야웨는 자유와 열정 가운데 자신의 파트너들에게 헌신하신다. 야웨는 파트너에게 돌보심과, 성실하심 그리고 의무감의 공약의 행위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이스라엘은 제시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와 수사로서는 자유 가운데 야웨께서 파트너와의 관계성에 대한 주권을 확실히 유지하고 계시다는 야웨의 성실하심과 인간과의 관계성은 표현할 수 없어 자신의 공약을 철회할 수도 있지만 야웨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신다. 특히 노아홍수 네레티브의 시작(창 6:5~13) 하나님의 “세상인 피조세계”를 사랑하시는 반면에 야웨는 분노어린 자유 가운데 언약을 포기하실 수 있었고 주전 587년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이 관계성을 종로하실 수 있었지만 야웨는 열정 가운데 파트너에게 헌신하셨다. 심지어 야웨는 자유와 열정이 지닌 특별한 변증법적 관계 때문에 야웨의 파트너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요청되지 않은 증언이 밋밋하거나 일차원적으로 쉽게 소진될 수 있었지만 야웨의 주권적 자유로 행하신 헌신이나 고통스러운 헌신은 자유와 열정으로 이스라엘과 개개 사람들에게 헌신하셨으며 열방과 피조세계에 헌신하셨다는 것으로 야웨와 파트너들과의 자유와 열정의 연계라고 축약할 수 있다.
<2> 야웨의 파트너 이스라엘
세상 속에서 지속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은 구약에 따르면 구체적인 사회와 정치적인 구현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도록 기대되어진 하나의 신학적 현상 때문에 신비로운 존재들로 이스라엘과 야웨, 야웨와 이스라엘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불가분의 관계는 역사적이며 정경적인 관점에서 구성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신학적으로 패러다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 이스라엘에 대한 야웨의 시원적인 사랑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지만 야웨의 결정적이고도 주도적인 행위로 인해 이스라엘은 근동 세계 가운데 존재하게 되었다.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들(창 12~36)과 모세를 중심으로 한 출애굽(시내산 네러티브 , 출 1~24)은 주권적인 능력 가운데 계신 야웨의 말씀이며, 말씀을 통해 무자하고 노예의 속박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의 불행한 상황이 야웨의 주권적인 말씀에 의해 이스라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수용되어지며 순종되어짐으로 극적으로 변환된 사건이다.
불순종하던 이스라엘의 포로 유형에서 야웨의 사랑이 다시 표면으로 부상한 “선택하다”란 용어는 이스라엘에 대한 야웨의 지속적인 관심을 특별한 방식으로 천명한 방식이다(사 44:1)
2. 이스라엘의 언약적 의무사항은 순종이다
사랑, 구원, 지명이란 시작의 행위가 사랑의 행위 가운데서도 주권적이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으시는 주권자 야웨에 의해서 “언약”이란 용어로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은 야웨의 언약적 파트너로 순종으로 정의되는 민족이다. 언약이 이스라엘에게서 하나의 실제적인 사안이 된 것은 기원전 8세기와 7 세기 경에 신명기 전승의 후원 아래서 윤리적 유일신론이 부상하게 된 이후 야웨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그리고 창세기 선조들과 맺으신 언약들)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주도적 언약이며, 명령(창 12:1, 17:1)의 차원이 담겨 있으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은 인간의 의무 규정에 관한 근본적인 개념(조지 멘덴홀과 클라우스 발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아브라함 가운데 “미리 전해진 복음”(갈 3:8)으로 천명하며, 자신의 유대 개통의 적대자들을 “모세와 율법”이라고 지칭하고 있고 은혜 역시 언약 아래로 귀속되어야 언약이 지닌 기대와 요청의 관계성으로부터 은혜를 제거하게 만들 수 있으며 언약을 단순히 율법으로 환원 시키게 할 수 있다.
물론 이스라엘은 야웨의 자기희생의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반응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데 모든 진지한 사랑의 관계가 그러하듯 사랑에 대한 적합한 반응은 사랑하는 자의 뜻과 목적, 바램과 소망 그리고 의도에 부합되도록 하기 때문에 신명기 전승들은 변명 없이 야웨의 설명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올바른 반응은 순종으로 세상 속에서 삶을 가능하도록 베푸신 사랑의 목적대로 야웨를 사랑하는 것이다.
