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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한국영화, 장르:역사드리마 개봉:2016.08.03.
감독:허진호, 관객:5,598,967명(2016.12.08.현재)
제작:호필름, 주연:손예진,박해일
1. 덕혜옹주
조선시대 왕실에는 후궁의 소생으로 출생한 옹주들이 많이 있었다. 정비 소생의 공주들보다 서열이 낮은 신분적 한계로 조명받을 수 없었던 인물, -덕혜옹주였다. 고종황제에게는 9남4녀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린 시절 유명을 달리하였다. 남은 사람은 네 사람,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왕 “이척”, 귀인 장씨의 소생 의친왕 “이강”, 그리고 황귀비 엄씨의 소생 영친왕 “이은”과 복녕당 양춘기의 소생 “덕혜옹주” 등 3남1여다. 덕혜옹주는 고종 말년의 애환을 달래는 유일한 낙이었다.
1910년, 고종황제는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로 책봉하지만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유학길에 오른다. 1911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독살되고 영친왕의 생모인 엄씨마져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상실감과 신하들에 대한 배신감에 사로잡힌 고종은 말년을 궁녀들과 관계하며 지내고 있었다. 복녕당 “양춘기”(1882년생)는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에 불과하였으나 1912년 5월25일, 30이 넘은 나이에 덕수궁 명선당에서 덕혜를 순산했다. 고종은 양씨를 귀인에 봉하고 “복녕”이라는 당호를 하사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고종황제의 말년은 덕혜옹주의 탄생전후로 대비되고 있다. 고종은 이른 아침 옹주의 탄생을 기뻐하고, 7월13일 탄생 2개월만에 함녕전 동온돌에 데려다가 키웠을 정도로 금지옥엽이었다. 함녕전에서 덕혜옹주를 보살펴 준 사람은 유모 “변복동”이었다. 그녀는 기혼녀였지만 옹주의 유모에 전념하기 위해 남편에게 다른 여인을 재가하고 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한일합방후 일본 궁내성은 양씨가 공식적 후궁이 아니라는 이유로 덕혜를 고종의 정식적인 딸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 격하된 고종일가는 “이태왕가첩적”이라는 족보에 기재되어야만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왕가의 자손번성을 우려하던 궁내성에서는 덕혜를 사생아로 취급하며 복녕당 아가씨로만 명명되었다.
1916년 4월, 고종은 덕혜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건립하고 “쿄구치 사다코”와 “장옥식”을 보모로 삼았다. 매일 아침 사인교를 타고 유치원을 다닌 덕혜는 풍금과 동요와 무용을 배우고 뒷동산에서 나물을 캐는 즐거움에 젖어 있었다. 고종은 덕혜옹주의 입적을 위해 “데라우치”총독과 함께 궁내 유치원견학을 갔으며 그곳에서 둘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입적을 확인하였다.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난 영친왕에 이어 덕혜마져 일본에 강제송환될 것을 우려한 고종은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을 부마로 내정하고 결혼을 추진하였지만 일본이 김황진을 강제로 추방하고 말았다. 1919년 1월21일, 고종이 의문의 독살로 죽음을 맞이하자 인산일인 3월1일에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국제사회를 집중시킨 이 운동은 일본의 강제정책을 문화정책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국내사정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조선은 세계열강들의 먹이감으로 으러렁대는 정글과 같은 곳이었다.
