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가톨릭
적도의 약간 북쪽, 아시아 대륙 남동쪽의 서 태평양에 산재하는 섬들로 구성된 도서국가. 면적은 30만㎢, 총 인구는 5,074만명(1982년 현재)이다. 1521년 마젤란의 스페인 상륙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당시 서로 적대시하는 필리핀의 소국(小國)들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수도사들을 파견했으며 아우구스티노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이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도미니코회 수사 살라자르(Salazar)가 최초의 주교로 임명되어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교회행정을 정비하는 한편 여러 종족의 그리스도화에 힘썼다.
1521년 4월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사마르(Samar)와 레이떼(Leyte)를 거쳐 세부(Cebu)에 도착한다. 이때 마젤란에 동행한 스페인 선교사가 세부의 주민 800명에게 세례를 주고 로만 가톨릭(Roman Catholic)으로 개종을 시킨다.
이때부터 필리핀의 선교는 출발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후 마젤란이 부족전쟁에 참가했다가 전투에서 죽음 으로서 그의 필리핀 탐험 계획은 끝나게되고 그의 탐험대도 결국은 필리핀을 일단 포기하고 고국으로 회항하게 되어 잠시의 단절이 발생한다.
1559년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spy)를 파견하게 되고 이들은 1565년 필리핀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식민지화와 복음화를 동시에 착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가톨릭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330년간의 스페인 식민통치기간동안 100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노동문제나 세금문제 등이 문제가 되었고, 이 중 종교적 이유에 의한 반란도 상당수였으며, 반란 때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수도사들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필리핀은 인구의 약 90%가 기독교이고, 그 중 80%가 로마 카톨릭 신자들이며, 아시아에서 가장 큰 카톨릭 국가이며, 필리핀에서의 카톨릭은 그 문화에 맞게 변형된 요소도 있다. 일부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지금도 매년 성 금요일에 일부 카톨릭 신자들은 속죄의 의미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몇 명은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한다.
성주간에는 이렇게 속죄와 단식으로 우울하게 보내지만, 부활절 당일에는 대 축제의 분위기다. 필리핀 성당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필리핀 가톨릭 상징적인 성상이있다. 산토니뇨상과, 블랙 나자렛, 까다루페 성모마리아상, 마젤란 클로스 등이다.
-. 필리핀 가톨릭 교회의 역사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로 1521년 마젤란의 상륙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됐다. 스페인은 당시 서로 적대시하는 필리핀의 작은 국가들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수도자들을 파견했고 아우구스티노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이 이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후 도미니코회의 수사가 최초의 주교로 임명돼 교회 회의를 개최하고 교회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여러 종족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상이 전파되면서 필리핀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했고 결국 1898년 독립을 선언,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국 헌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파리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할양받은 뒤 1902년 필리핀인들의 저항을 물리쳐 필리핀의 지배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1902년 로마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필리핀 독립교회」가 설립돼 다른 교의나 전례는 모두 로마 가톨릭과 같으면서도 교황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하나의 분파를 형성해 유지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07년 필리핀에 자치권을 부여해 필리핀인들에 의한 입법의회가 구성되고 1934년에는 필리핀 독립법이 미국 의회를 통과했으며 이듬해에는 필리핀 연방 정부가 1946년 독립을 목표로 발족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이러한 일정은 중단됐고 1945년 미국이 필리핀을 탈환하고 이듬해 총선을 거쳐 필리핀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필리핀 가톨릭 교회는 400여년 동안 스페인으로부터 받은 가톨릭 신앙과 종교적 실천을 유지해왔다.
- 대중 신심 행사들
▲ 십자가 형을 실제로 재현하는 모습
필리핀 교회에 대해 말할 때 대중 신심에 대해서 빼놓을 수 없다. 필리핀 교회에서는 공식적인 전례보다도 오히려 대중 신심들이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공식 전례가 필리핀 문화와 괴리를 보일 때 필리핀의 문화에 보다 가까운 대중 신심들이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전례운동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전례 개혁이 도입됨으로써 이 괴리가 상당히 좁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대중 신심 중에서 성탄 대축일 전 새벽미사는 주목할 만하다. 필리핀에서는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며칠 동안 새벽미사와 성야 행사를 거행하는데, 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농부들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른 시간에 미사를 했다고 한다.
「심방 가비」(Simbang Gabi)는 마리아를 기리는 9일간의 새벽미사이고 「파눌루얀」(Panuluyan)은 자정 미사 전인 12월 24일 저녁에 거리에서 이뤄지는 연극이다. 이는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여관을 찾아다닌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필리핀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환대가 마리아와 연결된다. 즉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거절하는 것은 마리아를 거절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성주간에는 성모 마리아 상을 중심으로 수난을 겪은 성인들의 상을 실거나 장식한 수레를 끌고 행렬을 한다. 성모상 앞을 행진하면서 묵주 기도를 바치고 찬미가를 부름으로써 성모님의 슬픔을 함께 나눈다.
부활 대축일 새벽의 만남 행사는 필리핀 마리아 신심의 절정이다. 검은 천으로 가린 마리아상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상을 모신 행렬이 마을 광장에 모여 마리아가 부활한 아드님을 만나는 것을 기념한다.
