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원(姜振遠)
출생일 1881년(고종 18)
사망일 1921년
본관진주(晉州)
경력 의병장
관련사건 원포리전투
대한제국기 전남 여수의 원포리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본관은 진주(晉州). 일명 강진원(姜震遠). 자는 형원(亨遠), 호는 성산(聖山).
전라남도 순천 출신. 유년 시대에 손오병서(孫吳兵書) 등을 탐독하며 한문을 수학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의병진에 가담하였으나 전공을 세울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1907년 일본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의 해산 조치가 내려지자,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08년 동향의 우국지사인 김명거(金明巨)·김화삼(金化三)·권덕윤(權德允)·김병학(金柄學), 곡성의 김양화(金良化) 등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한 뒤, 일본측의 동향을 살피면서 의병의 소모(召募) 및 무기 구입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6월에는 승주군(지금의 순천) 조계산(曹溪山)에서 진을 치고 실전을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7월에 결사동지(決死同志) 33명을 가담시키고, 보성과 곡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조규화(趙圭和)와 동맹하여 그의 휘하에 있던 40여 명이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8월 곡성군 석곡면조지촌(鳥枝村)과 목사동면(木寺洞面)에서 처음으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9월 23일 적을 기습하여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0월 5일에는 고흥군 과역면 과역리(過驛里) 전투에서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고 무기를 빼앗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10월 9일 여수시 화양면원포리(遠浦里)전투에서 패배하여 승주군 쌍암면(순천시 승주읍)으로 회군하였고, 이후에는 주로 승주(순천)·곡성·화순 등지에서 싸웠다. 1909년 1월부터 4월까지 승주군 서정병참소(西亭兵站所)를 습격하는 한편, 남원까지 진격하였다. 그 해 4월 말 곡성의 서순일(徐淳一) 의병대가 합류함에 따라 240여 명의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5월 석곡(石谷)에 있는 병참소 공격에 실패하고, 더욱이 6월 11일 승주군 서면 당천리의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일본군 앞잡이 김원학(金源學)이 인솔한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참패, 퇴각하였다.
1909년에 전개된 일본의 의병초토화작전에 밀려, 그 해 말 강진원의 의병군도 해산하였다.
결국 8월 중순경 남해의 통영연내도(蓮內島)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승주로 돌아와, 두모리오성산(五聖山) 동굴에서 10여 년간을 은거하였다.
1921년 7월 16일 은신처가 발각되어 쌍암헌병대로 압송된 뒤 순천헌병대로 이송, 10월에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진중일기(陣中日記) 취웅록(取態錄)
강진원의병장약전(민족문화협회, 횃불사, 1981)
「강진원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홍영기,『남도문화연구』12,2006)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진원(姜振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