1921년 3월31일, 고종황제의 영향력을 절감한 일본은 고종의 혼전을 창덕궁으로 옯기고 덕혜옹주 또한 창덕궁의 관물헌으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덕혜옹주는 일본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게다와 하오리 복장 등 그의 삶은 일본화를 이루어 갔다. 5월4일에는 “덕혜”라는 호를 받고 “옹주”라는 존칭을 사용하였으나 1925년 1월,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는 순종에게 덕혜옹주의 일본유학을 통보했다. 곤도 시로스케의 “이왕가비사”에는 왕후의 특명으로 덕혜옹주의 유학이 결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도쿄에 마중나온 “이방자”여사가 덕혜옹주를 맞이하였지만 그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영친왕은 덕혜를 잘 지켜 주었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덕혜는 일왕가와 화족가문의 자녀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 중등과 2학년에 편입하여 학습원교수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고 동요를 작곡하는 등 여러 활동에 참가하였다. 고종황제의 사망원인을 직감한 덕혜는 언제나 일본정부의 감시대상이었다. 그녀는 학교에서도 수돗물을 마시지 않았고 조선에서 가져간 보온병을 들고 다닐 정도로 독살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1926년 3월, 덕혜옹주는 영친왕과 함께 귀국하여 와병중인 순종을 알현하고 돌아갔다가 4월에 다시 귀국하였고, 25일에 순종이 승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집요한 요구에 의해 인산에도 참석하지 못한채 5월10일, 도쿄로 돌아가야만 했다. 1929년 5월29일, 모친인 양씨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듣고 급거귀국한 옹주는 상복으로 장례식에 참여 하였지만 일본은 양씨가 귀족이 아니므로 복상을 할수 없다는 핑계로 장례 2일만에 일본으로 돌려 보냈다. 이 일은 덕혜옹주를 정신적 충격으로 몰아갔다. 그 후 덕혜옹주는 기이한 행동을 하였고 학교 등교를 거부하거나 식사를 하지 않는 등 심각한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여 주었다.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해졌고, 손님을 맞이하는 짧은 순간에도 그녀의 증세는 이왕가를 매우 당황스럽게 하였다.
이러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덕혜옹주를 급박한 일본정부는 그녀의 결혼을 추진하고 그녀의 정혼자로 쓰시마섬의 36대 도주로서 24세의 백작 “소 다케유키”를 내정했다. 동경제대 영문과 3학년이었던 그는 다재다능한 청년으로 시와 작곡에 능하였으며 유화에도 자신감이 있는 유망주였다. 소 다케유키 역시 정략결혼의 희생자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덕혜옹주가 귀한 신분과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정신분열증 환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건 매우 불편한 일이었던 것이다.
1931년 5월8일, 덕혜옹주가 일본가문과 결혼하였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조선일보는 그녀의 결혼식 사진에 남편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는 등 조선의 심기는 분노했었다. 신혼초기 각종행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였으나 덕혜옹주의 증세가 갈수록 심각해져 외부와의 출입을 끊고 아내 간병에 골몰하며 그의 심신은 지쳐만 갔다. “황실황족성감”에는 1932년 8월14일, 딸 “소 마사에”를 출산하였다는 기록만 있을뿐, 조선도 일본도 그녀에 대한 관심은 점점 퇴색되어 갔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패전국으로 일본은 미군정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47년 10월,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신적강하”(臣籍降下)에 의거하여 왕족은 평민으로 격하되었고 왕족들에게 지급되던 연금과 면세특권은 박탈당하였다. 이 시기에 소 다케유키도 백작직위와 재산상 모든 특권을 박탈 당하고 덕혜옹주 또한 “양덕혜”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등재되고 모든 왕족 특권은 상실되었다. 이로 인하여 소 다케유키는 1946년 덕혜옹주를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 시켜 버리고 1955년, 영친왕부부와 협의후 이혼하여 버렸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후 “가츠무라 요시에”라는 일본여성과 재혼하여 2남1여를 두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조국의 품으로 귀국할 수 없었던 덕혜옹주는 정신병동 한켠에서 방치되듯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죽음으로 내 몰리고 있었던 그녀를 구한 것은 어린 시절 정혼녀였던 김장한의 친형 “김을한” 기자였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한 김을한 기자는 소 다케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덕혜옹주의 소식을 물었지만 입원중이라는 냉담한 반응을 들어야만 했다. 김을한 기자가 어렵게 영친왕을 접견하게 되었을 때 덕혜옹주가 매월 1만원의 고가 입원비를 내면서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을한 기자가 병원을 찾았을 때 그녀는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눈빛으로 독방에 갇혀 있었다. 