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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파미르종주기-‘파미르하이웨이’를 달리다.2
* 고원위의 역참마을, 알리추르(Alichur)
야실쿨 호숫가에서 알리추르 하천1)이 시작되는 인근 초원의 광활함에 이끌려 이곳저곳 배회하다보니 해가 벌써 중천을 넘긴다. 오늘 밤 묵을 예정이었던 무르갑까지 갈 시간이 모자라 운전기사가 소개해주는 알리추르의 근처 홈스테이에서 하루 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알리추르는 근래 M41번 도로를 건설하면서 중간 보급기지로 역할을 했던 역참(驛站)마을이어서 길가에 몇몇 민박집과 간이식당 그리고 수십 채의 유목민 가옥들이 전부인 삭막한 마을이다. 그렇지만 옛날부터 파미르고원을 넘는 대상들의 숙소를 겸한 카라반세라이 마을이었던지, 고지도2)에도 표기되어 있고 또한 인근의 의미 있는 유적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알리추르를 중심으로 하여 서쪽에는 오늘 본 부룬쿨 호수가의 수만타쉬(Sumantash)에도, 동쪽에는 바쉬굼베즈(Bash Gumbez)에도, 북쪽에는 바자르 다라(Bazar-dara)계곡 광산촌의 옛 카라반세라이가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인근에 수많은 옛무덤들이 산재해 있었다.
▼ 알리추르 마을 인근의 카라반세라이 중국인들의 고분과 생활용품들이 대량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에서는 그것을 중국인들의 공동묘지라고 부르고 있다.
▼ 알리추르의 민박집 모녀와 아침식단
▼ 알리추르와 무르갑 사이에 있는, 파미르고원 상징물인 눈표범상
▼ 광활한 파미르고원 알리추르 평원의 유목민들의 유르트
그러나 마을에서 더 이상의 정보는 얻기 어려웠다. 그날 밤을 지낼 숙소의 주인 딸이 초등학교 교사인데, 다행이 영어를 할 수 있다기에 기대감에 지도를 펴 놓고 근처의 엣 유적지 정보를 물어보니 그녀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어서 무조건 모른다고 하며, 별 도움이 안 되어 미안하다고만 한다. 다만 내일 아침 무르갑으로 출발하는 차편은 책임지고 알선해준다는 것이었다.
밤이 되자 마을은 개 짖는 소리만 가득한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창문 밖으로 올려다 본 밤하늘은 찬란한 별세상이어서, 마치 티베트고원의 어느 곳 같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옛날 개에 물렸던 기억 때문에 두려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땅히 할 일도 없이 무료히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문득 13세기 이런 막막한 고원을 횡단했던 마르코 폴로 일행이 이곳을 지날 당시의 광경이 그려졌다.
* 마르코 폴로의 파미르고원 횡단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는 17세 때 아버지와 함께 1271년에 고향을 떠나 1275년 원나라의 수도 카이펑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원나라에 간 이유는 그곳에는 없는 물론 귀하고 비싼 물건을 팔아 돈벌이를 하려는 목적 외에도 칭기즈 칸의 손자인 원 세조 쿠빌라이 칸(忽必烈,1215~1294)3)의 요청으로 가톨릭 선교사들을 원나라까지 호송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마르코는 그들이 여행한 지역의 위치와 거리, 각 지역의 언어와 생활상, 종교와 신앙, 산물과 동식물 등 다양한 방면에 대해 기록한『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남겨서 중세 암흑기의 시대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위서일 가능성과 일부 내용의 사실성 여부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 마르코폴로의 여행지도
▼ 마르코 폴로의 초상화
하여간, 마르코 폴로는 아프간을 남북으로 횡단하여 와칸주랑의 입구인 바닥샨지방을 지나 와칸주랑의 입구인 이스카심에 도착해 랑가르를 지나 동북쪽의 파미르천을 따라 파미고원에서 가장 높은 조르쿨 호수에 올라왔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로 동남쪽의 타쉬쿠르간으로 넘어가지 않고 다시 12일간을 걸어서 동북쪽의 카슈가르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루트는 현장법사나 혜초사문이 갔던 <# 9-2번 와칸북로>가 아니고 조르쿨에서 동북쪽으로 길을 잡아 <# 9-1번 쿨마패스>를 넘어 갔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그 원문을 한번 읽어 보도록 하자.