(1) 듣고 정의해야 할 의무
야웨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가운데 반응한다는 것으로 약한 자들의 복리에 대한 야웨적 관점의 의무사항과 헌신 사이의 이러한 연관관계는 언약적 전승들 가운데서 특별히 “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 17:5)”는 말씀과 같이 정의를 행하라는 이러한 구체적이고도 근본적인 명령이 이스라엘의 삶의 전부를 특징짓고 이러한 명령은 (출애굽기에서 증명되고 있듯이) 자기 보호, 자기 충족, 그리고 자기 탐닉의 삶에 대한 비평적이고 돌출적인 성격을 지닌다.
정의에 대한 명령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책을 특징짓는 것으로 정의는 구제나 자선이 아니며, 낭만적인 선행주의가 아닌 공동의 선을 위한 공동체를 해롭게 하는 탐욕적인 주도세력들에 대한 대항을 위한 공적 정책과 공적 실행, 공적 기구들을 세우고 운용하는 일종의 강제 규정이다. 공공의 선이 요구하는 바는 능동적인 사회적 힘이 활력 있게 구동되어짐으로써 공동체 전체를 증진시키는 일이요, 또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동일하게 평가되고 있는데 이웃에 대한 사랑은 특권이 없는 자들에게 저의 차원에서 사회적 자산과 사회적 힘, 사회적 접근의 기회들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을 통해서 실행되어진다. 더욱이 이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장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회적 요구사항을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시는 야웨의 성격에 그 뿌리를 두게 한다(호 14:3).
(2) 보라는 초청
본다는 전승은 야웨의 제의적인 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야웨의 임재, 거룩, 아름다우심의 비전을 응시하도록 초정되어진다. 즉 하나님을 보고 의무조항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것은 모세와 아론, 나답, 아비후 그리고 칠십인의 장로들에 대해서 이들이 시내산에 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보았고, 먹고, 마셨다”(출 24:10, 11)라고 확언하고 있는데 야웨의 임재 가운데 머물며 하나님을 보고 야웨와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교제하는 것이며 시내산에서의 이러한 만남은 그 다른 무엇을 위해 주어진 도구적인 것이 아닌 야웨의 임재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시내산의 만남은 교제와 하나됨을 가능케 하신 야웨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들어가는 일을 가능케 만드는 법규들을 실천하는 일을 거룩함으로 이해한다면 이스라엘에 속한 개인들이 야웨를 가시적으로 경험하는 일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있다. 듣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긴장관계는 듣는다는 것과 “얼굴”을 본다는 것 사이에는 심각한 긴장관계가 놓여 있음이 분명한데 이것은 성경본문의 교회공동체들 가운데서 특징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논쟁으로 야웨의 신실하신 주권은 야웨 자신의 삶에 관계된 것이 거룩하심을 믿고 이스라엘은 “흔들림 없이” 야웨를 신뢰하는 일이다. 삶의 모든 측면들이 야웨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 세상 속에서 이스라엘의 존재에 적합한 그런 영역임을 확언하고 있다.
세상 속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소명과 궁극적인 목표의 일부로서 세상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피조세계의 적합한 운용과 복리를 위한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출 19:5~6)이며 제사장의 역할은 세상 속에서 복리와 치료가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종국적으로 야웨와 세상 사이의 참된 교제를 가능케 한다.
창세기 3~11장의 이야기들은 야웨의 신실하신 피조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아브라함과 사라 가족에 대한 부르심은 세상의 반역에 대해 “너를 인하여 땅의 모든 자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12:3)고 온 나라가 야웨의 주권 가운데 계시는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자신들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위기와 병치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존재의 한 이유는 온 피조세계가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며, 야웨는 세상이 복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작정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삶은 세상의 복리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요셉 이야기에서 요셉이 이집트에 대해 크나 큰 복을 일구어 냈지만(창 41: 25~36) 그 복은 이스라엘에게는 노예상태를 만들게 된 이집트의 복을 의미하며 야웨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요셉을 예비하심을 지나 포로된 자들을 모세로 하여금 바로와 강국 이집트의 복리가 이제 하나의 노예공동체로서, 초강대국 이집트의 운명이 달려 있는 복의 힘을 담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손에 놓여 있는 가운데 이사야 40~55장에서 포로기의 이사야에게 이스라엘의 증언의 지평은 확장되어 온 인간 세계를 야웨의 주권과 관심의 대상과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리라 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6~8),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백성의 언약”(사42:6)과 “열방의 빛”(사 49:6, 사42:6)이란 두 표현은 이스라엘이 야웨의 다스림의 좋은 소식을 이방 세계에 알림으로써 이방세계 역시 결박이 풀려 구원받게 하라는 하나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 유대 국가들의 복리는 이스라엘의 삶과 사역에 맡겨진 것이다(눅 2:32).
