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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13장1~12
제목 : 복음을 위한 성령의 사람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지시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고,
두 사람은 살라미를 지나 바보에 이릅니다.
총독이 그들을 불러 말씀을 들으려 하자, 바예수라는 유대인 마술사가 방해합니다. 바울이 정죄하니 바예수가 맹인이 됩니다.
이를 본 총독은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13:1-5)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입니다.(1절)
“[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11:19-30에서 언급되었던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졌던 성도들이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안디옥 파송합니다.
파송 받은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의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안디옥교회는 여러 명의 교사와 선지자들이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11:19절에서 언급될 당시보다 많은 성장을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기서 언급된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안디옥 교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직분자들로 보입니다.
한편 11:27에서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음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 언급된 선지자들에 예루살렘에서온 선지자들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단을 살펴 보면,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사울
바나바를 맨 처음에 언급하고 사울을 맨 나중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안디옥 교회에 있어서 중심 서열 내지 신앙의 연륜에 따라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바나바를 비롯하여 시므온, 루기오는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 오기 이전부터 직분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11:20).
그러나 누가 선지자인지 누가교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 니게르라는 말이 검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때,
시므온은 아프리카 출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 '젓동생'이란 같은 젖을 먹고 자란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친한 친구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표현이 헤롯과 마나엔이 서로 매우 친밀한 사이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2)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웁니다.(2절)
“[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주를 섬겨 금식할 때. 행27:9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금식(禁食)절기를 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를 섬겨'라는 단서를 달아 유대교적인 금식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봉사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행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본절에서는 예배행위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 성령의 지시가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임하였는데 성령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앞 절에서 언급한 바나바 외에 4명입니다.
성령의 지시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선교를 위한 사역자들로 구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지가 되며,
성령의 지시로 인해 사울은 사도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따로 세우라 - 름 1:1; 갈 1:15에서는 이 표현이 바울의 소명(召命)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사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임명받은 것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냅니다(3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앞에 2절에서 금식기도 할 때 성령의 시키를 담당하도록 두 사람을 따로 세웠습니다.
이제 이들을 파송하기 위하여 일종의 임명 예배를 드리기 전에 특별히 금식기도를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냅니다.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按手)를 베풀고 파송하였습니다.
누가 안수 하였을 까요?
아마 1절에 언급된 시므온과 루기오 그리고 마나엔 이 세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것입니다.
그 세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했다고해서 안수받은 두 사람보다 직책상 높은위치에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성령의 지시로 두 사람을 안디옥 교회의 대표자로 혹은 사도로 인정하는 의식을 집행했을 따름일 것입니다.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갑니다(4절).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실루기아에 내려가 -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이 실루기아(Seleucia)로 내려간 것은 배를 타기 위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안디옥은 내륙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실루기아를 외항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 서쪽 약 26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B.C. 300년경 셀류시드(Seleucid) 왕조의 첫 왕 셀류쿠스(Seleucus) 1세 니카토르(Nicator)에 의해 개항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갔습니다.
구브로는 사울과 동행한 바나바의 고향이고(4:36),
안디옥 교회구성원의 일부가 이곳 출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11:20).
따라서 첫 선교지로 구브로(Cyprus)가 선택된 것은
바나바와 구브로 출신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5)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다(5절)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살라미는 구브로섬 동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입니다.
B.C. 58년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인해 상업 도시로 커갔습니다.
그러나 A.D. 116년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때에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습니다.
살라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회당도 여러 곳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이방인들의 사도로 전도 여행을 떠났지만,
실제적으로 전도는 주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도 그들의 전도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12:25에서 언급된 마가 요한을 가리킵니다.
그는 아마 두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베푸는 일을 도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전도 여행시 몇 사람에게만 직접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14-17).
또한 요한은 두 사람의 여행 경비를 관리하는 등 전도 여행 중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2. 주의 능력의 손(6~12)
1)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다(6절)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은 살라미의 반대편 즉 구브로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인 바보에 도착했습니다.
이 바보는 살라미로부터 약 180여km의 거리에 있습니다.
본래 바보(Paphos)는 두 군데가 있었습니다.
즉 한 군데는 옛 베니게의 도시이고,
여기서 언급된 바보는 이곳으로부터 서북쪽 약 11km의 거리에 있는,
로마 령의 도시를 가리킵니다.
바예수( 바르예수스)는 '예수의 아들' 혹은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유대식이름입니다.
바예수는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유대인으로,
그의 신분은 '거짓 선지자 박수'였습니다.
마술사는 당시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릍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덧 불여진 점으로 보아 자칭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인 그가 그 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를 보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레 20:6) 처벌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2)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합니다(7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총독 서기오 바울 에 대해서 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글라우디오 황제 때 티베르강 관리자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F.F. Bruce)도 있지만 정확한 인물 고증(考證)이 어렵습니다.
다만 누가의 묘사로 보아 지혜있고 유력한 통치자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있다' 는 맡은 본래 신중하고 지성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이 말은 총독의 통치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아마 누가는 총독으로서 서기오 바울이 공명정대하면서 분별력이 있는 정치를 한 것을 이 한단어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3) 마술사 엘루마는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씁니다(8절)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엘루마는 아람어 또는 아랍어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6절에서 언급된 마술사와 동의어입니다.
본래의 뜻은 요술장이 또는 마법사로 통합니다.
그는 총독과 바나바 일행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반(反)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총독 서기오 바울의 지혜는 더욱 돋보이게 됩니다.
즉 측근의 블경건한 술수를 물리치고 바나바와 사울 일행을 만남으로써,
지혜있다는 누가의 묘사가 증명되는 셈입니다.