바닥샨4)을 뒤로 하고 12일간 동북동쪽으로 강[파미르천]을 따라 올라간다. 이 강이 관통하는 곳은 바닥샨 왕의 형제들이 다스리는 곳으로 인가가 많다. 주민들은 이슬람교도로써 용감하다. 12일 뒤에는 작은 나라인 보칸에 이른다.[중략] 이 작은 나라를 뒤로 하고 3일 동안 산을 올라가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고원에 이른다. 그곳에는 두 산 사이에 큰 호수가 있으며 그곳에서 흘러나온 시내는 아름다운 초원지대 들판을 흘러간다. 그곳에서 방목된 양은 10일이면 살이 통통하게 찐다. 사나운 짐승도 아주 많은데, 그중 큰 야생면양5)의 뿔은 크기가 1m 이상이나 된다. 양치기는 이 뿔로 큰 식기를 만들거나 문을 닫는 도구를 만들기도 한다. [중략] 그 뿔이나 뼈를 많이 쌓아놓아 눈이 내렸을 때 길 표지로써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을 타고 12일간, 고원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을 ‘파미르’라고 부른다. 그 동안 마을이나 [유목민의 유르트]6) 한 채도 눈에 띄지 않고, 가도 가도 끝없는 길만 이어져 있는 사막과 같은 곳이어서 도무지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통과하려는 여행자는 반드시 식량을 가져가야 한다. 높은 고도, 강추위, 그리고 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연조건 때문에 그곳에는 새 한 마리도 살지 않는다. 더욱이 강추위 때문에 불이 밝게 타오르지 않고, 화력도 약해져7) 고기조차 잘 구워지지 않는다.
* 파미르 대상들의 기록,『타타르의 대상』
옛부터 실크로드의 대상들은 말이나 노새보다 낙타를 더 선호하였던 것 같다. 사막의 기후와 추위에 대해 적응력이 강한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등에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효율성에 무게가 있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막상 이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니 대상8)들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었다. 아니 전무 하다시피 하였다. 고대뿐만 아니라 중세의 기록까지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현장법사나 혜초사문의 경우도 탈 것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기지 않았다. 간혹 있다고 해도 단편적일 기록뿐이었다. 마르코 폴로처럼 말을 타고 파미르를 넘어 갔다거나 하는 정도이다.
말하자면, 차마고도의 마방(馬幫)9) 같이, 대상들의 조직은 어떻게 운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 실정에서 눈에 확 띠는 비중 있는 기록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고대나 중세가 아닌, 거의 현대의 기록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낙타의 대상들의 조직은 “낙타몰이꾼 한 명과 낙타 세 마리 그리고 뒤따르는 말 한 마리가 대상행렬의 기본적인 편성형태” 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정보만 해도 여간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필자가 <실크로드 고전 여행기 총서>에 들어갈 로고로 대상들의 행렬을 구상하고서 여러 가지 매체에서 낙타나 대상들의 이미지를 찾아본 결과, 그 숫자는 많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둔황같은 알려진 관광지에서 관광객을 태운 사진이고 실제 짐을 실은 대상의 카라반의 무리들의 것은 찾을 수가 없었기에 기본적인 대상의 대열을 어떻게 배치하여 그림을 그려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 대상의 행렬 1940년대 사진
1972년 롤랑과 사브리나 라는 두 사람의 사진기자는 호기심 반, 취재 반의 목적으로 한 달 간 키르기즈의 어느 대상들과 동행하면서 대상들의 일상을 밀착 취재를 할 수 있었다. 바로 『타타르의 대상』10)이란 책에 실린 「파미르 고원 답사기」인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낙타몰이꾼 한 명과 낙타 세 마리 그리고 뒤따르는 말 한 마리가 대상행렬의 기본적인 편성형태이다. 라만쿨의 낙타들은 이른바 박트리아의 낙타이다. 이 낙타들은 중국, 신장, 몽고, 티베트 등지 반사막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다. 이 낙타들은 키가 2m가 넘고, 몸무게가 최고 500Kg이나 나가며 힘이 좋고 몸집이 크다.