비탄에 빠진 김을한 기자는 그로부터 한국정부요인들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덕혜옹주의 귀국을 요청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1956년 8월29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에는 덕혜옹주와 관련한 기사가 게재되었다.당시 스무네살에 불과하였던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가 자살을 암시하는 유서를 남긴채 사라져 버린 것이다.일본 경시청이 나서서 전 국토를 수색하다 시피했지만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을 때, 11월12일 방미중에 일본에 도착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희의 의장을 찾은 김을한 기자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간청하였다. 망국의 왕족을 귀국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는 판단을 내린 박정희 의장은 1962년 1월, 고종황제의 손자 “이우공” 부인 “박찬주”여사와 차남 “이종”과 함께 일본을 찾았고, 1월26일, 51세의 덕혜옹주는 초라한 모습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김포공항, 소학교 동창 “민용아”와 유모 “변복동”(72세)이 눈물을 흘리며 덕혜옹주를 맞이하였고, 유모는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할 때 까지 낙선재에서 덕혜옹주를 모셨다. 덕혜옹주는 창덕국 낙선재에서 순정효왕후 윤씨를 알현하고 서울대병원에서 7년동안 치료를 받고 1967년5월 퇴원하여 낙선재에서 생활하였다. 1968년 가을, 수강재로 옮긴 덕혜옹주를 소 다케유키가 찾았지만 종실 관계자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그를 돌려 보냈다. 덕혜옹주는 조국의 품에서 20년을 살다가 1989년 4월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가 맑은 정신을 가졌을 때 그녀가 썼다는 한 장의 낙서는 많은 사람들을 울리게 한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2. 영화 “덕혜옹주”
대한제국 말기, 덕수궁 편전에서는 “고종”(백윤식역)과 을사5적간의 대화가 계속된다. 한 나라의 황제와 신하들이 나누는 대화속에는 나라를 팔아넘기는 듯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격론이 계속되고 귿은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이때 어린 나이의 “덕혜”(신린아역)가 편전에 들어와 고종황제에게 안기었다. 일제의 강압속에서 실의에 빠진 고종황제에게 이제 낙이라고는 덕혜옹주 하나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1919년 1월, 고종이 일본의 독살로 승하하면서 8세의 덕혜옹주는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잠겨야 했다 “양귀인”(박주미역)의 거처인 양화당으로 옮긴 덕혜는 10세 되던 해, 일본왕가에서 일본유학 결정이 내려진다. 조선궁내의 실력자 “한택수”(윤제문역)와 덕혜의 첫 번째 만남은 다섯 살 어린나이에 있었고, 이 두사람의 관계는 갈수록 첨예한 대립각 속에 이기는 자는 언제나 권력의 속성인 한택수였다.
덕혜옹주가 유학을 거부하자 한택수는 그녀의 모친 양귀인을 위협하며 일본유학을 종용하였다. “어머니 한번만 덕혜라고 불러주세요, 제 소원입니다” 결국 일본 유학길에 오른 덕혜옹주(김소현역)는 양귀인이 전해준 보온병을 들고 떠난다. 두렵고 낯설기만 한 일본행에는 그의 유모 “복순”(라미란역)이 동행하며 그의 마음을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가 된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국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던 덕혜는 그곳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김장한”(박해일역)을 만나게 된다. 김장한은 일본육사 차석졸업자로서 일본군장교로 입대하였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위장 취업을 한 것이었다. 일본의 압박은 날로 그 수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조선인의 가슴에 남아있는 마지막 자존심인 덕혜옹주에게 일본은 다이토중공업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 연설을 강요하였다 연설문 또한 정해진 것이었다. “나는 황녀이고 옹주이기 이전에 병든 어미의 딸입니다” 때마침 조선에 있는 양귀인의 위독소식을 접한 덕혜옹주는 한택수가 전한 조선귀국 확약서는 매력있게 들렸다.
다이토중공업 연설회장, 운동장에는 조선에서 끌려온 힘없는 백성들이 덕혜옹주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덕혜옹주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하다. 덕혜는 한택수가 적어준 연설문을 읽다가 종이를 구겨 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는 조선의 옹주, 이덕혜입니다. 여러분 희망을 잃지 마세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옵니다. 우리에겐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저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연설로 다이토중공업에는 조선인의 데모가 일어났고 수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났다. 성난 민심을 뒤로한채 덕혜옹주가 몸을 피신하려 차에 오르자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한택수가 달려와 덕혜옹주를 차에서 끌어내어 폭력을 가한다. 이에 유모인 복순이 한택수의 머리를 휘어잡고 달려들지만 그녀 또한 내동댕이치며 꼬꾸라진다.