필리핀 교회는 새로운 천년기를 맞으면서 토착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필리핀 교회는 자신들이 가톨릭 신자인 동시에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신앙에 자신들 고유 문화와 전통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식한다. 토착화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바로 필리핀 사람들 자신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행일2003-11-02 [제2371호, 10면] 가톨릭신문 박영호기자
-. 마젤란선교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페르디난드 마젤란(영)]
포르투갈 왕국 출신의 항해사로, 스페인에 귀화하여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후원으로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에 도전한 모험가이다.
마젤란 본인은 중도에 필리핀 막탄 섬에서 사망하여 세계 일주 항해에 실패하였으나, 마젤란이 인솔하였던 함대가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고 또한 마젤란이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동쪽으로 항해하여 필리핀에 도달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두 번에 나누어 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인물이므로 최초 세계 일주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마누엘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독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아프리카· 인도 항로에 근무하였다(1504~1511). 이어서 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였다.
선배인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반니 카보토(존 캐벗) 등과 더불어 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모험가이자 항해자로, 사실상 대항해시대의 정점을 장식한 인물이다. 마젤란 이후 바다에는 모험가보다는 군인/해적, 선교사, 학자들이 득세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마젤란은 1480년 포르투갈 사브로자(Sabrosa)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 마젤란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어 마젤란은 12살 때 왕궁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포르투갈 무장상선대의 일원으로 향료제도 탐험에 종사하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부하로써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의 요충지인 말라카 정복에 참가하기도 한 베테랑 항해자 겸 모험가 겸 군인이었다.
그러나 마젤란은 뛰어난 능력에도 모나고 차가운 성격으로 인해 적이 많아서 상관과 동료들과는 관계가 좋지못했고 늘 불화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그들에게 심심찮게 모함당하는 신세였다. 거기에 1513년 모로코에서의 아자모르 전투 중, 무어 족의 진지를 공격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어 상이군인으로 퇴역, 결국 포르투갈로 반강제적으로 귀환하여, 한동안 실업자 상태로 지내는 안습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에 귀환한 후로는 아시아에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대서양과 태평양(물론 이 때에는 아직 태평양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지만)을 가로질러 아시아의 향료 제도로 가는 모험 항해를 후원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은 실패. 그 모난 성격 탓에 국왕인 돈 마누엘 1세를 들이받는 기행을 벌인 끝에 1517년, 스페인으로 도주 이주하여 스페인 국적을 얻고 스페인 여자와 결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어렵사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한 마젤란은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카를로스 1세의 흥미를 끌 수 있었고, 결국 5척의 선박을 포함한 항해자금 전액 지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총독 직위(마젤란이 '발견'한 영토의 크기를 생각해보자!) 약속, 항해 수익의 20% 분배 등 엄청난 조건으로 항해에 대한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뒤늦게 정신차린 포르투갈 정부는 함대와 스페인 주재 영사까지 동원한 방해 공작을 펼쳐서 마젤란에게 포르투갈로의 귀환과 원정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단호히 거절하고 1519년 9월, 스페인 함대를 지휘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를 얻어,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별한 허락을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 항로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 하에 선박 5천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목적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
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남하를 계속하여 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 해협'', ''태평양''이라고 명명하였다.
마젤란 해협의 혹독한 기후와 정 반대되는 고요한 태평양의 광경을 본 마젤란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의 'Mare Pacific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의 항해는 그야말로 '굶주림'과 '괴혈병'과의 사투... 세계지도의 태평양 부분을 보면 그래도 수백개의 섬들이 존재하고, 마오리족같은 비교적 발달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섬도 상당했지만 이들이 지나간 항로에 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 마젤란, 라푸 라푸 부족과의 전투장면
1521년 마젤란은 필리핀의 막탄 섬에 상륙해 현지 원주민과 교류해 식량과 물을 공급받고 가톨릭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게 무척 어려웠는데 일단 이미 필리핀에는 이슬람교를 선교하러 온 인도인 및 아랍인 이슬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몇 백년전부터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마젤란을 전사하게 만든 라푸 라푸 부족왕도 무슬림이었고, 이 지역에는 오늘날의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시아 사바 주의 북부에 이르는 술루 술탄국이라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도 있었다. 비단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도서 지역에서 이슬람교는 상당히 널리 전파되어서 앞서 마젤란이 고문관으로 재직했던 트르나테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 지역 통치자와 친밀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선 세부 섬에서 부족 통합국을 다스리던 국왕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막탄 섬 지배를 두고 경쟁하던 막탄 섬 부족연합국 왕인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그들이 별거 아닌 야만족이니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스페인인 49명과 세부인 200~300명이라는 소수 병력만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가 막탄 섬에서 부족들을 다스리던 부족왕 라푸 라푸를 죽이려 했고 라푸 라푸가 쫄아서 100명 남짓한 수 밖에 안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점도 있지만 부하들이 아무래도 불안하니 더 많은 병력을 데려가려고 충고했는데 산호초나 여러가지 환경 때문에 도저히 스페인 원정대 배가 막탄 섬에 다가갈 수 없었던 점이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때문에 병력을 조금 데려갔다. 게다가 대포를 챙기지 않았고 약간의 화승총만 챙겼으며 그나마 총알과 화약과 화살조차도 조금만 챙겨간 것도 화근이었다.
소수 병력을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오니 바닷가에서부터 마젤란의 예상과 달리 준비되어 있는 1,500여명의 부족 전사들과 맞닥뜨리고 만다.
결국 병력 수와 무장, 지리적에서도 불리한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라푸라푸 군대에게 참패했고 마젤란은 스페인인 부하 14명, 세부인 지원군 150명과 함께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