3. 패역함으로 책망 받고 흩어진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할 의무(레 19:2~4), 야웨께서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그네를 사랑해야 할 의무(신 10:19) 아래 놓여 있지만 패역한 이스라엘은 야웨의 명령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세상 속에서의 자신들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들었고 흩어졌다.
① 실패한 공동체 : 여호수아 - 사사기 - 사무엘 - 열왕기서에서 이스라엘은 야웨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감당함에 실패한 공동체로 묘사되어 있다(열하 17 : 7~41, 시 106).
② 포로 유형 : 심판은 사실상 이스라엘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흩어지게” 하신다는 징벌이며, 철저한 패망이요, 손실이며 야웨와 함께 하는 삶의 상실을 초래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강제 추방된 것은 지정학적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하에서 이루어진 바벨론 제국의 팽창의 한 여파로 이스라엘은 무효화되어졌으며 파트너십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을 내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교훈하신 것이다.
(1) 새로운 믿음의 실천 사항들 : 회개
“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왕상 8:33~34)”
돌이킴은 기다림 중에 자비로우신 주권적인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 신 4:31)이며 회개는 이스라엘의 저주의 원인이었던 기억, 거룩함, 정의와 같은 이슈들을 수반하고 있다. 반면 포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은 관행처럼 탄식하고 항의하던 공동체이다.
탄식의 관행은 시편 137편과 예레미야 애가에서 보여 듯이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종국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야웨의 공약과 헌신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지만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주의 초원에 있는 양 떼에게서 진노를 거두지 않으십니까? (시 74:1)”라는 말로 야웨의 포기 성향에 항의하는 동시에 야웨의 새로운 관심과 귀 기울이심을 촉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탄원에 의해 환기되어 마음이 움직여질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포로생활 속에서 솔직한 토로인 탄식과 소망 어린 청원인 항의가 효과적이었다. 야웨는 정말로 이스라엘을 향해 새롭고도 관심어린 방식으로 마음이 움직이셨다.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가운데 나오는 포로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위대한 약속의 신탁들은 확실히 포로 된 백성들에게는 흩어진 자들이 곧 불러모아질 것이라는 소망에 대한 예언들이요 규명들이었다.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렘 31:10)”
(2) 소망의 특징은 회복이다
소망은 특징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속해 있으며 야웨의 심판은 교훈이나 책망 혹은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닌 심판은 결코 모욕당하지 않으시는 주권자이신 야웨의 심판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슬픔과 항거 속에 뿐만 아니라 기대 속에서 자신들을 흩으셨던 하나님은 또한 모으실 것이라고 믿었으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은 욥기 42장 7~17절, 극한 상황들 속에서 믿음이 어떻게 실천되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는데 무엇이 옳은 가를 말하는 것(욥 42:7~8)으로 야웨는 그 믿음의 화답으로 욥의 자녀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심을 기억해야 된다. 분명히 욥은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욥기서는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살아 있으며 욥기 42장 7~17절은 다시 모아진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4. 이스라엘을 향하신 야웨의 새로운 돌이킴
아직도 이스라엘은 야웨의 무서운 심판이 무엇인지를 이해를 못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회복시키신 긍정적인 태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분명 이스라엘이 회개했기 때문이거나 이스라엘이 강력히 항거해서 야웨의 마음이 돌이켜 야웨로 하여금 성실하심으로 돌아가게 했던 것은 아니라 야웨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징벌했던 열방들이 위임사항의 한도를 벗어남으로써 구원이라는 야웨의 반대 행위를 초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 값이 지불된 것이다(사 40:2). 이스라엘에 대한 혹독하고도 적절한 포로유형이라는 징벌은 끝없는 벌이 아니라 야웨에게 지불해야할 빚이 지불되어졌고 그 결과 야웨는 이제 야웨의 자의에 의해 이스라엘을 향해 긍정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는 방향전환이 중요한 요소이다.