“제가 이것만은 약속드리죠, 옹주님은 앞으로 조선땅 밟을 일 없을 겁니다” 독기를 품은 한택수는 덕혜옹주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고 덕혜옹주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덕혜옹주가 유일한 낙이며 어머니와도 같은 유모 복순이의 방에서 잠을 청하려 할 때 갑자기 일본 군인들이 침실에 들어와 복순이를 끌어낸다.복순이의 생명에 위협이 발생하고 끝내 덕혜옹주는 유일한 낙이었던 복순이를 조선으로 돌려 보낸다. 모든 것을 잃어가는 덕혜옹주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녀를 향하여 찾아오는 조현병 증세는 조금씩 그녀의 심장을 향하여 문을 두드리고 있다.
김장한과 일본 독립운동 유학생들, 그리고 이들의 리더격인 “이우”왕자(고수역)와 “김황진”(안내상역)임시정부 간부는 영친왕부부와 덕혜옹주를 상해로 망명하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왕가로부터 보호와 감시속에 있었던 “영친왕”(박수영역)은 “이방자”(토다 나호역)여사와 함께 언제나 주저하고 망설이는 시간속에 갇혀있다. 얼마나 많은 협박과 회유속에서 지쳐 있었을까? 그들은 상해망명을 두려워 하며 지금의 행복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마음은 사뭇 다르다. 설득작업과 함께 모든 거사준비가 완료되던 날, 하늘은 맑고 태양은 일본의 내일을 비추고 있다.
차질없는 준비와 계획은 언제나 예상을 빗나간다. 폭탄은 제대로 작동하였으나 한택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임정밀사는 목숨을 잃고 그의 가슴에는 피로 얼룩진 태극기가 있다. 그러나 김장한의 안내로 영친왕은 망명작전을 수행하고 이방자여사를 설득하는 덕혜의 시간은 조급하기만 하다. 덕혜옹주는 지금 도쿄 시내 중심가에서 이방자 여사와 함께 그녀의 약혼자 “소 다케유키”(김재욱역)를 만나고 있다. 덕혜옹주는 일본왕가의 결정으로 쓰시마섬의 도주 24세의 동경제대 출신의 백작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이방자 여사에 대한 설득작업은 예상보다 더뎌지고 상황은 혼돈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영친왕의 거취또한 불분명해 보인다. 자신의 아내가 오지 않으면 망명을 거부하겠다는 단호한 입장속에 죽어가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결국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한택수의 포위망에 갇혀버리게 된다 “저승에서 광복을 맞이 하겠습니다” 이번 작전의 책임자인 김황진은 영친왕에게 납치되었다고 일본에게 말하고 다음을 기약하시라는 작별인사와 함께 운명을 달리하였다. 한사람의 가치와 그가 가진 신념에 따라 얼마나 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헛되게 가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영친왕의 비겁한 얼굴에서 우리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을 되새기게 된다.
한 편, 도쿄 중심가에서 이방자 여사 설득에 실패한 덕혜옹주는 김장한의 안내로 도주로를 확보하지만 때마침 도착한 한택수 일행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총격전을 벌이며 무사히 빠져 나간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는 어느것 하나 보장된 것이 없고 덕혜옹주를 보호해야 할 김장한은 치명상을 입은 상태다.
“상해에 가면 맛있는 오향장육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동경만 앞바다, 밀항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는 김장한과 덕혜옹주간에는 작은 설렘과 사랑이 싹을 트지만 자랄 시간이 없다. 어느듯 그들의 숙소까지 침투해온 일본군은 포위망을 좁히며 총을 겨누고 있다. “저에게 10분만 주십시오, 반드시 옹주님을 찾을 것입니다” 지하 땅꿀을 나가 혼자서 바다를 향해 무조건 달려가라는 김장한의 말에 덕혜옹주는 10분후에 돌아오겠다는 그의 약속을 믿고 헤어진다. 덕혜옹주가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뒤,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설치한 김장한은 불을 당겨놓고 자신도 무사히 빠져 나갔다. 이어 일본군이 막사로 들어가고 폭탄은 제 시간에 터지며 그들의 목숨을 날려 보낸다.
이제 배만 타면 끝인가? 그러나 다 되었다고 생각한 밥은 언제나 3층밥이다 어디선가 멀리서 뱃소리가 들리고 그 배에는 독립군 동지가 타고 있는 듯 하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다. 그의 뒤에는 한택수가 있고 덕혜옹주는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한다. 덕혜옹주를 지켜 주려던 김장한은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더 이상 회생불능의 상태로 끝나는 듯 했다.