이들의 발걸음은 비록 느리지만, 앞 등의 혹을 가볍게 출렁이며 정확하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걸음을 옮긴다. 거대한 혹은 양분저장소이다. 두 개의 양분저장소에는 100Kg까지 지방질을 저장할 수 있다. 이 혹들은 아주 단단해지기도 하고 다시 물렁해지기도 하는데 이것으로 낙타의 건강상태를 살펴볼 수 있다. 낙타가 기진맥진하거나 병이 들면 혹의 크기가 줄어들거나 완전히 없어진다.
낙타는 값이 대단히 비싸 여덟 마리의 야크 또는 아홉 마리의 말이나 양 45마리의 값이 나간다. 그도 그럴 것이 낙타는 280Kg이나 되는 짐을 운반하며, 젖과 고기, 그리고 모피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털의 광택과 감촉은 낙타마다 차이가 있지만, 머리부터 목을 따라 다리까지 무성하게 뒤덮인 수북한 털로 낙타는 중앙아시아고원의 혹한에도 잘 적응한다. 낙타의 털은 아름답고 값이 비싸다.
"낙타 털은 아주 비싸기 때문에, 그것을 훔치러 오는 박키인들을 막기 위해 밤마다 낙타를 지켜야 합니다."
동행한 낙타몰이꾼은 이렇게 고충을 털어놓았다.
우리 일행은 사르하드 사막을 벗어나 바칸강 유역으로 접어들었다. 이 강은 폭이 500m인데, 곧 바로 협곡이 되면서 폭이 좁아졌다. 우리 일행은 말을 타고 꽁꽁 언 강 위를 건너갔다. 키르기스인은 얼음판 위에서도 통과하기 적합한 길을 직감적으로 정확하게 가려냈다. 그리고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재나 모래 같은 것을 간간이 뿌렸다. 사람, 낙타, 말의 순서로 일렬을 지어 얼음판 위를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압둘바킬은 여러 차례 바닥에 엎드려 얼음의 상태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리고는 조금씩 잔걸음을 걸어 얼음 위로 성깃하게 균열이 간 곳을 살펴보았다. 균열 틈으로 하얀 거품을 머금고 쏟아져 흐르는 물이 역력하게 보였다. 때로는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잔금이 여러 개 생겼다. 강 주위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수직으로 높다랗게 솟아 있어서, 해가 중천에 떠야만 겨우 햇빛을 받을 수 있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비좁아진 강을 포기하고 고개를 넘기로 했다. 아이바스는 낙타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빙판길 위에 모래를 뿌렸다. 고개가 매우 가팔랐기 때문에 짐승들은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고, 사람들은 열심히 채찍질을 가다듬기 위해 50m마다 행렬을 멈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맨 뒤에 있던 낙타가 절벽 가장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낙타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온 힘을 다해 몇 미터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사람들도 자신들의 신상에 닥친 위험을 직감하고서는 낙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짐을 풀어 주었다.
어스름한 황혼이 깔리자 산들은 엄청나게 커지는 듯했고, 엄습해 오는 추위에 모두 몸을 웅크렸다. 누군가가 말했다.
"산이 너무 높아서 새조차 넘기 힘들겠군."
사람도 짐승도 모두 가파른 산허리에 꼭 달라붙었다.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순간, '구름의 아들'이라 불리는 땅을 향해 굽이굽이 펼쳐진 검고 위풍당당한 산의 윤곽이 창백한 납빛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히 드러났다.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걸음을 멈춘 나는 일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너무나 고요했다. 그것은 일종의 완전한 침묵 같았다.
일행은 쥐가 들끓는 동굴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계곡에는 동굴이 많았다. 그리고 동굴의 바깥에는 혹시 들를지 모르는 나그네를 위해 나뭇단이나 나뭇가지 묶음들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파미르고원을 왕래하는 여행객끼리 서로를 배려해 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곳에서 불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성냥이 등장하기 전, 대상들에게 가장 귀중했던 물건은 말 한 마리 값에 해당하는 ‘차크마크’라고 부르는 부싯돌이었다.
오후에 일행은 말 한 마리가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로 좁고, 바라만 보아도 현기증이 나는 바위 절벽이 즐비하게 늘어선 고갯길로 들어섰다.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여정을 마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던 만큼 두려움은 곧 뇌리에서 사라졌다.
