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피해자지원협회 회장단이 서울 광진구 광장동 협회 사무실 앞 한강변에 섰다. 왼쪽부터 박효순 수석부회장, 이상욱 회장, 김부식 부회장. 최정동 기자 |
한국피해자지원협회(KOVA) 이상욱(58) 회장의 말이다. 각종 범죄 피해를 본 당사자와 가족을 돕는 KOVA는 2011년 3월 창립한 사단법인이다. 만 2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민간자격 인증을 받은 피해상담사 양성 과정을 운영하며, 매년 범죄 피해자 200~300명에게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다. 이 회장은 “정부 보조금 없이 뜻을 같이하는 회원들의 기부와 정성으로 얻은 성과가 대부분이어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단체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하는 세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이상욱 회장과 박효순(53) 수석부회장 겸 사무총장, 김부식(50) 부회장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범죄가 늘고 있는데도 범죄 피해자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입을 모았다. 변호사인 김부식 부회장은 “매년 30만 건이 넘는 폭행 사건은 논외로 치더라도 살인·강도·성범죄 3대 흉악범죄만 2011년 2만3910건이 발생했다”며 “범죄를 당한 본인 외에 가족·친지까지 피해자가 매년 수십만 명씩 생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범죄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흔히 짐작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범인에 대한 분노가 국가·사회에 대한 분노로, 다시 본인에 대한 자책과 좌절로 이어지면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연쇄살인마 유영철에게 살해당한 A씨의 동생이 충격에 못 이겨 자살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박효순 수석부회장은 “개인적으로 상담해 온 한 아동 성폭행 살인사건의 피해자 엄마는 딸을 잃은 충격에다 주변의 도움과 보조금으로 만든 수천만원을 사기로 날리고,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등 그 뒤로도 끝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에서 다루지 않은 상당수 사건의 피해자들은 그나마 하소연도 못하며 속병이 드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박 수석부회장은 “특히 피해자 가정의 어린이는 마음의 상처를 제때 치유하지 못하면 범죄의 가해자로 변하거나 좌절로 삶을 포기하는 등 피해가 막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범죄 피해자 지원시스템은 여전히 미흡하다. 이들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인권 보호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지만, 피해자에 대한 지원제도는 아직도 초기 단계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는 피해자 지원 시스템이 없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겉돌고 있어 문제다. 이 때문에 피해자에게 적시에 맞춤형 지원을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각종 지원제도를 강력히 통합하고 조정하는 기구와 제도가 필요하다. 개별 정부기관의 이해관계를 넘기 위해 국무총리 직속의 위원회를 세우는 것도 건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부터 전미피해자협회(NOVA)가 세워지는 등 범죄 피해자 지원에 신경써 온 것과 달리 우리는 범죄 피해자 지원의 역사가 길지 않다. 범죄 피해자 일반을 다루는 민간단체는 2003년 김천·구미에 생긴 게 처음이다. 이후 피해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법무부 범죄피해자종합대책이 나오면서 2004년 12월부터 불과 3개월 사이에 전국 지검·지청 관내에 54개의 범죄피해자센터(현재는 58개)가 한꺼번에 만들어졌다. 법무부 주도로 단기간에 만들어지면서 현재 전국 센터의 80%가 민간단체이면서도 지검·지청 청사 내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산과 활동에 있어서 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문제가 생긴다. 형사정책연구원이 2010년 낸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활용 성과 분석 및 활성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센터들은 ^피해자들에 대한 장기 지원보다는 1회성 생계·의료비 지원 위주이고 ^경찰과의 공조가 부족하며 ^재정·활동에서 관 의존도가 크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경찰과 손발이 잘 안 맞는 것도 해결할 과제다. 대부분의 범죄 피해자들은 1차적으로 경찰과 만나는데, 피해자센터는 검찰청 안에 있다 보니 시간·공간적 격차가 생기는 것이다. 경찰도 2010년부터 자체 훈령으로 ‘피해자 권리고지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최근 3년간 흉악범죄 피해자 중 권리고지를 받은 비율이 37.5%에 그치고 있다.
각종 사회복지제도가 범죄 피해자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것도 문제다. 박 부회장은 “우리 복지제도가 많이 충실해져서 지원을 받을 길이 많다”며 “문제는 어떤 복지혜택에도 ‘범죄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게 없다 보니 꼭 필요한 사람이 혜택을 못 본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가장이 범죄 피해자가 되고, 부인이 뒤처리를 해야 한다면 가사도우미나 간병인 제도를 활용할 수 있지만 피해자 가족이 그런 혜택을 일일이 찾아 다닐 정신이 없다는 얘기다. 박 수석부회장은 “가장 좋은 건 전문적인 피해상담사가 심리상담을 겸해 여러 문제를 파악하고 적절한 지원책을 연결하는 업무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KOVA가 기존 피해자센터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이 회장과 박 수석부회장은 기업인이다. 이 회장은 삼원특수지와 고려신소재 등의 업체를 운영하고, 박 수석부회장은 식당 여러 곳을 운영하는 나루가온F&C 대표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법원 조정위원·범죄예방위원 활동을 해왔고, 피해자센터의 전문위원이나 자원봉사활동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문제점을 해결해 보려고 한 것이 출발이었다.
박 부회장의 말이다. “센터에서 한 피해자 가정의 어린이를 봤어요. 형편이 어려운 아이라서 갈비도 사주고 용돈도 챙겨줬지만 아이는 이미 자기가 처한 불행한 상황에 대해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상태였죠. 1회성으로 밥 먹이고 용돈 줘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어요. 정말 아득했죠.”
서울동부지검에서 부장검사를 하다 변호사로 개업한 김부식 부회장도 이들의 뜻에 맞춰 합류하게 됐다. 피해자들을 1차적인 단계부터 상담해 필요한 것을 찾아 주고, 정상적인 사회 복귀가 이뤄질 때까지 꾸준히 지원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기존의 피해자지원센터와 별개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자금 마련도 쉽지 않았다. 설립 후 운영 과정에서 세 사람이 사재를 털어야 했다.
기존 피해자지원센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독립된 활동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다. 이 회장은 “무슨 이득을 바라는 것이냐, 정치적인 야망이 있느냐는 말까지 들었다”며 “사심을 갖고 뛰어들기에는 너무나 힘든 활동”이라며 웃었다.
이들이 활동을 지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범죄 피해자들의 참혹한 실상을 현행 법이나 제도가 어루만지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떤 사례는 초기 상담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심각하면 20번 넘는 상담과 각종 금전적 지원이 필요하다. 이 회장은 “예산이 부족해 더 규모를 늘리지는 못하고 있다”며 “기업체나 개인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지만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이들은 올해 활동 영역을 더 넓힐 예정이다. 법무부가 운영하는 범죄피해자·가족 보호시설인 ‘스마일센터’의 확대 설치 계획에 따라 올해 새로 생길 ‘인천 스마일센터’의 운영 기관 선정에 도전한다. 학교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도 확대한다. 현재 4개인 지부를 5개 더 늘리는 것도 목표다.
이 회장은 “피해자가 고통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사회에 복귀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며 “민간단체로서 모범적인 사례와 방법들을 만들어 제도에 반영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