4) 처음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이 언급됩니다(9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처음으로 바울(Paul)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됩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울이 회계한 이후부터 새 사람 된 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있으나(Bengel, Olshausen, Meyer), 이는 주관적 추측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저자가 사울을 로마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식 이름 외에,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23;12:25;13:1).
*행1: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행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특히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22:28),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울의 로마식 이름을 이제야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 비로소 사울이 이방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이고 설교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해외 나가면 “대빗”즉 ‘다윗’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 말씀을 보면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였습니다.
주목하였다는 것은 집중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가 있습니다.
(1) 모든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끄는 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말합니다.
(2) 거짓 선지자와 대결하는, 성령이 충만한 바울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제까지 앞세웠던 바나바로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로 옮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마술사 엘루마의 정체를 폭로합니다(10절)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모든 거짓와 악행이 가득한 자.
여기서 언급된 '거짓'은 '교활', '간교', 또는 '올무', '미끼' 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한마디로 사기꾼이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6절에서 '거짓 선지자'라고 언급된 것과 연결해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행'이라는 말은 본래 경솔하거나 무절제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부주의하고 반(反)신앙적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마귀의 자식
이와 같은 저주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요 8:44).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 말은 엘루마에 대한 저주이면서 그의 악한 행실에 대한 폭로입니다.
(3)모든 의의 원수
(4)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엘루마의 행위가 '주님의 길을 훼방'(공동 번역)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총독 서기오 바울과 바나바와 바울 일행의 만남이 주님의 뜻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을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나무라면서 진노하여 11절을 말씀합니다.
6) 주의 손의 이적이 나타납니다(11절).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저주 또는 축복에 대한 묘사로 주의 손이 본서에서 언급되는데(11:21),
여기서는 성령의 일을 거스른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을 의미합니다.
진노가 임한 결과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징벌은 구약성경에서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되었습니다(신28:28, 29).
“안개와 어둠”은 눈이 멀어진 상태를 점층적 표현으로 묘사한 듯 합니다. 즉 엘루마의 눈은 안개처럼 희미하다가 어두움처럼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 엘루마가 완전히 실명(失明)하여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갈길을 지시해 주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혼자서 걸을 수도 없어 인도자를 찾는 엘루마의 모습은 거짓 선지자의 상징적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12절)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었습니다.
본 구절은 총독 서기오바울이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결정적인동기에 대한 설명입니다.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이 총독 바울의 회심(回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회심을 유발시킨 전체 동기는 아닙니다.
즉 기적적인 사건이 총독 바이오바울의 회심에 영향을 크게 준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여기에만 강조점을 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엘루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만나고자 했다는 점은 바울의 가르침이나 그에 관한 이야기에 이미 호의적인 입장에서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은,
그가 회심하는 데 외형적 동기 부여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여기서 '주의 가르치심'은 총독 바울이 엘루마의 저주를 목격하면서 받은 교훈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주의 일을 훼방하고 사기와 악행을 일삼아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의 비참한 말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함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신생 교회였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나바, 니게르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마나엔, 사울 등은 선지자와 교사로서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들이 금식하며 주님의 뜻을 구할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복음 전파의 일을 감당하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한 뒤에 두 사람을 선교지로 파송합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와 구브로를 거쳐 살라미에 이른 두 사도는 하나님의 참뜻을 동족 유대인에게 전하기 위해 먼저 회당을 방문합니다.
사람을 세우시는 분도, 보내시는 분도 성령님 이십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바보라는 지역에서 마술사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납니다.
‘바예수’는 ‘구원의 아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런 이름은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는 데 적절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총독 서기오 바울 곁에 머물며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독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자,
자신의 이익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며 이를 방해합니다.
바울이 성령 충만하여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마술사 엘루마(바예수)를 질책할 때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졌던 총독은 이 일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됩니다.
결국 오늘 말씀은 성령의 역사로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게 되었고,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전도를 방해하는 바예수를 질책하여 보지 못하게 하므로 총독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합니다.
프뉴마는 바람으로 해석하고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아도 있듯이,
성령님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 함께 계십니다.
성령은 인격자이기 때문에 우리와 대화를 하면 대화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와달라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직분을 위한 실제적인 지혜와 능력을 주셨으며,
복음의 방해자를 벌하시고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시면 성령이 충만하여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을 대적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전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의 통치와 교회
(찬송 268장)
9절에서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은 사울이 13장을 기점으로 이제 헬라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바꾸어집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2절:성령님께서 교회에 직접 말씀하셔서 선교사(직분자)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계획하신 일들에 가정 적합한 사람들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또 안디옥 교회에도 지도자들을 충분히 주셨기 때문에 지도력의 공백은 없었습니다. 나의 직분도 성령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하고 두려움을 가지며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붙잡아 놓기 위해서 함부로 직분을 주지는 않습니까?
3,4절:교회가 선교사(직분자)를 세우고 보냈지만, 성령님께서 임지와 사
역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지금 있는 곳과 하는 일로 나를 보내셨을까요?
9-12절:성령님은 직분을 위한 실제적인 지혜와 능력을 주셨으며, 복음의 방해자를 벌하시고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성령님은 내게도 필요한 은사와 열매를 주셨습니까(고전 12:4-11, 갈 5:22,23)? 성령께서 내 전도 활동에 어떻게 함께 해 주실 것을 원하십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3절:교회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였으며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그 준비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도 포함되었습니다.
위선적인 금식(마 6:16-18)을 해서는 안되지만 교회의 중요한 일들(직분자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 등)을 위해서는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를 다른 일로 보낼 수 있습니까?
5절:예루살렘에서 데려온 마가 요한(12:25)을 선교 사역의 수종자로 동행시켰습니다. 비록 어리지만 하나님의 일을 함께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나는 누구에게 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