위에서 ‘박트리아 낙타’라고 설명하고 있는 낙타는 이른바 쌍봉낙타(two-humped camel, 雙峯駱駝)를 말한다. 이름 그대로 혹이 두 개 달린 낙타로, 혹이 하나 달린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의 단봉낙타보다 강인하다고 전한다. 옛날부터 중앙아시아, 몽골의 고비 사막, 중국 타림분지 등지의 초원에서 서식하는 낙타로 대부분 인간에 의해 가축으로 사육되었다. 11) 그 생김새는 사지는 굵고 짧으며 털이 무성하고 뻣뻣하고 발바닥이 단단하여 바위나 자갈이 많은 구릉지에 적합하다고 한다.
* 낙타의 눈물
뭐, 이런 생태학적 설명 말고도 낙타를 빼어 놓고 사막을, 실크로드의 정경을 그려볼 수 없을 정도로 낙타는 실크로드의 이미지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에 해당된다.
사막은 일반인들의 인식같이 바람결에 옮겨 다니는 모래무더기로만 이루어진 것 이외에도 돌무더기나 잡초가 듬성한 황무지 같은 곳이 오히려 더 많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우리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사막의 일반적인 정경은 불타는 사막의 노을을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가로지르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카라반들의 행렬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게 된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반들은 역광으로 드리운 긴 그림자만으로도 참으로 인상적인 황금비율의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 둔황 158굴 <오대산도>의 벽화 곡의 낙타들
▼ 낙타 발바닥/모래에 빠지지않게 진화되었다.
낙타에 대해서는 필자도 할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먼저 니체(F.W.Nietzsche,1844~1900)12)의 비유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그는『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 자신의 사상적 편력이 거친 인간 정신의 세 단계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정신의 세 가지 변화를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고, 사자는 어린애가 되는가.
그러나 니체는 낙타를 일반적으로 주어진 규범에 충실한, 그저 그렇게 사는 평범한 인물로 비유하여 '금욕과 복종'의 상징으로 비유하였다. 또한 아직도 극과 극의 평가를 같이 받고 있는, 인도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13)는 낙타에 대하여『사자가 된 낙타의 반역』에서 다음과 같이 새롭게 해석하고 있어서 이채를 띤다.
오쇼 라즈니쉬는 니체가 다른 책을 전혀 쓰지 않았다 해도 미래의 성서가 될 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것만으로도 인류에게 무한한 공헌을 했다고 평하며, 말하자면 인류의 기억 속에서 잊힌 짜라투스트라를 재조명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다. 필자 또한 젊음의 한 때 라즈니쉬에게 열광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의 특유한 패러독스가 돋보이는 인상적인 대목을 한 두 구절 소개하고자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는 하다. 미소를 지을 수는 있어도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농담에 갓난아기가 웃음을 터뜨렸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적인 농담이다. 이 존재계 전체를 감싸 안고 있는 우주적인 농담에 그는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렇다. 그대의 노트에 우주적인 농담이라고 쓰고 밑줄을 그어라.
태어나면서부터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린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생애가 하나의 웃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잊었다. 고통 속에서 삶을 산 사람은 오래 기억되지만, 삶이 하나의 환희가 되고 넘치는 웃음이었던 사람은 금방 잊힌다.
나는 이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책은 단지 몇 권에 불과하여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중 이 책은 내 도서 목록에 첫 번째로 오를 책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니체나 라즈니쉬의 비유나 상징처럼 낙타는 무거운 짐만 질줄 아는 몽매한 짐승으로 비유가 될 그런 동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뭐, 그렇다고 특별한 역발상적인 근거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낙타가 있는 곳에 갈 때마다 기회를 만들어 여러 번 낙타를 타 본 경험이 있고 한 두번은 이상할 정도로 낙타에 대해 애착이 가서 병든 낙타 한마리를 사놓고 틈틈히 타보려고도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유명한 관광지에서 손님을 태우는 전문 낙타이기는 했지만, 그 때마다 목이 길고 너그럽지만 슬픈 눈빛을 가진 생김새에 무척 매료되어 그들에게 말을 건네며 무언가 정신적인 교류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사바세계의 삶이 그리 만만치 않은 탓으로 그곳을 떠나 일상생활에 열중할 수밖에 없엇지만, 가끔 여러 가지 매체에서 실크로드나 몽골초원에 얽힌 낙타에 관한 기사를 접할 때면 문득 역마살이 도져 유체이탈하여 영혼 만이라도 그리움의 그곳으로 날아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며칠 전 <KBS파노라마>의 <몽골고원에 가다 2부; ‘낙타의 노래’>라는 다큐를 보게 되었다. 이미 내보낸 ‘보도자료’에 의하면 대단히 관심 있는 내용이였기에 기대감으로 설레며 시청하게 되었다.