심판의 유형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 (렘 30:12~13)”라는 치명적이고 죽을병으로 표현했으며 에스겔에서는 “네 음란과 네 가증한 일을 네가 담당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겔 16:58~59)”와 같이 성적인 부정함은 반드시 징벌 받아 마땅한 것으로 이미지화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 너와 세운 나의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 16:60)”는 에스겔 선지자의 말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내가 넘치는 진노로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네게서 가렸으나(사 54: 7a, 8a)"
“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54:7b, 8b)"는 두 본문 사이에 일어난 모두에게 배척된 말이 새로운 포용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이사야 54장 7~8절과 확실히 예레미야 30장, 그리고 에스겔 16장에서 갑자기 수사적 전환은 대개의 경우 본문들을 파편화시킴으로써 본문이 지닌 예술적 긴장감을 없애버리는 그런 종류의 비평이론에 의해 가볍게 설명되는데 본문을 파편화시킴으로써 본문을 우리의 이성에 혹은 우리의 신학에 부합되도록 만들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이들 본문 각각으로부터 야웨 자신의 삶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러한 음성, 즉 야웨의 책망하시는 말씀이 들어있지만 각각의 경우 야웨의 심판은 직접적으로 반전의 말씀, 즉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가능성, 즉 말씀과 말씀하시는 분에게만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낳게 하는 반전의 말씀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포로귀환 역시 페르시아의 주도권이 바벨론의 팽창을 종식시킴에 따라서 생겨난 운명의 역사적, 정치적 역전으로 경험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스라엘의 미래는 회개하고 순종함으로 야웨의 설명할 수 없는 선하신 의도와 이스라엘에 대한 재 공약 혹은 재 헌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 불러 모으다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렘 31:8)”
“ 내가 너희를 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겔 36:24)”
“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북쪽에다가 이르기를 '그들을 놓아 보내어라' 하고, 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여라(사 43:5~6)“
(2) 사랑하다
“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 ?( 사 48:14)”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렘 31:3)”
(3) 치료하다
“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렘 30:17b)"
(4) 용서하다
“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 31:34)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 오너라, 자비롭게 맞아 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 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사 55:7)“
이제 용서 가운데 야웨에 의해서 부여된 자신의 새로운 삶을 자세히 계획하고 새로이 구성하는 일일 이스라엘의 과제이며 용서를 통해 이스라엘은 빌려온 시간, 즉 빚진 자로 살게 됨에 감사함으로 야웨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묵상하는 토라 경전은 죄책이나 두려움 혹은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주야로 묵상하기로” 결심(시 1:2)하였으며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서 이루어진 개혁으로 통해 시내산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공적으로 토라의 백성 됨을 서약했던 사건을 기억(느 8:9) 해야 되는 것은 이스라엘은 다른 백성과 다르게 십일조, 안식일, 결혼에 관한 새로운 결심( 느 10~13장)으로 공동체 내에서 정의에 대한 새로운 결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느 5장).
순종은 이스라엘의 존재에 긴박성과 구별성을 부여 하지만 절망이나 자기 과찬 속에 고립되어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소망하고 있는 야웨의 약속과 야웨의 명령에 따라 세상 속에서 미래가 이 세상 속에 있는 어느 것에도 속해 있지 않고 야웨의 선하신 의도에만 종속되어 있다고 천명하는 야웨의 약속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5. 이스라엘과 뒤이어 나타난 신약의 교회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신약 본문을 언급하며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표현함으로써 구약 교체설의 주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16)”라는 종결적 논박 속에서 바울은 실용주의적 할례 문제의 관심과 이상적인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관심들 사이의 대조라는 문제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표식으로서 이상적인 것을 선호하고 있는 주장하여 바울은 시종일관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특히 교회 공동체를 유대교에 대한 실용주의적인 구성자로 유지할 수 있다면 한 쪽 방향으로 과도하게 진술하고 있지만 포로 유형 이후의 이스라엘의 개혁을 둘러싸고 있는 긴장 상태들을 피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3> 야웨의 파트너인 인간
구약은 인간됨에 대한 기이하고 특이한 개념을 만들었는데 그 기이성은 구약은 인간됨에 대한 자율적이거나 보편적인 개념을 규명하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이 인간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규명은 특징적으로 구약이 지닌, 야웨적이고도, 언약적인 상호작용적인 형태의 실체라는 문맥에 놓여 있는 결과 인간됨이란 언제나 야웨적 관점의 인간됨, 즉 유대적 인간됨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러한 기이한 연관 관계는 구약에서 인간들은 이스라엘에게서 그러하듯이 야웨의 거룩하심과 동일한 교류적인 과정들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교류적인 과정은 인간들에 대한 “성경적 이해”로 하여금 자율이란 방향으로 움직여나가고 있는 모든 현대적 개념의 인간됨과 심각한 거리를 두거나 인간됨의 개념에 반하는 하나의 비평적 항의의 위치를 점하게 만들었다. 구약은 이스라엘 계통의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 인간으로부터 모든 다른 사람들이 추출되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특별한 선민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다.
