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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갈라디아서3장10~18절
제목 : 저주에서 복으로
어제 말씀에서(갈라디아서 3장1~9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과 배반을 질책합니다.
바울이 말과 삶으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음에도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어 십자가의 의미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혹을 받기 전에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성령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성령의 역사와 무관한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버리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도 아름다웠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바는 예를 아브라함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대가로 받은 삯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능력받고, 믿음으로 치유 받고, 믿음으로 모든 문제 해결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은 복으로(9절), 율법의 행위는 저주로 귀결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율법은 그 약속을 페하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저주에서 복으로입니다.
즉 율벋은 저주이고 복은 성령을 받은 믿음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1.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10~12절)
1)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10절)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 27:26)”
*신27: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는 바울의 말은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말은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라는 율법 자체에대한 부정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율법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든 율법(613개)을 지키더라도 하나의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인간의 완벽할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그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① 인간의 죄인 됨을 드러내는 것이며,
② 또한 모든 사람이 율법을 따라야 하는 필연적인 의무를 가졌음에도(레 19:2) 불구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7:24).
*롬7:24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단지 정죄와 진노의 기능을 가질 뿐입니다(롬 4:15;5:16,18).
*롬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롬5:16,18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11절)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합 2:4)”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칭의를 설명해 온 바울은 이제보다 긍적적이며 적극적인 시각으로 칭의에 접근합니다.
바울이 구약에서 인용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는 구절은 구원에 관한 여러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로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하박국의 입장이 다른 것은 사실이나 필할 수 없는 위기와 저주 가운데서 믿음으로(롬 1:17) 여호와를 바라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앞에 살고자 하는 자는 오직 '믿음'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3)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습니다(12절).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레 18:5)”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구약을 인용하여(레 18: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임을 증거 합니다.
*레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율법으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율법을 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신27:26).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하시지 아니하는 심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저주를 깨닫게 될 것이다(딛 3:4, 5).
*딛3:4,5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2.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13~14절)
1)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13절).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속량하셨으니.('엑세고라센')은 '값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본절에서 이 말은 율법의 노예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는 십자가의 피였습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贖錢)의 개념에서 해석되며(출 21:30),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는 저주(신 21:23)까지 받게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합니다(사 53:6).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14절)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성도들을 구속한 목적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1)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2) 믿는 자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널리 미치게 되었고(9절 주석 참조),
성령의 약속은 예수의 부활 이후 성취되었습니다(요 14:16-18;행 1:4).
이처럼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은 성격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미치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하나님의 약속이듯이(8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눅 24:49).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3. 율법이 페기 못할 하나님의 언약(15~18절)
1)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합니다(15절)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언약'('디아데케')는 주로 '유언이나 유언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나 70인역에서는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대분분 '언약'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말이 '유언'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으나 본절에서 '유언'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유언은 유언자가 죽어야 그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유언이 되려면 하나님의 죽으셔야 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죽으심을 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 단어를
'유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릅니다.
바울은 본절에서 사람 사이의 언약의 견고성(堅固性)을 예로 들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불변성(16절)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이 맺은 언약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창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정황을 살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 계약자들을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 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주권자로서 기필코 하신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히 6:13-15).
*히6:13~15 “[1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의 언약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신실성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절대적으로 성취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2)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곧 그리스도입니다(16절).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 '자손' ('스페르마티')는 복수형인 '스페르마신'과 함께 집합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오직 한 사람'라는 강조 문구를 덧붙인 것은 바울이 헬라어를 잘 몰랐다거나 바울 자신이 랍비적 논증 방식을 사용하여 랍비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했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바울은 '스페르마티'를 집합적인 의미로 사용한 예도 있지만(롬4:16-18; 9:6-8),
본 구절에서는 단수의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궁극적인 메시야의 축복이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라. - 바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로 끌어옵니다.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언약은 당대의 육신적인 자손들이나 율법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본절을 궤변적인 랍비적 논쟁 방법에 의한 삽입구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분명하게 주장하는 바는 약속의 성취는
그리스도에게 집약되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3)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율법이 폐기하지 못합니다(17절).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 - 이것은 출 12:40에 근거한 기간입니다.
*출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그러나 이 기간은 접근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됩니다.
(1)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기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히브리어 본문을 기초로 한 번역본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Boice).
(2)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의 기간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헬라어 사본(LXX)에 근거한 견해입니다.
(3) 아브라함의 언약이 확정된 야곱 때로 부터 시내산 율법을 주신 때까지의 기간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 견해는 (2)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야곱에게 와서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주어지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18절).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과 약속을 대립시킴으로
율법이 약속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17절)을 강조합니다.
율법과 약속이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이유는
율법이 행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행함은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큰 저주를 초래할 뿐입니다.
한편 '은혜로 주신'('케카리스타이')는 '카리스'('은혜')에서 온 말로 구원이 값없는 은혜임을 보여주며, 이 말이 완료형인 것은 구원의 영원 불변성을 나타냅니다. 또한 '유업'(클레로노미아)이 약속에 의하여 주어졌다는 사실은 구원이 율법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율법은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율법은 죄인에게 저주를 선고하지만,
그리스도는 죄인을 저주로부터 구원하십니다(13,14절).
율법(신21:23)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이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그 저주를 무효화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음이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죽음입니다.
모세의 법은 아브라함의 복을 유대인에게로 한정했지만,
그리스도는 이방인에게 까지 확장하시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십니다.
이 성령으로 하나님은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율법의 행위는 구원이 아니라 저주로 이끕니다(10~12절)
율법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해줄 뿐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자격을 주지 못합니다.
문제는 할례나 절기 준수 같은 외형적 행위들만으로 율법 전체를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입니다.
율법의 행위들로 공허한 신앙을 감추고 꾸미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가시적 ‘율법의 행위’들이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불순종’이라는 곤경에 대해서는 어떤 해답도 주지 못합니다.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해도 하나님이 사람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거짓 교사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수용하는 것이 더 성숙한 믿음의 단계라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이제 율법은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새언약의 삶의 원리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11절).
믿음이 아니면 의의 소망에 이를 수도, 주의 형상을 닮을 수도 영생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3) 사람의 확정된 유언도 변경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언약도 한 번 정새지면 파기할 수 없습니다(15~18절).
약속보다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이 하나님이 확정하신 약속을 부정하거나 폐기할 수 없습니다.
이삭(한 자손)을 통해 유업(칭의, 하나님 나라, 의의 소망)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율범이 아니라 약속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유업의 통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