천년 넘게 고비사막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생사를 같이 해 온 낙타와 유목민의 삶을 밀착 촬영했다는 다큐멘터리인데, 막막한 고비사막의 풍광도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어린 낙타새끼에게 젖을 주지 않는 어미 낙타에게 마두금(馬頭琴)14) 연주를 들려주자 눈물을 흘리며 젖을 물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영상화 한 것이 백미에 속했다.
마두금이란 악기는 몽골민족의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악기로, 몽골어로는 ‘모린 후르(Morin Khuur)'라고 하는데 ’모린‘은 말(馬)을, ’후르‘는 음악을 뜻한다. 말하자면 초원을 지나는 말 같은 바람을 일으키는 악기인 셈이다
▼ 어미 탁타의 등에 마두금을 푸른색 '하다'로 묶어 놓아 교감을 유도하는 장면
▼ 말머리 세게가 달린 마두금, '모린 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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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의 마두금 연주 앨범재킷
▼ 마두금의 연주와 슬픈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어미 낙타
▼ 몽골초원에 떠도는 낙타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장면
▼ 몽골 영화. <낙타의 눈물(The Story of the Weeping Camel> 포스터
물론 나는 한눈도 필 겨를도 없이 열중해서 그 푸로를 인상깊게 보기는 했지만, 뭔가 뒤끝은 개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실은 이 다큐는 2003년 몽골과 독일 합작15)으로 몽골의 여류감독이 만든 영화 <낙타의 눈물 >를 패러디한 것이 한눈에도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뒤져보니 정말이었다.
이 작품은 광활한 고비사막을 배경으로 낙타의 모정을 테마로 하여 촬영한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것으로 오래 전에 이미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바 있었다. 다큐 스타일로 찍었으면서도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이 진한 감동을 관객에게 안겨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어미와 자식 간의 사랑’ 이란 만고에 변치 않을 주제를 잘 살린 연출의 덕이었으리라...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몽골의 남부, 고비(Gobi)16)사막의 외딴 곳에서 양과 염소와 낙타들을 기르면서 살아가는 한 유목민 가족이 기르는 낙타 한 마리가 새끼를 출산하는데. 그런데, 출산과정이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어미 낙타는 새끼에게 젖을 물리지도 않고 무조건 멀리 하려고만 한다. 새끼를 살려야 하는 유목민은 최후의 방법으로 ‘후스(Hoos)요법’을 쓰기로 결정한다. 이는 몽골의 전통악기인 마두금 연주자를 불러다가 어미에게 들려주어 모성애를 자극하여 새끼에게 젖을 물리게 한다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말한다.
악단들이 초빙되어 온 다음, 먼저 마두금을 ‘하닥’이란 파란 수건에 묶어서 매정한 어미 낙타 봉에 걸어둔다. 그러자 조금 지나자 낙타의 심장박동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악기에서 웅~ 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그 마두금을 낙타에서 내려 악사에게 건네준다.
그렇게 마두금 연주를 시작하면 그 집 며느리가 낙타를 쓰다듬으면서 애처로운 곡조로 계면조(界面調)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과 낙타들이 모여 들어 그 연주와 노래를 경청하는데, 그렇게 의식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사람들이 새끼를 어미 곁으로 데려온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어미 낙타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고이며 이윽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런 믿거나 말거나하는 이야기의 근원은 낙타의 기억력과 길눈이 밝아서 생겨났다고 한다. 말하자면 마두금의 소리가 어미낙타의 울음소리와 흡사하여 어미를 잃은 새끼 낙타가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옛 기억을 되살리며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요즘도 몽골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풍장(風葬)을 하는데, 이 때 그곳에다 새끼 낙타를 같이 죽여서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후에 거처를 옮겨 살다가, 언젠가 가족의 묘를 찾고자 할 때 그 어미낙타를 근처까지 데리고 오면 그 어미 낙타가 그곳을 기억했다가 그곳을 지날 때 슬피 울기 때문에 그 장소를 찾는다고 한다.