1. 인격성이 지닌 언약적 개념들
인격성이 지닌 언약적 개념들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신학적 요소는 5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있는 인간은 “남성과 여성”을 그 특징으로 하며(창 1:27) 그 결 과 사람의 인격성이 지닌 상호공동체적인 성격과 성적인 면에 있어서의 교류적 성격이 확언된다.
(2)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있는 인간은 왕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즉 인간은 땅에 대한 “다스림”의 명령을 위임 받았다(창 1:28).
(3)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있는 인간은 동전에 새겨진 주권자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의 주권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경험되고 있지 않는 모든 다른 대상들 가운데 서 하나님의 주권을 대변하는 대표자요 대리 통치자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다스 림”을 위임 받는 것이다(창 1:28, 시 8:5~8).
(4) 하나님의 이미지로서의 인간은 우상을 금하는 성경전통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다른 모든 이미지들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되며, 그 결과 인간은 “인격”과 “인격적”이신 하 나님의 성격에 대한 가장 온전한 실마리들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주장은 부정적이고 도 반 우상적인 의도뿐만 아니라 중요하고도 긍정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5) 창세기 5장 1절과 9장 6절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언급은 아담과 하 와의 “최초의 범죄(타락)”는 뒤 따르는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형상이란 성격을 부여 하는데 거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언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주제에 관련한 이스라엘의 의도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는 결론을 유출할 수 있는데 사람의 인격성이 지닌 생리학, 즉 영, 육체, 생령, 그리고 마음 등의 생리학의 문제는 네 가지의 중요한 통찰력들을 낳았다.
(1) 인간은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며 “생령”이 되기 위한 목적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숨 이 불어넣어졌다(창 2:7, 시 103:14).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은 처음부터 그리고 끊임없이 생명을 갖기 위해서 야웨의 돌보시고 자상하신 공급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 다 (시 104: 29~30). 이 의존이란 문제는 그 자체로서는 죄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심각한 문제점을 불러일으킨다.
(2) 생령이 되게 하실 목적에서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니”란 표현에 대
한 규명은 모든 이원론을 배제한다. “생령”이 일반적으로 “영”으로 고전적 사고의 “몸”에 대한 하나의 대조, 즉 이스라엘적인 표현 방식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는 구분의 하나인 “생령”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 의 종속적인, 그리고 활력이 주어진 통일체요. 이러한 통일체란 성격을 잘 보여주는 표현으로 심신 합일적인 존재라는 용어가 적합할 듯 하지만, 단 하나의 단서가 있다면 이 용어 자체는 이원론이란 유산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분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이러한 생리학적 이슈들의 직접적인 일부는 아니지만, 이 생리학으로부터 파생되 는 또 하나의 인식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은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야웨께서 주신 생명 을 낳는 호흡에 의해 공적으로 인정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라는 점 과 그러기에 인간들은 오직 이러한 구성원 됨이란 문맥 안에서만이 인간성을 갖게 된다 는 인식이다.
인간은 야웨와의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존재로서, 야웨와의 밀접한 상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상호 관계성은 야웨의 성격과 인간의 인격성이 지닌 성격 사이에서 “어울림” 혹은 “조화”의 문제를 생각게 하지만 관계성, 상호성, 어울림과 조화, 비동질성 등등이 이 모든 것들은 언약이란 유연한 개념 속에 드러나 창세기 9장 8~17절과 같이 하나님과 “모든 생물”, 곧 땅에 있는 “모든 육체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존재한다는 점이 확언되고 있다. 인간은 야웨의 언약 파트너로 야웨께서 제정하신 이스라엘의 언약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야웨와 맺은 자신의 언약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일반화시킨다는 점에서 넘쳐흐르게 함으로써 그것이 상호교류와 상호관계라는 보다 포괄적인 관계로까지 나아가도록 허용하고 있다.