“당신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이제부터 제 부인입니다” 조현병에 시달리는 덕혜옹주와 결혼한 다케유키 또한 심경이 착잡하다. 도쿄제대 유망주로서 시와 음악에 능하고 다재다능한 그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오직 하나, 덕혜옹주였다. 그와의 사이에는 “정혜”(이채은역)라는 한국이름의 “소 마사에”가 있다.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진심으로 사랑하였을까? 정신분열증세에 시달리며 외부인과의 접촉을 끊고 있는 덕혜옹주의 병간호를 위해 두문불출하며 함께 애쓰고 있다. 그런 그도 점점 지쳐가며 그녀는 더 이상 희망없는 굴레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덕혜옹주는 한가닥 희망을 갖고 있다. 그의 딸 정혜를 데리고 출입국관리소에 도착한 덕혜옹주는 어이없는 상황을 맞이한다. “저 조선인 이덕혜예요, 왜 제가 거부를 당해야 해요?” 조선황실의 존재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던 이승만정권이 영친왕과 함께 덕혜옹주의 귀국을 불허한 것이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일본국 상류층 신분을 유지하였던 한택수는 이제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 유력한 권력자로 부상되어가는 상징적인 장면이 나타난다. 이것이 권력이다 이것이 힘이고 진리라는 것을 이 영화는 이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끝내 귀국이 불허된 덕혜옹주는 깊은 병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 한순간도 그녀을 잊은 적이 없는 김장한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대로 도쿄 앞바다에서 죽어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사회생한 그는 지금 서울신문 편집국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이승만 정권 내내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지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다시 일본을 찾은 김장한은 이미 다른 사람과 재혼한 다케유키를 찾았지만 냉담한 반응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한가닥 실마리를 찾은 김장한은 그녀가 입원중인 “마쓰자와 정신병원”을 방문한다. 거기서 만난 덕혜옹주, 참으로 기막힌 세월속에 그려진 그녀의 모습은 초췌하다 못해 죽은 시신처럼 낯설어 보였다.
1961년, 이승만정권이 붕괴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을 때, 김장한 기자는 일본동경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때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를 만난 김장한은 덕혜옹주의 귀국을 부탁했고 정치적으로 이해가 빠른 박정희는 이들의 귀국을 허용하였다. “10분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10분이 이렇게 길었습니까? 왜 이렇게 늦었어요 10분이 훨씬 지났는데” 김장한은 마쓰자와 병원을 찾아 그녀와의 면회를 요청하고 귀국길에 함께 오르게 된다. 김포공항엔 그녀를 모셨던 궁내 하녀들과 함께 보온병을 들고 있는 복순이가 서 있었다. 50년이 지나서야 조국의 품으로 돌아 올수 있었던 덕혜옹주는 이제 심신이 피로에 지쳐 있었다. 그 옛날 자신이 뛰놀던 궁궐은 이제 관광지가 되어 있다. “옹주님이 좋아하시는 사이다 사오겠습니다” 그녀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고종황제와 양귀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덕수궁 편전은 이제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역사가 되었다.낙선재에서 20년, 병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마지막 황녀의 삶은 이렇게 저녁노을처럼 물들어 가며 영원히 잊혀져 간다.
영화가 끝난후 사람들은 그녀가 썼다는 한 장의 낙서를 읽게 되었다 무엇이라고 썼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써 내려간 그녀의 글에는 50년 세월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그리스도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을 교훈해야 할까? 갑바도기아에서 300년을 살며 신앙을 지켜 내었던 정신세계의 위대함에서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았던 가녀린 소녀들을 기억해 본다. 13세의 어린나이에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자존심은 그렇게 스스로가 아닌 조선을 지키기 위해 병이 들었다 그녀의 신념속에는 조선이 있다. 그녀에게서 조선의 왕은 여전히 고종황제였다. 세상이 달라졌고 시대가 변하여 버렸지만 그녀에게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대의 변화와 기류에 편승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며 덕혜옹주의 신념을 생각해 본다.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마져 빼앗긴 세상에서 병에 걸려 미칠지언정 신념을 빼앗기지 않았던 덕혜옹주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신념과 그 신념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선명하게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