화면 속에 클로즈업된 어미 낙타의 눈은 길고 숱이 많은 인상적인 눈썹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마치 암소의 눈 같이 착하고 맑아서 몽골초원의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해준 전설처럼 조물주가 낙타에게 소의 눈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실감나게 한다.
▼ 사막의 황금구도인 석양속의 카라반 행렬
아! 낙타! 어느 노시인의 마지막 유언 같은 짧은 시구 절이 먼저 떠오른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신경림의 시 '낙타'- 전반부>
마치 내가 남기고 싶은 유언 같아 가슴이 멍해온다. 그런데 후반부의 다음 구절을 마저 읽고는 뭐랄까 표현하기 어려운 아련함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후반부>
사바세계의 삶이 어찌 탄탄대로만 계속되겠냐마는, 그래도 혹 인생의 여물목에서 사막같은 험난한 곳을 만나더라도, 전생부터 이런 원력을 품고 태어난 너그러운 낙타 한 마리를 벗해 살아갈 수 있다면 덜 외롭지 않을 텐데…
1) 이 하천은 야실쿨로 들어가는 내륙하천으로 근처에 수만타쉬 카라반세라이가 있다.
3)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은 몽골제국의 제5대 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이며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현재의 베이징을 대도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고려·버마·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색목인(중앙아시아 인)을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중앙아시아, 서양인을 우대하여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고,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을 완성하여 성시대를 이루었다. 중국 남송의 주요 지원세력인 고려를 정벌하고 속국으로 삼기 위해, 충렬왕을 부마로 삼았다. 그러니까 티베트 샤까사원으로 귀양갔던 충선왕의 외조부가 되는 셈으로 우리나라와는 밀접한 관게가 있던 인물이다.
4) 아프간 동북부 바닥샨(蒱特山) 지방은 발흐에서 와칸계곡을 통해 총령으로 넘어가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루트지만, 2001년 미국 무역센터 폭파범으로 공개수배를 받아온 빈라덴이 오랫동안 토굴에서 숨어 재낼 정도로 심심협곡 지형으로 필자도 2002년 아프간에 들어가 단신으로 발흐에서 쿤두즈(Kunduz) 까지는 접근했지만 화이쟈바드(Faizabad)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선 던 곳으로 현재 아프간이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되어 우리나라 국적을 가지고는 들어가 볼 수가 없는, 말하자면 통한의 지역이 되고 말았다.
5) 이른바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따서 “마르코 폴로 양”이라 부르는 거대한 면양으로, 그 동안의 남획에 멸종위기를 맞았으나 자연보호구를 설치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지금은 개체수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6) 유목민의 거주용 텐트의 이름은 다양하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유르트’, 몽골에서는 ‘겔’ 중국 서부에서는 ‘파오’라고 부른다.
7) 아마도 고산증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연히 해발 4천m 정도가 되면 물이 100도c 이하애서 끓기 때문에 음식물이 제대로 익을 리가 과학적 사실을 당시 마르코 폴로는 몰랐던 것 같다.
8) 대상(隊商)은 낙타 등에 짐을 싣고 떼지어 다니면서 특산물을 팔고 사는 상인의 집단을 뜻하며, 캐러밴 또는 카라반(페르시아어: کاروان)(영어: caravan)이라 부른다. 대상은 동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비단이나 보석 같은 귀중품이나 특산품을 운반했다. 이것은 비싼 물건들로 항상 도적떼들의 표적이 되었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긴 하나 이익이 많은 장사여서 나중에 유럽의 향로무역과 비교되기도 했다. 지역의 지배 계층에게 신기하고 인기 있는 물품을 전해 주었으므로, 그들은 대상들이 머물 숙소를 지어[카라반세라이] 동물들을 휴식 할 수 있게 하고 물품을 보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중세에 이르기 까지 대상이 운반할 수 있는 물품의 수량은 한정되어 있어서 500 마리의 낙타가 운반 할 수 있는 상품이 배 한척에 비해 절반 밖에 되지 못했기에 점차로 그 기능을 무역선에 빼앗기게 되었다.
9) 마방은 ‘사람을 돕는 말의 무리’라는 뜻으로, 지역적 특성을 지닌 운송조직이자 상업 집단으로 ‘방(帮)’이란 글자는 패거리나 동업자를 뜻하며 ‘방(幫)’으로도 통해 쓰기도 한다. 마방들은 대개 가족단위의 혈연이나 마을단위 지연 등으로 구성되기도 하며 큰 도시에서는 전문운송회사에 붙박이로 고용되어 있기도 한다.