2. 야웨의 주권과 자비에 알맞은 인간들
야웨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권적이시다. 인간이 야웨와 “어우러져” 있듯이 인간의 순종이 야웨의 주권과 연결되어있고 인간은 야웨의 성실하심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공적인 재가를 받았고 야웨의 선하심과 신뢰할 만하심과 관대하심 때문에 인간은 기본적으로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야웨의 성실하심과 자비는 특별히 창세기 1~2장과 시편 8편에서 인간의 특성은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독선과 자율적인 책임을 낳게 하며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탄원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고전적인 기독교전통의 해석은 야웨를 상대하면서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주장을 천명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충분히 숙고하고 성찰하지 못해왔기 때문에 인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천명과 자기 포기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는 야웨의 주권과 성실하심 사이에 놓여 있는 해결되지 못한 내면성에 대한 하나의 상대적인 표현이다. 고전적인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지닌 이 측면을 유대 전통으로부터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으며 자신의 해석상의 초점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을 다른 해서전통으로부터 회복시키는 일을 성찰해야 된다.
3. 언약이 보여주는 인간됨의 특징적 표징들
(1) 인간됨의 세 분야
① 듣는 것(순종, 미 6:8) : 순종에 대한 명령은 청지기적 사명, 즉 세상과 인간의 관리하에 위임되어진 세상에 속한 피조물들에 대한 지혜로운 보호, 즉 스튜어드쉽이란 문제를 제기하는데 긍정적인 측면(겔 34:14~16)과 부정적인 측면(겔 34:3~4)으로 표현된다.
② 지혜와 분별력 : 율법주의자로 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하나의 보호자이며 순종은 피조세계의 향상을 위해 긍정적인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상상력 넘치는 능력을 동반한다. 지혜는 또한 폭넓은 배움과 통찰의 실행으로 지혜와 분별력은 눈 앞에 놓인 사적인 이익을 위해 지구를 해치는 경향을 보이는 “할 수 있다”라는 사회 속에서 고삐 풀린 기술적인 지식에 대한 하나의 교정책이다.
③ 근본적인 신뢰: 완전히 인간이 된다는 것은 야웨를 믿을 수 있는 분으로, 함께 임재해 계시며 강하시고 관심을 갖고 계시며 언제나 관여하시는 분으로 철저하게 흔들리지 않게 근본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시 25; 2~3, 26:1~3, 28:7, 32:10).
인간됨의 순종하고, 분별하고, 신뢰하는 것은 비록 서로 상이한 전승 속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모두 하나에 속해 있는 필수 조건이며 자격이다.
(2) 위기 속에 있는 삶
① 탄원 : 인간의 존재가 고통과 역경 중이거나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야웨와의 삶을 관심사로 하고 있지만 불평은 때때로 직접적으로 야웨의 부재와 침묵, 무관심하거나 소홀히 하신다는 생각을 현재적 어려움에 책임을 야웨에게 맞추게 된다. 그렇지만 야웨의 무관심은 죽음의 세력으로 하여금 주도권을 갖고 고통을 야기시키도록 허용하게 만든다. 이런점에서 인간은 길들여진 침묵 그리고 경외감에서 오는 침묵이란 모든 유혹을 물리친다. 더욱이 야웨를 향한 이러한 분노와 강력한 항의가 정적주의적인 크리스천 경건에서 종종 생각되어지는 것과 같은 불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강력한 자유와 책임의 행위라는 점을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고 있다. 긴박함 속에서 야웨에게 전해지는 명령형으로 이루어진 탄원을 불러일으키는데 탄원은 불평에 이어 의례적으로 뒤따르며 탄원을 통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야웨에게 명령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두 눈에 불을 밝혀 주십시오(시 13:3)“
“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재난이 가까이 닥쳐왔으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님,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생명을 원수의 칼에서 건져 주십시오. 하나뿐인 나의 목숨을 개의 입에서 빼내어 주십시오(시 22:11, 19~20)“
이런 탄원은 깊은 자기 천명과 자기 존중의 행위로서 체념이나 혹은 존경의 형태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소망의 행위로 현재의 고통이 삶이 원래 야웨께서 의도한 삶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있게 알게 한다. 만약 야웨께서 구동화되어질 수만 있다면 상황이 변화되고 올바르게 되어질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 가운데 단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② 감사드림 : 불평과 탄원이란 언어표현은 야웨의 회복적인 행위 가운데서 특징적으로 발해지고 야웨의 새롭게 하심이 실행됨에 따라 감사드림 중에 인간의 불평과 탄원이 발해지는데 이 감사드림은 제의적인 희생제사 행위이며 때에 따라선 공동체를 향한 관대한 행동의 양태를 띠기도 한다. “음부 밖으로” 나오는 과정의 완결은 고통이 야웨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기쁘고도 가시적인 인정으로 야웨와 인간과의 관계가 다시 연결되어졌으며 이 가운데 인간은 이제 일차적 실행자가 아니라 야웨의 선하심에 대한 적합한 수혜자가 되었다는 뜻이며 야웨의 관대하신 평정의 상태 가운데 있는 삶으로 회복되어지고 그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불평- 탄원- 감사드림이란 순환구조는 시편의 특징적인 구조이기며 사람의 인격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찰의 일차적 자료이다. 그럼으로써 회복의 전 과정은 찬양과 소망으로 가득하다.