마방조직은 일종의 마부들 무리의 팀장 또는 조장인 마과두(馬鍋頭:마궈터우)와 마부(馬夫)인 간마인(赶馬人:깐마런)으로 구성되는데, 이 마부는 흔히 마각자(馬脚子:마자오즈)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개 마부 한 사람이 거느리는 노새의 수는 10필 좌우인데, 이 단위를 ‘한 줌(把:바)’이라고 부른다. 마방행렬이 몇 ‘바’ 이냐에 따라서 마방의 전체 규모가 결정된다. 중간 규모의 마방이 대개 3-4바 정도라니 큰 규모의 마방무리의 행렬은 장관을 이룰 것이다. 차마고도의 주역들인 이 노새 또는 말이 하루 걸 수 있는 거리가 대개 60km이기에 마방들은 60km마다 그들이 자고 쉬며 말들을 돌볼 수 있는 역마참(驛馬站)이 설치되고 그 주위에는 간이 물물교환 시장이 생겨난다.
10) 실크로드;사막을 넘은 모험자들 장 피에르 드레주 이은국옮김 시공사
11) 한편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낙타들도 있는데, 통계에 의하면 그 개체수가 1천 마리 정도로 국제보호단체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12) 니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이며 음악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고, 특유의 문체를 사용했으며 경구(aphorism)에 대한 자신의 기호(嗜好)를 드러내었다. 니체의 영향력은 철학과 철학을 넘어서는 다른 영역에도 실질적으로 남아있는데, 특히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러하다.
13) 인도에서 출생하였으며 21살에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1970년대 한 때는 크리슈나무르티, 마하리쉬, 마훼쉬와 함께 세계의 스승, 혹은 성자로 불리며 인도뿐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깊은 영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그의 육신이 잠들어 있는 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오쇼,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다. 다만 1931년 12월 11일부터 1990년 1월 19일까지 이 세상을 방문하다.>
오쇼가 사랑한 첫번째 책이라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광기 어린 철학자 니체의 입에서 불을 토하듯 뿜어져 나오는 웅대하고 거친 서사시였다면 오쇼 라즈니가 해설한 <짜라투스트라>는 춤과 노래를 가미하고 아름다운 보석을 수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4) 몽골의 민속 현악기로 우리나라의 해금과 중국의 얼후[二胡] 같은 2현의 찰현악기로 몸통 위쪽 끝에 말 머리 장식이 있어 마두금이라고 한다. 몸통은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의 모양인데 양가죽이나 말가죽으로 싸여 있으며, 여기에 약 1m 길이의 대를 세우고, 대의 위쪽 끝에 보통 2개의 줄감개가 달려 있다. 몸통 아랫부분부터 줄감개까지 말총이나 명주실로 만든 두 개의 긴 현이 연결되어 있으며, 연주할 때는 왼손으로 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활을 당겨 말총을 현에 마찰시켜 소리를 낸다.
마두금은 기원전 2세기경 북방유목민인 흉노족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원래는 손잡이 부분이 용머리로 되어 있었으나 후대에 들어와 몽골이 세계제국을 건설할 때에는 이미 말머리형상으로 바뀌었다.
첫댓글 역시 내공있습니다.
아~~그시대의 마르코 폴로
ᆞ 이시대의 다정 김규현 ᆞ
파미르고원을 넘나드는 진정한
자유인ᆞ대단하신 분들이십니다
부지런히 쓰셔서 단행본 .....출판기념회는 파미르에서..........
예, 이번에는 파미르에서 파티 한 번 하시지요.
그럴까요 ? 하하
거기서... 브랑 스투파 아래서... 유고집 출판기념회 한번 열어주실려고?
아 역사에서 동물로... 감동적입니다. 차라투스트라... 신경림..역시 대단하고...
독일철학 도사 앞에서 요령흔드는 꼴입니다. ㅎㅎㅎ 신경림의 낙타 아주 좋지요? 꼭 내 유서 같아서 말입니다.
@다정/김규현 너무 슬픕니다. 책 마치셨으면 건강좀 챙기시고......출판기념회 해요......
잘 읽었읍니다.
고맙습니다.