찬양은 인간됨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의 핵심적인 표징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포기의 찬양은 자원하는 제의적 행위인 기쁨의 양도 혹은 포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양도나 포기는 단순히 한 번의 제의적 순간의 포기가 아니라 찬양의 실행 속에서 인간은 자아의 모든 것과 자아가 주장하는 모든 것들을 온전하고 주저함 없는 항복 가운데 야웨에게 포기하게 될 그때에 최선으로, 가장 자유롭게 잘 살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주인공 욥이 출현하는 드라마의 주변적 요소이지만, 창세기 3장에서의 사탄은 뱀으로 존재했고 욥기서에서 사탄이 아닌 야웨, 즉 자신의 종국을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야웨만을 욥은 상대할 필요가 있었다. 사탄이 아닌 아브라함을 상대역으로 한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지고한 사람으로서 실체에 대한 이스라엘의 네러티브적 이해 안에 철저히 살았던 자(창 22장)이기 때문에 창세기 17장 1절에선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에웨께 칭송 받는다. 욥 또한 흠이 없으며 제한 없는 믿음의 사람(욥 1:21)이었지만 특이한 모델로서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앙의 네러티브 속에 위치시키기에는 온전히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욥은 아브라함의 단순한 모습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된다.
두 믿음의 사람들은 순종 가운데 복종할 수 있는 자들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좋은 이스라엘 사람일 뿐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적인 사람임이 드러나고 있고 욥은 결국 사람일 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난 가운데 어떠한 불평함도 없이 이 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인간은 야웨의 법칙에 따라 살도록 명령되어져 있기 때문에 이 법칙들을 위반했을 때 고통이 온다.
이러한 무기력한 두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야웨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야웨는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와 같으시며 자상히 돌보시는 어머니와 같이 인간이 음부에 놓여 있을 때에도 기꺼이 능력 있게 하사 새로움으로 나아가게 하신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핵심적인 확신이며 이것이 인간의 소망이요 결국 인간의 기쁨이다.
<4> 야웨의 파트너인 열방들
열방은 야웨의 자유에 의해서 야웨에게 연결되어 변혁적인 동사들을 갖고 있는 야웨의 특징적인 문장들 속에서 직접 목적어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존재이며 이스라엘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의 삶에 영향을 끼쳤던 열방들 가운데 살아가던 이스라엘은 열방들이 야웨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구약 창세기 족보를 모티브로 하였다.
1. 창세기 족보에 있는 모티브
야웨는 노아와 노아의 후손들과 땅의 모든 짐승들과 온 피조 세계와 영원한 무지개의 언약을 맺으심으로(창 9:8~17)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모든 피조물들의 선조들이며 노아의 언약은 모든 열방에 적용되는데 모든 인간들은 이 가족으로부터 파생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죄는 모든 열방에게 흩어짐의 역사를 안겨준다(창 11:30)
열방들의 무참한 멸망은 이스라엘과 연속성 안에서 파트너로서의 열방이 지닌 한 측면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선물을 부여하실 때에는 열방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하나의 무서운 차별이 존재한다(신 12:29~30).
이스라엘의 주변국인 일곱 나라는 가나안 땅을 요구하는 경쟁적인 주창자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들의 멸망은 부정적인 면에서 볼 때 그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장의 적법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증언이 천명하고 있듯이 야웨께서 장차 처분해 버리실 그러한 장애물이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세- 여호수아 전승과 공격적일 만큼 배타적인 신명기 전승자료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은 저주받은 열방들을 축복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 신 12:3, 18:8, 22:18, 26:4, 28:13). 특히 이스라엘이 “선교의 신학”을 통해서 열방과 관련해 변화의 사역과 소명을 갖게 된다는 문맥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족장들의 전통과 모세- 언약전통 모두 열방들을 자신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삶과 종국에 부수적인 것으로 다루고 있지만, 서로 다른 점에서 그렇게 열방들은 야웨의 뜻에 따라서 제거되어야 마땅한 장애물이란 존재라는 한계점을 다른 한편으론 야웨의 명령에 따라서 복 받고 증진되어야 할 존재라는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다.
찬양과 순종은 야웨의 주권에 도달되어지는 방식이기 때문에 찬양과 순종 가운데 열방들은 이스라엘이 야웨와 관계 속에서 행하도록 기대되어 졌다.
시편 86:9~10절, 열방이 야웨를 찬양하고 순종하리라는 이 기대는 온 나라들이 조만간 반드시 인정해야할 인정의 토대는 온 나라들로 하여금 기쁨의 찬양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의 청원과 명령으로 전환된다(시 117편).
2. 야웨와 열강들
야웨의 주권은 직접적으로 열방들에게까지 확장되어 나가며 야웨의 복들을 열방들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나, 열방들에 대한 멸망의 실행자 혹은 토라의 좌소로서 이스라엘을 중개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야웨와 열방의 관계가 때때로 직접적이며 이스라엘의 지위와 상태에 달려 있거나 거기로부터 파생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작은 인식을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열방들에 대한 신탁에 적용되어 대부분의 예언적 모음집들 가운데 나타나는 예언피치의 표준적 장르가 된다( 사 13-23; 렘 46 46-51; 겔 25- 32; 암 1-2; 습 2).
야웨께서는 열방들을 지으셨고(시 86:9)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도록 승인하셨고 그들 가운데 삶과 복의 가능성을 부여하셨다는 신탁 기사에 따르면 열방들은 자신들이 종속되어 있는 야웨의 지시와 명령을 위반한 자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징벌을 받거나 멸절되어져야 한다. 야웨의 다스림에 대한 위반은 곧 야웨께서 교만에 의해 모욕을 당하시거나(사 37:17,23) 이스라엘이 학대를 받는다는 것을 (사47:6) 의미한다. 그래서 이 패역한 열방들에 대한 미래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1) 애굽 : 학대자요 압제자
애굽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점유했던 나라로 이스라엘 이전에 세워진 형태로 번영했고 이스라엘이 기근을 당했을 때 피난해 가서 양식을 구했던 장소이기도 하며(창 41:53) 족장 야곱의 특별한 복을 받았던 땅이기도 하다(창 47:7~10).
학대자요 압제자로서의 역할은 야웨의 선한 창조를 분열시키는 패역한 종이라는 점에서 모든 피조물은 이 혼돈을 겪게 되었고 결과로 바로는 대단한 규모의 죽음으로 절정에 이르는 징벌을 출애굽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출 12:29~32).
(2) 앗수르 : 교만과 제멋대로의 자율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관심과 시학적 상상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야웨께서 국제정치에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앗수르는 경건치 못한 나라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탈취하고 노략질하려는 야웨의 의도에 순응(사 10:6)했지만 불순종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교만한 자랑과 거만한 자만 속에서 야웨의 명령을 넘어 자기 맘대로 자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패망하였다(사 10:18~19).
(4) 바벨론과 느부갓네살
바벨론에 대해 그렇듯이 유다에 대한 야웨의 주권적인 의도를 거만하게 위반하는 자로 고소를 당하게 된다. 권력과 야망에 대한 집착과 주장들은 원색적인 파워와 뻔뻔스러운 힘의 세계속에서는 통용되 지만 통제되지 않는 파워와 뻔뻔스러운 힘은 결코 제거되거나 야웨의 뜻과 제약에 종속되어 지는데 이사야 본문에 바벨론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만과 자율의 전형적인 구현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사 47:6~9).
(5) 페르시아(바사) : 긍정적이고 순응하는 파트너
북방에서 온 나라(렘 51: 41~42) 바사는 바벨론에게 잔인하고 무자비한 백성이로 고레스는 초대 왕으로 바벨론을 멸망(사 44:28) 시키고 유대 전통의 제의를 회복시키는 하나의 후원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페르시아의 재정적 도움을 받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스 1:2~4; 6:3~5; 대하 36:23).
페르시아는 긍정적이며 반응하고 순응하는 파트너의 모본으로 표현되고 있다.
3. 열방들에 대한 야웨의 자유
야웨는 자신의 자유로우심과 열정 가운데 자신의 목적들을 위해 열방들을 새로운 돌구로 모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갖고 계신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해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사용하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페르시아를 도구 선택하셨다.
야웨의 통치 능력은 열방들의 의도로부터 생겨나거나 그들의 의도에 달려 있지 않으며 완전하고도 명령적인 야웨의 자유로우심 가운데서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심판과 멸절을 넘어 새로운 국가적 가능성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은 원수를 회복시킬 수 있는 야웨의 자유로우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